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물/출판물-AKB
비 선발 아이돌 - 1장
hemod
2014. 3. 5. 15:56
1-1. 아이돌이 된 이유
어째서 나는 아이돌이 되었는가. 우선은 그 점부터 써 내려 가 보려한다. 음... 어떻게 말하자면 한 없이 길어 질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단 한 마디로 정리 될 수도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단 한 마디로 정리를 하자면, '어쩌다보니'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이 세계로 들어오게 된 것은 정말로 '우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날 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는 이 세계에 들어오기 이전에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내가 '아이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 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나의 그런 자세가, 나의 AKB48로서의 활동, 혹은 '비선발 아이돌'로서의 삶의 방식을 돕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여 내가 이전부터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는 아이였더라면 지금의 이런 '비선발 아이돌'로서의 삶을 버텨 나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2. 나의 성장기
이쯤에서 나, 다시 말해 나카야 사야카의 성장과정을 소개 해 두고자한다. 이야기가 길어 질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성장 해 온 시대와 환경이 AKB48이라는 그룹의 성장 배경과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참고 들어주셨으면 감사하겠다.
나는 1991년 10월 15일에 태어났다. 주변 사람들 중에는 내가 태어 난 1991년을 '걸프전이 일어 난 해'로 기억하거나, 국내적으로 보자면 일본 경제에 버블이 완전히 꺼지고 장기 불황이 본격적으로 시작 된 해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고는 하나, 물론 나는 기억하고있지 않다.
나는 이와테현 (※일본 동북지방.) 모리오카시(※소위 '동북 제 2의 도시', '동북 교통의 중심지'라고 불리며, 이와테현 현청소재지. 완코소바, 냉면이 유명)에서 태어났다. 내 위로는 오빠가 두 명 있다. 말하자면 3남매의 셋째이자 외동딸이며 장녀인 것이다.
아버지는 평범한 샐러리맨이었고, 사는 곳은 모리오카시 외곽 주택단지였다. 아무것도 특이한 점 없이, 너무나도 평범한 가족에서 태어 나, 평범하게 자라 왔던 것이다. 나 자신도 어디 한 구석 독특한 구석이 없는 평범한 여자아이었으며, 큰 문제 없이 성장 해 왔다.
내가 태어 난 집 근처는 산과 숲 등 자연이 풍부한 곳이었다. 또, 집 근처에 사는 친구들도 많았기에, 말 그대로 친구들과 함께 산과 들을 종횡무진하며 노는 것이 일과였다. 나에게있어 형제는 오빠만 둘인데다가 외동딸에 막내라는 점까지 겹쳐 성격은 왈가닥에 자유분방한 꼬마였다고한다. 한 번 놀러 나가면 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아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런 '평범한' 생활은 하루아침에 급변하게된다. 내가 7살이었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게 된 것이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큰 오빠는 다니던 학교 문제로 인해 아버지와 함께 모리오카에 남게 되었지만, 작은오빠와 나는 어머니와 함께 외갓집이 있는 치바현으로 이사를 하여 3명이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혼이라는 것에서 온 충격으로 내 성격, 그리고 인생은 적잖게 변하게 된다. 내게 있어 너무나도 소중했던 것들이 한 번에 사라 져 버린 것이었다. 가족, 친구, 고향, 놀이터였던 자연... 그 모든 것을 잃게 된 상실감은 어린 나로서는 견뎌내기 힘들만큼 큰 것이었다.
그 탓이었을까, 치바현으로 이사 온 뒤로부터 나는 성격이 많이 변하게되었다. 지금까지는 허구헌날 나가서 놀던 내가, 집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도 않게 된 것이다. '자유분방한 꼬맹이'가 어느 사이엔가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한, 매사에 의욕이 없는 아이'로 변해버린 것이다.
집에서 나가지 않게 되고나서부터는 집에 특어박혀 TV를 보는 것만이 낙이었다. 그 중에서도 '모리오카에 있을 때 부터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당시 어린 내게있어 유일한 '안식'은 바로 '애니메이션'이었다. 브라운관 (당시에는 브라운관 TV였다.) 안에 펼쳐 진 세계는 항상 밝고, 희망이 있고, 꿈이 있었다. 그렇다. 내 주변에서 '현실'로서 일어나는 세계와는 정 반대였다. 그런 현실을 잊기 위해, 나는 마치 홀린 듯 애니메이션에 탐닉했다. 무기력하고 의욕 없이 매일매일을 보내는 나에게 있어, 유일하게 '열중 할 수 있는 대상', 그것이 바로 애니메이션이었다.
1-3. 꿈을 꾸기시작하다.
그런 생활을 보내던 중, 내게도 꿈이라는 것이 생겼다. 그것은 '성우가 된다'는 꿈이었다.
