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물/출판물-AKB
AKB 히스토리 - 4장.
hemod
2013. 6. 17. 19:10
4-1. 불안한 가운데 팀 B가 시동을 걸다.
그런 와중에 소녀들에게 다시 한 번 큰 파도가 몰아쳤다.
A,K,B 48의 막내에 해당하는 팀 B가 결성 된 것이다.
처음 AKB48이 결성 될 때에는 멤버들을 각각 1군과 2군으로 나누어 각 군에 24명씩의 멤버를 두는 방식으로 예정되었으나 (결국 48명의 멤버) 여러 시행착오들을 거치면서 1군/2군제도가 폐지되고 '팀' 제도가 정착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팀의 이름인 AKB에서 따 와 1기 오디션 합격자들을 팀 A, 2기 오디션 합격자들을 팀 K로 부르기로 결정이 난 것이었다.
그렇기에 어찌 보자면 나머지 한 알파벳, 즉 팀 B를 만들기 위해 제 3기 오디션을 본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2006년 11월 하순...
현재 팀 B의 캡틴을 맡고 있는 카시와기 유키는 그 날의 오디션을 이렇게 얘기한다. "정말 너무너무 긴장했었어요. 너무 긴장을 한 탓인지 무엇을 해도 실수연발이었지요. 특히 실수가 컸던 게 노래 심사때였어요. 인트로가 흘러나오는데 가만히 서 있는 게 너무 불안해서 저도 모르게 리듬을 타 버렸던 거예요. 그 전까지 다른 오디션을 볼 때나 연습 때에는 그런 짓 한 적 없는데 말이죠. 저 스스로도 굉장히 놀라서 심사가 끝난 뒤 '아... 아까 내가 뭔 짓을 한 거야..."라고 낙담했습니다.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이미 떨어졌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합격 발표가 났을 때,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들떠있으려니 스탭분께서 '아직 너희는 팀 B가 아냐. 어디까지나 후보생이지'라고 따끔하게 말씀하셨기에 속으로 '아...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팀 B 오디션 (3기 오디션)에 합격한 사람은 총 20명이었다. 그리고 이 20명은 약 1주일 뒤 (12월 9일)에 있을 이벤트(아키하바라 DUX에서 열린 1주년 기념라이브 'NTT DoCoMo presents AKB48 1st Anniversary Live! 전부 모인 'A' 'K' 'B' 공연) 회장에서 짧게나마 피로연을 갖도록 예정되었던 것이다.
결국 다른 선배들에 비해 빠르게 팬들의 앞에 선 팀 B였지만, 그 뒤로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팀 A는 20명, 팀 K는 16명으로 이루 어 져 있었다. 이는 세트리스트를 구성할 때 필요한 인원수이기도 했기에 (오리지널 세트리스트를 보유 한 것이 아니고 선배들의 세트리스트를 물려 받게 될) 팀 B는 16명에서 20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피로연이 끝난 뒤, 팀 B'후보생'들은 힘든 레슨을 견뎌내지 못하고 한 명 두 명 차례로 탈락하는 멤버들이 속출하게 된 것이다. 결국 남게 된 후보생 수는 팀 K의 16명에도 못 이르는 수치였다. 그리고 이 점을 고민하던 운영측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짜 내게 된다.
어느 날, 공연을 끝 내고 대기실로 돌아 온 팀 A에게 한 스탭이 말을 걸었다. 팀 A의 캡틴인 다카하시 미나미는 그 날을 떠올리며 이렇게 얘기했다. "스탭분이 갑자기 저희에게 '잠시 할 얘기가 있는데 괜찮을까? 다름이 아니라 팀 B 발족에 관한 얘긴데 말이야...'라고 말을 꺼내셨어요. 속으로 '왜 저런 얘기를 우리에게 하는거지?'라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스탭분이 '팀 B 후보생들 중에 관둔 애들이 많아서 말인데... 팀 A 멤버 중에 몇 명 정도만 팀 B에 서포트 멤버로서 가 주었으면 하는데...'라고 말을 하시는거예요. 순간 깜짝 놀라서 다른 멤버들을 바라보니 다른 멤버들도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셔 있더라고요. 다들 충격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스탭분이 '다카하시, 넌 어떠니?'라고 묻더라고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처럼 어질어질 해 지더니 '아... 팀 B로 이동하는구나'라고 생각했지요. 있는 힘을 다 쥐어 짜서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힘든데요'라고 대답은 했지만... 그 뒤로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군요.. 뭐랄까 '난 이미 지옥 밑바닥에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그 뒤로 스탭이 이름을 거론한 것은 우라노 카즈미, 히라지마 나츠미, 마스야마 카야노, 와타나베 시호였다. 그 중 가장 처음 이름이 불린 우라노 카즈미는 "솔직히 팀 이동 얘기가 나온 순간 속으로 '내가 불릴 것 같아'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가장 먼저 제 이름이 불렸지요. 스탭분이 '이름이 불린 사람은 무대 쪽으로 나오'라고 하셨고, 주변을 둘러보니 카야노가 펑펑 울고 있더군요. 곧이어 낫쨩 (히라지마 나츠미)도 울기시작하고, 시호쨩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될대로 되라는 식이었어요. 저는 어찌 할 줄 몰랐고요... 이렇게 말하면 이미지가 안 좋지만 뭐랄까요 '좌천'당하는 느낌이었어요." 라고 이야기했다.
