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B 공식 10년사 -눈물은 구두점- 01
01. AKB48의 탄생 (2005년 12월 8일)
‘언밸런스한 세계의 청춘 스토리’
극장 오픈을 하루 앞둔 2005년 12월 7일.
도쿄 아키하바라 돈 키호테 8층에 위치한 전용극장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을 만든다는 것이 회견의 내용이었다. 이 회견에 참가 한 관계자 중 아키모토 야스시 종합 프로듀서와 안무가인 나츠 마유미씨가 등단하였으며, 아이돌을 꿈꾸는 멤버 20명이 등장하여 1곡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TV나 신문은 물론이고 아키하바라에 관계 된 잡지 등의 기자들이 회견에 참가하였으나, 이상하게도 아이돌잡지나 주간지 관계자들은 단 한 명도 출석하지 않았다.
당시 시점에서 결정 된 것은 어디까지나 ‘컨셉’과 멤버들 뿐이었다.
보통 ‘프로젝트’를 시동함에 있어, 기자회견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앞으로의 예정 등이 윤곽을 갖춘 시점의 일이지만, 이 회견은 무언가 달랐다. 아무리 기자들이 질문을 해도 관계자들의 입에서 명확한 비전이나 답변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확실히 정해 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기자회견이 있은 지 몇 시간 뒤에 열린 게네프로 (실전과 똑 같은 상황 하에서 행하는 최종 리허설)에서 기자들이 목격 한 것은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설득력이 있는 무대. 그것은 다름 아닌 ‘프로페셔널한 콘텐츠’의 힘이었다. 극장 인테리어, 무대장치, 조명부터 시작해서 의상, 안무. 그리고 무엇보다도 완성도 높은 ‘오리지널 곡’. 단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들자면 무대 위에 서 있는 아이돌들의 ‘스타성’ 정도였다. ‘아이돌’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소박하고 평범한 소녀들 말이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잘 정비 된 극장에서 매일 공연을 거듭하며 그런 소박하고 평범한 소녀들이 빛나는 원석으로 가다듬어 질 수 있다는 점 역시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 확신이 생겼기에, 그 다음날, 나는 그녀들의 첫 공연을 보기 위하여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 공연은 내 돈을 내고라도 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1000엔을 내고 입장권을 구입, 세 번째 줄에 앉아 공연을 보았다.
너무나도 긴장 한 나머지 자기소개 때 자신의 이름도 채 말하지 못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멤버도 있었고, 표정이 굳어 제대로 웃지 못 하는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너무나도 잘 전해졌다. 그녀들이 무대 위에서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나는 그런 그녀들의 필사적인 모습을 보고는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더 보러 가자. 첫 공연때랑 어떻게 다른 지 확인 해 봐야겠다’고 마음 먹고, 이틀 뒤, 다시금 극장으로 향했다.
돈 키호테 빌딩의 8층을 빌렸다고는 하나 거액의 돈이 들어갔을 것은 확실해 보이는 전용 극장, 그리고 아직 때묻지 않은 평범한 소녀들.
그런 ‘지금까지의 아이돌계에선 본 적 없는 언밸런스한 콘텐츠’에 초창기 AKB오타들은 금세 푹 빠져버렸던 것이다. 한 번이라도 그 세계를 맛 본 사람들은 어느 사이엔가 매일같이 극장을 찾는 단골이 되어갔다.
당시 아이돌 업계는 ‘그라비아 아이돌’들이 업계를 섭렵하던 ‘그라비아 아이돌 전성시대’였다. 또한 ‘노래’를 주력으로 삼는 전통적인 ‘아이돌’들은 대부분 요츠야, 신주쿠 일대를 주요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전통적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AKB48라는 잘 짜여진 콘텐츠는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 자연스레 수 많은 ‘전통적 아이돌’ 팬들이 아키하바라의 AKB48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마케팅 용어 중에 ‘이노베이터 이론’이라는 말이 있다. (주 : 본문에서는 이노베이터 이론과 캐즘 이론을 섞어서 쓰고 있습니다.)
이는 소비자들의 소비 행태를 그 시간적 순서대로 나눈 것으로, 순서에 따라 이노베이터 (개발적 소비자), 얼리 어댑터 (조기 수용 소비자), 얼리 매이저리티 (조기 다수자), 레이트 메이저리티 (후기 다수자), 레거드 (추종적 소비자) 등 5단계로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노베이터 이론은 AKB48에도 적용 할 수 있는데, 특히 AKB48의 초창기를 지탱 해 온 것이 바로 상기한 이노베이터, 얼리 어댑터형 팬들이었던 것이다.