아니, '꿈'이라는 거창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동경'이나 '흥미'정도로 가벼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순수하게 꿈 꾸게 되었고, 열망은 더더욱 강해져만 갔다.
네가 처음으로 '성우'라는 존재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 한 것은 유치원 때였다. 그 때는 아직 모리오카에 살던 시기였는데, 당시 TV도쿄 계열에서 '포켓몬스터'를 방송 해 주었었다. 이 애니메이션은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매 주 매 주 포켓몬스터가 방송 되는 날 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끌면서, 아이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피카츄 흉내내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 안에서 피카츄는, 기본적으로 '피카츄' 혹은 '피카'라는 대사만으로 의사표현을 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라고 할 지라도 흉내내기가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파고 들어 가 보면 그 짧고 제한된 대사만으로 갖가지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연기이므로 '닮은 흉내'와 '닮지 않은 흉내'간의 차가 확연히 드러나는 캐릭터이기도 했다. 간단하지만 잘 하는 지 못 하는 지가 확실히 드러나는... 쉽게 말해 '흉내 내 볼 가치가 있는' 캐릭터였던 것이다.
아이들도 자연스레 그런 것을 알아 차린 모양인지, 어느 사이엔가 '누가누가 더 진짜 피카츄 같은 지'를 겨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잘 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게 바로 나였다. 음... 정확하게 말하자면 '잘 한다'기 보다는 '즐겼다'고 하는 편이 옳다고 해야 할 까... 내가 좋아서 흉내를 내다보면 어쩌다 한 번씩 굉장히 닮은 소리가 나오곤 했다고 하는 게 정확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주변 친구들은 '잘 한다'고 칭찬을 해 주었고, 그런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나 역시도 은근히 의식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피카츄와 비슷하다'는 칭찬을 들은 날에 대해서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공원에서 놀다가 그냥 아무 생각없이 '피카츄'라고 흉내를 내 봤는데, 그것을 들은 친구가 "사야쨩, 엄청 비슷했어!!! 사야쨩, 나중에 피카츄가 되어도 되겠어!!" 라고 말을 해 주었던 것이다.
친구의 그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 말로 인하여 나는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 '새로운 사실'은 총 3가지...
첫째로 내가 흉내 낸 피카츄가 꽤나 비슷했다는 점을 '자각'하게 된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단순히 내가 좋아서 비슷하건 아니건간에 그냥 하던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친구의 그 말 한 마디로 인해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점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고, 거기서부터 나 자신의 흉내에 대해 '비슷하다' '아니다'라고 평가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물론, 부모님이나 유치원 선생님이 칭찬 해 주신 적은 있었지만, 솔직히 그렇게 기쁘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뭐랄까, 어린 나이였지만 그 칭찬에 '본심'이 담겨있지 않고, 겉으로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에게 '진심이 담긴' 칭찬을 받고 나서는 난생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란 게 이렇게 기쁜 것이구나'라고 새삼 느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피카츄가 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TV안의 세계와 TV 밖의 세계가 다른 세계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기에, '피카츄가 되어도 되겠다'는 친구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TV속의 인물이 된다'는 발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친구의 말을 계기로 '아, 정말로 피카츄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포켓 몬스터'의 주인공인 사토시 (※ 한국판 : 지우)는 '포켓몬 마스터가 된다'는 꿈을 갖고 있는 아이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건 '포켓몬 마스터가 되겠어!'라고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를 걸며 다짐을 한다.
친구의 칭찬을 들은 나는, 사토시처럼 꿈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 해 '피카츄가 되겠어!'라는 꿈이 생긴 것이다.
물론, 진짜 피카츄가 될 수는 없는 법, 내가 꿈 꾸게 된 '피카츄가 되는 방법'은 바로 '피카츄의 목소리를 연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서는 어머니에게 "엄마, 피카츄 목소리 하는 사람을 뭐라고 해?"라고 물었다. 피카츄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뭐라고' 하는 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우'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성우가 되고 싶다'는 나의 꿈 역시, 그 날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모리오카에 살던 때의, 자유분방한 나카야 사야카의 꿈이기도 하였지만, 치바로 이사를 온 뒤로, 방안에 틀어박혀버린, 매사에 의욕이 없었던 또 한 사람의 나카야 사야카의 꿈이기도 했다. 아니, 치바로 이사 온 뒤, 주변 생활이 180도 변한 뒤, '성우가 되겠다'는 꿈은 더더욱 강해져만 갔다.
1-3. 성우를 꿈꾸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치바로 이사 간 뒤로부터 '성우가 되겠다'는 꿈은 점점 더 강해져 갔다.
치바에서 집안에 틀어박혀 애니메이션만 보던 시기, 브라운관 안의 세계는 한층 더 빛나보였다. 모리오카에서 살던 시절에 보았던 그 세계보다도 훨씬 더...
