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테 유리나
19세, 지금 느끼는 것들
19살이 된 뒤 처음으로 임한 3시간에 걸친 롱 인터뷰
‘연기한다’는 것, 음악에 대한 생각, ‘표현’, 혼자가 된 지금 그녀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그리고 이젠 말할 수 있는 이야기까지…
2019년 4월 30일, 헤이세이 시대 마지막 날에 발표 된 본지의 표지를 장식한 지 약 1년 4개월만에 그녀와 마주했다. 지난 1년 개월간 히라테는 5년간 몸담아 온 케야키자카46에서 탈퇴,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노도와도 같았던 1년간의 ‘18세’ 시기를 끝내고 지난 6월 25일, 19살이 되었다.
본지가 지금까지 그녀를 인터뷰 한 빈도를 생각 해 보면 거의 1년에 한 번 꼴이었다. 아마도 본지와 그녀의 페이스가 그 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인터뷰 할 때는 언제나 우리(나, 스태프, 그리고 히라테 본인)는 길게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리고선 지금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그녀의 머릿속을 바삐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당장은 정리가 되지 않아도 다른 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레 정리가 되는 어떤 ‘생각의 씨앗’ 같은 것은 없는가,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은 없는가, 혹은 나이를 먹고 새로이 1년을 보내며 그녀 안에서 생긴 ‘변화’는 없는가 등등… 수 많은 이야기의 파편들을 모으고 흐름에 맞추어 배열하고 공유하며 ‘언제 어디서 인터뷰를 하는 것이 좋을지’, ‘어떤 내용을 글로 옮겨야 할 지’, ‘어떤 타이밍에 잡지에 실어야 할 지’ 등을 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인터뷰는 히라테가 ‘19살이 된 뒤 처음으로 임하는 인터뷰’라는 테마로 진행하는 것은 어떨까라는 제의가 왔을 때, 나 역시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히라테라는 사람 안에서 한 사이클이 끝나고 새로운 사이클이 시작되는 지금, 그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번 인터뷰는 19살이 된 히라테에게 있어 ‘표현’이란 무엇인가, ‘책임’이란 무엇인가, ‘음악’이란 무엇인가 등 여러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되어 히라테 본인이 ‘로킨 재팬’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들어 볼 수 있는 인터뷰였다.
‘삼각창 밖은 밤’, ‘더 페이블’ 등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은 물론이고 이 인터뷰가 발매되었을 때엔 이미 방송이 되었을 ‘FNS가요제’에서의 콜라보레이션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Mrs. GREEN APPLE의 뮤직비디오에서 선보인 멋진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지금까지 겪어 온 일들을 이야기하는 히라테의 말투는 너무나도 밝고 즐거워 보여서 지금까지 얼마나 충실한 매일매일을 보내 왔는지 실감이 될 정도였다.
언제나처럼 3시간이 넘는 긴 시간동안 이어진 인터뷰 내내 히라테는 마치 자문자답 하듯이 한 마디 한 마디 차근차근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아 주었다.
이 인터뷰가 ‘언제나 매 순간 순간을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히라테 유리나라는 한 사람의 리얼한 마음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다.
- 오랜만이네요.
히라테 (이하 ‘히’) : 오랜만이에요.
- 작년 4월 표지 모델이 되었을 때 인터뷰를 하고 1년 4개월만에 다시 인터뷰를 하게 되었네. 이번에는 특정한 테마에 맞추어 이야기를 한다기 보다는 지난 1년 4개월 동안 히라테상이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으니, 지금 심경은 어떤지,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 왔는지 같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어 볼까 해. 굳이 테마를 정하자면 ‘히라테 유리나라는 사람에게 있어 표현이란 무엇인가’ 정도라고 할까?
히 : 요즘은 영화 ‘더 페이블’ 촬영이 한창이에요. 내일이면 크랭크업이네요. 촬영 자체는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시작했는데 코로나 사태때 잠시 쉬었거든요. 얼마 전에 촬영을 재개 했습니다. 그렇기에 촬영 기간 자체가 굉장히 긴데다가 감사하게도 제 분량이 많아 많은 스태프 분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취할 기회도 많았어요. 물론 처음에는 -항상 그렇긴 합니다만- 긴장도 많이 되고 불안했어요. 한 번 중단되었다가 촬영이 재개 될 때도 다시금 불안했지요. 하지만 감사하게도 스태프 여러분께서 그런 저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시고, 여러 모로 신경을 써 주셔서 정말 따뜻한 환경에서 촬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솔직히 한 편으로는 아쉽기도 해요. 하지만 촬영이 끝나지 않으면 영화가 완성되지 않으니까요. (웃음) 좋은 작품으로 완성 되면 좋겠네요.
- 방금 전에 ‘처음에는 불안했다’고 이야기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런 ‘불안’을 안고 일 해 왔을 거라 생각하거든? 그런 ‘불안’은 어떤 종류의 불안일까?
히 : 음… 영화라면 ‘내가 이 역할을 정말 제대로 연기하고 있는 걸까?’라던지 ‘나는 과연 이 작품을 더욱 더 좋은 작품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있는 걸까?’, ‘내가 이 영화에 폐를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같은 불안함이 있네요.
- 예전에 느끼던 ‘불안’이랑은 다른 종류의 불안이라 할 수 있을까?
히 : 음… 전혀요. 지금도 불안하고, 촬영이 끝나면 그 나름대로 또 불안할 것 같고요, 시사회 때나 영화가 공개가 되었을 때에도 불안할 거고요. 그런 ‘불안’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저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없는 것 역시 변하지 않을거고요. 감독님은 물론이고 다른 출연진 분들, 스태프 여러분, 그리고 기대하며 기다려주시는 여러분의 기대를 만족시켜드릴 수 있을 지 어떨지… 그런 점이 좀…
- 그런 불안은 케야키에 있을 때에도 느꼈을 것 같은데, 그 때는 사실 ‘내게 주어진 책임을 얼마나 짊어져야 할 것인가’, ‘나는 케야키를 위해 얼마나 싸울 수 있을까’ 같은 ‘자신에 대한’ 불안이 컸던 것 같다면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다’,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불안감이 큰 것 같은데 말이지.
히 : 아,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말씀해 주시는 것을 들으니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뭐랄까요. 저는 지금까지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견 교환을 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리허설이나 준비기간 동안에는 여러가지를 정하지 못 하는 면도 있어요. 어느 쪽이냐면 실제로 촬영이 시작되었을 때 현장의 분위기나 뉘앙스에 맞추어 이래저래 결정하는 편이 더 재미있다고도 생각하거든요. 영화의 세계에 뛰어 든 뒤로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고,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라고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알게 된 것 같아요.
- 음…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을 갖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일까?
히 : 그렇죠. 정말로. 그런 것을 제 눈으로, 그리고 제 피부로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 그런 가운데 자신에 대한 부담이나 책임감을 느낀다거나, 자문자답 해 보거나 하는 시간도 있어?
히 : 네. 있어요. 엄청 있어요. 매일매일 있는걸요. (웃음) 얼마 뒤에 영화가 크랭크업 하는데, 촬영이 막바지에 달하니 ‘아, 대본 여기까지 끝났구나’라고 실감하게 되기도 하고, 이제 더 이상 재촬영을 못 하니까 ‘문제 없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 생각들을 번갈아가며 하곤 해요. 하지만 저 혼자 생각하다보면 결국 생각이 치우치게 되고,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사람, 예를 들어 매니저님께 ‘어떻게 생각하는 지’ 여쭤보곤 해요. 이건 예전부터 하는 버릇이긴 하지만.
- 그건 아마도 한 작품에 여러 사람들이 관여가 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히라테상에게 기대를 하기 때문에 느끼는 불안이라 생각해. ‘많은 사람들이 내게 바라는 나 자신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종류의 불안 말이야. 그렇다면 불안에서 벗어나긴 힘들겠지.