우라노와 마찬가지로 이름이 불렸던 히라지마 나츠미는 "솔직히 제 이름이 불리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어요. '인원이 부족하니까 서포트 하러 간다'고 했으니 당연히 나이 많은 멤버들이 가게 될 줄 알았거든요. 당시 제 나이는 밑에서 두 번째였으니 저는 아닐 줄 알았었어요. 그런데 제 이름이 불린거예요. 그 순간 굳어버렸지요. 저랑 똑같이 중학생이었던 미이쨩 (미네기시 미나미)과 앗쨩 (마에다 아츠코)도 저와 같은 생각을 했었는지 순간적으로 '에?!'라고 놀란 분위기었습니다. 멍하니 있다가 나오라고 하니 나가려는데... 미이쨩이랑 앗쨩이 뒤에서 '에?!?! 낫쨩 가지 마!!"라고 펑펑 우는거예요. 대기실을 나와서 무대쪽으로 가는데 시호쨩이 '난 안 울 거야'라고 하더군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그래, 울어봤자 변하는 것은 없어. 울지 말자'라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라고 밝혔다.
후보생들의 대거 탈락과 팀 A로부터 들어 온 이적생들.. 팀 B는 출발부터 큰 불안을 안고 시작되었던 것이다.
4-2. 의견 충돌, 부상... 팀 B에게 닥쳐오는 위기들!!
그리고 해가 바뀌어 2007년이 왔다.
1월 25일, 팀 A의 세 번째 세트리스트인 '누군가를 위해서 (誰かのために. 다레카노 타메니 ※1)'도 드디어 마지막 공연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날은 팀 A의 실질적인 리더로서 팀원들을 이끌어 왔던 오리이 아유미가 졸업을 하게 되는 날이기도 했다. 오리이의 졸업과 더불어 팀 B로 갈 예정이었던 4명의 멤버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마스야마의 팀 A 잔류 역시 결정되었다. 결과적으로 팀 B로의 이적이 확정 된 것은 우라노 카즈미, 히라지마 나츠미, 와나타베 시호였다.
우라노 카즈미는 이 날을 떠올리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희 셋이 최종적으로 이적하게 되었을 때 저희 나름대로 역할을 정했어요. 예를 들어 저희 중에 가장 어렸던 낫쨩 (히라지마)은 팀 B 멤버들과 연령적으로 가장 가까우니까, 멤버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 그리고 저는 좀 미움받아도 좋으니까 어린 멤버들을 혼내는 역할, 마지막으로 시호쨩 (와타나베)은 저희 둘 사이에서 적당히 균형을 맞춰주는 역할을 하기로 했었어요.솔직히 그 당시를 떠 올리면 '괴로웠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어요.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 말투도 좀 세게 하면서 화 낼 일도 아닌데 애들에게 일부러 화를 내고... 하지만 실제로도 제가 있었던 팀 A와 비교 해 보면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많았습니다. 인사를 제대로 안 한다던지, 곱고 단정한 말을 쓰지 않는다던지, 프로의식이 없다던지 말이지요."
이 당시 AKB48은 사회적으로도 조금씩 조금씩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는 때였다. 그렇기에 팀 B 멤버들 중에는 애초부터 'AKB 멤버가 되고 싶다'는 목적으로 오디션을 보게 된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점에 있어서 제로에서 시작 하여 '자신이 아이돌이 될 수 있을 지 조차 모르는' 환경에서 불안과 싸워가며 매일같이 극장에서 필사적으로 춤 추고 노력 해 온 팀 A나 팀 K와는 의식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팀 A와 팀 K가 오디션 합격 발표로부터 약 1달 뒤에 무대에 선 것에 비해 팀 B는 합격 발표 1주일 후에 있었던 피로연으로부터 무려 5개월 뒤에나 데뷔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분위기에서 맞이 한 4월 8일, 새롭게 오디션에 붙은 13명과 팀 A에서 이적 해 온 3명, 이상 16명이 '팀 B'로서 공연을 시작하게 된다. 이 때 사용했던 세트리스트는 팀 K의 두 번째 세트리스트인 '청춘 걸즈'였다.