치바로 옮긴 뒤 부터, 나를 둘러 싼 세계, 다시 말해 애니메이션 바깥쪽의 현실세계는 어둡고, 우울한 세계였다. 그렇기때문에 더더욱 브라운관 안의 세계가 밝고, 빛나 보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희망이 가득한 애니메이션의 세계... 나는 그 세계에 동경을 품게 된 것이다.
지금 되돌이켜 생각 해 보면 그런 '희망이 가득한' 애니메이션이 방영되었던 것 또한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시대 배경에서 비롯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000년 전후로 일본 경제가 바닥을 치고, 장기 불황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잔뜩 어두워 져 있었던 때이기에 그에 대한 반동으로 가상의 세계에서 위안을 받기 위하여 밝고 희망이 가득 한 작품들이 나왔던 것이다.
물론 사회의 분위기 때문만은 아닐 지 모른다. 나처럼 현실 세계에서 희망이나 빛을 찾아내지 못하는, 꿈도 희망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늘어났다는 점 역시 '희망이 가득한 애니메이션'이 많아 진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일을 하느라 바빠졌기에,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고독한 아이'들이 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고독감'을 치유하기 위하여, 위안을 얻기 위하여 TV에 탐닉하거나 게임에 빠져드는 아이들이 많이 늘어났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그런 '고독한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들이 많이 만들어 지기도 했고 말이다.
나 역시도 그런 '고독한 아이'중 한 명이었다. 그렇기에 점점 더 '꿈과 희망이 있는'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는 이런 시대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애니메이션 산업 자체가 확대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시장은 점점 확대되었고, 걸작이라고 부를만한 작품들도 많이 제작되었던 시기였다.
그렇게 다이내믹하게 성장 해 가는 애니메이션 업계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당시의 어린아이들은 (물론 나를 포함해서)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 업계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애니메이션 중 하나는 NHK에서 방영하던 '카드캡터 사쿠라 (※ 한국 방영명 : 카드캡터 체리)'였다. 이 작품은 1998년부터 2000년에 걸쳐 방영이 된 애니메이션으로, 가족이 산산조각나고, 정든 모리오카를 떠나 낯선 치바로 이사 하여 심신이 지쳐있던 나는 금세 이 작품에 빠져들었다.
'카드캡터 사쿠라'의 주인공, 사쿠라는 당시의 나와 같은 초등학생이었다. 그리고, 사쿠라가 사는 세계는 내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처럼 이런저런 문제점들이 산재 해 있는 세계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쿠라는 그 문제점들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 해 나간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사쿠라는 가족, 친구, '신비한 세계의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문제점을 해결 해 나갔다. 그 어떤 시련이 몰아닥쳐도 사쿠라는 꿈과 희망을 놓지 않았다.
힘들었던 나는 이 애니메이션에서 정말이지 많은 위안을 얻었다. 용기를 얻고, 살아 갈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카드캡터 사쿠라'가 점점 더 좋아지게 되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동경'과는 약간 다른 감정이었다. 나는 '카드캡터 사쿠라'의 세계속에서 살고싶다 (=카드캡터 사쿠라에 출연하는 성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현실에서 꿈과 희망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하여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부터가 '현실에서 꿈과 희망을 얻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나 자신이 현실에서 꿈과 희망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나처럼 현실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애니메이션이 나를 구원 해 주었듯이, 나 역시도 애니메이션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돕고싶어.'
'성우'라는 꿈에 대한 열망은 점점 더 강해져만 갔다.
1-4. 꿈과 현실의 격차.
비록 실생활에서는 우울하고 의욕이 없으며, 게으르기까지 한 나였지만, '애니메이션' 만은 필사적으로 챙겨보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애니메이션'을 보면 볼 수록 '성우'가 되고싶다는 꿈은 부풀어만 갔다.
그리고 중학생이 된 이후, 그런 경향은 점점 더 심해졌다. 뭐라고 할까... 내가 꿈꾸는 세상과 현실간의 괴리가 점점 더 커 져 버린 것이다.