히 : 그런 것 같아요. 최근 매니저님과 이야기 하는 것도 바로 그런 내용이고요. 이야기 하다 스스로 ‘뭐, 벗어나지 못 하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성격면으로 봐도.
- 내가 느끼기엔 말이지, 예전엔 히라테상이 마음 한 구석으로 ‘언젠간 이런 불안을 벗어나는 날이 올거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거든? 단적으로 말하자면 ‘해 보다 안되면 다 그만둬 버리면 된다’고 할까? 그런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이는 점이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그런 불안이나 부담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것 같아. 물론 지금도 자신을 엄하게 채찍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말이야. 하여튼, 내가 보기엔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히 : 사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안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제 성격상 아마도 그렇게 되기는 힘들겠죠. 여러 사람들에게 ‘불안하다’거나 ‘긴장된다’고 이야기 하기에 주변 사람들이 지겨워 할 것 같지만 결국 그런 게 ‘저’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물론 뭔가 작품을 하고 있을 땐 그런 불안이 더 심해지고 말이죠. 작품이 끝나면 그래도 조금은 부담이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작품을 할 때 불안해 지는 거야 당연한 거라 생각하는데, 히라테상은 뭐랄까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안의 연속이라는 느낌마저 든단 말이지.
히 : 아… (웃음) 후후후.
-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달까, 어떤 것이 정답인지 알지 못 한 채로 걷고 있다는 느낌? 그런 불안함이랄까, 어긋남이랄까 그런 것이 히라테상에게서는 느껴져. 작품을 할 때고 아닐 때고.
히 : 분명 그런 것 같아요. 작품이 있건 없건 언제나 항상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 생각해요. 하지만 감사하게도 요즘은 ‘아무 것도 없는 때’가 거의 없거든요. 뭔가 하나가 끝나면 바로 다음 일을 생각해야 하는 나날이 이어지는 것 같아요.
- 이번호가 발매 될 때엔 이미 방송이 끝난 뒤일테지만, 모리야마 나오타로상과 콜라보레이션을 하게 되었다고 들었어. 이건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걸까?
히 : 네. 누가 뭐라 해도 저는 음악을 좋아하기에, 제게서 ‘음악’이라는 색을 지우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부르실 노래는 물론이고 모리야마상 본인의 메시지나 방송국 분들의 의견을 들었는데, 그 순간 ‘아, 이 곡은 지금 내가 표현해야 할 곡이구나’라고 직감했어요. 말 그대로 ‘이건 해야만 해, 전해드려야 해’라 생각했지요.
- ‘이 곡은 내가 표현해야 할 곡’이라고 느끼게 된 이유는 뭐야?
히 : 음… 요즘은 말 그대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잖아요. 뭐라 해야하지… 2020년이 된 뒤로 사실 그다지 좋은 뉴스가 없었던 것 같거든요. 그런 가운데 이 곡은… 타이틀이나 가사만 보면 일견 굉장히 무겁게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 제가 전달하고자 한 건 그런 ‘무거운’ 내용은 아니었어요. 그저 여러가지 표현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살아라’, ‘힘 내’, ‘함께 극복 해 내자’ 같은 메시지를 전해봤자 ‘정말로 그렇게 받아들여 줄까’라는 의문이 있었거든요. 그렇기에 받아들이는 거야 보시는 분 각각에게 맡기기로 하고 저는 보시는 분들에게 다가서는 퍼포먼스를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보시는 분들께서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러고 보면 히라테상은 예전부터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하여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점을 고민한다는 게 느껴져. 단순히 ‘나는 나야’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히 : 그렇네요. 영화, 드라마, 연극 등 다양한 장르가 있고 장르마다 해야 하는 것이 각각 조금씩 다른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 음악이라던가 생방송 퍼포먼스처럼 ‘시간이 멈추지 않는’ 일을 할 때라면 그 때, 그 시대에 무엇이 요구되는지,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 지 같은 것을 엄청 생각하곤 해요.
- 그건 다시 말 해 ‘그 시대에 결여되어 있는 것을 채우고 싶다’는 감각이라 해야 할까?
히 : 음… 어떨까요. 제 모습이 어떤 분들께 용기를 드리거나 결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드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긴 해요.
- 그런 마음은 변하지 않는구나?
히 : 네. 쭉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계속 이야기 해 오고있는 것 같네요.
- 그렇구나. 이젠 혼자서 ‘표현’을 해야 하잖아? 그렇게 상황이 변했으니 히라테상의 심경에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히 : 아니에요. 기본적인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어요.
- 지금 이 시대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 했잖아. 생각 해 보면 케야키자카에 있을 땐 이렇게 명확하게 이야기 한 적은 없었던 것 같거든. 하지만 그 때도 이렇게 이야기를 못 했을 뿐, 생각하는 건 같았던 것 아닐까?
히 : 그런 것 같아요. 비슷한 생각은 갖고 있었어요.
- 히라테 유리나라는 ‘한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지를 숨겨 왔던 것 같거든.
히 : 그런 것 같아요. 특히 올 해 들어… 코로나 사태가 있었잖아요. 그 사태를 겪으며 여러 부분이 변해 버렸기에 더더욱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에 결여 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실감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 세상 뭔가 이상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라 생각해. 그러면서 -나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별 수 없지’라고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고. 하지만 히라테상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아.
히 : 음… 그런가요? ‘포기하지 않는다’고 할까, 이런 시대가 되어버렸기에 더더욱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갖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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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화
'달아나고싶어'라 적었던 나날
멤버 내 오디션
2기생들이 오디션을 거쳐 그룹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은 9월 초 어느날.
'테스트 촬영을 한다'는 명목으로 2기생 멤버들이 소집되었다. 특이한 것은 멤버들을 두 팀, 다시 말해 지방에 살고 있는 멤버들과 도쿄에 살고 있는 멤버들로 나누어 소집하였던 점이다.
그리고 소집일, 지정된 장소에 모인 멤버들에게 날아든 소식은 멤버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 했던 것이었다.
'얼마 전에 히라가나 주연 드라마 소식 나온 건 알고 있지? 사실 그 드라마에 나오는 중요한 역할 중 한 자리가 아직 미정이거든. 지금부터 그 자리에 들어 갈 사람을 정하기 위해 오디션을 볼거야.'
그렇다. 8월 말 치바 마쿠하리멧세에서 열린 케야키자카46 사상 첫 전국투어 파이널 무대에서 히라가나케야키 주연 드라마, 'Re'mind' 제작 발표가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것은 10월부터였고 대략적인 줄거리와 키 비주얼은 이미 공개 된 상황이었다.
2기생들 역시 관객석에 앉아 드라마 제작 발표를 보았지만,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들이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제대로된 레슨조차 시작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무대 위에 서 있는 선배 멤버들을 바라보는 그녀들은 말하자면 '팬과 다름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오디션'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2기생 멤버들. 하지만 스탭들은 아랑곳않고 멤버들에게 각자의 이름이 적힌 조끼와 오디션용 대본을 건네주었다.
소집을 받고 이 날 아침에 고향(야마구치현)에서 올라온 카와타 히나는 아이돌이 되어 처음으로 받은 '일'에 의욕이 가득했다. 비록 첫 '일'이 춤이나 노래가 아닌 연기, 그것도 9명 중 단 한명만을 뽑는 오디션이라는 것은 예상 못 했던 일이지만 '기왕 할 거면 꼭 합격해야지'라는 마음으로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실제로 심사위원들 앞에 서자 긴장을 한 탓인지 몇 번이나 대사를 더듬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다 보니 자신이 생각했던 자신의 모습과 실제 자신의 모습간의 괴리에 낙담하게 되어, 자신감을 잃은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만 갔다.
