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미유키 포토북 'MILKY' - 와타나베 미유키 22years history♡
와타나베 미유키 22years history♡
‘모닝구 무스메’를 동경하던 초등학생시절.
그리고 ‘댄스’와의 만남
- 졸업을 맞이하여 지금까지의 역사를 한 번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NMB48에 들어오기 전까지의 이야기는 첫 번째 사진집인 ‘미루가미’에서 이야기를 나눈 바 있으니, 이번에는 전에 다루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좋겠네요. 어릴 때 부터 아이돌을 좋아했나요?
미루키 (이하 ‘미’) : 모닝구 무스메상(이하 모무스)의 팬이었어요. 투샷을 찍을 수 있는 이벤트에 참가하거나 악수회에 가거나 했지요. 제 악수회에 어린 아이들이 오는 것을 보면 예전 제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져요. 본격적으로 빠져든 건 분명 초등학교 2학년때쯤이었는데, 당시에는 완전히 제게 있어 ‘동경의 대상’이었죠. ‘카고쨩이 친언니, 혹은 사촌언니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 그 당시에는 ‘아이돌’이란 어떤 존재라 생각했었나요?
미 : 손이 닿지 않는 ‘동경의 대상’이요. 그렇기에 망상하는 것이 즐거웠지요. 당시에는 1년에 4번 정도 오사카성홀에서 모무스의 콘서트가 열렸는데, 그 공연이 정말 기대되곤 했어요. 아, 하로프로 운동회도 간 적 있고요.
- 그런 ‘동경’이 서서히 ‘나도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변한 것인가요?
미 : 아뇨. 보는 것으로 만족 했어요. 그 당시에는 ‘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죠. 카고쨩의 팬이었기에 옷에 캔배지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곤 했어요. (웃음) 저 뿐 아니라 주변 친구들 중에도 그런 아이들이 꽤 있었지요. 당시 ‘모무스’는 정말 엄청난 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생활이 중 1때까지 이어졌어요.
- 왜 갑자기 팬을 그만 둔 건가요?
미 : 딱히 싫어졌다던가 한 건 아니에요. 그저 단순히 댄스 연습이 너무 바빠져서 응원을 할 시간이 없어 진 거였죠. 그리고 댄스와는 별개로 초 1때부터 중 2때까지 서도(붓글씨)도 배웠어요. 초등학생 때는 초등부 최고 클래스인 8단을 따기도 했어요.
- 댄스는 4학년때 시작하셨죠?
미 : 네. 모무스의 팬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편지함에 들어 있던 전단지가 계기였는지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쯤 댄스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랫동안 엄마를 졸라 겨우 춤을 배우러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시작하고 보니 재능이 너무나도 없어서… 댄스 학원 전단지에 ‘레슨 체험도 가능하다’고 쓰여 있었기에 일단 체험부터 해 보자고 엄마랑 함께 갔었는데, 제가 춤 추는 것을 보고 엄마가 ‘그만 두렴. 돈이 아까워’라고 말 하실 정도로 센스가 없었지요. (웃음) 하지만 아무래도 포기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 낭 체험 레슨때 배운 춤을 계속 연습했지요. 한동안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매일같이 그 춤을 연습 했어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엄마를 설득했지요. ‘정말로 댄스 배우고 싶어’라고. 그랬더니 엄마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별 수 없지’라며 정식으로 춤을 배우러 다닐 수 있도록 허락 해 주셨어요.
- 한 번 정한 일은 물러섬 없이 밀어붙이는군요.
미 : 그 댄스 교실이 말이죠, 마치 48그룹 같은 곳이었어요. 연습을 해서 잘 추게 되면 ‘선발 클래스’에 들어 갈 수 있고, 선발 팀이 되면 대회나 콘테스트에도 나갈 수 있게 되는 시스템이었거든요. 그리고 저도 그 ‘선발 클래스’에 들었고요. 매일매일 춤 연습 삼매경이었지요. 학교 가 있는 시간, 식사시간, 자는 시간 빼면 전부 춤 연습에 쏟아 부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1주일에 7일 연습했었네요. 지금 새삼 깨달은 거지만 (웃음)
- 그 정도로 즐거웠었나봐요.
미 : 네. 그저 단순히 즐거울 따름이었어요. 딱히 장래에 춤 관계된 길을 가자고 생각 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다른 학원에 다니면서도 댄스교실은 빼놓지 않고 다녔죠. 지금 생각 해 보면 그 때부터 벌써 ‘겸임’하고 있었네요. (웃음)
- 그럼 그 당시의 장래 희망은 무엇이었나요?
미 : 조산사요. 어린 아이나 아기들을 좋아하기에 조산사가 되고 싶었어요. 조산사가 되기 위해 고등학교 입시도 열심히 공부해서 제1지망 학교에 붙었어요.
같은 학년 남자 아이들에게 ‘마돈나’였던
‘인기 만점’ 중학생 시절
- 초등학교 때의 에피소드를 조금 더 들려주세요. 인기도 꽤 많았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땠나요?
미 : 초등학생때, 중학생때 남자아이들에게 고백도 많이 받았죠.
- ‘많다’는 건 같은 학년 남자아이들 대부분 정도인가요?
미 : 그정도는 아니지만… 꽤 많았던 것 같아요♡. (웃음)
- 역시 대단하네요!