현실세계의 이야기를 해 보자면, 우선 내가 가게 된 중학교가 나와 맞지 않았던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 학교는 소위 말하는 '학급 붕괴 (※ 학교를 소재/배경으로 다룬 일본 드라마나 만화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사회 현상으로, 교사들의 권위가 사라 져, 학생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되는 현상. GTO 등에 잘 표현 되어 있다.)'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일부 학생들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학교에 안 나오고, 공부도 하지 않는 등 정리가 되지 않는 학교였다. 매일 3교시 이후에나 학교에 나오는 아이에 급식만 먹고 바로 돌아 가 버리는 아이, 학교에 와서는 하루 종일 양호실에 틀어박혀 있는 아이에 수업시간임에도 개의치 않고 시끄럽게 떠드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나 역시 그런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물론 불량한 행동을 하거나 다른 아이들에게 폐를 끼칠만한 행위는 하지 않았지만 학교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특히나 수업 자체가 싫었다. 아무리 해도 공부를 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았기에 아무 의미 없이 의자에 앉아만 있기가 고역이었다. 선생님이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기에 항상 노트에 낙서나 끄적이고 있었다. 때때로 낙서하는 것에 대해 선생님이 한 소리를 하면 별 수 없이 낙서를 그만두고 딴 생각이나 하며 멍하니 지냈었다. 그 덕분인지 '멍하니 있는 것'은 내 특기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멍하니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를 느낀 뒤부터는 학교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가 일터에 나간 뒤에는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홀로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거기에도 질리면 아무 것도 안 하고 '집에서조차' 멍하니 있곤 했다.
한동안 그런 나날을 보낸 뒤, 그런 생활에도 질리기시작했다. 그 결과, 내가 생각 해 낸 것이 '애니메이션 이외의 취미를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취미조차도 '애니메이션'이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 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취미, 그것은 바로 '코스튬 플레이', 줄여서 '코스프레'라고 하는 취미였다.
'코스프레'라는 것은 애니메이션 등의 캐릭터로 변장을 하고, 그 캐릭터의 감정 등을 추측하며 노는 놀이의 일종이다. 어릴 적에 자주 했던 'XX놀이' (※ 엄마놀이, 가족놀이, 병원놀이 등)의 연장선인 동시에, 그보다는 조금 더 본격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애당초 '애니메이션 세계의 주민이 되고 싶'었던 내게는 너무나도 딱 맞는 놀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의욕 없는' 나였기에, 코스프레에 그다지 깊이 빠지지 못했던 일면도 있었다. 애초에 '코스프레'라 하는 것은 취미 중에서도 꽤나 고도의 취미로서, 이런 저런 규칙들이 있었고, 지켜야만 하는 것들이 많은 '귀찮은' 취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의상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돈이 적지 않게 드는 취미라는 점도 쉽사리 빠져들지 못 한 이유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렇게 깊숙히 빠져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핸드폰 사이트에서 알게 된 한 살 위 언니와 콤비를 결성하여, 자주 인기 만화 '블리치'의 코스프레를 하곤 했다. 이 콤비로 작은 이벤트 등지에 나간 적도 있었다.
한 편으로는 점점 성우에 대한 열망이 강해 진 시기이기도 했다. 뭐라고 할까, '성우'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어느 사이엔가 이런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빠져 나갈 한 줄기 희망으로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 단계에서는 더 이상 '꿈'이나 '동경'이 아니라 '목표'로서 내 안에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중대 결심을 하고, 어머니에게 말을 했다.
"엄마... 나, 성우 양성소 (※ 성우 학원) 다니고 싶어요."
부모님이 이혼 한 뒤, 우리 가족은 어머니가 아르바이트로 벌어 오는 돈 만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빈말로도 '유복하다'고는 할 수 없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생활비 이외에 다른 부분에 지출 할 돈은 없는 상황이었다고나 할까.
그렇기에 내가 '성우 양성소'에 다니게 되면 가계에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어린 나조차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내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내게 있어 '성우'라는 꿈은 그 어둡고 힘든 현실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성우 양성소에 가는 수 밖에 없다'고... 중 2였던 내 머리로는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정보를 얻는 수단은 휴대폰으로 검색을 해 보는 것 뿐이었다. (집에 PC조차 없었다). 그렇게 찾아 본 결과, 프로 성우 중에 양성소를 나온 성우들이 많았기 때문에, 양성소에 대한 나의 환상이 커진 것도 있을 것이며, 검색 해 본 결과, '성우 양성소를 다닐 거면 되도록 빨리 다니기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조언을 보고나서 더더욱 조급해 져 버렸다. (고작 중 2였음에도!!) '성우가 되기 위해서는 양성소에 다니는 수 밖에 없다'고, '다닌다면 하루라도 빨리 다녀야 한다'고 멋대로 상상 해 버렸던 것이다. 현실 세계의 중압감에 짓눌려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라고 말 해도 좋을 지 모르겠다. 어머니에게 있어 큰 부담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성우 양성소에 다니고 싶다는 무리한 부탁을 하게 된 데에는 그런 절박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뭐, 어차피 밑져봐야 본전인데'라는 체념도 그 이유였다. 우리 집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것 정도야 나도 잘 알고 있었고, 또 나 자신도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기에 '어차피 안 될거야'라고 반쯤 포기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안 된다고 하면 별 수 없지'
지금까지 현실 세계에서 수 없이 상처를 받아 왔던 나는 이미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미리 예방선을 그어 놓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대답은 나의 그런 부정적인 예감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알았어"라며 내 요청을 들어 주신 것이었다.
