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물/출판물-AKB
AKB 히스토리 - 7장.
hemod
2013. 6. 17. 19:22
7-1. 홍백전 낙선. 아키모토, 카사이, 그리고 멤버들의 결심이란...
2008년 연말.
AKB48의 멤버들, 그리고 관계자들은 모두들 작년에 이어 홍백전 출전을 기원하며 NHK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11월말에는 홍백전의 무대, NHK홀에서는 AKB48의 콘서트가 열린 바 있다. 당시, 인터뷰를 청해 온 미디어들에 대해 오오시마 마이는 이렇게 대답 한 적 있다. "NHK홀이라고 하면 역시 홍백전이지요. 오늘 이 곳으로 오면서 마지막으로 (홍백에 나갈 수 있도록) 기원하며 왔어요." 오오시마뿐이 아니었다. 모든 멤버들이 홍백을 기대하며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었다.
'만약 홍백에 나갈 수 있다면 신곡인 '오오고에 다이아몬드'를 부르고 싶어.' 작년, 전 일본국민들에게 '만나고 싶었어요 (아이타캈타)'라고 메세지를 전한 소녀들은 올 해는 전 국민들을 대상으로 '좋아 해요'라는 메세지를 '큰 소리로' 전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2008년 홍백전 출장자 발표'날이 왔다. 아쉽게도 그 리스트에 AKB48의 이름은 없었다. 멤버들은 물론이고 팬들의 꿈은 깨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키모토 사야카가 당시를 떠올리며 이야기한다. "솔직히 엄청 분했어요. 당시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나갈 수 있을거야'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저희 뿐 아니라 08년 홍백에는 아이돌 그룹 자체가 등장하지 못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가고 싶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 홍백 당일을 앞둔 어느 날, 아키모토 사야카는 '그 곳'에 갔었다고 한다.
"안절부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이 분함을 가슴 속 깊숙이 새겨두자... 이 섭섭함을 잊지말자는 의미에서 일부러 NHK홀에 갔었어요." 아키모토 사야카가 말을 이었다.
굳게 닫힌 NHK홀 정문 앞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한겨울의 찬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건물 벽면에 새겨진 'NHK'라는 글자가 뿌옇게 흐려진다. '내년, 반드시 돌아오겠어'... 그렇게 가슴 속에 굳게 결심했던 것이다.
그럼, 카사이 토모미는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던 것일까. "08년에 출장하지 못하면 '어차피 한 번 반짝하고 말았던 거 아냐?'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게 싫었어요. 팬 여러분들께서도 '홍백에 나가기를 진심으로 빌어요!'라고 응원 해 주셨기에 더욱 더 아쉬웠어요. 그것도... 홍백에 나갈 때를 대비해서 정말 맹렬히 연습했었거든요. 출연은 2~3분 하지만, 연습은 하루에 몇 시간이나 하는 나날이었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홍백에 나갈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즐거웠어요. 그래서 결국 나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뭔가 텅 빈 느낌이었어요." 카사이의 말이다.
그리고 홍백 당일 (12월 31일) 밤이 왔다.
카사이가 말을 잇는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홍백을 TV로 봤어요. 낙담하고 있으려니 엄마가 '홍백이라는 게 그리 쉽게 몇 번이나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작년에 나갔던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분명 엄마는 저를 위로해 주려고 말씀하신 거였겠지만.. 듣고나니 더 서러워 졌어요. 엄마가 '이상하네.. 어째서 AKB48이 출장하지 못한거니?'라고 말 해 주길 바랐어요. 저 자신이, 그리고 AKB48이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나도 분했어요. 조금 지나니 12시가 지나서 가족들끼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나누었는데... 갑자기 '아.. 작년에는 처음 이 인사를 나눈 것이 멤버들이었지... 대기실 안에서였지... 그 때 참 즐거웠는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 이렇게 집에 있어서는 안 되는데... 내년부터는 대기실에서 보낼 수 있도록 더욱 더 노력하자'라고 결심했지요. "
모두들 AKB48가 크게 도약하는 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2008년은 그렇게 '홍백전 낙선'으로 막을 내렸던 것이다.
7-2. 놀랄 일들이 차례차례 이어지는 AKB48의 2009년
해가 바뀌어 2009년이 왔다.
AKB48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한 해가 밝은 것이었다.
아이돌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AKB48는 올 해가 문제야. 올 해 치고 올라가지 못하면 끝이겠지'라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그런 이유로 든 것은 마에다 아츠코, 다카하시 미나미, 이타노 토모미를 비롯한 많은 인기멤버들이 그 해 18세(성인)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이돌 그룹의 주력이 되는 멤버들이 이 해가 지나면 더 이상 여고생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돌 세계에서는 '젊음'이라는 것 역시 큰 무기가 되기때문에 주력 멤버가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은 큰 약점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도 AKB48은 세일즈 포인트 중 하나를 '교복'으로 잡고 있었기에 그 약점을 더욱 더 커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2009년이라는 해는 AKB48에게 있어서는 승부를 걸어야 하는 해였던 것이다.