미 : ‘고백’까지는 아니지만 ‘함께 하교하자’는 얘기도 들었는데, 정말 두근두근했죠. (웃음) 중3 말쯤 되면 아무래도 입시 준비에 바빠지잖아요. 학교보다 집이 공부에 집중이 더 잘된다고 생각했기에 한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던 적이 있거든요. 그랬더니 한 남자아이가 집 앞까지 데리러 와 주었지요. 그 덕분에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기뻤거든요.
- 학교의 ‘공주님’ 같은 존재였네요.
미 : 그러고 보니 별명이 ‘공주님’이나 ‘아가씨’였네요. 지금도 고향에 가면 친구들이 ‘아가씨’라 부르곤 해요.
- 학교의 중심적인 인물이었군요.
미 : 지금보다 훨씬 밝은 아이였거든요. 지금보다 10배는 밝았어요. 아이돌들 중에는 ‘학교 다닐 땐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정반대였어요. 반에선 꽤 눈에 띄는 편이었던 것 같아요.
- 밝고 눈에 띄고 공부도 잘 하는데다가 춤도 잘 춘다니…
미 : 저 말고도 ‘와타나베’라는 성을 가진 귀여운 여자아이가 한 명 더 있었는데, 저랑 그 아이 둘을 ‘더블 와타나베’라고 불렀어요. 다른 중학교 다니는 사람이 ‘더블 와타나베’를 알고 있길래 깜짝 놀란 적 있어요.
- 말하자면 중학교의 ‘더블 센터’같은 존재였네요.
미 : 그 정돈 아니에요. (웃음) 아, 하지만 다른 중학교 다니는 남자아이에게 ‘연락처 가르쳐 달라’는 소리 들어 본 적은 있어요.
- 고등학생땐 어땠나요?
미 : 공학에 다녔었는데, 중학생 때완 달리 전혀 인기가 없었어요. (웃음) 같은 반 남자애들도 끝까지 ‘와타나베상’이라고 딱딱하게 불렀고. 대신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지요. 입학식 당일에 있었던 일인데, 같은 반 여자애들 7명이 저를 빙 둘러싸고 ‘너 이름이 뭐니?’라고 물었거든요. 그래서 ‘와타나베 미유키예요’라고 대답했더니 ‘미유키라… 그래 그럼 이제부터 미루키라고 부를게’라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제게 ‘미루키’라는 별명이 붙은 건 그 때부터였어요.
- 아! 그랬군요!
미 : 그 일을 계기로 그 7명이랑 엄청 친해져서 항상 8명이 몰려다녔어요. 그 외에도 선배 언니들이 저희 반까지 와서 ‘놀자’고 말 걸어주시기도 했지요.
- 고등학생 때도 역시 ‘사람을 끄는 매력’을 발휘했던 것이군요.
미 : 중학생때가 제 ‘모테키’가 절정에 달했던 때일지도 몰라요. 여후배들이 제 팬클럽을 만들기도 하고, 졸업식때 여학생들이 몰려들어서 제 교복, 명찰, 교복 단추 같은 걸 달라고 하기도 한 데다가, 발렌타인데이 때 초콜릿을 받기도 하고…
- 상상 이상이네요. 여성으로부터 고백을 받은 적도 있나요?
미 : 음… 그러고 보니 ‘정말로 좋아해요. 사귀어 주세요’라고 고백을 받은 적은 있었어요. 정말 깜짝 놀랐지만, 다른 여성이 저를 동경 해 준다는 게 정말 기뻤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킬 순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 명언 나왔네요 (웃음)
미 : 뿌리까지 철저하게 아이돌이 아니라면 ‘아이돌로서 성공’하기는 힘들다 생각해요..
- 보통 그렇게 인기가 많으면 동성으로부터 질투를 사거나 할텐데요.
미 : 어릴 때 부터 ‘넌 다른 사람들을 착각하게 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거든요. 비슷한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질투를 사고 있구나… 라고 느낄 때가 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저 역시도 분명 폭주했었던 게 사실이고요. (웃음) 남자고 여자고 관계 없이 말을 걸곤 했거든요. 사춘기가 늦게 왔기에 다른 아이들에 비해 남자아이들을 남자로 의식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게다가 타고 나길 붙임성이 좋았기에 남자아이 자전거 뒤에 타서 ‘태워줘’라고 하기도 했고요.
- 자전거 뒤에 타서 같이 가자 하면 착각할 법 하죠. 남자란 동물은.
미 : 지금 생각 해 보면 그게 ‘다른 사람들을 착각하게 하’는 행동이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초등학생때부터 중학생때까지 학교 아이들이 거의 변화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소꿉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유치원 땐 한 남자아이가 ‘키스하자’고 했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기억에 없는데 엄마가 얘기 해 줬어요. 커튼 뒤에 숨어서 키스 해 달라고 졸랐는데, 그걸 보던 다른 남자아이가 구해줬다고.
- 그쯤되면 거의 타고 난 것 같은데요. 그럼 남들이 그런 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쾌감으로 느껴지거나 했나요?
미 : 아뇨. 그렇지는 않았어요. (웃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거든요. 물론 많은 남자아이들이 호감을 가져 준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주변 보는 눈도 그렇고, 학생때는 오히려 약간 번거롭다고 생각 할 정도였어요.
- 앞으로도 변함없이 인기 폭발이시겠지요.
미 : 아무래도 그런 운명을 타고 났나봐요. 아, 이거 농담입니다. (웃음) 글쎄요. 미래가 어떨 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기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잔뜩 사랑 받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아요.
NMB48 합격,
필사적으로 버텨낸 힘든 레슨과 케잇치의 말.
