출판물/출판물-AKB
AKB 히스토리 - 9장
hemod
2013. 11. 6. 16:12
9-1. 차근차근 발표되는 순위.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던 것은...
"이어서, 10위를 발표하겠습니다..."
회장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있었다. 한 멤버의 귀에 멀리서 사회인 토가사키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 멤버의 이름은 사토 아미나.
제 1기 연구생 오디션에 합격하여 AKB48에 들어 온 멤버였다. 그녀는 '4기생'으로 불리며 (※1) 어떤 팀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연구생' 신분으로 시작 한 멤버로서, 작년 4월에 팀 A로 승격한 상태였다. 그 사토 아미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뚝뚝 떨구며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사토 아미나가 말한다. "제가 다른 멤버들에 비해 인기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악수회가 한창일 때, 제 앞에 있는 줄만 먼저 끊긴다던지, 팬레터도 다른 멤버들에 비해 확연히 적었으니까요... 모를 리 없지요. 하지만... 아무리 적다고는 해도 저를 응원 해 주시는 분이 계신다는 점도... 그리고, 극장에서 AKB48의 일원으로서 노래 부를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즐거웠어요.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인기에 집착하지 말기로 결심했었지요. 하지만... '오오고에 다이아몬드' 이후부터는 후배인 5기생들도 선발에 들기 시작 한 거예요. 그래서 저 역시도 '좀 더 자신을 어필해야겠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선발 멤버들처럼 TV, 혹은 잡지에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뭘 어찌해야 하는 지 조차 알 수 없었어요."
그 상황에서 사토 아미나는 스탭들에게 '저를 다른 팀 공연에 내보내주세요'라고 부탁하는 방법을 택했다.
아미나가 말을 잇는다. "우선 팀 K 선배님들의 '마지막 벨이 울린다' 공연 DVD를 빌려서 스탭분들께 부탁해서 레슨실을 열어달라고 하고, 거기서 혼자 춤 연습을 했어요. 한 곡 한 곡씩 말이지요. 극장 공연이라는 것은... 처음에 멤버 전원이 하는 곡을 4곡 한 뒤에 자기소개를 해요. 그러니까... 일단 4곡만 외워두면 일단 자기소개 할 때 까지는 계속해서 무대 위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조금 더 외워두면 중간 MC도 참가 할 수 있게 되는 거고요. 그런 식으로 한 곡씩 한 곡씩 제가 무대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늘려갔어요. 그러다보니 단골 관객분들께서는 저를 보고 '아, 아미나 이만큼이나 외운거야?'라고 알아 주시기도 했어요. 솔직히 그렇게 알아 봐주시는 분이 계신데 '전과 똑같으'면 안 되잖아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1분이라도 더 오래 스테이지에 서 있고 싶기도 했고요... 정말 필사적이었지요."
그리고 선발 총선거가 시작되는 2009년 6월 말엽, 사토 아미나는 팀 K의 공연 뿐 아니라 팀 B의 세트리스트까지 외우고 있었다. 팀 B와 같은 세트리스트로 공연을 하는 자신의 후부, 연구생 공연에까지 출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AKB48의 제 2극장인 '시어터 G 롯소'에서 열리던 '히마와리 구미'의 리바이벌 공연에까지 출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토 아미나는 팀 A, K, B, 연구생, 히마와리 구미에 이르기까지 AKB48의 전 공연의 댄스와 노래를 기억, 여러 공연에 나왔었던 것이다. 그런 것이 가능한 멤버는 약 50여명이나 되는 AKB48 정규멤버 중, 사토 아미나 한 명 밖에 없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단지 '1분이라도 좋으니까 더 오래 무대위에 서 있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스스로 그만큼이나 노력 해 온 것이었다.
그리고 투표가 개시되었다. 첫 날 (6월 24일), 속보결과가 AKB48 극장에서 있었던 팀 K 공연 뒤, 발표되었다.
1위 마에다 아츠코, 2위 오오시마 유우코, 3위 다카하시 미나미... 속보 결과에는 언제나처럼 항상 선발에 들었던 인기멤버들의 이름만이 있었다.