객석은 초만원이었다.
당시, '주간 플레이보이'에서는 공연에 앞서 팀 B 특집을 준비, 지면에 팀 B 멤버들의 이름과 얼굴 사진을 실은 적 있었다. 그 덕분인지 첫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멤버들이 공연을 할 때, 팬들이 별명을 불러주는 보기 힘든 광경도 연출되었다. 그것도 원래 '청춘 걸즈'공연은 팀 K의 공연. 공연 사이사이에 팬들이 넣는 추임새도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이를 본 팀 B 멤버들은 '아, 공연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거구나'라고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팀 B의 센터에 위치하며 팀의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와타나베 마유우가 겨우 이틀만에 발을 다쳐 장기 휴양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와타나베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오른쪽 정강이 부분이 갑자기 아파오더라고요. 병원에 가 보니 '한동안 춤 같은 거 추지 마세요'라고 하더군요. '아.. 하필이면 이렇게 중요 할 때에... 어떻게 해야하지'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거기다가 생각 해 보면 제가 쉬어도 다른 멤버들은 공연을 계속 하는 거잖아요. 다른 멤버들과 차가 점점 벌어진다고 생각하니 초조해지더라고요. 집에서 쉬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매일매일이 불안의 연속이었습니다."
와타나베가 부상으로 빠진 상황에서 뒤를 잇듯이 많은 멤버들이 차례차례 부상, 컨디션 난조 등으로 이탈 해 갔다.
카시와기 유키가 말한다. "그 때만 해도 저희 언더(대타)가 없었으니까요... 만약 누군가 쉬게 되면 그 멤버가 서 있어야 하는 자리가 텅 비게 되는거예요. 결국 16명이 필요한 공연인데 9명이서 공연 한 적도 많았어요. 그렇게 하는 것도 결국은 한계가 있어서 팀 K 멤버 분들이 나와서 대타로 공연 해 주시기도 하고 (어차피 세트리스트는 팀 K의 것이니) 했었어요. 부주의하게 연습하다가 부사을 당하거나, 몸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독감에 걸리거나... 선배들은 그런 일로 공연을 쉰 적이 없다는데 저희 팀 B에서만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신디 (우라노 카즈미)나 낫쨩이 그런 모습을 보고 화를 많이 냈었어요. '팀 B 멤버들은 왜 이리 부주의 한 애들이 많니. 팀 A였으면 컨디션이 안 좋다면 기어서라도 무대에 올랐을거야. 대체... 우리를 보러 와 주신 관객분들께 죄송하다는 마음이 있긴 한거니?' 라고요..."
결국 자신들이 미숙한 탓에 주변 사람들... 선배나 스탭들에게 폐를 끼쳐 버렸다. 아니, 무엇보다도 자신들.. 팀 B를 보기 위해 일부러 와 준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는 점에 자기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지고, 분해서 견딜수가 없었다고 한다. 공연 첫 날에 그토록 기뻐했던 자기 자신이 너무나 바보같이 느껴졌다고...
말 그대로 '손이 많이 가는 막내', 팀 B는 AKB48이 처음 결성 된 이래로 가장 큰 위기에 처해있었다.
4-3. 전국적으로는 아직 지명도가 낮아...
내부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외형적으로 AKB48은 팀 A, K, B에 각각 16명씩 멤버가 소속되어 말 그 대로 '48'명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는 AKB48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편안히, 알기 쉽게 다가 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한 것이다.
각 팀을 떠나 AKB48명의로 두 번째 메이저 싱글인 '교복이 방해해 (制服が邪魔をする)'가 1월 31일에 발매되었고, 곧이어 4월 18일에는 세 번째 싱글인 '경멸했던 애정 (軽蔑していた愛情)'가 발매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미디어에서 '아키하바라에 가면 AKB48이라는 교복 입은 48명짜리 아이돌 그룹이 있다'고 흥미를 가지고 다루어 주기에 이르렀다.
다만, 이런 인지도 향상은 어디까지나 '아키하바라 내'라는 제한적인 장소에서의 인지도 향상에 그쳤을 뿐이었다.