1-5. 양성소에 가다.
어머니에게서 그 대답을 들었을 때, 참으로 복잡미묘한 기분이었다.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가장 큰 것은 물론 기쁨. 꿈을 향한 길이 열렸다는 기쁨이었다.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감정 역시 강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어머니에게 큰 부담을 지워드렸다는 미안함,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압박감 역시 무시 할 수 없었다. 그런 압박감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성격이었다면 그것이 플러스가 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항상 매사에 부정적이고 의욕이 없는 성격이었기에 그 순간이 마치 억겁의 시간만큼이나 길었던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매사에 부정적이고 의욕이 없는 성격' 자체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양성소에 다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겁을 집어먹는 내가 정말로 성우가 될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이 너무나도 걱정이 되었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품은 채, 나는 전차로 1시간이나 떨어진 도쿄 도요시마구의 성우 양성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곳은 굳이 말하자면 '중소' 양성소이긴 했지만, 프로 성우가 된 선배를 몇 명이나 배출 해 낸 역사와 전통이 있는 양성소였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다른 곳에 비해 수업료가 싼' 그 곳 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가급적 어머니에게 드리는 부담을 줄이고 싶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실제로 성우 업계에서 활약하시는 50대 남성 성우분이셨다. 수업은 1달에 3번, 한 번에 2시간씩이었고, 학생들은 한 반에 10명 정도. 의외로 학생들의 나이대가 위였다. 중 2이였던 내가 가장 어렸고, 30대인 분도 계셨다. 가장 많은 것은 20대층으로,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성인들이었다.
수업시간에는 선생님의 방침에 따라 '기초를 충실히' 다졌다. 발성 연습, 혀를 풀어주는 연습 뿐 아니라 '성우이기 이전에 사회인'이기에 익혀야 하는 매너와 룰 등 비교적 단조로운 수업을 담담하게 이어갔다.
듣기에는 일부 양성소에서는 '재미'를 중시하여 기초도 다지지 않은 상황에서 연기 연습을 들어가는 곳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오히려 프로가 되기 힘들다는 것이 선생님의 지론이었다. 프로라고 하는 것은 기본이 다져 져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성우의 세계이기에 그런 면 부터 확실하게 쌓아 가기 위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기초를 닦는 것이 선생님의 교육 방침이었던 것이다.
겨우 중 2였던 자는 다른 양성소에서 어떤 것을 배우는 지 몰랐기에 '아, 그런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연습을 계속 해 나갔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프로 성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배운 것에 집중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반년 정도를 다닌 뒤에야 겨우 '성우라는 것이 어떤 직업'인지에 대해 어렴풋한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다시 한 번 큰 변화가 내게 들이닥치게 되었다.
뭐, 큰 변화라고 해도 이미 예전에 예상은 했었던 일이지만...
어느 날, 어머니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야카, 미안한데 이 이상은 양성소에 보내주기 힘들 것 같구나."
어머니는 그 이상 길에 말을 이어가지 않았고, 나 역시도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이유가 너무나도 명확하고 간단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반년 정도를 '무리해서' 보내 주었던 것이다. 우리 집 형편에서 성우 양성소 교습비를 낼 돈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무리야'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 무엇인가를 사 달라고, 혹은 해 달라고 조른 적이 없는 (다르게 말하자면 뭐든 쉽게 포기하는) 내가 어머니에게 한 부탁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성우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없는 살림에도 무리해서 나를 양성소에 보내 주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식의 꿈을 돈 때문에 부수어 버릴 수는 없다'고 하는 어머니의 자존심이었었을지도 모른다. 학교에도 가지 않는 나에 대한 어머니의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무리야'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수업료를 지불하다 보니, 자존심을 세우거나 할 수 없는... 진짜 '무리'인 상황이 닥쳐왔기에 별 수 없이 내게 그런 말을 하셨던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에, 충격을 받을 수 조차 없었다. 물론 슬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슬픔을 표현하거나, 그것으로 어머니를 원망하거나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어머니가 나에게 얼마나 미안해 하고 있는 지가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와 닿았다. 어머니에게 부담을 주었던 것 이상으로 어머니의 자존심을 짓밟아 버린 것 같아서, 우리 어머니가 '어머니로서' 딸에게 가장 하고싶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만 같아서 너무나도 미안했다.
그렇게 반년가량 다녔던 성우 양성소를 도중에 관두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금 나의 나태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학교에 가는 날 보다 안 가는 날이 더 많았고, 학교에 가더라도 수업을 제대로 들은 날이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삶의 낙이라고 해 봤자, 집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나, 가끔씩 하는 코스프레 정도였다.