- 그럼 이제부턴 NMB에 들어 온 뒤의 이야기를 들어 볼게요 오디션 때에 대해 기억하나요?
미 : 네. 처음 합격했을 땐 ‘설마’라 생각했죠. 붙을 줄 몰랐거든요. 살던 동네에서야 좀 인기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오디션쯤 되면 통하지 않을거라 생각했기에. TV라는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거든요.
- 그럼 센터가 되고싶다는 생각은 했었나요?
미 : 애초에 ‘센터’라는 개념 자체를 몰랐어요. 제가 좋아했던 모무스는 기본적으로 센터 싸움이 어쩌고 하는 얘기가 안 나오는 그룹이니까요. 그 뿐 아니라 당시에는 ‘선발 총선거’의 존재자체도 몰랐어요. 그렇기에 오디션 때 다른 아이가 ‘전 절대적인 에이스가 되고 싶어요’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저 혼자 연습 할 뿐이었죠. 그리고 그 연습도 딱히 센터나 에이스가 되고 싶어 한 것도 아니고.
- 초기 레슨이 어땠는지 기억 하나요?
미 : 엄청 가혹했죠. 당시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필사적으로 레슨을 받았어요. 진짜 저 스스로에게 ‘잘 견뎠구나’라고 얘기 해 주고 싶을 정도. (웃음) 매일 학교가 끝난 뒤 오후 5시쯤부터 레슨을 받았어요. 하지만 당시만 해도 흔들렸거든요. 아무래도 조산사라는 꿈을 비럴 수가 없었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레슨을 받은 건 이 쪽으로 나아가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에요.
- 포기하고 싶어 질 정도로 가혹했나봐요.
미 : 가장 힘들었던 건 근육단련이었어요. 특히 코어근육을 단련하는 운동 중에 마루에 팔꿈치랑 발 끝으로 엎드려서 버티는 자세가 있거든요. (※플랭크자세) 그 자세를 유지한 채 계속 버티기만 하는 거예요. 만약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바로 엄청 혼났기에 필사적으로 버텼지요. 하지만 힘들긴 했어도 그만둬야겠다라던가 괴롭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참 신기한 일이죠. 그렇게 힘든 레슨이 3~4달 정도 이어졌는데, 정말 정신력으로 버텨냈습니다.
- 멤버들과도 서서히 친해졌나요?
미 : 아뇨. 당시에는 주변을 돌아 볼 여유가 없었어요. 그저 쫓아가는 것 만으로도 필사적이었거든요. 그렇기에 인연이고 관계성이고 쌓을만한 상황이 아니었죠. 당연히 첫 공연날 (2011년 1월 1일)을 앞두고 다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어요. 특히 저 같은 경우에는 딱히 단체행동이라고 할만한 걸 해 본적이 없었기에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이해가 안 되기도 했고요. 그렇기에 첫 날 공연을 무사히 끝내고 다른 멤버들이 부둥켜안고 우는 가운데 저는 ‘아, 소중한 첫 공연이 무사히 끝났구나. 안심된다…’ 정도의 느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철저하게 ‘개인’이었던 것이죠. 정말이지 협조성이라곤 찾아 볼 수도 없었네요. (웃음)
- 그런 가운데 동기들 사이에 ‘서열’이 뚜렷해지기 시작했지요.
미 : 사실 그것도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알아 챈 것 같아요. 첫 공연 멤버로 뽑혔던 것도, 팀 N의 멤버로 뽑혔던 것도 말이죠. 물론 기쁜 일이긴 하지만 오히려 열심히 연습을 해 왔다는 건 자신 할 수 있었기에 그런 노력이 인정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그게 더 기뻤어요. 춤 연습 열심히 하길 잘 했달까요.
- 이전까지는 어떤 커뮤니티에서건 항상 정점에 있었잖아요. 그 점에 대해 불안함 같은 것은 없었나요? ‘더 넓은 세상에서도 내가 통할까?’ 같은 불안함 말이에요.
미 : 사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좌절’이란 것을 몰랐기에 오히려 ‘어? 나 여기서도 먹히네’라는 생각은 조금 했어요.
-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서서히 멤버들과의 사이도 좋아졌나요?
미 : 음… 아무래도 저 자신이 협조성이 없었던 점, 그리고 그런 제가 프론트에 서 있다는 점 때문에 악순환이 계속되었어요. 그 덕분에 쓰라린 경험도 했고요. 언젠간 제가 없는 곳에서 멤버 몇몇이 제 험담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미루키 좀 이상하지 않냐’며. 그리고 그 얘기를 듣고 큰 소리로 ‘그런 말 하면 안 돼’라며 나무란 멤버도 있었죠. 그게 바로 케잇치였어요. 그렇기에 케잇치는 제게 있어 은인입니다. 기본적으로 크게 소리를 치거나 하는 타입이 아닌 케잇치가 저를 위해 그렇게 화를 내 주었다는게 정말 기뻤어요. 원인을 생각하면 협조성이 없는 저 자신이 가장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멤버들 사이에서 붕 떠 버려서 남 몰래 운 적이 있었는데, 케잇치가 그런 제 모습을 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멤버들이 제 험담을 하는 것을 들은 순간 그 때 제 얼굴이 떠올랐다고도. 정작 저 자신은 언제 울었었는지 자세히 기억도 못 했는데…
- 스스로가 생각해도 협조성이 없었나요?
