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물/출판물-AKB
AKB 히스토리 - 5장.
hemod
2013. 6. 17. 19:14
5-1. '아키바 욘쥬하치 (48의 일본어발음)'라고 불렸던 2007년 홍백전
홍백가합전에 출장한다... 그 소식은 이내 레슨스튜디오에도 젼해졌다.
멤버들이 연습하고 있는 스튜디오에 스탭이 뛰어들어오더니 이렇게 말 한 것이다. "여러분, 올 해 홍백가합전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흥분을 억누르고 차분히 곱씹듯이 이야기를 하는 스탭. 하지만 멤버들은 흥분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몇 명이나 오열하듯 기뻐하는 멤버들도 있었다. 미네기시 미나미♡는 그 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처음에 '홍백가합전에 나갈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설마...'라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제가 '어디어디에 나오니까 꼭 봐 주세요'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모두들 봐 줄만한 방송에 나가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그것도 홍백이라니... 언제나 연말이 되면 가족들과 당연스럽게 보는 방송이었어요. 한번에 제 꿈이 이루어 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했었어요."
한 편, 일반 미디어에서는 AKB48, 나카가와 쇼코, 레아 디종을 한 묶음으로 하여 '오타쿠 문화를 대표하여 출장 한 것'으로 다루고 있었다.
홍백 가합전 출전과 더불어 AKB48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 햇던 관심을 받게 된다. 연일 이어지는 보도진과의 기자회견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일반 미디어의 기자들은 카메라 앞에서 긴장하고 있는 멤버들에게 '아키바 욘쥬하치 여러분은...', '역시 아키하바라의 오타쿠들은 대단하지요?' 등등 실례되는 질문들을 연발했다.
일반인들이 보는 AKB48의 이미지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아키하바라의 오타쿠를 대상으로 기획 된 아이돌'...
그런 짓궂은 질문에도 묵묵히 성실하게 대답하는 멤버들을 보며 다카하시 미나미는 너무나도 분했다고 한다. "속으로 '아.. 이렇게 모두들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역시 그냥 '아키바'라는 말 한 마디로 정리가 되어 버리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저희가 힘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솔직히 '얕잡아보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예요. '저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모에라던가 오타쿠라는 말만으로 정리하고, 경시하고 있구나...'라고요. AKB48이, 우리의 소중한 극장이, 그리고 극장에 우리를 보러 와 주시는 팬분들이 모두 경시되는 것 같았어요. 그런 생각을 하니 너무도 분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어요. '언젠가 저 사람들이 우리를 제대로, 에이케이비 포티에잇이라고 부르게 해 주겠다'고 말이예요."
그리고, 결전의 날... 2007년 12월 31일이 왔다.
기다려 온 당일이 온 것이다. 멤버들은 각자 마음속에 이런저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도쿄. 시부야. 그리고 NHK홀...
이 날을 떠올리며 미네기시 미나미는 이렇게 말한다. "저희 순서가 다가오면서 점점 불안이 커졌어요. 그 때 멤버 중 누군가가 '아까 복도에서 우리 보고 학예회 하러 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어'라고 말을 꺼내는 거예요. 엄청 쇼크받았지요. 솔직히 저희가 그 무대에서 부를 '아이타캈타'는 분명 쉬운 안무이긴 했지만 말이죠... 하지만, 동시에 '어쩌면 그 사람이 솔직하게 말 해 준 것일지도 몰라. 모두들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을지도 몰라. 하긴 아직 인지도도 그렇게 높지 않은데 홍백 출장이라니... 심사위원들이나 다른 아티스트분들도 우리를 비웃으면서 보고 있을지도 모르지'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러다보니 점점 더 괴로워졌지요."
이런 멤버들의 마음과는 달리 시간은 점점 흘러 출연 직전이 되었다.
멤버들은 무대 뒤에서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모였다. 그리고, 다카하시 미나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번 홍백을 계기로 우리에 대해 처음 알게되는 분들도 계실거야. 그러니까... 우리, 힘 내자!"고.