사토 아미나가 말을 잇는다. "그 날, 저는 G롯소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어요. 너무 무리했었는지 과호흡 증세를 보여서 무대 뒷편에서 스탭분들께 응급조치를 받고 있었지요. 그런데 스탭분이 달려 들어오셨어요. 한 손에는 웬 종이 쪽지를 들고요... 그 종이쪽지는 속보 결과를 출력 한 거였는데... '이것 봐!!'라고 네 앞에 들이미셨어요. 종이를 보니 '15위, 사토 아미나'라고 쓰여 있었지요. 한 번도 선발에 들었던 적이 없는 제 이름이 15위에 쓰여 져 있었던 거예요!!! 그 순간, 긴장이 풀렸는지 멍 해지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나... 힘내고 있어', 그리고 '나... AKB48의 멤버야'라고 스스로를 다시 한 번 다잡았지요. 그 뒤, 동기인 (쿠라모치) 아스카쨩이 문자를 보냈었다는 것을 알아 챘어요. '나, 14위야. 아미나쨩 바로 옆이야! 우리 함께 힘 내서 선발에 들자!'라고 보냈었던 거예요... 그 문자를 보낸 순간 다시 한 번 실감했어요. '아... 나를 위해 투표 해 주신 분들이 이만큼이나 계셨어!'라고요..."
9-2. "8위는..." 파란을 불러 일으킨 순위 발표... 말도 나오지 않고...
총선거 결과발표 직전,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던 [JAPAN EXPO 2009]에 참가 한 소위 '파리 멤버'에 사토 아미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에 간 멤버들은 호텔에서 인터넷을 통해 중간발표 결과를 보며 일희일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곳에 사토 아미나의 모습은 없었다. 그녀는 일부러 순위발표를 보지 않기로 했었던 것이다.
사토 아미나는 이렇게 말한다. "중간발표 결과를 보았을 때, 제 이름이 없다면 크게 마음이 상할 것 같아서요... 처음으로 들었던 속보 이외에는 듣지 않은 채로, 상심하지 않은 채로 최종 발표까지 도전 해 보고 싶었어요. 파리 가기 전에 엄마한테도 '만약 내가 선발에 든다면 모두들 놀라겠지?'라고 이야기했었어요. 물론, 그렇게 놀라는 이유가 '아무도 제가 선발에 들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슬픈 일이지만요... 하지만, 일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열심히 해야지'라고 마음을 다잡았지요."
다시 선거 당일로 시간을 돌려보자. 처음으로 발표 된 선발 최 하위, 21위에 동기인 쿠라모치 아스카의 이름이 불리웠던 순간, 사토 아미나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속보때 저는 15위였거든요... 그래서 저도 사실은 선발권 내에 머물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최종결과에서 (자신보다 한 단계 높았던) 아스카쨩이 21위라는 발표를 듣고는 '얼라?!'라고 생각했어요. 아스카쨩을 돌아보았는데, 아스카쨩도 '얼레?'라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그순간부터 저도 엄청 혼란스러워졌어요. 그러고나니 갑자기 '그러고 보니 내가 몇위였지?' '분명히 아스카쨩이 나보다 하나 위였는데?' '아스카쨩이 나에게 문자를 보내서 [바로 옆 순위]라고 함께 힘내자고 했었는데'... 등등 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그리고 결국 '아... 그래, 난 결국 21위 아래로 떨어 진 거구나... 언더걸즈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아미나의 말이다.
21위부터 13위까지 싱글 선발 멤버의 발표가 끝났다. 곧바로 이어지는 언더걸즈 발표... 하지만 그 9명의 이름 중에도 사토 아미나의 이름은 없었다.
그리고, 언더걸즈의 발표가 끝난 그 순간부터 사토 아미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들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치마와, 꼭 쥔 주먹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꼭 쥔 주먹 위에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역시 TV에 나오지 못하면 내 존재를 알아주는 사람 따위는 나오지 않는거구나'라는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결심했던 '열심히 하자'는 마음조차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1초라도 빨리 이 괴로운 시간이 지나 가 버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사토의 귀에, 토가사키 지배인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8위는... 사토 아미나."