미 : 네. 당시 제가 협조성이 없었던 건 확실해요. (웃음) 하지만 딱히 나쁜 마음먹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 때, ‘아, 난 이렇게 평생 붕 뜬 채 살아가겠구나’라고 생각했죠. 초등학생때부터 그랬으니까… 모두와 사이 좋게 지낸 적이 없었거든요.
-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인기가 있었는데도요?
미 : 네.
- 아무래도 동년배, 혹은 동기처럼 ‘같은 라인’에 서면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될 수도 있겠네요. 자, 그럼 처음으로 경험 하는 아이돌 활동은 어땠는지 이야기 해 주시겠어요?
미 : 즐거웠어요. 매일매일이 신선한 자극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스타히메 사가시타로’라는 방송에서 저희들을 밀착취재해 주셨던 것도 그렇고, 잡지 촬영을 한 것도 그렇고… 모든 것이 즐거웠어요. 동시에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커 달까’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두근거렸죠.
총선거, AKB48선발, 겸임…
기쁨과 동시에 느끼게 된 AKB48이라는 ‘벽’
- 첫 공연에서 프론트에 서게 되는 등, 그룹 초창기부터 중심 멤버로 낙점되었는데요, 얼마 되지 않아 처음으로 좌절을 맛보게 되시죠.
미 : 네. 처음으로 참가한 총선거 때 랭크인 하지 못했으니까요. 사실 내심 ‘내가 랭크인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기에 랭크인 하지 못했을 때 엄청 울었어요. 제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거든요. 다들 ‘괜찮다’고 위로 해 주었지만, 그런 위로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어요. 아마 그 때부터 ‘분함’이라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 총선거 직전에 발매된 ‘Everyday 카츄샤’ 때 처음으로 AKB48의 선발 멤버로도 발탁되셨는데요.
미 : 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요. 촬영 때 ‘기쁨’보다는 ‘난 아직 멀었구나’라는 것을 실감했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시 AKB는 ‘카미 7’이라 불리던 선배들이 중심이셨잖아요. 다들 엄청 당당하신데다가 괌에서의 촬영을 즐길 여유도 갖고 계셨어요. 하지만 저는 기껏 선발에는 들었지만 그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어서 항상 구석에서 혼자 있곤 했죠. 게다가 MV역시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제 원샷은 없었어요. 제가 나오는 건 전체가 찍히는 댄스신 뿐이었지요. 물론 선발에 들었을 땐 ‘와! 해냈다’고 기뻤지만, 정작 촬영이 시작 된 뒤로는 현실의 벽에 부딛혀 집에 돌아가고 싶어 질 정도였습니다. (웃음) 하지만 그런 저를 신경 써 주셨는지 유코상이 ‘함께 밥 먹자’고 말을 걸어 주셨지요. 정말 기뻤습니다.
- 그리고 2012년, 두 번째 총선거를 맞이하시지요.
미 : 그 땐 ‘무슨 일이 있어도 랭크인하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결과는 19위였는데, 당시만 해도 19위는 ‘기적의 순위’라고 불리던 순위였거든요. 1회때 19위는 쥬리나상, 2회때는 사시하라상, 3회땐 요코야마 유이상이었기에 ‘조만간 출세하게 되는 순위’라는 느낌이었지요. 그렇기에 그런 순위를 받은 게 기뻤습니다. 그것도 전 해 권외에서 19위로 크게 점프 업 한 거니까요. (웃음) …여기까지 얘기 한 건 사실 나중에 생각 한 거예요. 당시에는 그 ‘전설’을 몰랐기도 하고, 선발에 들지 못 했다는 게 분해서 울기만 했거든요.
- 19위에 만족하지 않았던 거네요.
미 : 총선거 하나만 보고 노력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총선거를 앞두고 평소보다 더 블로그, 구플에 힘을 들이고 있었거든요. 하루에 4번이나 갱신한다던가… 당시 NMB에선 제가 갱신율 1위였을 정도예요.
- 구플 하니까 생각났는데, 목욕을 ‘챠푸챠푸’라고 표현해서 팬들 사이에서 유행하기도 했죠.
미 : 이런 거 쓰면 재미있겠다 싶은 것을 올리면 팬분들이 어떻게 반응하실까 상상 해 보는 게 즐거웠어요. (웃음) ‘챠푸챠푸’도 그렇지만, 나중에 아키모토상이 말씀하시길 제가 오른쪽 눈이랑 왼쪽 눈 클로즈업해서 찍어 올린 게 인상 깊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그 다음엔 왼쪽 무릎이랑 오른쪽 무릎을 클로즈업해서 찍어 올리기도 했죠. (웃음) 딱히 재미있을 거라 생각 한 건 아니지만, 화제가 될 것 같긴 했거든요.
- 그리고 팬들 사이에선 ‘낚시꾼 캐릭터’로 인지되기 시작했지요. 본인은 ‘낚시꾼 캐릭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미 : 딱히 ‘낚으려는’ 건 아니거든요. (웃음) 하지만 그 ‘낚시꾼 캐릭터’가 팬 여러분 사이에 정착 된 뒤로는 ‘이렇게 되면 재미 없겠다’싶은 생각은 들었어요. 애초에 성격이 청개구리다 보니. 그 뒤론 그런 제 의사와는 상관 없이 ‘와루키’라는 캐릭터가 멋대로 만들어지고 발전 되어 가더라고요. 그 덕분에 ‘와루키’라는 곡도 받을 수 있었지만요. 처음 곡 제목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웃음)
- 그리고 그 해 3월에 팀 B 겸임이 발표되었지요.
