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시와기 유키 - 와타나베 마유 왕복서간 첫 번째 편지
첫 편지
'꿈으로 향하는 문'
국경, 인종, 종교… 태어난 곳, 피부 색, 믿는 것은 각자 다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꿈'을 품고 살아간다.
카시와기 유키와 와타나베 마유.
두 사람이 제 3기 AKB48 추가 멤버 오디션에 합격한 것은 2006년, 그 해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들의 장래희망 1위는 팬케이크를 만드는 파티시에, 2위는 꽃집 주인, 3위는 간호사, 4위는 교사, 그리고 5위에 위치한 것이 연예인/탤런트였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1991년 7월 15일에 가고시마시에서 태어난 카시와기 유키는 8살이 되었을 때 모닝구 무스메。의 무대를 보고 한 눈에 반한 뒤, 눈 깜빡할 사이에 모무스의 노예가 되고, 어느 사이엔가 아이돌 오타쿠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와타나베 마유는 어떤가, 그녀는 1994년 3월 26일 사이타마에서 태어나, 아이돌이나 연예인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PC와 2차원 세계에 몰두 해 왔다.
그런 두사람은 인터넷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 처럼 만나게 되었다. 그녀들이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 것은 도쿄 아키하바라에 전용극장을 갖춘 아이돌 그룹 AKB48였다.
물론…
자기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입을 모아 '정말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여자아이였다'고 이야기하는 두 사람에게 있어 아이돌의 길을 간다는 건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2005년에 있었던 '오프닝 멤버 오디션'에도 참가,사실은 1차 심사도 통과 한 바 있었던 카시와기 유키. 하지만 가족들의 맹렬한 반대와 '평일에 학교를 쉬어가면서까지 도쿄에 갈 각오가 없었'던 그녀는 면접 심사를 포기해었다.
그리고 2006년에 있었던 제 2기 추가멤버 오디션에 참가했던 와타나베 마유 역시 최종심사까지 진출했음에도 '어차피 떨어질거야'라는 부정적인 마음의 발로인지 최종적으로 낙선을 맛 보고, 결국 한 번은 꿈을 포기했던 과거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들조차 깨닫지 못 했던 점이 있었다. 자신들의 마음 한 구석에서 조용히 타오르던 불길은 그 정도로 꺼지지 않는 불길이었다는 점 말이다.
와타나베 마유 귀하.
마법 열쇠를 쓰면 제 아무리 굳게 닫힌 문이라 해도 눈 깜빡 할 사이에 열 수 있다…
그런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처음 보게 된 것일까요.
'미녀와 야수'도 아니고, '이웃집 토토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리 포터'도 아닌 듯 한데…
그런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가슴이 두근거렸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열쇠가 어디에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지금껏 반짝반짝 빛나 보였던 것들이, 마음들 두근거리게 하던 모든 것들이 빛을 잃곤 했어요. 중학생이 될 즈음해서는 저런 '이야기'들을 정말로 내가 읽은 적은 있긴 한 걸까 하고 의심조차 하게 되었지요.
'유키쨩은 대단해'
주변에서 저를 그렇게 칭찬 해 주었던 것은 음악 계열 유치원에 다녔던 때였지요.
피아노를 치건 북을 치건 항상 가장 잘 하거나, 못해도 두 번째는 했었던 것 같네요.
마칭 밴드를 할 때에도 항상 중앙에서 지휘하는 드럼 메이저였지요.
네. 마칭 밴드의 '센터'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칭찬을 들으면 기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요.
하지만…
어린 나이일 때에도 '이걸 너무 섣불리 믿어서는 안 돼'라고,
'이 분위기에 취했다가는 나중에 가서 큰 코 다칠 지 몰라'라고 생각했던 어린 저는 어른들의 표정을 살피며, 너무 나서지도, 안주하지도, 그렇다고 어들들에게 아양 부리지도 않으려 노력했지요. 물론 마음 속으로는 '에헴!'이라 자랑스러워 하긴 했지만요.