'이거 어쩌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카와타의 머릿속이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던 와중에 오디션이 끝났다.
심사위원들은 카와타에게 '오디션에 대한 감상'을 요구하였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TV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는 '연기' 라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 '해 낼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무력감'은 카와다 뿐 아니라 이번 오디션을 겪은 모든 멤버들이 공통적으로 뼈저리게 느낀 바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연기'로 심사위원들을 깜짝 놀라게 한 멤버가 있었다. 바로 와타나베 미호였다.
그녀가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인 대본의 내용은 '내가 좋아하는 선배가 알고보니 내 친구에게 고백을 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된 상황'을 그린 것이었다. 이 상황을 멤버 둘이서 연기 해 내야 하는 것이었다.
멤버 대부분이 친구를 위해 희생하는 '착한 아이'를 연기한 가운데, 와타나베만은 감독의 조언에 따라 대본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여 '악녀'를 연기했다. 다른 멤버들과 같은 대사를 받았음에도 해석 하나로 캐릭터를 정반대로 가져갔던 것이다.
그리고 와타나베의 연기를 뒤에서 보고 있던 니부 아카리는 그 순간 '아, 이번엔 얘가 합격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한다. 니부 뿐 아니라 와타나베의 상대역이었던 토미타 스즈카 역시 '나도 오디션에 붙고 싶긴 하지만, 상대가 미호면 별 수 없지'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오디션으로부터 이틀이 지난 어느 날, 와타나베는 드라마 촬영이 한창이던 스튜디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오디션에 합격하게 되었다는 점과, 그 날부터 바로 촬영에 합류하게 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합격하다니, 뭔가 잘못된거야.'
'처음 뵙겠습니다. 와타나베 미호라고 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촬영 현장 문을 열고 들어선 와타나베는 처음 만나는 히라가나 케야키자카46 '선배'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듯했다.
2기생으로서 들어 온 와타나베가 처음으로 1기생 선배들을 만난 이 자리는 1기생 멤버들에게 있어서도 처음으로 '2기생이 이 드라마에 참가한다'는 것을 알게 된 자리이기도했다.
1기생들 역시 뜨거운 박수로 '후배'를 맞아 주기는 했지만 사실 처음 생긴 후배를, 그것도 혼자 찾아 온 후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다른 멤버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있던 와중에 가장 먼저 행동을 취한 것은 카게야마 유카였다. 카게야마는 적극적으로 와타나베에게 다가 갔다. 우두커니 서 있던 와타나베를 이끌어 자기 옆자리에 앉히고 지금까지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 해 준 것도, 와타나베의 사인을 함께 만들어 준 것도 카게야마였다.
사실 카게야마는 이미 2기생들과 접점이 있었다. 2기생들이 오디션 때 걸쳤던 조끼에 2기생들의 이름을 적은 것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2기생들의 드라마 오디션이 결정된 날, 스태프가 조끼에 이름을 쓰고 있을 때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카게야마는 '저도 도울게요'라고 자원하여 일을 도우며 2기생들의 이름을 완벽하게 외웠다.
이 오디션 뿐 아니라 앞으로도 리허설 등이 있을 때 마다 그녀들이 착용하게 되는, 말하자면 '아이돌이 된 자만이 입을 수 있는 유니폼'과 같은 의미 깊은 조끼에 이름을 적어 넣은 것이 바로 카게야마라는 이야기이다.
생각 해 보면 카게야마는 추가 멤버 오디션 당시에도 자신의 메세지를 통해 'OO번(후보자)은 사실 정말 성실한 아이예요.', 'XX번은 이러이러한 특기가 있답니다.' 라는 식으로 후보자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 카게야마가 '홀로 낯선 환경에 떨어진' 와타나베를 돕고, 1기생과 2기생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와타나베 본인은 든든한 선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고민을 끌어안고있었다. 바로 '연기 경험이 없다'는 점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감독으로부터 자주 '감정이 아직 덜 잡혔다'고 지적을 받기도 했다.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여러번 연기 워크숍에 참가하여 '자연스러운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 방식'을 배운 1기생들과는 애초에 출발선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와타나베가 맡은 역은 설정상 다른 멤버들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한' 역할이었기에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프로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어야 하는 일도 많았다.
한 번은 그녀가 그룹에 가입하기 전부터 TV에서 보았던 배우와 단둘이 연기를 해야 하게 된 적도 있었다. 그 날 역시 감독에게 여러 가지 사항을 지적받았고, 프로 배우 앞에서 이어지는 감독의 지적에 '난 정말 연기를 못 하는 한심한 인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 날 촬영이 끝나고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와타나베는 조용히 홀로 울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나 말고 다른 아이가 붙는 게 더 나았을 지도 몰라. 내가 합격한 건 뭔가가 잘못 된 거야.'
와타나베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메모 해 두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드라마 촬영 기간동안 그녀가 적은 메모에는 이런 말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힘들어', '도망가고싶어', '그만 둬 버릴까'
가슴 가득 희망을 품고 '아이돌 세계'에 한 발을 내딛은 순간,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런 감정이었다.
'합격한 딸 앞에서 눈물을 보인 어머니'
와타나베 미호는 중학생 때 부터 농구를 해 왔다. 사실 그녀가 시합에 처음 나선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언니의 연습을 보러 갔을 때, '시합이 있으니 나와달라'는 권유를 받고 처음으로 시합에 나간 것이었다.
우연히 데뷔를 하긴 했지만, 어린 아이때부터 남자 아이들보다도 활발했던 데다가 운동신경도 좋았던 와타나베는 금세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않아 시합을 할 때마다 '쟤는 어디 팀 소속이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성장했다.
이렇게까지 빠르게 성장한 데에는 물론 그녀의 타고난 소질도 있었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그녀만의 '강점'이 있었다.
중학생이 되어 정식으로 농구부에 들어 갔을 때의 일이다. 때마침 입부한 학생 중에 와타나베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라이벌격 존재가 있었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그 '라이벌'에게 자신의 포지션이었던 포인트 가드 자리를 빼앗겼다. 그리고 그 때 와타나베는 '앞으로는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코트 구석구석까지 뛰어다녀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다.
주전자리를 빼앗긴 뒤로는 좀처럼 경기에 나서지도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지만 와타나베는 연습 때에도 다른 누구보다도 열심히 코트 구석구석을 누볐다. 그리고 그 결과 포인트가드 자리를 되 찾는데에 그치지 않고 주장 자리를 거머쥐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은 그 뒤로도 변함없이 이어져, 고등학생이 된 후에는 주장으로서 팀을 사이타마현대회 8강으로 이끌기까지 했다. 앞서 말한 '와타나베의 강점'이란 바로 이 '포기하지 않고 끈기있게 노력하는 재능' 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남들에게 말 못할 비밀이 있었다. 그 비밀은 다름아닌 '아이돌에 대한 동경'. 어릴 때 부터 헬로! 프로젝트나 AKB48을 좋아했던 그녀는 내심 '아이돌이 되고싶다'는 꿈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중학교 2학년 때 오디션 지원용지를 프린터로 뽑아 본 적도 있었다. 비록 '농구부 활동을 해야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해서 지원을 하지는 않았지만 솔직한 이유는 '자신에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고 3 진로상담 때 선생님과 어머니 앞에서 '저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연예계로 나가고 싶어요.'라고 밝혔을 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 지는 상상이 될 것이다.
물론 그녀의 그런 폭탄선언에 주변 어른들은 맹반대했다. 와타나베의 어머니는 딸에게 '난 네가 평범하게 대학을 가서, 평범한 인생을 살았으면 한다'고 설득하기도 하였다.
언제나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렴'이라고 말 해왔으면서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용기를 내서 말 하니 반대하는 어머니가 미워졌다. 동시에 '결국 나한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무력한 자신에게 화가 나 눈물이 쏟아졌다.