토가사키 지배인이 그 말을 한 순간, 사토 아미나는 튕겨 오르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날 최고로 큰 함성이 회장을 가득 메웠다.
사토 아미나는 다리의 힘이 풀려서 제대로 걷는 것 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그 순간까지 너무 힘들어서 흘린 눈물로 더 이상 나올 눈물은 없을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날려버리듯이 눈물이 펑펑 나왔다. 무대에 서서도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듯이 팬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저는... 가수, 혹은 배우가 되기 위해... AKB48를 발판으로 삼기 위해 들어 온 것이 아니라, AKB48 자체가 너무 좋아서, AKB48가 되고 싶어서 들어 왔어요. 여러가지 공연에 나가보고 싶어서 스스로 다른 팀 춤도 배우고 그랬지요... 저는... 저는... TV나 잡지에 나오는 다른 멤버들처럼 빛날 수 없었거든요. 자신이 AKB48이라는 팀에 공헌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선발에 들 수 있어서 너무나도 기뻐요..."
중간발표가 끝난 순간부터 최종 마감일까지... 그 짧은 기간동안 사토 아미나에게 투표 된 표 수는 1423표. (※2) 전 멤버 중 가장 많은 득표를 얻은 것이었다. 이 결과는 '스포트라이트가 닿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고 있는 인간에게는 언젠가 그 보상이 온다."는 뻔한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9-3. 긴장감에서 해방되어 진심을 털어놓는 멤버들
최고의 반전을 제공했던 8위 발표 뒤, 랭킹 발표가 이어졌다. 항상 선발에 드는 단골 멤버들의 이름이 불리고, 긴장감에서 해방 된 멤버들은 슬슬 본심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 7위, 이타노 토모미.
"팬 투표로 이 순위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더욱 더 도약 (스텝 업)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뒤 이어 6위, 코지마 하루나.
"NHK홀에서 열렸던 공연 (총선거가 시행된다는 정보가 흘러 나온)이후로는 항상 불안함과 싸워왔습니다. 6위로 선정되어 안심했습니다. 앞으로 더욱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5위, 다카하시 미나미.
"악수회 같은 때 '다카미나의 꿈은 뭐야?'라는 말을 자주듣습니다. 사실 제 꿈은 솔로 가수가 되는 거예요. 앞으로도 제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4위, 와타나베 마유.
"솔직히 저는 5위 이내는 너무도 짐이 무거운 자리라, 저는 그 자리에 들 수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자주 CG라고 불리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안 좋은 의미가 아닌 좋은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CG혁명'을 노리겠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더 위를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3위, 시노다 마리코.
"사실, 팬 여러분들께서 '선거, 잘 돼 가?'라고 물으실 때... '선거... 지금 그런 거 하고 있나요?'라고 일부러 모르는 척 하곤 했었어요. 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너무나도 불안했습니다. 벌써 나이도 23살이나 되었고... 일각에서는 졸업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씀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3위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지금보다 더 도약하여 AKB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 결과 발표때엔 '매혹적인 포커페이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시노다 마리코마저 눈물을 보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당연히 상위에 위치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부터 해방 된 것이 아닐까... 그런 해방감은 곧이어 팬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난 뒤, 다카하시 미나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솔직히 그 때엔 기쁘다는 마음보다는 '면목 없다'는 마음이 강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모두들 느꼈겠지만... 정말 그 때엔 저희들의 무력함을 실감하고 있었거든요. 이런 못난 우리를... 팬 분들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응원 해 주시는 것일까, 사실 감사해야 하는 건 우리들인데... 라는 느낌이었어요. 지금 생각 해 보아도 팬 여러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9-4. A와 K의 센터 대결. 과연 1위는...
남은 것은 1위와 2위의 발표뿐이었다. 속보와 중간발표 결과에 따르면 1위는 마에다 아츠코, 2위는 오오시마 유코였다. 사실상 2005년에 AKB48가 생긴 이래로 AKB48의 센터는 초기멤버, 마에다 아츠코의 차지였었던 것이다.