미 : 사실 겸임이 뭔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쥬리나상과 저, 이렇게 둘에게만 특별하게 허락 된일이라 생각하니 기뻤습니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겸임제도라는 것이 없었기에 무엇보다 크게 느낀 점은 ‘깜짝 놀랐다’는 점이었지만요. 솔직히 그 당시의 일은 그렇게 기억에 없어요. 갑작스레 엄청 바빠졌거든요. 외워야 하는 것도 두 배로 늘었고, 오사카와 도쿄 사이를 오가야 하는 경우도 2배로 늘었고 말이죠. 하루 사이에 오사카 도쿄를 2왕복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솔직히 매일매일 파김치였지요. 2012년부터 2, 3년간의 기억은 사실 굉장히 희미한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아요.
- 겸임을 하면서 ‘이건 좋다’고 생각 한 게 있다면?
미 : 극장 공연에 나갈 수 있었던 게 좋았어요. 이즈리나쨩이 저를 위해 딱 붙어서 알려주었거든요. 지금도 이즈리나에겐 감사한 마음이에요. 하지만 동시에 체력적으로 힘들기도 했어요.
- 얼굴이나 몸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였다고 하던데요.
미 : 네. 태어나 처음으로 두드러기가 났어요. 온 몸이 마치 표범같았지요. 얼굴 뿐 아니라 발, 등… 온 몸이 울긋불긋했어요. 아마도 몸이 비명을 질렀던 것이겠지요. 체력의 한계를 넘어 서 버렸던 것일지도 모르고요. 분명 ‘NMB 게닌!’ 녹화때였던 것 같은데, 얼굴에 난 두드러기가 너무나도 신경 쓰이고 불안 해 져서 결국 울음이 터져 녹화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 간 적이 있어요. 마츙이나 리포포가 함께 울면서 위로 해 주었던 것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 겸임을 하면서 NMB의 좋은 점을 새삼 깨닫거나 했나요?
미 : 네. NMB 멤버들은 다들 열심히 한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어요. AKB같은 경우에는 스위치가 들어 오는 순간 곧바로 딱딱 틀이 잡히는 편이라면 NMB는 리허설 때부터 쭉 시동이 걸려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죠.
‘라이벌’ 야마모토 사야카의 존재
그리고 쟝켄대회에서의 기적
- 그럼 2014년을 되돌아보죠. 2월에 있었던 ‘대조각 마츠리’ 때 팀 N에서 팀 BⅡ로의 이적, 그리고 SKE48 팀S와의 겸임이 발표 되었지요.
미 : 아무래도 N에 대해선 애착이 있었으니까 말이죠. 처음엔 너무나도 불안했어요. 1기생이 셋 밖에 없는 팀이기에, 후배들이 따라 준 것은 고마웠지만 말이죠. 모르는 게 있으면 질문을 해 주거나 했고… 하지만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라이벌의 필요성’이었어요.
- 야마모토 사야카상 얘긴가요.
미 : 네. 서로 다른 팀이 된 뒤에야 처음으로 느끼게 된거예요. 서로서로 이렇게까지 성장 해 올 수 있던 것은 역시 제 곁에 사야네가 있어 주었기 때문이었단 것을 말이죠. 이건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어요. 하지만 BⅡ에는 그렇게 함께 커 갈 라이벌이 없었어요.
- 두 분은 ‘사야미루키’라는 이름으로 항상 비교되곤 했죠.
미 : 사진집대결때 사실 스태프분께 이런 얘기를 했어요. ‘둘이 함께 하는 일 이 이상 늘리지 말아주세요’라고. ‘무슨 세트상품도 아니고 말이죠’라면서.
- 2012년 11월, 두 분이 각각 솔로 사진집을 동시 발매하여 CM출연자를 뽑는 기획을 했었죠.
미 : 당시엔 필요 이상으로 서로를 의식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라이벌의식’은 없어졌어요. 말로 설명하라면 좀 힘든데… 뭐랄까요 후련하게 빠져나갔다고나 할까요. 제가 졸업을 결정 한 이후인 것 같은데, 사야네를 보며 ‘사야네는 정말 여러 모로 노력하는구나. 대단해’라고 생각 하게 되었죠.
- 라이벌이란 필요하다 생각하시나요.
미 : 꼭 필요하다 생각해요. 라이벌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라 생각해요. 만약 라이벌이 없다면 재미도 없을 뿐더러 깊이도 없어진다 생각해요 하지만 정작 본인이 그 한가운에 있을 땐 그런 점들을 깨닫지 못하지요.
- 그건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 해 9월, 쟝켄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셨는데요.
미 : 사실 같은 일을 몇 년이고 계속 하다보니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는데, 때마침 그 타이밍에 솔로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기에 ‘아,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구나’라고 생각 하게 되었어요. 솔로로 노래를 한다는 건 부담감이 대단하거든요. 물론 그렇기에 보람도 있지만, 그만큼 힘든일이었죠. 아, 물론 대기실을 혼자 쓰는 건 편해서 좋았어요. (웃음)
- 이전에도 콘서트 땐 혼자 노래 부르지 않으셨던가요? 그것이랑은 다른 느낌인가요?