물론 그렇게 나태하게 지내면서 어머니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나 자신의 성격이나 생활을 바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인생이요 꿈이라고 생각했던 성우에 대한 동경마저도 옅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이 싫어지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애니메이션 안의 세계에서 살고 싶다' (=성우가 되고 싶다)는 꿈이 점점 희박 해 져 갔었던 것이다.
1-6. 내 운명을 바꾼 한 마디 말.
시간이 흘러, 겨울이 찾아왔다.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오랫만에 학교에 갔던 나이었다. 하도 학교에 나가지 않았기에, 친구들과는 언제나 '오랫만에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 날도 역시 친구 중 한 명 (친구가 많지는 않았지만)을 만나, 우리 나이또래 여자아이들 답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친구는 "사야카, 왜 학교에 안 나와?"라고 물었고, 나는 필사적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이야기가 방향을 틀어, 최근 학교에 나오지 않는 다른 친구 이야기로 발전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랬고, 학교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 그렇게 드문 케이스도 아니었기에 별로 흥미를 갖지 않았지만, 신이나서 말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뭐라 하는 지 보자'라는 마음으로 그냥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내 운명을 바꿀 한 마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말이지, 최근 앗쨩 (같은 반 친구의 별명이다)이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가더라고."
여기서 말하는 '앗쨩'이라 함은, 이야기를 하는 친구와 나의 공통된 친구의 별명이다. 내가 그나마 학교를 나왔던 1학년 때에는 자주 함께 집으로 돌아 가고는 했었다.
"...음, 왜 바로 집에 돌아가는데?"
"아, 앗쨩이 말이지... 아이돌 그룹에 들어갔다더라고."
"에?!?!?!?! 정말?!"
솔직히 친구에 말에 흥미가 없어 건성으로 듣고 있던 나는, 그 얘기를 듣고는 진심으로 놀랐다. '앗쨩'은 반에서도 별로 튀지 않는 아이로, 솔직히 말해 아이돌 같은 걸 하리라고는 상상도 안 되는 아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아키바 48인가 뭔가 하는 그룹에 들어갔다던데?"
...그렇다. 내 반 친구 '앗쨩'이 들어 간 그룹이 바로 AKB48, 그리고 그 '앗쨩'이 바로 마에다 아츠코였던 것이다.
1-7. AKB48을 알게되다.
그것이 바로 내가 AKB48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순간이었다. 그 날 이전까지 '아이돌'이라는 존재는 TV 음악 방송에 나오는 존재일 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부류의 존재였다. 물론 콘서트를 간 적도 없을 뿐더러 CD를 산 적 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아이돌이 되고 싶어'라고 동경하거나 꿈 꾸어 본 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반 친구였던 마에다 아츠코가 그런 '아이돌'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와는 관계 없는 '먼 곳'의 존재였던 아이돌이 단박에 너무나도 가깝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흥미깊었던 것은 '그토록 얌전하던' 앗쨩이 '아이돌 그룹' 멤버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내가 아는 앗쨩은 귀엽기는 해도, 나 못지않게 내성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기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앗쨩이 그렇게 나와 비슷한 성격이었기에, 친근감이 느껴졌고, 사이도 좋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앗쨩이 아이돌이 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점점 더 AKB48이라는 아이돌 그룹이 어떤 그룹인 지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 간 나는 휴대폰을 이용해 'AKB48'을 검색 해 보았다. 그리고 검색 결과 AKB48의 데뷔싱글 '桜の花びらたち' 쟈켁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작은 휴대폰 화면에 집중 해 보니, 사진 가운데 부근에 분명 앗쨩이 있었다. 분명 지금까지 학교에서 봐 오던 앗쨩이 거기에 있었는데.. 내가 알던 앗쨩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알던 '얌전하고' '내성적인' 앗쨩은 어디 갔는 지 없고, AKB48이라는 아이돌 그룹에 들어 간, '반짝 반짝 빛이 나고' '귀여운' 아이돌 '앗쨩'이 그 사진 한복판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사진에 홀려버린 나는 AKB48이라는 그룹에 대해 점점 더 흥미가 생겼다. 검색에 검색을 거듭하던 중, '아키모토 야스시'라는 작사가가 종합 프로듀서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 돈 키호테 아키하바라점 8층에 있는 전용 극장에서 공연을 한다는 사실, 기본적으로 '매일' 공연을 하는 아이돌이라는 사실 등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잊혀지지 않는 한 마디, 'AKB48은 꿈의 쇼케이스 같은 그룹입니다'라는 말이 (※ 아키모토 야스시의 인터뷰 내용) 내 뇌리에 박혔다.