결국 이 날 진로상담에서는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 한 채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교문을 나선 순간 짜증과 무력감, 서러움 등 온갖 감정이 폭발하여 휴대전화를 힘껏 바닥에 패대기쳤다.
사실 어머니가 반대를 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란 다름아닌 와타나베가 고 2때 받았던 오디션, '노기자카46 3기생 오디션' 때의 기억이었다.
자신에게 자신이 없던 와타나베가, 항상 '농구부' 핑계를 대며 정작 중요한 순간에 도망쳤던 와타나베가 심기일전하여 '핑계'를 대지 않고 끝까지 해 내기로 '결심'했던 오디션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허무하게도 불합격. 와타나베는 그 때의 충격에서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울기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딸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두 번 다시 그런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반대 의사를 내비친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 어른들의 반대에도 와타나베의 의지는 굳건했다. 우선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와타나베는 PC를 켜서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우선 적은 것은 그녀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노기자카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자신의 목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그녀의 '궁극적인 목표' 역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 '목표'는 다름아닌 '배우'가 되는 것. 어릴 때 부터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했던 그녀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변화였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목표를 세운 와타나베는 '연기에 대한 열정'을 어떻게 현실로 만들어 나갈 것인지를 서류에 적어나갔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모아 연기 학원에 들어간다', '우선 오디션을 여러 번 봐서 소속사에 들어간다' 등 자신이 얼마나 이 길에 진심이며, 어떤 계획으로 움직일 것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자료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때마침 열리고 있던 것이 바로 '히라가나 케야키자카46 추가 멤버 모집' 오디션이었다. 비록 아이돌이 된다는 꿈은 접은 와타나베였지만 그럼에도 '오디션에 붙는다면 내 마음을 알아 주겠지'라는 마음에 응모를 결심했다.
와타나베가 오디션에 합격, '엄마가 많이 놀라겠지?'라 생각하며 집에 돌아 왔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엄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에 반대하는 게 아니야. 네가 어떤 길을 걷건 네 미래를 응원한단다.'
와타나베 모녀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한다.
'동기에게조차 말 못할 고민'
그렇게 힘들게 들어 온 아이돌 세계인데, 시작부터 난관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꿈꾸었던 연기에서.
배우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매일같이 영화를 보고, 감상을 노트에 적고, 자신이 목표로 하는 배우를 분석하고, 자신이라면 어떻게 연기 했을 지까지 노트에 정리 할 정도로 갈구하던 '연기' 일이 어느 사이엔가 '도망가고 싶은' 대상이 되어 있던 것이다.
약 두 달에 걸친 촬영을 거쳐 드라마 'Re:mind'가 크랭크업 되었다. 마지막 촬영이 끝난 뒤, 1기생들은 입을 모아 '좀 더 이 촬영을 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자신의 차례에 이렇게 감상을 말했다.
'아무래도 2기생이 저 혼자다보니 부담감이 컸어요. 물론 기쁘기도 했지만…'
와타나베는 오열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이제 와 생각 해 보면 '연기를 해 본 적이 없으니 못 하는 게 당연하다'는 전제 하에 연기 워크숍에 참가하고, 다른 멤버들과 함께 촬영을 하며 조금씩 성장 해 나갈 수 있었던 1기생들과는 달리 '오디션'이라는 과정을 통해 '선발'된 와타나베는 '당연히 잘 해야만한다'는 부담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떨어진' 동기들에게 그런 마음을 상담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녀는 말 그대로 혼자서 '선택 받은 자의 책무'를 짊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인사에서 그녀가 오열한 것은 어쩌면 지금껏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하고 억눌러만 왔던 감정들이 폭발 한 것이라 봐야 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와타나베 외의 2기생들 역시 머지않아 그런 '선택받은 자의 책무', '히라가나 케야키자카46이라는 그룹에 뽑힌 자의 책무'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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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자카 전 멤버 나카모토 히메카, 아이돌에서의 좌절을 딛고 도전한 ‘대학’에서 배운 것은?
‘카운셀링에 대한 이미지를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바꾸고 싶어요.’
인간과학부 E스쿨 2학년 나카모토 히메카
인간과학부 E스쿨 건강복지과학과에서 공부를 하며 동시에 심리 카운셀러로서도 활동하고 있는 나카모토 히메카씨는 사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인기 아이돌그룹 ‘노기자카46’의 일원이었다. 2017년 11월에는 이틀간 10만명을 동원한 노기자카의 도쿄돔 공연에도 출연하였지만, 그 무대가 나가모토상에게 있어서는 아이돌 인생의 마지막 무대였다.
모든 이들이 동경하는 화려한 무대를 내려와 대학에서 공부하는 길을 선택한 나카모토상.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배경에는 ‘아이돌 시절에 그녀가 안고 있던 고뇌’가 있었다고 한다.
대학 공부와 카운셀링 일로 바쁜 매일을 보내는 나카모토상에게 학업과 일, 그리고 앞으로의 목표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 나카모토상, 노기자카46의 1기생이셨죠? 그룹에는 어떻게 들어가셨나요?
나카모토 (이하 ‘히’) : 초등학생 때부터 어머니의 권유로 춤과 노래를 배웠어요. 자연스럽게 히로시마의 로컬 유닛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고요. 사실 제가 연예계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만 서서히 ‘아이돌이라는 직업, 즐거워보여’라는 생각이 들어 중 3 여름방학때 노기자카의 오디션을 받게 되었습니다.
- 노기자카46의 일원으로 6년 이상 활동을 하신 뒤에 그룹을 졸업하셨지요. 그런 자신의 경험 덕분에 ‘심리 카운셀링’에 흥미를 갖게 되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톱 아이돌 그룹으로 자리매김한 노기자카를 졸업하는 것은 각오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히 : 노기자카라는 그룹에는 선발과 언더라는 제도가 있는데요, 저는 선발에 들지 못 해 마음이 아픈 시간이 매우 길게 이어졌어요. 지금 생각 해 보면 저 자신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원도 여러 곳 다녔는데, 항상 70점은 쉽게 받지만 어느 것 하나 100점을 받는 것이 없었거든요. 남들에게 내세울 곳이 없어서 항상 ‘나만의 장점은 무엇일까’를 필사적으로 찾아 왔습니다. 그런 상태로 아이돌이 되었지만 들어 간 아이돌 그룹에서도 저는 주력 멤버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언제나 ‘난 어중간하구나’ 라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런 어중간한 상황이 싫어서 저도 모르게 무리를 하게 된 거죠… 처음으로 선발에 뽑혔을 때, 긴장의 끈이 풀어져 심신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고, 처음으로 ‘카운셀링’ 이라는 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심리 카운셀러’라는 일을 알게 되었지요. 이 때 ‘내가 가야 할 다음 스텝은 이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그 때부터 졸업을 준비하기 시작했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게 있어 노기자카46 졸업은 미래를 생각한 긍정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 2018년 4월에 와세다대학교 인문과학부 E스쿨에 입학하셨지요. 다른 대학교가 아닌 와세다를 지망한 이유가 있나요?