미 : 솔로로 ‘와루키’를 부를 땐 기분이 좋거든요. 개인적으로 큰 회장에서 콘서트를 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지는 모르겠지만, 스테이지에 홀로 섰을 때, 관객분들이 ‘오오!!’하고 환성을 보내주시는 그 감각이 정말 좋아요. ‘와루키’가 인기 있어서 정말 다행이죠 (웃음)
아, 이제서야 하는 말이지만, 쟝켄대회 전날 고양이 모양 반지를 샀거든요.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 반지를 끼고 대회에 나갔더니 우승 했고요. 그런데 중계를 보던 영매사분이 전화를 하셔서 ‘당장 저 반지 버려! 저 반지는 너무 큰 힘을 갖고 있어. 좋은 일도 생기지만 그만큼 엄청 나쁜 일도 일어 날 수 있어!’라고 충고를 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결국 그 반지는 신사에서 정화 하고 버리게 되었어요. 그거 정말 무서웠어요.
모델 일, 후배들의 성장…
스스로의 장래를 생각하는 데 필요했던… ‘졸업’
- 2015년에 들어 와선 모델로 활약하는 빈도도 늘었지요.
미 : 네. 저를 골라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촬영 때 귀여운 옷을 잔뜩 입을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모델을 한 뒤로는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엄청 늘었고요. 특히 인스타는 댓글 다시는 분들이 대부분 여성이세요. (웃음)
- 그 해 여름 즈음해서 졸업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라디오에서 말씀 하시는 것을 들었는데요. 그 경위를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미 : 졸업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스스로의 활동에 폐쇄감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이대로 활동을 계속 해 봤자 장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랬더니 좀 더 나만의 시간을 소중히 하는 편이 내 장래를 위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론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하는게, 공연이나 악수회가 싫어졌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팬 여러분과 만난다는 건 제게 있어 엄청 큰 힘이 되니까요. 하지만 저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 해 노력하고 있는데도 그런 노력들이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때였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런 사고회로로 변해버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결과 제가 내린 결론은 ‘졸업’이었습니다.
- 졸업이라는 ’결론’은 장래에 확고한 목표가 있기에 내린 결론인가요?
미 : 아니요. 큰 꿈을 쫓기 위해 졸업을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때로는 시간이 필요한 일도 있잖아요. 예를 들자면 찬찬히 생각 할 시간을 갖는다던가, 휴식을 취한다던가… 그런 건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물론 매일 바쁜 건 감사한 일이지만, 그 활동을 하면서 정체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일단 ‘끊어 보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그럼 그게 졸업을 결심한 큰 이유였군요.
미 : 그것 말고도 하나 더 들자면 팀을 옮긴 뒤, 후배들이 믿음직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실감하게 된 것도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네요. 특히 슈와 나기사가 프론트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졸업해도 괜찮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BⅡ는 이 둘이 이끌어 가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졸업에 대해서 상담은 많이 했나요?
미 : 멤버들에겐 졸업을 결심한 뒤에야 이야기했어요. 사후보고라고 할까요. 물론 전원에게 이야기 한 건 아니고, 주로 동기들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엄마한테는 꽤 이른 시점에 이야기 했는데,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걸로 됐다. 빨리 정해진다면 좋겠구나’라고 말씀 하셨지요. NMB에 들어 온 뒤로 엄마에겐 많은 것들을 상담했지만 한 번도 제 결정을 말리거나 하신 적은 없어요.
- 졸업 발표를 하기 전부터 SNS 등지에서 졸업을 암시하셨는데요.
미 : 졸업을 결심 한 뒤, 실제로 졸업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멤버들이 많잖아요. 하지만 저는 한 번 정한 일은 바로 실행하는 타입이다보니… (웃음)
‘사랑받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던
고베에서의 졸업 콘서트
- 얼마 전에 열린 졸업 콘서트는 어땠나요?
미 : 체력승부였어요. 이틀간 열렸는데, 콘서트를 할 땐 사실 피로감을 못 느꼈지만 콘서트가 끝나고 그 다음날 일어나니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피로가 쌓여 있었어요. 그 정도로 전력을 다 해 공연을 했지요.
- 세트리스트에는 와타나베상의 의향이 반영 된 것이라 하던데요.
미 : 네. 제가 참가한 곡들은 전부 선보이고 싶었거든요. 물론 선보이지 못 한 곡도 몇 곡인가 있긴 하지만 ‘나게키스로 사로잡아’나 ‘지퍼’같은 유닛곡, ‘기다렸어 신학기’나 ‘내가 조금 더 대담했더라면’ 같은 홍조곡까지 추억이 담긴 곡들은 역시 꼭 하고 싶었어요. 아, 그리고 곡마다 출연 멤버들도 신경썼어요.
- 둘쨋날 공연에는 졸업한 1기생인 야마다 나나, 콘도 리나, 카도와키 카나코, 미아키 리호도 달려 와 함께 ‘졸업여행’을 선보였는데요. 자신의 아이디어였나요?
미 : 아뇨. 스태프분의 아이디어 였어요. 오랜만에 만나선 ‘수고했어’라고 이야기 해 주더라고요 졸업생은 아니지만 키시노 리카쨩은 리허설때부터, 아니다 그 전에 있었던 레슨때부터 울었죠. (웃음) 정작 저는 한 번도 안 울었는데 말이죠.
- 눈물이 날 뻔한 적은 없었나요?
미 : 둘쨋날에 선보인 ‘초승달 등’ 때 울 뻔 했어요. ‘사야미루키’ 둘이서 노래를 시작한 뒤, 1기생들이 나오고… 하는 흐름이었는데 울컥했어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어요.