1월 18일, 2008년 1월에 처음 시작되어 09년부터는 연례 행사가 되어버린 'AKB48 리퀘스트아워 세트리스트 베스트 100'이 시작되었다.
이 이벤트는 AKB의 곡들 중 팬들의 투표를 거쳐 인기 상위 100곡을 결정하여, 4일에 걸쳐 발표하는 일종의 '축제'에 가까운 이벤트였다. 참고로 1회인 08년 이벤트의 1위곡은 '사쿠라노 하나비라다치'였다.
그리고, 모두들 2회째인 09년 이벤트에서는 당연히 '오오고에 다이아몬드'가 1위를 차지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벤트 마지막날인 4일째, 모두의 그런 예상을 멋지게 뒤집어 엎고 1위는 팀 B의 데뷔곡, '쇼니치'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 일에대해 팀 B의 캡틴인 카시와기 유키는 이렇게 말한다. "그 멤버 (오리지널 멤버)가 함께 부르는 '쇼니치'는 그 때가 마지막이었어요. 평소에는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모두들 둥글게 모이면 신디 (우라노 카즈미)가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고...'라고 말을 꺼내고, 나머지가 그 뒤를 이어서 언제나처럼 '냉정하게, 정중하게, 정확하게. 모두의 꿈이 이루어 지기를!'이라고 외치고 공연이 시작되는데요...그 날은 마이크에 들어가지 않을정도로 작게 이렇게 말을 하더라고요.'이 멤버로 이렇게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야. 모두들, 이 노래가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더욱 더 열심히 하자'고 말이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눈물이 나와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히라지마 나츠미도 이렇게 말한다. "모두들 감격해서 펑펑 울었어요. 팀 B가 항상 공연 시작할 때 하는 말이 바로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말고... 냉정하게, 냉정하게, 정중하게, 정확하게. 모두의 꿈이 이루어 지기를!'이라는 말인데... 사실 그건 팀 A가 먼저 쓰던 거였어요. 팀 A의 구호에 신디가 '모두의 꿈이 이루어 지기를!'을 붙인 것 뿐이었지요. 신디는 팀 B의 두번째 공연인 '아이타캈타'공연 연습이 시작되기 전에 이렇게 얘기했어요. '팀 B 멤버들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 MC도 재미는 있지만 잘못 들으면 같은 멤버를 공격하는 것 처럼 들리거든. 거기다가 다른 멤버가 실수를 해도 그걸 감싸주지도 않고... 전반적으로 같은 멤버에 대한 배려가 부족해. 모두들, 자기 자신 뿐이 아니라 다른 멤버들을 조금씩 더 배려하도록 하자. 우리 모두의 꿈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말이지'라고요. 그리고, 그런 마음을 항상 잊지 말자면서 팀 A가 쓰던 구호 뒤에 붙여서 저희 팀 B의 구호로 만든 것이었지요. 그 때가 생각나서 모두들 울었던 거지요. 얘기가 조금 새는데요... 신디는 그렇게 뭔가 말을 지어내는 것을 참 잘해요. 아까 말씀드렸던 구호건도 그렇고... 극장에서 3회 공연을 할 때, 2회차 공연을 '간식 공연 (오야츠 공연)'이라고 부르기 시작 한 것도 신디였어요."
'막내'라는 말을 들으며 노력 해 온 팀 B가 소중히 마음속에 간직 해 온 '쇼니치'가 1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팀 B멤버들에게 있어 문자 그대로 '모두의 꿈이 이루어 진'것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우라노의 구령이 울려퍼지고, 동시에 '쇼니치'의 인트로가 흘러나온다. 팀 B멤버 모두가 펑펑 울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리퀘스트아워 공연이 끝난 2월 21일에도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데뷔 당시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AKB48의 인기를 이끌어 오던 주역 중 한 명인 오오시마 마이가 '4월 25, 26일에 열리는 NHK홀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전 정식으로 AKB48을 졸업합니다.'라고 선언 한 것이었다.