히 : 아이돌 활동을 할 때부터 대학교에 가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요령이 좋은 편이 아닌지라 아이돌과 학업을 양립하는 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어요. 노기자카46를 졸업하고 처음에는 임상심리학을 배울까 싶어 심리학부가 있는 대학교를 찾다가 와세다 대학교 인간과학부 건강복지과학과를 알게 되었지요. 여기서는 임상심리학 뿐 아니라 조금 더 포괄적으로 ‘인간’에 대한 것들을 배울 수 있겠다 싶어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1차 시험과 2차 시험 사이에 도쿄돔 공연이 있었기에 입학시험 때 힘들었지요. (웃음)
와세다대학교에 들어오길 잘 했다고 생각 한 것은 복지제도의 현실에 대해 알게 된 점이라던가 유소년기를 어떻게 보내는 지에 따라 성격이 어떻게 변하는 지에 대해 알 수 있어 카운셀링을 할 때 매우 도움이 된다는 점입니다. 특히 하라 다이이치 선생님 (인간과학부 교수)의 ‘푸드 앤드 라이프 사이언스’라는 수업에서 세포 생물학과 분자 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건강에 대해 고찰 해 보거나 영양과 정신건강의 관계를 해설 해 보는 등 많은 점에서 공부가 되었습니다. 또한 인간과학부 교수님들 중에는 의사 면허를 갖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기에 의료 현장 일선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등을 들을 기회가 많아 수업이 재미 있어요.
- E스쿨 수업과 일을 병행하는 것이 힘드시진 않으신지?
히 : 힘들죠. (웃음) 수업 대부분은 온디멘드(자신이 보고싶을 때 볼 수 있는 온라인 수업)로 받을 수 있긴 하지만 1시간 가까이 보고 있어야 하기에 카운셀링 일을 하며 틈틈이 보거나 이동을 할 때 전철 안에서 PC를 펼쳐 놓고 보거나 합니다. 학교에 통학하는 학생이라면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PC로 간단한 메모를 하거나 선생님이 판서하신 것을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거나 하겠지만 저는 PC로 강의를 보며 모르는 부분은 구간반복 해 가며 필사적으로 노트를 적곤 해요.
E 스쿨의 특징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페이스로 공부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점이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물론 잠깐 방심하기만 해도 봐야 하는 수업이 차곡차곡 쌓이고 진도도 빠르게 나가 버리기도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나도 대학생이다’ 라는 자각을 잊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 스쿨은 제가 게으름을 피워도 뭐라고 해 주는 사람이 없기에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대학교에 들어 와 새삼 깨달은 것도 있는데요, 바로 ‘시간은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잊지 말고 졸업 때 까지 열심히 해 나갈 생각입니다.
- 심리 카운셀러로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히 : 저는 주로 영상통화를 통해 카운셀링을 합니다. 이런 방식을 이용하면 신체적/심리적 이유로 집을 벗어나지 못 하는 분들께서도 가장 편한 환경에서 카운셀링을 받으실 수 있거든요. 또 아직까지 일본에서는 ‘카운셀링’이라 하면 부정적인, 숨겨야 할 것 같은 이미지가 강하지요. 스쿨 카운셀러나 기업 카운셀러가 있기는 하지만 정작 이용을 주저하시는 분이 많으신 가운데 이렇게 영상 통화로 카운셀링을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상담을 할 수도 있어요. 역시 한 번 통화해서 그 분의 문제가 해결 되고 기분이 좋아지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카운셀링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고 싶은 분이라면 정기적으로 카운셀링을 받는 분도 계십니다.
언젠가 한 번은 제가 카운셀러가 되게 된 계기를 알게 되신 손님께서 ‘카운셀러가 되어 줘서 고맙다’고 말씀 하신 적이 있어요. 그 얘기를 듣고 ‘내가 고른 이 길은 틀리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굉장히 기뻤습니다. 지금 제가 갖고 있는 카운셀러 자격증은 민간 자격이기 때문에 공부만 하신다면 누구라도 따실 수 있는 자격이에요. 하지만 저와 이야기 하며 안심하시거나 저를 필요로 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점에 일 하는 보람을 느낍니다.
- 그럼 나카모토상의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히 : 앞으로 심리 카운셀러로서 어떻게 나아 갈 지에 대해서는 아직 방향성을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심리 카운셀러라는 직업은 자신이 경험 한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스킬 업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대학에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공부 해 나가려 합니다. 3학년이 되면 연구회에도 들어 갈 수 있기에, 어떻게 할 지를 검토하고 있어요. 아, 그리고 ‘다른 사람과 상담하는 건 좋은 일이다’라고, 카운셀링에 대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나가고 싶고, 카운셀러라는 존재를 더욱 더 널리 보급 해 나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는 계발 활동에 제가 힘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프로필
나카모토 히메카
히로시마현 출신. 초등학교 4학년 때 ‘액터즈 스쿨 히로시마’에 들어 가, 춤과 노래 레슨을 시작. 2011년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본 오디션을 통해 아이돌 그룹 ‘노기자카46’의 1기생에 합격. 2017년에 그룹을 졸업 한 뒤로는 인지행동요법이나 카운셀링 등을 공부, 2018년 11월에는 온라인 카운셀링 홈페이지
‘카운셀링 살롱 모니카와 나’를 개설, 심리 카운셀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취미는 버라이어티 방송을 보는
것과 (카운셀링 살롱의 이름에도 쓰인) 애견 ‘모니카’와 노는 것.
사진이나 원문을 보실 분들은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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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최전선에 있는 것은 언제나 ‘소녀’들이었다.
~’한국 음악’이라는 틀을 뛰어넘어 글로벌화 되어가는 ‘K-POP 시스템’~
1) 음악제작 시스템에 불어닥친 큰 변화
2010년을 전후하여 일본에서 일어난 K-POP붐.
그 중에서도 소녀시대나 KARA를 위시한 여성 그룹의 약진은 눈이 부실 정도로, 당시 일본의 틴에이저 중에서 그들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후, 한국에서 인기를 얻은 K-POP 걸그룹은 차례차례 일본에 상륙, 눈 깜빡할 사이에 큰 인기를 얻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K-POP 걸그룹은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덕분일까, 그룹의 활동 방식 자체도 크게 변했을 뿐 아니라 활약하는 무대 자체가 ‘세계’로 넓어지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그런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K-POP 걸그룹’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작금의 걸그룹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위 말하는 ‘걸그룹 르네상스’를 쌓아 올린 3대 기획사, 즉 SM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YG 엔터테인먼트에 대하여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세 기획사는 현재도 왕성하게 최고의 아이돌 그룹을 제작하고 있는 명문 기획사인 동시에, 과거 가장 각광을 받았던 걸 그룹을 배출 해 낸 기획사이며, 상기한 기획사에서 만들어 낸 아이돌 그룹들이 말 그대로 K-POP 이라는 장르를 선두지휘한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현재 3대 기획사의 간판 그룹이라 할 수 있는 Red Velvet, TWICE, BLACKPINK을 보면 각각 자신들의 직속 선배라 할 수 있는 소녀시대, Wonder Girls, 2NE1가 남긴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Red Velvet의 다양한 음악적 실험이나 TWICE의 캐치한 후렴구와 귀여운 안무, BLACKPINK의 ‘걸 크러시’ 컨셉트는 바로 직속 선배들의 그것들과 궤를 같이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요즘 걸 그룹들이 위대한 선배들의 유산을 그대로 답습하고만 있냐 하면 그런 것은 또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부분이 어떻게 변화 해 온 것일까?
가장 처음 꼽을 수 있는 ‘변화’는 바로 음악 제작 시스템이 큰 폭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오랜 기간 여러 아이돌을 탄생시켜 오며 노하우와 기반을 쌓아 온 대형 기획사들은 더욱 더 퀄리티 높은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어 SM은 해외의 거물 프로듀스들과 자주 협업을 한다. 물론 지금같은 시스템이 정착되기 이전에도 테디 라일리 같은 세계적인 프로듀서의 곡을 받아 소녀시대에게 주고는 했지만, 요즘은 그런 단발성 협업에 그치지 않고 정기적으로 ‘송 캠프’를 개최, 전 세계의 유명 프로듀서들을 한자리에 모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꾸미는 데 까지 발전했다.