- 울지 않겠다고 의식하고 있었나요?
미 : 네. 제가 울면 다들 따라서 울게 되잖아요. 하지만 제가 울지 않음으로 해서 ‘무언가’ 메세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런 제 메세지는 제가 고른 곡, 연출을 통해 전하면 된다고 생각했고요. 그렇기에 가능하다면 끝까지 울지 않고 공연을 끝내야겠다 생각했어요.
- ‘초승달 등’ 다음 곡으로 ‘졸업여행’이 이어졌을 때, 사야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해서 노래를 부르지 못 하는 일도 있었는데요
미 : 풀썩 주저앉았죠. 그런 모습 본 적이 없었거든요. 절대로 울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만큼 강한 사람이니까… 정말 의외였어요.
- 새삼스런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사야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미 : 본인에게도 이미 이야기 했지만, 만약 총선거가 1인당 1표였다면 1등은 사야네였을거라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실제 총선거는 그런 게 아니니까… 넘으려 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란 게 있어요. 그렇기에 때로는 ‘사야네에게 있어 그 벽은 어떤 의미일까’라는 것을 생각 해 보곤 합니다. 사야네는 싱어송라이터라는 훌륭한 꿈이 있으니까, 그 꿈을 꼭 이루었으면 좋겠어요. ‘벽’이 없는, 다른 세계로 간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때론 해 보곤 합니다. 하지만 사야네는 어디까지나 사야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선 본인이 가장 제대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기에 걱정은 되지 않아요. 반드시 훌륭한 싱어송라이터가 될 것이라 생각해요.
- 사야네와 본인 사이에 비슷한 부분이 있나요?
미 : 최근 들어서 느끼는 점인데, 저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춤 스타일이 전혀 변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사야네의 춤 추는 방식이 최근 들어 저와 비슷해 진 것 같아요. 뭐라 할까요. 오랜 기간 함께 해 온 부부같달까요. 같은 해 태어나서, 혈액형도 같고, 동기이지만 성격은 전혀 다른 저희 둘…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닮아 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지금이라면’은 사야네가 미루키를 위해 작곡한 곡이지요.
미 : 정말로 좋은 곡이에요. 이동 중에 자주 듣곤 합니다. 곡을 처음 들었을 땐 몇 번이나 눈물이 났어요. 아키모토선생님의 가사도 정말 좋기에 팬 여러분께서도 좋아 해 주실 거라 생각해요. 저는 그것이 가장 기뻤거든요. 스테이지 위에 서는 사람으로서 팬 여러분들이 기뻐 해 주신다는 게 말이죠.
- 마지막으로 큰 스테이지에 서서 느낀 게 있다면?
미 : 역시 ‘즐겁다’는 점이었어요. 스테이지에 서는 것이 좋다는 걸 새삼 느꼈어요. 48그룹은 팬 여러분과의 거리가 가깝잖아요. 제가 아이돌의 팬이었을 때는 ‘아이돌’이라 하면 손이 닿지 않는, 그저 동경 할 뿐인 존재였거든요. 그렇기에 사실 제가 품고있던 이상적인 아이돌상과 제 활동은 조금 다르다면 달랐지만, 거리가 가까운 만큼 팬 여러분께서 사랑 해 주고 계신다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정말 좋았어요.
미루, 후쨩 슈, 나기사, 유우리, 리리퐁…
믿음직한 후배들
- 약 5년 10개월동안 NMB에 재적 해 오면서 그룹에 대한 견해에 변화가 있었나요?
미 : 한동안은 항상 ‘나’만을 생각했어요. 하지만 작년, 나나쨩이 졸업 한 때를 기점으로 동기들과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지요. 물론 모두들 어른이 되었다는 점도 있겠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거든요. 뭐라 할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저 자신은 지금도 단체활동이 안 맞긴 하지만…
- 졸업 발표 전후로 특히 BⅡ후배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적극적으로 취하셨죠.
미 : 그건 전부 후배들이 믿고 따라줬기 때문이에요. 그룹에 대한 사랑이나 팀에 대한 사랑이라 하기는 좀 다른 것 같은데… 뭐랄까. ‘인간애’랄까요.
- 스케일이 엄청난데요 (웃음)
미 : 슈, 나기사는 물론이고 다른 아이들도 저를 믿고 따라 주었기에 저 역시 그 믿음에 보답해야겠다 생각했거든요. 다들 저보다 나이가 어리다보니 그렇게 따라 주는 모습을 보면 여동생들 같아서 귀엽거든요. 그렇기에 팀을 대한다기 보다는 멤버 개개인을 대하고 있다는 감각이에요. 제가 졸업 한 뒤에도 저를 믿고 따라 준다면 개인적으로 계속 관계를 이어 갈 것 같고요.
- 그럼 BⅡ이외의 후배들과는 어떤가요?
미 : 리리퐁은 슈나 나기사랑은 또 다른 타입이에요. 말하자면 귀여워하는 후배라기 보다는 제가 곁에서 지켜보며 감탄을 하게 되는 후배죠. 리리퐁에게 해 줄 말은 딱히 없어요.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아이니까. SNS도 잘 활용하고, 생각이나 발언도 자극적이고요. 제게는 없는 장점을 잔뜩 갖고 있는 아이입니다. 본인에게 이런 말을 해 준 적은 없지만, 직접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거예요.
- 드래프트 회의에서 스토상을 지명한 건 다름아닌 와타나베상이신데요.