수많은 연예계 활동을 통해 AKB48의 인지도를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해 온 오오시마 마이의 졸업 선언은 멤버들 뿐 아니라 팬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2월 27일에는 팀 A의 멤버이자, 팀 결성 당시부터 함께 해 온 오리지널 멤버, 카와사키 노조미도 졸업을 해 버린 것이었다. 작년 가을, 한 번에 오리지널 멤버가 5명이나 졸업 한 상황에서 또 다시 오리지널 멤버가 2명이나 졸업을 결정 한 것이었다. 극장 오픈부터 함께 해 온 초기멤버는 겨우 8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타노 토모미, 우라노 카즈미, 코지마 하루나, 사토 유카리, 다카하시 미나미, 히라지마 나츠미, 마에다 아츠코, 미네기시 미나미)
3월 4일에는 오오고에 다이아몬드의 뒤를 이어, 새로운 음반회사에서 내는 2번째 싱글, '10년 벚꽃 (쥬넨사쿠라)'가 발매되었다. '사쿠라노 하나비라다치'에 이어 2번째 '졸업 시즌의 벚꽃 노래'로서 만들어 진 이 쥬넨사쿠라의 PV에서는 멤버들이 '10년 뒤의 자신의 모습'을 연기하였다. 특히 오오시마 유우코가 임신했다는 설정 등, 일반적인 아이돌 PV의 상식을 깨는 이 PV는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4월 1일, AKB48에게는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후지 TV 프로듀스 아이돌, '아이돌링구!!!'와 AKB48가 기적적인 협연 (코라보레이션)을 하기도 하였다. AKB48와 아이돌링구!!의 멤버 중 8명씩을 골라 'AKB아이돌링구!!'라는 이름으로 CD를 발매 한 것이다. 이 협연 역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유닛으로 발매 한 싱글 '츄 시요제!'는 오리콘 등장 첫 주 위클리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9년 첫 3개월은 AKB48멤버들에게 있어 이런 놀라움으로 가득한 3개월이었다. 그리고, 결국 오오시마 마이가 졸업하는 날이 왔다.
4월 26일, 콘서트의 타이틀은 '신(神)공연 예정. *제반 사정에 의해 신(神)공연이 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해 해 주세요'였다. AKB48의 인디즈 싱글부터 최신곡까지 차례차례 둘러보는 말 그대로 'AKB48의 데뷰 이래 3년의 역사를 함축한 총 결산' 적인 콘서트였다.
그리고 이 콘서트에서는 6월 24일에 발매 예정인 신곡, '나미다 서프라이즈'의 피로연을 가졌다. 이 '나미다 서프라이즈'의 피로연 이 끝나는 순간, 오오시마 마이와 카와사키 노조미, 그리고 팀 K의 하야노 카오루가 무대 위로 올라와, 졸업 세레모니를 가졌다. 공연 타이틀대로 모든 관객들이 '신(神)공연이었어요'라고 이야기 하는 공연이 이루어 진 것이었다.
멤버들이 모두 무대에서 내려간 뒤... 지금까지 멤버들의 모습을 클로즈 업 해 왔던 스크린에 VTR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VTR에는 AKB48 극장의 지배인인 토가사키씨가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기자회견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팬들은 물론 멤버들에게도 이 VTR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멤버들도 깜짝 놀라서 백스테이지에서, 그리고 무대 모퉁이에서 그 화면을 보고 있었다.
토가사키씨가 입을 열었다. "8월 26일, 새로운 싱글이 나옵니다. 그 새로운 싱글 선발을 정하는 데 있어 팬분들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예, 'AKB48 총선거'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모든 멤버들에게 선발 찬스는 있는 것입니다!"
회장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멤버들은 비명에 가깝게 탄식하고 있었다.
'아이돌 그룹 멤버의 인기도를 팬들이 직접 투표로 정한다.'라는 전대미문의 일대 이벤트가 발표 된 것이다. 멤버들에게 있어서는 가혹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나, 이 소문은 곧 인터넷과 잡지를 장식하며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7-3. 긴장속의 총선거 전야. 불안감에 떠는 멤버들.
AKB48에게 있어 '선발'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전까지도 AKB48명의로 음반을 낼 때에는, 총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가 멤버들 가운데서 20여명을 '선발'멤버로 뽑아 노래를 부르게 해 왔었다. 이 '선발'은 결과적으로 많은 멤버 중, 누가 현재 가장 인기가 있는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이기도 하였다. 그런 중요한 것을 이번에는 팬들의 손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프로듀서, 업계의 평가가 아니라 진정한 '인기 No.1'을 가리는 것이었다.