아키모토라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AKB48이라는 그룹은 '각자 여러 꿈을 가진 멤버들이 모여 있는 그룹'으로, '그룹 내에서 자기 자신을 갈고 닦아 성장 해 나가는 장소' 라고 한다. 아이돌이 되고 싶은 사람들만 들어 갈 수 있는 그룹도, AKB48로서 성공하고픈 사람만이 들어 갈 수 있는 그룹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돌'이 아닌 '자기 자신의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의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AKB48은 '꿈을 이루기 위한' 등용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멤버들이 '아이돌'이 아닌 배우, 가수, 탤런트 등 자기만의 꿈을 갖고 있었다. 앗쨩 역시 '배우가된다'는 꿈을 갖고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배우가 되기 위하여 AKB48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AKB48이라는 그룹에 들어가면, 성우의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같은 반 친구였던 앗쨩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AKB48에 소속되어 있었던 점도, 나의 그런 생각을 뒷받침 해 주는 근거였지만, 나 스스로도 '아이돌' 활동을 하면서 갈고 닦아, 최종적으로는 '성우'라는 꿈을 이룬다는 것이 너무나도 '말이 된다'고 생각 한 것이었다.
성우라 하는 직업은, 단순히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목소리를 연기하는 것 이외에도 CD를 내거나, 콘서트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라비아 활동을 하는 등, 상당부분 '아이돌'과 겹치는 활동을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성우가 활동하는 업계 역시, 아이돌이나 탤런트 등과 다름 없는 '예능계'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돌 활동을 하면서 취득한 것들을 활용하면, 조금 더 쉽게 성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강하게 확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었다.
AKB48의 멤버가 된다면, 모든 레슨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인터넷에서 '멤버가 되면 레슨이 무료'라는 정보를 알게 되었을 때, '이거, 나한테 딱 맞는 그룹인데!'라고 생각했다. 이미 한 번, '돈이 없어서' 성우의 길을 포기했었던 내게 '레슨료가 무료'라는 것은 거부 할 수 없는 매력이었던 것이다. '돈이 없어'도 레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머니에게 부담을 드리지 않고 내 꿈, 성우를 향 해 걸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친구인 앗쨩이 멤버였던 점, 최종 목표가 아이돌이 아니라 '꿈의 쇼케이스' (다시 말해, 다른 꿈을 갖고 아이돌 활동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레슨료가 무료라는 점... 전부 나에게 너무나도 딱 맞는 환경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 순간 'AKB48의 오디션을 받겠어'라고 다짐했다. 결정을 내리는 데에 한 점 망설임도 없었다. 아니, 망설일 이유 자체가 없었다. AKB48이라는 그룹은 '나에게 딱 맞는' 그룹, 말 그대로 나의 '구원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구원의 길이 눈에 보이는데 걸어가지 않을 사람은 없지 않은가. 당시의 나에게 AKB48이외의 다른 출구가 없었던 것이다.
1-8. 오디션
그렇게 오디션을 볼 결심을 하자마자 바로 응모원서를 보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합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있었다.
이유야 여러가지 있겠지만, 우선 매사에 쉽게 포기하는 버릇이 있었기에 '내가 붙을 리 없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있고, 나의 '매사에 의욕이 없고 부정적인' 성격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오디션을 봐야 한다는 점이 점점 무서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일부러 '의식적으로' 오디션에 대해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랬더니 그게 또 역효과를 낳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디션을 받아야 한다는 점 자체를 깜빡 깜빡 잊어버리게 된 것이었다. 덕분 3개월 뒤, 서류심사 합격 통지가 왔을 때에 '이거 대체 뭐야?'라고 생각했었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기껏 2차심사에 나가서도 실수연발이었다. 그리고 그 실수 중에는 '일반적인 오디션 참가자'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치명적'인 것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오디션에 가면서 검은 옷을 입고 갔던 점을 들 수 있다. 나야 그저 가장 좋아하는 옷을 입고 갔었던 것이지만, 오디션 회장에 가서 보니, 100명이 넘어가는 참가자 중 검은 옷을 입은 건 나 혼자였던 것이다. 이후에 자세히 설명 할 기회가 있겠지만,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아이돌은 밝고 깔끔한 이미지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오디션을 받으면서 검은 옷을 입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나는 '아이돌' 세계는 물론 '오디션'이라는 게 어떤 세계인 지도 모른 채, 그저 휴대폰으로 찾은 정보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었기에 그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또, 안경을 쓰고 갔었던 것도 남들이라면 하지 않을 일이었다. 지금이야 오히려 소위 말하는 '안경 소녀' 이미지로 밀어붙이는 아이돌이나 연예인들도 있지만, 당시에는 안경을 쓰는 사람이라도 가급적 렌즈를 끼고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기였다. 당시에 안경을 끼고 오디션을 받는 경우는 대개 '안경을 쓴 것을 캐릭터로 삼는 사람'이거나,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였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두 가지 이유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고, 단순히 눈이 나쁘니까 쓰고 갔던 것 뿐이었다. 연예계 사정에 밝지 못 해 '오디션에 참가 할 때엔 안경을 쓰지 않는다'는 상식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심사위원분께서 "특별히 안경을 쓰고 온 이유가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셨을 때, '대체 왜 저런 걸 묻는 거지?'라고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눈이 나빠서요."라고 대답을 했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그 심사위원분께서는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하지만,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는 점이 의외로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었다고 한다. '오디션'에 오면서 안경을 쓰고 왔다는 점이 신선하고, 특히 어린애가 '은테(※ 한국에서도 어린아이는 금테/은테 잘 안 쓰죠. 어지간히 어울리지 않으면 성실해보이고 촌스러워 보인다는 이미지랍니다. 또, 은테 쓰는 사람은 '오타쿠' 같다는 이미지도 있다고...)' 안경을 쓴 게 소박하다는 인상을 주었다고...