'센터'라는 자리가 주는 중압감과 자신의 뒤로 AKB, SKE의 100여명에 달하는 멤버들이 뒤쫓아 온다는 압박감을 견뎌내며 달려 온 마에다 아츠코의 뒤를 바싹 쫓으며 오오시마 유코가 추격 해 오고 있었다. 이런 마에다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사회자 토가사키가 '2위'라고 쓰여진 봉투에 가위를 가져다댔다.
"선발 총선거, 제 2위는..."
그 순간, 회장 뒷편, 팬들이 앉은 자리에서 '마에다!' '마에다!'라는 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오오시마 유우코의 팬들이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안티 마에다 아츠코를 내세운 팬들이었던 것일까. 그런 것까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회장내에 '마에다에 대한 악의'가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마에다 뿐 아니라 회장 안의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악의 넘치는 반응은 지금껏 마에다 아츠코가 받아 온 '악의'의 일부에 지나지않았다. 마에다 아츠코는 지금껏 이 수백배, 수천배에 달하는 악의와 압박감, 책임감을 느껴 왔던 것이다.
"... 오오시마 유코!"
사실 오오시마는 이 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이벤트에 출연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2위에 이름이 불리는 순간, 오오시마 유코가 매니저의 부축을 받아가며 비틀비틀 등장하였다. 회장은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걱정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2위로 뽑혀서 기뻐요. 하지만 저는 계속해서 더욱 더 위를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항상 '자신을 믿고 정진'한다는 기분으로 더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더욱 더 제 등을 밀어 주세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소감을 남겼던 오오시마 유코는 훗날, 이런 말을 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 때 제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몸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던데다가 너무도 긴장했었거든요... 생각이라는 것을 할만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 생각난 것을 그대로 말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오오시마가 팀 K의 센터로서 얼마나 고생 해 왔는지, 얼마나 노력 해 왔는지를 팬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팬들의 마음을 오오시마 역시 알고있었다. 오오시마의 당시의 감상은 그런 팬들에대한 마음이 자연스레 발현 된 것이었이리라...
이벤트가 개시된 지 2시간, 드디어 1위 발표의 시간이 왔다. 회장에는 4630표를 얻은 마에다 아츠코의 이름이 울려퍼졌다. 언제나 마이페이스인 마에다 아츠코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눈물을 참아가며 무대 위에 섰다.
"제가 지금 이 위치에 있어도 되는 것일까... 지금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제 인생 자체를 AKB48에 바치기로 마음 먹었기에... 앞으로는 여러분들께 조금이라도 더 은혜를 갚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AKB48를 잘 부탁드려요."
'AKB48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다'
평소에는 그다지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마에다 아츠코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직접 거론 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마에다 아츠코는이 때의 기억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실 총선거 발표가 있기 전에 팀 A멤버들끼리 모여서 '앞으로 AKB48는 어떻게 될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제 인생을 바친다'는 말은 제 마음속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총선거 당일... 모두들 숨김없는 진심을 이야기 했었잖아요. 그것을 보고는 저 역시도 '느끼고 있던 진심을 이야기 하자'고 생각했어요. 동시에 '지금까지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지요. 결국, 1위에 이름이 불리었을 때, '앞으로는 AKB48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도 했었고요."
아이돌계의 터부를 깬 제 1회 총선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AKB48 멤버들은 이 선거를 통해 '보통 아이돌들을 체험 할 수 없는' 큰 무엇인가를 얻었던 것이다.
제 9장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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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기생은 제 1기 연구생들을 의미하며, 07년 5월에 있었던 오디션에 합격 한 18명의 멤버들을 이야기한다. 초기에는 'AKB SEED'로 불리었으며, '팀 4'로 데뷔 할 예정도 있었다고 한다.
※2 두번째로 많았던 것은 시노다 마리코의 1142표였다. 3위는 종합 1위인 마에다 아츠코의 1141표였다. 그 외에는 전부 수백표 정도의 증가에 그쳤다는 점을 생각 해 보면 당시 사토 아미나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 했는 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