실제로 Red Velvet의 리패키지 앨범인 ‘The Perfect Red Velvet’에는 브루노 마스나 저스틴 비버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들의 프로듀싱을 담당한 더 스테레오 타입스를 비롯하여 덴마크의 프로덕션 팀인 Deekay의 다니엘 ‘오비’ 클라인, H.O.T나 S.E.S등 SM의 1세대 아이돌 제작 당시부터 SM엔터테인먼트의 음악적인 축으로 활약 해 온 작곡가 유영진, 한국 R&B계의 실력파 아티스트인 JINBO와 SUMIN 등 수 많은 유명 프로듀서들이 참여한 바 있다. 이는 말 그대로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K-POP 그룹이기에 가능한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SM의 과감한 시도는 자사 아이돌 뿐 아니라 타사의 여러 아이돌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남기고 있다.
2) 팬과 공유하는 ‘세계관’
기획사들의 아이돌 육성방식 변화는 음악 제작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JYP의 경우 꽤나 파격적인 시도를 하였는데, 바로 ‘TF팀’ 제도의 도입이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연예 사무소들은 회사 내에 마케팅 부서, 매니지먼트 부서, A&R(※레코드 회사에서 신인 아티스트 발굴, 레코드 기획, 제작, 관리 등을 담당하는 일) 부서 등 그 기능에 맞추어 여러 부서를 두는데, JYP는 그런 기능적인 부서 구분을 철폐하고 한 팀이 한 그룹을 전담해서 움직이는 태스크포스팀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시도를 통해 만들어 진 결과물이 바로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TWICE’인 것이다.
JYP가 이런 대담한 시도를 하게 된 것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종래의 방식으로는 아티스트의 성장 속도에 맞추어 시의적절하게 필요한 서포트를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도는 보란듯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전속 팀이 TWICE의 활동에만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앨범 기획, 선곡, 뮤직비디오 촬영, 마케팅을 담당하는 구조가 완성됨으로 하여 아티스트와 스태프들간의 커뮤니케이션도 더욱 밀접하고 원활하게 되었으며 콘텐츠 제작 속도 역시 비약적으로 빨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의 구축으로 인하여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면서도 내용의 일관성을 유지하거나 바쁜 스케줄 안에서도 콘텐츠의 질을 높게 유지하는 것도 가능 해 진 것이다.
물론 JYP이외의 기획사들도 각자 방법은 다를지언정 경쟁력 있는 활동을 위하여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창력과 퍼포먼스 능력이 전체적으로 상향 평준화 된 현재의 걸그룹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명확한 컨셉트와 확고한 개성을 갖추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이다. 예전 K-POP그룹들이 한 앨범 안에 다양한 컨셉트와 스타일을 실험했던 것과는 달리 현대의 그룹들에게는 ‘하나의 일관된 아이덴티티’를 갖추고 그것을 중심 축으로 하여 활동 할 것이 요구된다. 그렇기에 그런 ‘아이덴티티’를 설정하는 것은 그룹을 런칭하기 전부터 고민해야 할 최우선과제라 할 수 있다. 물론 MAMAMOO처럼 ‘가창력’이라는 부분을 극단적으로 강화하여 성공한 예도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그럴 수는 없는 노릇. 대다수의 그룹들은 팬들과 공유하는 유니크한 ‘세계관’을 설정하는 방향성을 택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이런 ‘세계관’에 가장 철저히 힘을 쓴 그룹이 바로 ‘이달의 소녀’라고 할 수 있다. 이달의 소녀는 완전체로 데뷔하기까지 약 2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12명의 멤버들을 한 명씩 공개하는 방식을 통해 독특한 세계관을 서서히 확장해 왔다.
이달의 소녀의 각 멤버에겐 자신을 상징하는 색, 과일, 동물이 주어졌으며, 멤버들을 4명씩 (※틀림) 나누어 우주를 구성하는 3개의 가상 공간에 속해있다는 설정으로 유닛을 구성,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멤버가 만나 한 공간에 모이기까지의 스토리를 짜기 위하여 막대한 자본과 시간을 들인 것이다.
이외에도 데뷔 당시부터 ‘학교 3부작’이라는 일관된 컨셉트 하에 활동을 한 ‘여자친구’ 역시 그런 세계관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여자친구는 고등학생을 연상케 하는 청순한 이미지의 초창기 3부작을 통해 인기를 얻은 뒤, ‘학교를 졸업하여 당당한 한 사람의 성인이 되었다’는 식으로 스토리를 전개시켜 팬들을 납득시키며 자연스럽게 이미지 변화를 꾀함과 동시에 그룹의 아이덴티티의 연속성 역시 확보 할 수 있었다. 이렇듯 세계관의 설정 및 전개는 단순히 ‘팬들이 그룹의 스토리를 공유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아이돌’이라는 하나의 콘텐츠를 ‘분석’하는 또 다른 즐거움을 제공해 주었다.
3) 전 세계의 팬들과 ‘동시대성’을 갖다
K-POP의 양적, 질적 성장과 선진적 시스템은 아시아 뿐 아니라 전 세계 팝 문화의 중심인 미국을 비롯한 유럽 등지에서도 주목받기에 이르렀다.
과거 한국에서 명실상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였던 Wonder Girls의 미국 진출을 예로 들어보면 그런 ‘시대의 변화’가 역력히 느껴지는데, Wonder Girls는 최전성기에 미국 진출을 위하여 국내 활동을 거의 희생시키다시피 하였다. 그 결과, ‘빌보드 핫 100차트’의 76위에 이름을 올리긴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희생해야 하는 것이 너무 컸기에 사실상 실패한 시도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예전에는 미국 진출을 위하여 현지의 유명 프로듀서를 섭외하고, 지금까지 보여 준 적 없는 새로운 컨셉트를 시도하며 어떻게든 ‘현지인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현지화를 꾀하는 측면이 컸다고 할 수 있는데, 최근 K-POP그룹의 미국 진출은 양상이 사뭇 다르다.
얼마 전 미국의 인터 스코프 레코즈와 계약을 맺은 BLACKPINK는 현지에서 단 한차례도 활동 한 적 없음에도 빌보드 핫 100차트 55위, 200차트 40위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올 4월, 그녀들이 처음으로 북미투어를 감행 한 것은 이미 그녀들의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 진 ‘뒤’였던 것이다. 이는 ‘우선 한국에서 인기를 얻고, 그 이후의 프로세스로서 해외 시장에 도전’하는 종래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한국에서 인기를 얻는 것 만으로도 이미 세계적으로 굳건하게 뿌리 내린 K-POP 팬들에게 어필 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K-POP 아이돌들이 생산해 낸 수많은 콘텐츠들이 동영상 플랫폼이나 SNS, 무료 방송 서비스등을 통해 전달됨으로 하여, 전 세계의 K-POP 팬들이 일종의 ‘동시대성’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K-POP’이 하나의 장르로 정착되는 가운데 그 팬베이스 역시 서브컬쳐의 일종으로서 확고하게 형성되어 왔으며,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서브 컬쳐’에서 벗어나 ‘메인 스트림’을 주도 할 정도의 규모로까지 성장 한 것이다.
또한, 해외의 K-POP 팬들은 단순히 콘텐츠 소비자에 머무르지 않고, ‘K-POP 랜덤 플레이 댄스 챌린지’ 등의 이벤트를 개최하거나 노래, 안무를 커버하여 동영상 사이트에 투고 하는 등 스스로 2차 콘텐츠를 제작, 커뮤니티와 공유하며 K-POP의 재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TWICE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이 아직 일본에 데뷔 하기도 전 부터 ‘TT댄스’는 일본의 10대, 20대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 않았던가.