네. 지금 마유유가 알고 있는 제 모습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으면 어릴 적의 저 자신이라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지금 생각 해 보면 그 때가 저의 전성기였을 지도 모르겠네요.
전성기가 오는 것이 조금 빨랐다… 고 하기에도 너무 이른 전성기였다 해야겠지만요.
하지만 그게 사실인걸요.
저는 그 이후로는 롤링 스톤… 말 그대로 '굴러가는 돌' 마냥 빛을 잃어 갈 뿐이었지요. 결국 중학교에 들어 갈 즈음에는 눈에 띄지도 않고, 몸도 약한 그냥 흔한 아이돌 오타쿠소녀 (심지어 입학식 때 의식을 잃고 쓰러져, 학교내에서는 '실신한 카시와기 유키쨩'으로 통하던 시기) 1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있어 말 그대로 '꿈의 조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AKB48이었습니다.
중 2때, 친구가 갖고 있던 오디션 잡지를 '발견' (그냥 눈에 띈 게 아닙니다. 당시 제게 있어 그 잡지는 '세계를 들썩이게 할 대 발견'이었어요.) 한 저는 '아… 내가 그토록 동경해 온 아이돌… 나도 어쩌면… 아이돌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제 뇌리를 뒤흔들었던 그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 가는 동안에도, 집에 돌아 가서도, 밥을 먹을 때도, 목욕을 할 때도… 심지어 잠을 잘 때 뿐 아니라 다음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서까지…
제 마음은 계속 두근거렸지요.
물론 '어차피 내가 아이돌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어, 아이돌이 될 방법이 있다 한 들 뭐가 달라져? 차라리 몰랐던 편이 나았을 지도 몰라'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동시에 가슴은 계속해서 두근, 두근, 두근거리고, 머릿속에는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처음으로 오디션에 도전 했던 것은 오랜 기간 동경 해 왔던 모무스였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결과는 무리였지요. (전국에서 수만명이 응모한 데 비해 합격자가 겨우 한 명이었는 걸요.)
그리고 그 후, 우연히 펼쳐 본 패션잡지에서 알게 된 것이 바로 AKB48의 오프닝멤버 오디션이었습니다.
물론 AKB가 어떤 그룹인가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 했지만
'전용극장'
'아키하바라'
'노래하고 춤 출 수 있다'
'아키모토 야스시 프로듀서'
지금 생각 해 보면 엄청 수상한 느낌입니다만 (아키모토상 죄송해요) 그런 수상함을 불식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제 마음을 끄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1차 심사는 매우 간단했어요.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 보내면 그만이었거든요. 그렇기에 부모님께 아무 말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를 했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어째선지는 몰라도 1차 심사를 통과하더군요.
사진을 보낸 다음날,
'면접을 하려 하니, 도쿄로 와 주십시오'라는 전화가 오더군요.
그것도 제가 학교에 가 있는 사이에, 집 전화로.
전화를 받은 엄마도, 저 역시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댔던 기억이 있네요.
전혀 상상도 못 했기에.
솔직히 그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습니다만, 엄마가 워낙에 맹렬히 반대하셨고, 저 역시도 '학교까지 쉬면서 도쿄에 가야하나? 그건 좀…'이라 생각 했었어요.
네, 합격을 했을 때의 각오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지요.
마유유, 당신은 당신의 '꿈의
장소'까지 어떻게 걸어 왔나요?
카시와기 유키 귀하
….
….
….
이렇게 격식을 차려 정식으로 편지를 쓰려니 왠지 부끄럽네.
3기생 오디션 이후로 유키링과는 항상 함께였지.
내게 있어서 유키링은 언제나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진지한 얘기는 거의 한 적 없었던 것 같아. 항상 농담만 했었지.
하지만 이번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려나.
그렇다면… 진지하게 써 보려 노력 할게.
그럼 처음부터… 다시.
유키링에게
어쩌다가 AKB에 들어왔더라…?