미네기시 미나미가 말을 잇는다. "가슴속에 불안이 가득했는데, 모두들 원을 그리며 모이자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 순간 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난 건 초창기의 '손님이 없던 극장'이었어요. 그리고 생각을 바꾸었지요. '그래, 드디어 우리가 여기까지 왔구나.'"라고요.
AKB48에게 큰 의미를 가진 '아이타캈타'의 인트로가가 NHK홀을 가득메우며 울려퍼졌다. 빨간색, 노란색, 녹색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소녀들이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환하게 웃으면서 일본 전국민을 상대로 '아이타캈타'를 불렀다.
겨우 1분 35초간의 공연...
어떤 사람들은 '데뷔 한 지 겨우 2년만에 홍백에 출연한 건 엄청난 성공 아냐?'라고 이야기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내년에는 '아키바 문화 특집'이 아닌 우리의 힘 만으로 이 곳에 올 거야. 그리고, 한 번 더 전 일본 국민들이 보고 있는 이 무대에서 노래 할 거야.' 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5-2. 연구생 제도의 탄생.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팀 B
상처로 가득했던 홍백이 끝나고 2008년이 밝았다.
AKB48으로서 맞이하는 세 번째 봄을 맞이하려는 2월 3일...
'연구생'에서 '사에키 미카 (※1)'가 팀 B로 승격되었다.
이 '연구생'이라는 것은 제 4기 이후 (1기 - 팀 A, 2기 - 팀 K, 3기 - 팀 B)의 오디션에서 합격한 소녀들이 제일 처음 소속되는 소속팀의 이름이었다.
처음으로 연구생 오디션이 열린 것은 팀 B가 첫 공연을 한 날로부터 1개월 뒤인 2007년 5월이었다. 여기서 합격한 소녀들은 '제 4기생'으로 불리우게 되었으며 (사에키 미카가 4기생), 제 2회 연구생 오디션 (2007년 9월에 열림)에서 합격한 소녀들은 통칭 '5기생'으로 불리었다.
이 4기생, 5기생들은 분명 AKB48의 멤버이긴 하지만 소속 팀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들은 팀 A, K, B의 공연에서 누군가가 공연을 쉬는 날에만 대타로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렇기에 솔직히 말하자면 '과연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없을까'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단지 선배들의 춤과 노래를 필사적으로 배우고, 연습 할 뿐...
대체 그런 상황에 처한 연구생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5기생인 미야자와 미호는 이렇게 말한다. "저희가 연구생으로 들어 갔을 때엔 딱 '히마와리구미'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어요. 그리고 저희 동기 (5기생) 중에서 레슨에 들어가도 된다고 허용 된 것은 저와 치카리나 (치카노 리나), 코하라 하루카쨩 뿐이었어요. 공연이 시작 된 뒤, 치카리나와 코하라 하루카쨩은 대타로 몇 번이나 공연을 나갔지요. 당시, 저는 다카하시 (미나미) 언니의 언더였는데... 공연에 나갈 기회가 전혀 오지 않았어요. 동기들은 공연을 하고 있는데 저는 무대에 오를 수 없다는 거... 굉장히 분한 경험이었어요. 엄청 초조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처음으로 무대에 서게 되었을 때, 너무 기뻤습니다. 아직도 그 날은 잊을 수가 없어요. 막이 오르고, 무대에 서는 순간, 관객분들께서 엄청난 성원을 보내주셨어요. 발 끝부터 머리 끝까지 닭살이 돋았지요. 그리고 '아... 무대란 게 이렇게 대단하구나... 오늘 이 기회를 잘 살리지 못하면 영영 이런 기회는 없을 지도 모르겠어'라고 생각하고, 춤 출때도, MC를 할 때에도 최선을 다 했어요."
마찬가지로 5기생인 니토 모에노는 이렇게 말한다. "동기인 먀오 (미야자키 미호)는 '히마와리구미' 연습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에게는 연락이 오지 않았지요. 그래서 '아... 어쩌면 합격이 취소 된 것은 아닐까... AKB48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노래도 못 하고 춤도 잘 못 추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겨우겨우 레슨에 합류하게 되었을 때에도 스탭분들에게 '넌 춤을 못 추니까 무대에 설 수 없을거야'라는 말도 들었기에 항상 주눅이 들어 있었어요."