팬들의 선거로 뽑게 될 선발멤버 수는 다 해서 21명. 그리고 22위부터 30위까지 9명의 멤버들은 '언더걸즈'라는 유닛을 이루어 커플링곡을 부르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런 총선거 공지 영상을 보고 과연 멤버들은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 오리지널 (1기) 멤버인 다카하시 미나미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처음 들었을 땐 정말로 실감이 전혀 안 났어요. '에... 설마, 진짜로 하는거야?'라는 느낌이었지요. 그것도 '어째서 이런 타이밍에 멤버들에게 순위를 매기려 하는 걸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머릿속이 그런 의문들로 가득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리지널 멤버인 미네기시 미나미는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를 떠올려 보면 '이런 거 정말 싫어'라고 생각했던 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 영상을 본 뒤, 화장실로 달려가서 울었어요. 솔직히 21명 선발 멤버에 들 자신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 때까지 CD를 낼 때에 선발에 들기는 했었지만, 제가 선발로 뽑히는 이유도 알 수 없었고요. 저 자신은 제가 인기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었고 SKE나 연구생까지 합하면 98명이나 되는 인원중에서 팬분들이 제게 투표를 해 주시는 모습도 상상이 되지 않았어요. 엄청 상심해서 울고 있으려니 다카미나 (다카하시 미나미)가 화장실까지 절 찾으러 와서 위로 해 주었어요. 그런데 저는 '어차피 너는 선발멤버에 들어 가니까 그렇지'라고 괜히 화풀이를 했었지요..."
불안을 느끼고 있던 것은 오리지널 멤버들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팀 B에 소속되어 있었던 오오타 아이카는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선거 같은 거 하고싶지 않았어요. 당시에는 '정말로 총선거 한다면 AKB48 관둘거야'라고 생각 할 정도로 싫었습니다. 만약 선거로 선발을 정한다면 저는 100% 못 들어갈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 5기생 (연구생)에서 팀 A로 승격된 미야자키 미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절대로 선발에 못 들어 갈 거라 생각했어요. 생각 해 보세요. 그 때 저는 연구생에서 정식멤버가 된 지 1년도 되지 않았었다고요. 같은 팀의 오리지널 멤버 선배들은 벌써 3년 반이나 활동을 하고 계셨으니까 팬의 수도 차원이 달랐으니까요. 동기들에게 물어봐도 한결같이 '우리는 무리야'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순위를 매긴다는 거... 상처 받는 일이니까요."
AKB48의 선거가 발표 된 것은 공교롭게도 일본 중의원 선거 선거운동이 활발한 때였다.(※1) 멤버들은 각자 불안을 안고 AKB48 총선거의 선거운동을 시작하였다. 선거 포스터를 만들고, '정견방송'으로 불리게 되는 어필용 영상을 찍어 극장 공연 마지막부분에 틀거나 혹은 AKB48의 '라이브 온 디맨드'로 발신하고는 했다. 선거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한 편, 앞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었던 이 전대미문의 '아이돌 총선거'라는 이벤트는 사람들의 입과 인터넷을 통해 큰 파문을 일으켰고, 그 결과, AKB48에게 거대 클라이언트와 여러 캠페인들이 접근 해 와, 자사의 이미지 캐릭터나 캠페인의 홍보 등을 부탁하기에 이른다.
요미우리 신문의 창간 135주년 이미지 캐릭터로 선정되어 1주일 연속으로 요미우리신문에 전면광고가 게재되거나, 요미우리 거인군단 (야구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찰성 75주년 기념 응원단으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7월 1일에는 도쿄돔 (대 히로시마전)에서 '대표 멤버 12명의 동시 시구식'이라는 전대미문의 독특한 시구식을 하기도 하는 등,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 외에도 루이뷔통이 제작한 애니메이션 '슈퍼 플랫 퍼스트 러브'의 이미지송을 팀 K의 오노 에레나가 담당하기도 하고, 6월 24일에 발매된 '나미다 서프라이즈'의 자켓을 일본 현대미술의 거장, 무라카미 다카시 (루이뷔통 디자이너. 만화가. 시각디자이너)가 담당하는 등,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차마 꿈조차도 못 꾸던 일들이 차례차례로 AKB48에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키하바라에 위치한 AKB48극장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껏 관객의 대부분은 20대에서 40대층이었으나, 이 때를 기준으로 갑자기 중/고등학생 팬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 한 것이었다. 그들은 이 반년간 AKB48을 새롭게 알게 되고, 매력을 느끼게 되어 팬이 된... 지금까지의 팬들과는 전혀 다른 팬층이었다.
이전까지 학교에서 '나 사실 여자 아이돌이 좋아'라고 이야기를 하면 '오타쿠'로 매도되기 십상이라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었으나, 이 때를 기준으로 일본 전국적으로 'AKB48은 좋아해'라고 말하는 중/고등학생들이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착실히 신규 팬층이 늘어남과 동시에 AKB48도 차근차근 '아키바를 벗어 나' 더 큰 무대를 향해 발을 옮기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2009년 6월 23일 0시. 신곡 '눈물의 깜짝파티 (나미다 서프라이즈)'에 동봉 된 투표권이 유효해 지는 순간이 왔다. aKB48가 결성 된 뒤, 가장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제 7장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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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의 상원/하원처럼 참의원/중의원 양원을 가진 양원국회체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