사실상 '경멸했던 애정'은 오리콘 등장 첫 주에는 8위로 좋게 시작했으나 그 다음주에는 바로 98위까지 곤두박질 쳐, 1주일만에 90위 하락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아키하바라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팬들이 'AKB48의 싱글을 사서 순위를 높여줘야겠다'라던지 '악수회에 가서 직접 응원 해 줘야지'라고 생각해서 한 번에 많이 사 댔기에 가능한 수치였고, 결과적으로 1주차에서 그런 사람들이 전부 사 버린 뒤, 2주차부터는 사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3월에는 AKB48의 첫 전국투어 '하루노 춋토 젠코쿠 투어 ~마다마다다제 AKB48~'가 개최되어 도쿄, 오사카, 아이치(나고야), 후쿠오카에서 공연을 열었으나 전국적인 지명도가 떨어 진 탓에 도쿄 공연 이외의 공연에는 빈 자리가 많이 눈에 띄었다.
물론 아키하바라에서 AKB48의 인기는 뜨거웠다. 극장도 매일같이 만석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그런 뜨거운 인기가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아키하바라'에 국한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 문제가 발생했다.
이 해 여름에는 AKB48의 핵심멤버들이 출연하는 영화, '전염가'가 크랭크 인 하게 되었다. 히로인은 팀 K의 오오시마 유우코, 그리고 그 외에도 팀 A와 K의 멤버들이 여럿 출연하게 되었다. 전국 투어와 영화 촬영 건으로 인해 3월의 극장 공연은 한 달동안 겨우 3일에 불과했다. 물론 4월 이후로도 영화 촬영으로 인한 결석자가 많아 져 팀 A와 팀 K의 공연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현상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6월이었다. 공연이 불가능한 팀 A와 팀 K 대신 매일같이 공연을 이어갔던 것은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인해 거의 너덜너덜한 상황이었던 '막내', 팀 B였다. 필사적으로 공연을 하는 팀 B를 보고 신규 팬들이 극장을 가득 메우며 팀 B를 응원하였(※1)지만, 한계는 명백히 눈에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운영진은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7월 1일, 팀 A와 팀 K를 셔플(섞음)하여 합동으로 '히마와리 구미'가 결성, 공연(※2)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히마와리 공연'은 결과적으로 이후 '언더'제도라고 불리우는 '대타'제도의 틀을 마련한 것으로, 팀 A와 팀 K를 섞어 각각 팀 1과 팀 2로 나눈 뒤, 기본적인 공연은 팀 1으로 하되 팀 1에서 누군가가 사정이 생겨 결석하게 되면 그 멤버의 '언더'(대타)인 팀 2 멤버가 그 자리를 메꾸는 방식으로 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AKB48이 처음 만들어 질 때 구상되었던 1/2군제도의 사실상 부활이라고 할 수 있었다.
팬들중에는 '그렇게 하면 인기가 있고 없고가 한 눈에 보이는데, 그런 방식을 강제로 밀어붙이면 멤버들이 너무 불쌍하잖아요!'라고 운영측에 항의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멤버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히마와리 공연은 솔직히 힘들었어요. 하지만 저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라고...
팀 A의 마에다 아츠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아... 이렇게 기껏 사이 좋아 진 우리 팀이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거구나. 다시 팀 A로 뭉치는 건 힘들까...'라고 생각했어요. 저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그 히마와리 공연을 하면서 많이 성장 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오시마) 유우코와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서, 유우코에게 엄청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어요. 뭐랄까요. 유우코는 저에 비해 밝은 아이라 그 아이를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아... 감정을 표현하고 싶을 때엔 저렇게 하면 되는구나', '아... 저렇게 하면 즐겁게 일을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라고 배웠어요."
반대로 팀 K의 오오시마 유우코는 이렇게 말한다. "팀 A 특유의 마이페이스적인 면이나 여러 기술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아.. 이렇게 자유롭게 하고싶은 대로 해도 되는구나!'랄까요. 팀 K에서는 모두들 '진지하게, 집중해서, 단결해서'를 중시하기 때문에 저 스스로도 꽤나 그런 것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팀 A 특유의 마이페이스적인 모습을 보면서 그런 집착에서 벗어 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저의 장점인 밝은 면이 나올 수 있었고요."
팀 A, 그리고 팀 K는 일본 청년관에서 있었던 셔플에 이어 히마와리 공연을 통해 팀을 뛰어넘은 우정과 유대감을 더더욱 기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막내인 팀 B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멤버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한계에 몰아 넣었던 여름, 그리고 가을이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겨우 맞이한 12월...
AKB48에게 결성 이래로 가장 기쁜 소식이 날아 들었다.
'홍백 가합전에 출장 해 주십시오'라는 소식...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경하고 나가고자 하는 꿈의 무대... 멤버들의 기쁨은 말로 다 형용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홍백가합전에 나가기 위해서 그녀들은 한 '칭호'를 손에 넣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4장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