연구생들간의 경쟁,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 조금 더 '위'를 향해 전진하는 연구생들. 그런 그녀들 가운데에서 드디어 '정식 팀으로 승격'한 멤버(사에키 미카)가 나왔다는 것은 그녀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한편, 그런 연구생들을 바라보는 선배들의 시선은 어땠을까.
팀 B, 카시와기 유키의 말을 들어보자. "4기생 오디션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면 솔직히 팀 B의 탄생으로 AKB48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저희 후배들이 들어온다는 거예요. 그 시점에서 저희가 공연하던 것은 팀 K의 '청춘 걸즈' 공연과 팀 A의 '아이타캈타'공연이었어요. 결국 저희의 오리지널 공연 하나도 없이 선배들의 것들을 물려받아 공연을 하던 시점이었기에 너무도 불안했어요. 생각 해 보세요. 저희 두 번째 공연 (아이타캈타)부터 저희에게도 언더가 생긴 거예요. 그리고 스탭분께서 저희에게 오셔서는 '어차피 팀 B 멤버들이 없어도 그 대역을 할만한 아이는 연구생 중에 얼마던지 있어'라고 말씀하셨었거든요... 그 말을 듣는순간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었어요."
그렇다. 선배인 팀 A와 팀 K는 히마와리구미 활동을 통해 차근차근 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아래로는 '꿈'을 쫓아 정식 팀으로의 승격을 위해 치고 올라오는 연구생들이 있었다.
그 사이에서 '막내' 취급을 받으며, 선배들이 이미 했던 공연을 물려받아 리바이벌 공연을 하고 있는 팀 B... 열심히 몸이 부숴져라 연습을 해도 결국 돌아오는 말은 '너희들을 대신 할 아이들은 얼마던지 있어'였다...
그런 팀 B 멤버들도 드디어 그 노력을 보상받는 날이 오게 된다.
'파자마 드라이브' 공연...
그것은 '자신들만을 위한 오리지널 세트리스트'였다. 그리고, 그 보상을 받기까지 그녀들은 극장 데뷔로부터 1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5-3. 눈물 범벅 무대 위에 울려퍼지는 '쇼니치 (初日)'
"처음으로 저희에게 오리지널 세트리스트가 생긴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너무나도 기뻤어요. 팀 A나 팀 K 선배들은 3개월마다 세트리스트를 바꾸어 가며 공연을 하고 계시는 것(※2)으로 알고 있었기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저희 세트리스트가 나오지 않아 불안해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와중에 손에 넣은 저희의 첫 공연인거예요. 얼마나 기뻤는 지 이해 되세요? 모두들 펑펑 울었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스탭 분들이 가녹음 된 새 노래들을 한 곡 한 곡 들려주시는데... 그 기분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라고 입을 연 것은 팀 B의 카시와기 유키였다.
새로운 노래가 가녹음 된 CD를 스탭들로부터 건네받은 멤버들은 극장에서, 전차에서, 집에 돌아가서도 자신들만의 새 노래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겨우겨우 손에 넣은 자신들의 오리지널 곡을 가슴에 품듯이 몇 번이고 질리지도 않고 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이게 다음 곡이야'라고 스탭분들이 다른 CD를 건네주었다. 본인들을 위한 두 번째 곡을 받은 멤버들... 당시의 일을 카시와기 유키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 그 날... 기억하고 있어요. 첫 곡을 받았을 때에는 모두들 집에 돌아가서 각자 노래를 들었지만, 두번째 곡은 어째서인지 모두 함께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극장에서 모두 함께 듣게 되었지요."
그 곡의 제목은 '쇼니치 (初日)'...
이후, 팀 B를 상징하는 곡이 될 명곡이, 극장 가득 울려퍼졌다.
'나는 서 있어요. 동경 해 왔던 무대 위에... (私は立ってる、憧れてたステージ)'
이런 가사로 시작되는 '쇼니치'는 지금껏 '무대에 서는 것'을 목표로 몸이 부수어져라 노력 해 온 그녀들의 결의를 노래로 표현 한 곡이었다.