4) 국경의 한계를 초월한 ‘콘텐츠’
전 세계의 팬들을 매료한 K-POP 걸 그룹계에서는 엄청난 속도로 새로운 그룹이 생겨나고, 새로운 곡들이 발매된다. 그리고 각 그룹들은 다른 그룹들과 차별화 되는 개성을 어필하기 위하여 자신들만의 ‘아이덴티티’ 개발에 매진한다. 그렇기에 일견 비슷해 보이는 그룹들이라 해도 찬찬히 뜯어보면 다 다른 새성을 갖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물론 그룹들을 크게 분류하면 ‘섹시’, ‘큐트’, ‘청순’ 등 몇 가지 키워드로 분류가 가능하다는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그룹이 어필하는 디테일들은 각자 다르다. 당장 ‘청순파’ 그룹이라 해도 ‘졸업 전’의 여자친구는 청순함과 절도를 동시에 갖춘 느낌이지만 LOVELYZ는 그와 다른 정통파 노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Weki Meki가 ‘10대 특유의 자신만만한 발랄함’을 선보이는 데 반해 MOMOLAND는 ‘장난기 넘치는 동급생’ 같은 발랄함을 무기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뿐 아니다. 같은 그룹이라 해도 연차를 쌓아가며 새로운 매력을 선보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청순파 아이돌’로 활동 해 왔던 APINK가 2018년을 기점으로 ‘걸 크러시’적인 면모를 대폭 받아들여 이미지 체인지를 한 바 있지 않은가. 또한 ‘밝고 귀여운’ 종래의 아이돌상에서 벗어나, Dreamcatcher 처럼 하드한 기타 사운드가 돋보이는 록적인 면모를 내세우는 그룹도 나름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다.
한국의 케이블 TV 방송국인 Mnet의 오디션 방송 ‘PRODUCE 101’을 통해 결성된 프로젝트 그룹 I.O.I의 멤버들 역시 그룹이 해산된 뒤로는 각자의 그룹으로 돌아가 이전과는 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다. 예를 들어 김세정과 강미나는 구구단에서 ‘당당하고 자신 넘치는 모습’을 어필하고 있고, 정채연은 DIA에서 귀엽고 소녀스러운 감성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주결경과 임나영은 PRISTIN(※해당 기고문은 2019년 2월에 작성됨)에서 발랄한 면모를 선보이고 있으며 청하는 솔로 아티스트로서 카리스마 넘치는 댄스를 무기로 활동하는 등 I.O.I 활동때와는 다른 매력을 선보이고있다.
2016년에 시작된 Mnet의 ‘PRODUCE 101’시리즈는 ‘아이돌 제작 시스템’ 측면에서 보아도 큰 의미가 있는 방송이다. 여러 사무소에 소속되어 있는 아이돌 지망생들을 모아, 경쟁을 통해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멤버들을 하나의 프로젝트 그룹으로 데뷔시키고 활동하게 만든다는 기획 취지 자체는 매우 심플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압도적인 스케일 덕분에 수 많은 드라마를 낳으며 결과적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첫 시즌 합격자들로 결성된 I.O.I는 2016년 4월부터 2017년 1월에 걸친 ‘기간 한정 아이돌’로서 활동하며 그 특수성 덕분에 더 큰 지지를 받았다.
해당 방송은 남성그룹인 ‘Wanna One’을 배출한 시즌 2를 걸쳐, 시즌 3에서는 파격적인 실험에 나섰다. 이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Mnet이 지금의 K-POP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기획이었다.
일본의 AKB48 그룹과의 협업이 바로 그것이었다.
시즌 3는 방송 제목을 아예 PRODUCE 48으로 바꾸어 방송되었으며, 이 파격적인 실험은 한일 양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불러모으기에 충분했다.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12명의 멤버들은 IZ*ONE이라는 이름으로 데뷔하였으며, 데뷔와 동시에 2018년 최고의 신인 아이돌로서 군림하였다. 그녀들은 눈 깜빡할 사이에 수 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경쟁하는 K-POP 걸그룹계에서 3대 기획사의 쟁쟁한 그룹들을 위협할 정도의 위치까지 치고 올라왔다.
특히 IZ*ONE에는 이미 AKB48 그룹의 일원으로서 일본 연예계에서 활동을 한 멤버가 3명 포함되어 있기에 일본에서 활동을 하는 데에는 큰 이점을 안고있다. 이러한 PRODUCE48, 그리고 IZ*ONE의 성공은 어찌 보자면 ‘기존 시스템이나 기획의 범위를 뛰어넘어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하는’ K-POP 걸그룹 시장의 현재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PRODUCE101’시리즈는 한국과 일본 뿐 아니라 중국 시장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있다. 해당 방송의 정식 판권작인 ‘창조101’이나 그 영향을 받아 제작된(※정확히는 표절) ‘우상연습생’ 등을 보면 중국에서의 PRODUCE101 시리즈의 영향력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은 ‘K-POP이라는 장르가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아이돌 그룹이라는 단편적 개념을 벗어 나, 국경을 초월한 콘텐츠라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20화
선택받은 자들
2015년 8월, 노기자카46의 뒤를 잇는 ‘사카미치 시리즈’ 제 2탄, 케야지자카46가 결성되었다. 한편, 어머니의 맹렬한 반대로 케야키자카46 최종 오디션장에 참가하지 못 한 소녀도 있었다.
이후 그 ‘소녀’ 나가하마 네루가 그룹에 뒤늦게 가입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그녀는 케야키자카46의 자매그룹격인 ‘히라가나 케야키자카46’의 유일한 멤버로 활동하게 된다.
이듬해인 2016년 5월, 히라가나 케야키46의 추가 멤버 오디션을 거쳐 나가하마와 활동을 함께 하게 될 11명의 멤버들이 그룹에 가입하며 히라가나 케야키는 그룹으로서 본격적인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한 발 앞서 데뷔한 한자 케야키는 데뷔곡인 ‘사일런트 마조리티’부터 사회 현상 수준의 붐을 일으키며 일약 인기 그룹으로 발돋움, 데뷔한 해에 홍백 가합전 무대에 서는 등 승승장구한 반면, 히라가나 케야키의 지명도는 미미한 채, 활동 기회조차 변변히 부여받지 못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런 그녀들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2017년 3월부터 전국의 라이브 하우스를 도는 소규모 전국 투어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 투어를 계기로 12명의 멤버들간의 유대가 깊어지고 하나가 되어 가던 그녀들에게 시련이 주어진다. 투어가 시작된 지 불과 한 달 뒤인 4월에 열린 ‘케야키자카46 데뷔 1주년 기념 라이브’에서 그녀들을 깜짝 놀라게 할 발표가 있었던 것이다.
같은 꿈을 쫓는 동세대 소녀들
2017년 4월 6일. 도쿄 요요기 제 1체육관에서 ‘케야키자카46 데뷔 1주년 기념 라이브’가 열렸다. 이 라이브는 1년 전 같은날에 데뷔 싱글 ‘사일런트 마조리티’가 발매 된 것을 기념하여 열린 라이브로, 지난 1년간 발표한 4장의 싱글에 실린 곡 전곡을 선보이는 라이브였다. 말 그대로 그룹이 지금껏 해 온 라이브 중 최대 규모의 라이브라고 할 수 있었다.
토미타 스즈카는 홀로 이 라이브 회장에 와 있었다. 가족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관계로 예전부터 가족들과 함께 한류 아이돌, 일본 아이돌은 물론이고 얼터너티브 록 공연에도 간 적이 있지만, 혼자서 라이브를 보러 온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동경해 온 케야키자카46의 스테이지를 보고 싶어 겨우겨우 손에 넣은 티켓이었다.
자신의 눈 앞에서 격렬하게 춤을 추는 케야키자카46 멤버들을 본 토미타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꿈을 쫓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마저 느꼈다.
이 날 공연에는 히라가나 케야키도 참가하여 커플링곡으로 수록된 자신들의 노래를 몇 곡인가 선보였다. ‘우리들은 사귀고 있어’를 부를 땐 멤버들끼리 손을 잡고 토롯코에 탄 채 회장 내부를 휘젓기도했다.