미 : 네. 사고방식도 어른스럽기에 후배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졸업 콘서트 첫날에 그토록 많은 관객 앞에서 ‘나는 여기에 장사를 하러 온 것도, 놀러 온 것도 아니라 풍파를 일으키러 왔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죠.
- 미루상도 센터 선언을 했지요.
미 : 미루는 센터에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공연도 악수회도 최선을 다 하고 있고, 결과도 남기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선언을 함으로 해서 팬분들 역시 마음이 흔들리셨을 거라 생각하고, 미루의 그런 발언으로 인해 후배들도 자극을 받아 블로그 등지에 이래저래 의사표명을 하기 시작했지요.
- 그렇죠. 야부시타상, 시부야상 죠 에리코상… 많은 멤버들이 ‘나 역시’라고 의지를 비추어 보였지요.
미 : 저는 지금껏 노력하는 모습이나 뜨거운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비추지 않았어요. 그렇기에 리리퐁이나 미루를 보면서 ‘나랑은 다른 타입’이라 생각했지요. 저와 같은 나라 출신 후배인 오오타 유우리쨩도 좋아요. 개인적으로 유우리를 꽤 예전부터 밀고 있는데, 예전에는 단순히 예뻐서 좋아했지만 알면 알수록 머리가 좋은데다가 심지가 굳은 아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타인에 대해 경의를 갖고 있다는 점도 좋고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동시에 자신 없어하는 약한 부분을 갖고있다는 점도 응원하고 싶어지는 일면이고요. 유우리와 리리퐁은 생각하는 게 닮았어요. 사이가 좋을 법도 하죠.
- 그럼 야구라 후코상은 어떤가요?
미 : 미루와의 라이벌 관계가 재미있어요. (웃음) 일부러 ‘미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을 한 적 있거든요. ‘에?!’라며 벙 찌는 표정이 재미 있어서요. 후쨩과 미루가 좋은 라이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 그렇게 보면 미루키상이 졸업 한 뒤, NMB는 말 그대로 ‘군웅할거’의 시대를 맞이하겠네요. 재미있어 보입니다.
미 :그렇네요. 개인적으로는 BⅡ의 슈나 나기사를 응원한다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각자 장점이 다르다보니 누구의 오시가 된다는말은 안 하려고요 (웃음) 아니, 정말로 정할 수가 없어요.
-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미 : 음… 물론 열심히 하란 말은 해야겠지만… 뭐랄까요, 좀 부족하다고 해야 하나요… 물론 저희가 들어왔을 땐 AKB가 전성기였기에 발족 당시부터 NMB의 주목도가 높았고, 그런 면에서는 분명 운이 좋았다는 점은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런 ‘운’이나 ‘타이밍’만으로는 설명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저희들(1기)에겐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신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찾아 내는 수 밖에 없겠지만요.
지금까지 지탱 해 준 모든 이들에게
진심을 담아 남기는 감사인사
- 수년 전, 미루키상은 ‘일본 최고의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목표는 달성하셨나요?
미 : 졸업 콘서트를 한 뒤, 달성감을 느꼈어요. 멤버들이나 관계자분들께서 ‘지금까지 본 콘서트 중 가장 좋았다’, ‘완벽했다’고 칭찬 해 주셔서 안심했습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는 만족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48그룹은 ‘아이돌다움’만을 보여주는 그룹이 아니다보니, ‘일본 최고의 아이돌이 되었냐’는 질문에 당당히 가슴을 펴고 ‘네’라고 말씀드리는 건 좀 다른 것 같아요. 올 해, 총선거에 입후보 하지 않고 처음으로 객관적으로 총선거를 보았는데, 이번 총선거를 제패 한 것은 다름아닌 버라이어티에서 활약하시는 사시하라상이셨어요. 결국 ‘무엇이 좋은가’는 제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봐 주시는 분들께서 정해 주시는 것이라는 얘기죠. 그렇기에 저를 보고 ‘일본 최고의 아이돌’이라 생각 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건 그것대로 감사한 일이리라 생각해요. 48그룹에는 300명 정도 멤버가 있는데, 그 정도나 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각자 개성이 다른 것도 좋은 것 같고요.
- 처음엔 연예계에 들어 가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연예계에 들어 온 뒤로는 최대의 이해자가 되어 주시고, 매일같이 나라의 자택에서 극장이나 신오사카역까지 차를 태워 주신 어머니께도 한 말씀 해 주시지요.
미 : 엄마, 정말 힘드셨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게 이렇게 멋진 광경을 보여 주시고, 내가 이렇게 즐겁게 보낼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 지금 이렇게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해요. 정말로 낳아 줘서 고마워요! 정말로 행복해. 내가 보는 수 많은 멋진 광경들을 엄마에게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앞으로도 날 따라 와 줘요.
-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졸업 후의 미루키상에 대해 이야기 해 주세요.
미 : 정말로 아무 것도 정하지 않았어요. 그렇기에 ‘이런 것을 목표로 한다’는 건 말씀 드릴 수가 없어요… 다만,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저는 아이돌을 후회 없이 완수 했다’는 점이에요. 여러분과 만날 기회가 사라지는 것은 정말로 쓸쓸하지만, 정말 많은 분들께서 저를 지탱 해 주시고, 사랑 해 주셨기에 ‘미루키’는 존재 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려요. 저는 NMB48를 졸업합니다만, 여러분의 마음 한 구석에 ‘미루키’가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정말로 기쁠 것 같아요. 지금까지 수 많은 성원, 정말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