어떤 부분에 끌렸더라?
응모를 하게 된 계기가 뭐였더라?
아무리 떠올려 보려 해도,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 보아도
이거야! 라고 할 만한 대답이 안 나오네.
'2차원에 푹 빠져, 항상 넷서핑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AKB48라는 글자를 목격 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섯 글자를 본 순간,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뭔가 멋진 이야기처럼 보일 지 모르지만, 그런 그럴듯한 계기가 없어.
'아키하바라?'
'돈 키호테 8층?'
'여자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노래한다고?'
결과적으로 든 생각은 '그게 뭐야' 였지요.
그 당시, 제가 속해있던 '초등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는 모무스가 엄청난 인기였지요. 저희 반에도 완벽히 푹 빠져있는 열광적인 팬들이 많았기에 저 역시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딱히 '팬'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요.
그렇다고 딱히 연예계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이돌이라는 존재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기에 AKB48역시
'흠… 이거 뭐지?'
정도의 인상일 뿐이었어요.
하지만 말이죠
지금 이렇게 예전 일들을 떠올려 보면 말이죠, 처음 그 다섯 글자를 목격한 바로 다음 날부터 집에 돌아 와서는 곧바로 인터넷으로 AKB48의 정보를 찾아보곤 했었던 기억이 있어요. 어쩌면 저 스스로도 눈치를 채지 못했던 것 뿐, 너무나도 사소한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AKB48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전조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매일 매일 멤버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고,
극장 라이브 영상을 찾아 보며
'아 이 곡 괜찮네'
라고 혼자 중얼 거리며, 나중에는 그 곡을 조용히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AKB48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고,
천천히 천천히 AKB48의 색으로 저 스스로를 물들여 오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이어지게 되더군요.
그러던 매일매일이 변화하기시작 한 것은 인터넷에서 제 2기 추가멤버 오디션 광고를 본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에?!?!?!? 정말이야?'
라며, 심장이 튀어나오는 것만 같았어요.
'이 오디션은 꼭 받아보고 싶어, 아니 받아야만 해'
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춤은 커녕 다른 사람들 앞에서 노래 하는 것 조차 해 본 적 없는 제가 말이죠.
유키링의 편지에 따르면 '두근두근'했다 했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직감'이었어요.
아이돌이 되고 싶다던가, 연예인이 되고 싶다던가 한 게 아니라, 단순히
'AKB 48가 되고 싶어'
그 마음이 저의 '출발점'이었어요.
반대하시는 부모님을 어찌저찌 설득한 뒤, 사진을 보내 1차심사를 통과했습니다.
NTT도코모(※일본의 통신회사)와의 타이업이었던 '화상 전화면접' 역시 운 좋게 클리어 했지요.
물론 그 당시만 해도 화상 통화라 해도 화질이 좋지 않았고,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지요.
하지만 말이에요.
그런 기술적인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어째서 항상 제 차례만 되면 전파가 약해지고, 영상이 멈추고, 목소리가 안 들려서 질문을 알 수 없어지는 것은 왜일까요.
'아 이거 무조건 떨어졌다'
그런 생각이 들어 실망감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최종심사 때, 자신이 없었던 댄스 심사에 어찌저찌 합격, 마지막 관문인 가창 심사로 진출했지요.
저 나름대로는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게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발표 되는 합격자의 이름 안에 제 이름은… 없었습니다.
'충격적이었느냐'고 물으신다면…
사실 1차 심사 때부터 줄곧
'어차피 떨어질텐데'
라고 마음 한 구석에서 부정적으로 생각 해 버리는 제가 있었지요.
아니, 오히려 그런 모습이 평소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직감적으로 움직여서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저 자신의 껍질을 벗어내지 못 한 것이지요.
'뭐, 내일부터 다시 학교 생활 열심히 하자'
는 엄마의 말에 힘 없이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 포기한 꿈인데도, 어째서인지 'AKB48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마음 깊은 곳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유키링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