그것은, '막내'취급을 받으며, 부상과 피로에 너덜너덜 해 지면서도 필사적으로 위를 향해 전진 해 온 그녀들에게 종합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가 보내 준 선물이었던 것이다.
카시와기가 말을 잇는다. "쇼니치가 담긴 CD를 들으면서 모두들 가사를 읽고 있었어요. 가사를 읽으면서 모두들 '이거... 우리 얘기 아니야?'라고 말 했지요. '나 혼자 제대로 춤 추지 못해서 집에 돌아가면서 울었어 (一人だけ踊れずに、帰り道に泣いた)'라는 가사는 하루곤 (나카가와 하루카)가 겪은 일이었고 말이지요... 모두들 '이거, 우리 얘기야!'라면서 동요했었어요."
이에 대해 와타나베 마유는 이렇게 말한다. "쇼니치라는 곡에는 당시 저희가 느끼고 있던 것... 이랄까요, 아니, 저희 팀 B 자체가 그대로 그려져 있었어요. 가사 중에 '부상 당해서 쉬었을 때, 분해서 울었던 날도 있어 (怪我をして休んだ時、悔しくで泣いた日もある)'라는 가사는 제 얘기였어요. 팀 B가 공연을 시작 한 지 이틀만에 부상을 당해서 꽤 오랜 기간 쉬어야만 했을 때 겪었던 일이었어요. 그래서... 그 노래의 그 부분을 부르고 있으려면 아직도 자연히 눈물이 나와요."
자신들의 오리지널 세트리스트를 손에 넣은 그녀들은 새로운 동기, '자기들만의 공연을 하기 위해' 더욱 더 필사적으로 레슨에 임했다.
그리고, 겨우 맞이한 3월 1일...
막이 오르고, 무대 위에 '언제나 하던 것으로 간다!!' 라는 우라노 카즈미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그 뒤를 이어 팀 B 전원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고. 냉정하게, 정중하게, 정확하게... 모두의 꿈이 이루어 질 수 있기를!! (いつも感謝。冷静に、丁寧に、正確に。みんなの夢が、叶えますように。)" "ABK! 팀 B!!"
그 뒤로 바로 이어지는 '쇼니치'. 극장 내부는 관객들의 함성으로 가득 차버렸다.
데뷔 당시부터 '팀 B는 팀 A, 팀 K에 비해서 전혀 고생도 안 했잖아'라던지 '막내들은 어차피 만년 극장공연 땜빵용이잖아'라는 소리를 들어왔던 팀 B가 비로소 처음으로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잠시 얘기를 바꾸어 보자. 팀 B의 '독립' 기념 공연을 3일 앞둔 날, AKB48는 AKB48명의로 8번째 작품에 해당되는 '벚꽃잎들 2008 (桜の花びらたち2008)'을 릴리즈한다. 인디즈 1st싱글을 리메이크 한, 추억의 곡이었다.
연말에 있었던 첫 홍백출장, 연구생들의 등장, 팀 B의 성장 등 다사다난 했던 2007년이 가고 2008년이 왔다. 2008년에 들어서자마자 AKB는 1월부터 첫 지상파 칸무리 방송, 'AKB1시 59분!'을 시작하게 된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2008년, AKB48이 '아키바의 선두'에 서게 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AKB48은 이 시기, 긴 정체기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들이 맞이 한 길은 얼핏 평탄한 길로 보였지만 그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던 것이다.
이 날로부터 237일동안, 그녀들의 이름이 적힌 신곡 CD는 발매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제 5장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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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佐伯美香. '미카치'라는 애칭으로 사랑받은 멤버로, 카시와기 유키와 함께 '데모데모노 나미다' 등 유닛곡을 부르기도 했다. 발목 관절염(棚障害)이 원인이 되어 09년 8월에 열린 부도칸 공연을 마지막으로 졸업.
※2 초기에는 거의 3개월 간격으로 세트리스트를 바꾸어 가며 공연을 하였으나, 멤버들이 점점 바빠짐에 따라 그 간격은 벌어지게 된다. 지금까지 가장 공연기간이 긴 공연은 팀 A의 '연예금지조례' 공연으로, 1년 7개월간 공연이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