이 중 이노베이터형 팬들은 말하자면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분류라 할 수 있다. 항상 새로운 문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타입이기에, 2005년 12월 이내에 1번 이상은 극장을 찾은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얼리 어댑터’형 팬들이 서서히 늘어나는 팬들 사이에서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인터넷 블로그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보를 발신하며 새로운 팬층을 만들어 낸 것이 그들의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AKB48는 말하자면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는 프로’지만 ‘아이돌’이라는 면에서는 한없이 초보에 가까운 집단이었다. 다만, 한 가지 긍정적이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타인의 의견을 들을 줄 알았다’는 점이었다. 그런 특징은 이후 팀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아키모토 종합 프로듀서와 극장 지배인 등이 운영 팀의 선두에 서서 팬들의 의견을 듣고, 그런 지적 사항을 실제로 운영 방침에 반영하며 팀의 운영을 개선 해 나갔다. 이런 유연한 발상은 어찌 보면 ‘아이돌 운영’에 있어 초보자였던 AKB48 운영이었기에 가능한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상식에 구애 받지 않는’ 파격적인 실험들이 몇 번이고 수 없이 반복되며 팀을 성장시켜 나갔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100회 MVP 제도’ – 극장 공연을 100번 보면 멤버 전원과 체키(즉석사진)를 찍을 수 있음. 자신이 좋아하는 멤버가 옆에 섬.
‘새치기 방지책’ – 새치기 방지를 위해 부정기적으로 ‘새치지 방지권’을 배부.
‘백발백중권’ – 제비뽑기에서 이 백발백중권을 뽑으면 언제 어떤 공연이건 간에 당선 될 수 있는 권리를 증정.
‘빙고 기계를 이용한 입장 순서 추첨’
등이 바로 상기한 ‘파격적인 실험’의 예라 할 수 있겠다.
어떻게 하면 팬들이 더욱 더 콘텐츠를 즐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공평하게 추첨 등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운영상의 난점들을 타개 해 나가는 데 있어, 이런 ‘팬들의 아이디어’는 큰 힘이 되었다. 이는 이후 열리게 될 ‘AKB48 선발 총선거’까지도 이어지는, 운영상의 큰 뼈대라고도 할 수 있다.
AKB48에 대한 팬들의 열광은 극장 내 뿐만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서도 발빠르게 번져갔다. 공연 곡, 출연 멤버, 운영 방식, 관객층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의견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독특한 전문용어 (일명 AKB용어)도 생겨나는 등, 끊임 없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고 이런 새로운 변화는 다시금 팬들의 열기를 부추기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시노다 마리코가 도중 가입 형식으로 1월에 멤버로 합류하고, 2월에는 인디즈 데뷔 싱글인 ‘벚꽃잎들’이 발매되며 극장을 찾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져만 갔다. 이런 모습을 보며 나는 ‘이 기세라면 부도칸 라이브도 가능 할 것’이라 확신하였다.
공연을 보러 가면 갈수록, 하루가 다르게 멤버들은 빛을 발했다. 그녀들이 매 공연 매 공연 아이돌로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완벽한 아이돌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물론 멤버 개개인마다 그 속도는 달랐다. 매 공연 선정되는 MVP 멤버도 매 공연 달랐다. 공연이라는 것 역시 살아 숨쉬는 ‘생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더욱 AKB에서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변해가는 그녀들의 변화를 따라잡기 위하여 공연을 보는 것 뿐 아니라 매일같이 인터넷을 찾아 봐야만 했다. 공연을 보고 온 팬들이 자신의 블로그나 전자게시판을 통하여 자신의 감상, 공연에 대한 증언을 쏟아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AKB48는 이노베이터, 얼리 어댑터들을 열렬한 팬으로 만들었고, 그 팬들이 다시금 정보를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 편, 당사자인 멤버들은 어땠느냐 하면, 아무리 주변의 열기가 뜨거워져도 자신들의 미래를 낙관만 하고 있지는 못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은 여전히 불안한 채, 그저 스케줄만이 빡빡해 져 갔다. 2기생 오디션이 시작되고, 인디즈이긴 하지만 정식으로 데뷔도 하게 되었으며 초기에는 텅텅 비어있던 극장이 가득차게 되었지만 그녀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그저 눈 앞에 주어진 일들을 필사적으로 해 나갈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처음으로 그룹을 떠나는 멤버가 생겨났다.
2006년 3월 31일. 이 날은 첫 오리지널 세트리스트인 ‘PARTY가 시작돼요’의 마지막 공연날이었다.
본공연이 끝나고, 앵콜곡인 ‘스커트, 펄럭’, ‘벚꽃 잎들’이 울려퍼졌다. 이 날, 이 두 곡의 센터 포지션에 선 것은 우사미 유키. AKB48 첫 졸업자이자 이 날 공연을 마지막으로 그룹을 떠나게 되는 멤버였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떠난 뒤에도 멤버들은 극장을 떠나지 못했다. 멤버들은 스테이지 중앙에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울다 지쳐 움직일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아,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청춘’이 아닌가!
인간은 누구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자신의 청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 순간, 자신들의 청춘 한 복판에 서 있었다.
앞으로 닥쳐 올 미래가 얼마나 험난한 것일지, 본인들이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지 알게 되는 것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다.
글 : 오카다 다카시
(1960/6/1, 아이치현 출신.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뒤 뮤지션, DTP디렉터로 활약한 뒤, 아이돌 전문 라이터로 변신. 2006년 주식회사 스크램블 에그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