사실 그 날 내가 썼던 것은 '은테'가 아니라 옅은 핑크색 테였다. 뭐랄까, 굉장히 여성스러운 테랄까... 그게 빛의 반사로 인해 은색으로 보였다는 얘기다. 행운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마지막에 치뤄진 가창 심사 때에도 나의 실수는 이어졌다. 나를 제외한 다른 응시자들은 대부분 아이돌송 (특히 당시에는 모닝구 무스메。를 비롯해서 하로프로젝트 곡을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을 불러 자신의 '아이돌 스러움'을 어필하거나, MISIA 처럼 난이도가 높은 곡을 선곡하여 자신의 가창력을 뽐내거나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나는 마치 친구들과 노래방에 놀러오기라도 한 양, 좋아하는 곡을 선곡했던 것이었다. (참고로 내가 부른 노래는, 내가 좋아하던 싱어송 라이터인 오쿠 하나코씨의 魔法の人였다.)
그랬기에 나는 '아, 이 오디션 끝났다'라고 생각하고 잇었다. 뭐, 어차피 오디션 시작 전부터 '어차피 안 될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끝날 때 즈음에는 '확실히 떨어졌을 것'이라는 확신조차 있었던 것이다.
오디션에 참가 한 아이들을 둘러 보니 내가 가장 못나보였고, 마음가짐에 있어서도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에 '이래선 붙을 리가 없지'라고 실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낫다고 자신 할 수 잇는 것도 한 가지 있었다. 바로 '꿈의 쇼 케이스'를 표방하는 AKB48 에 들어가기 위해 '아이돌' 이 아닌 '성우'라는 다른 꿈을 갖고 참가 한 게 나 밖에 없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심사때 '꿈이 있나요?'라는 질문이 나왔을 때, 열의를 갖고 대답을 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합격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떨어지더라도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미리 '포기'하고 있었다. 나쁜 버릇이 다시 나와 버린 것이다. 나는 '이번 오디션이 끝나면 성우에 대한 꿈도 접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합격자 발표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나 자신의 다짐을 마음 속에 새기고 있었다. 어느 정도 '성우'에 대한 꿈도 접기 시작 했던 것이다.
1-9. 합격자 발표
그랬었기에 합격자 발표 때, 내 이름이 불렸을 때에는 '지금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실감 할 수 없었다. 그것도 발표하시는 분께서 처음에 '나카타니 (※ 中谷 보통 谷은 '타니'로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라고 읽는 경우도 많긴 하지만, '타니'가 더 보편적...)'라고 읽었기에 나는 대답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발표하시는 분은 "나카타니상, 나카타니상 안 계세요?" 그런데도 '나카타니'라는 아이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들고는 "혹시 나카'타니'가 아니라 나카'야'를 찾으시는 거라면 제 성이 나카야이긴 한데요..."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나는 AKB48 제 3기 오디션 합격자가 된 것이었다.
당시에 어떤 느낌이었는 지를 설명 해 보자면... '허무하다'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단지 오디션 원서를 넣고, 서류심사에 통과해서 2차 심사에 나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방향성이 달랐지만) 하라는 것을 했을 뿐이었는데... 멤버가 된 것이었으니까.
음... 그것 외에 어떤 감정이었는 지 떠올려 보면... 물론 '기쁨'은 말 할 것도 없고 '믿을 수 없'었다는 감정 역시 강했다. 합격했다는 실감보다는 '이거 혹시 몰래카메라 같은 것 아냐?'라고 의심부터 들었던 것이다.
나중에 '붙었다'는 것을 실감 한 뒤에는 '그런데 나같은 애 합격시켜도 되는건가'라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AKB48이라는 그룹이 '제대로 된 그룹'인지가 의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불안은 금세 해소되었다. 지금껏 맛 본 적도, 상상 해 본 적도 없을만큼 가혹한 시련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 들이 닥쳤던 것이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그토록 힘든 직업이라는 것을 내 몸으로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갓 오디션에 붙은 나는 그런 미래가 닥쳐 올 것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제 1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