한자 케야키의 팬으로 입덕을 하긴 했지만, 히라가나 케야키 멤버인 카토 시호의 악수회에도 간 적이 있던 토미타는 내심 ‘히라가나는 한자와는 다르게 말 그대로 아이돌스러운 느낌이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본공연이 끝나고 앙코르를 위해 멤버들이 무대 위로 등장한 순간 서프라이즈 발표가 있었다.
‘긴급공지!’
‘히라가나 케야키 증원 결정!’
‘올 해 여름에 오디션 개최!’
쉴 새 없이 스크린에 표시되는 발표에 회장 내부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던 토미타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팬이 말을 걸어 왔다.
‘저 오디션 받을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토미타는 웃으며 ‘에이, 제가 뭘요.’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이미 응모 할 생각을 정해둔 상태였다.
토미타는 사실 이전에도 몇 번인가 연예인 소속 사무소의 스카우트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중 한 번은 꽤 잘 알려진 유명 소속사에 면담을 하러 갔지만 인연이 아니었는지 아쉽게 소속 연예인이 되지는 못 한 경험도 있었다. 그러한 경험 때문인지 토미타의 마음 한 구석에는 계속해서 연예계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토미타에게 있어 우연히 가게 된 콘서트에서 히라가나 케야키의 추가 멤버 모집 오디션 개최 발표를 보게 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운명적인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무대 위에 서 있는 저 소녀들처럼, 내게도 꿈을 이룰 기회가 주어진거야.’ 토미타는 그렇게 느꼈다.
시간이 흐르고, 오디션 접수가 시작되었다.
토미타는 접수 개시 직후 오디션에 응모했다.
‘나도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히라가나 케야키 추가 멤버 오디션에는 스태프들이 예상한 것 이상의 응모가 몰렸다. 오디션에 응모한 후보자들의 수는 무려 약 1만 5천여명.
지금까지의 활동 내용을 보면 사실상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 하는 백댄서 취급인데다가 단독 데뷔는 커녕 그룹의 존속마저도 명확하지 않은 그룹의 오디션에 이만큼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경악할만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의외였던 것은 응모자 중에 ‘히라가나 케야키의 라이브를 보았다’, ‘히라가나 케야키의 팬’이라는 응모자들이 많았다는 점이었다.
사실 그 해 3월에 시작된 히라가나 케야키의 투어는, 회장인 전국의 라이브 하우스는 물론이고 일부 영화관에서 라이브 뷰잉이 진행되었다. 이 덕분에 전국적으로 히라가나 케야키의 팬층은 서서히이긴 하지만 저변이 넓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라이브 뷰잉을 보며 히라가나 케야키의 멤버가 될 마음을 갖게 된 응모자 중에는 코사카 나오도 있었다. 코사카는 초등학생 때 AKB48의 팬이 된 후 아이돌 오타쿠로 발전, 노기자카46나 케야키자카46에도 빠져 가족과 함께 응원을 해 왔다. 하지만 그녀의 ‘덕질’은 어디까지나 TV나 CD 같은 미디어를 통한 것에 그쳐, 실제로 라이브나 콘서트를 보러 간 적은 없었다. 그런 코사카가 히라가나 케야키의 라이브 뷰잉을 보러 간 것은 그녀가 중 3때, 같은 반에 있었던 ‘히라가나 케야키의 팬’인 친구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5월 31일, 그 날은 히라가나 케야키의 전국투어 오사카 공연이 열린 날이었다. 코사카는 오사카 시내의 한 극장에서 화면을 통해 히라가나 케야키 멤버들이 춤 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이 날 공연은 히라가나 케야키라는 그룹이 지금까지의 노선에서 방향 전환을 시도한 중요한 공연이었다. 한자 케야키의 이미지가 강한 ‘사이마조’나 ‘불협화음’은 봉인하고 그 대신 ‘제복과 태양’, ‘미소가 슬퍼’ 같은 상대적으로 유순한 분위기의 곡들을 세트리스트에 주로 포함시켰다. 그런 세트리스트에 맞추어 미소를 지으며 무대에 임하는 멤버들의 모습은 회장 뿐 아니라 라이브 뷰잉이 진행되는 영화관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며 보는 이들의 기분마저도 밝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반짝거리는 멤버들의 모습을 보며 코사카의 마음 속에서도 지금껏 생각 해 본 적 없는 새로운 마음이 싹텄다.
‘아이돌이라는 존재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미소짓게 만드는구나. 혹시 나도 아이돌이 된다면 저렇게 밝게 웃을 수 있을까?’
코사카는 초등학생 때 부터 학교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성적은 좋은 편이었지만 친구가 많지 않았기에 학교라는 공간이 어색했다. 한 번은 일부러 밝게 행동해서 반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여자아이들 그룹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별로 가고싶지도 않은 약속에 억지로 따라가고 하다 보니 ‘이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야’라는 고민이 생겨서 결국 그 아이들과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그런 상황은 변함이 없어 성격은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했고 집 밖으로 한 발짝 나가는 것 만으로도 남들 눈을 의식해서 전전긍긍하기에 이르렀다. 학교에서도 몇몇 친구들 말고는 교류를 거의 하지 않고 항상 조용히 지내는 아이가 되었다.
‘다른 애들하고 이야기를 해 봤자 재미 있을 리도 없는데 뭐.’
재미도 없고 밝지도 않은 자신의 모습이 정말로 싫었다. 하지만 히라가나 케야키같은 그룹에 들어 갈 수 있다면 그런 자신의 모습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라이브 뷰잉을 보았던 그 날, 히라가나 케야키의 추가 멤버 오디션 접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코사카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인생에 한 걸음을 내딛었다.
첫 라이브뷰잉이 끝나고, 코사카는 그 때 느낀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느끼기 위해 다음 공연의 라이브뷰잉을 신청했다. 이번에는 코사카가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권유 했던 것이다.
부모님 앞에서 ‘서약서’에 지문을 찍다.
‘왜? 어째서 오디션을 보지 말라는 거야? 이유라도 알려줘요!’
미야타 마나모가 어머니를 향해 질문 공세를 펼쳤다. 손에는 갈기갈기 찢어진 서류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찢어진 서류는 다름아닌 히라가나 케야키 오디션 1차 심사 통과통지서였다. 격해져 있는 감정과는 반대로, 어머니를 몰아세우는 그녀의 말투는 무서울정도로 냉정하고 침착했다.
외동딸로 태어난 미야타는 어릴 때 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주변에서 ‘아가씨들이 다니는 학교’라 불리는 명문 사립중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도, 수험공부를 해서 결국 원하던 중학교에 들어 간 것도 전부 그녀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 간 중학교에서 그녀는 ‘아이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빠져버렸다.
그 당시는 TV를 켜기만 하면, 아니 TV를 보지 않아도 여기저기 붙어있는 광고에, 잡지에, 어딜 보아도 AKB멤버가 눈에 들어오는 시기였다. 미야타 역시 AKB의 팬이 되어 자신의 오시멘인 오오시마 유코를 비롯한 어리고 귀여운 여자아이들이 노력하는 모습, 춤 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CD를 사거나 거실에서 아이돌이 나오는 방송을 보지는 못했다. 연예계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어머니 앞에서는 ‘아이돌’이라는 화제를 입에 올리는 것 조차 거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억압받으면 억압 받을수록 그녀가 안고 있던 ‘동경’은 커져만갔다. 결국 미야타는 아이돌 뿐 아니라 만화, 애니메이션 등 비슷한 분야의 서브컬쳐로도 발을 뻗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고2였던 때, ‘친구가 티켓을 줬다’는 핑계를 대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러 갔던 성우 아티스트의 라이브가 그녀의 마음 속에는 너무나도 큰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나도 언젠간 저렇게 귀여운 의상을 입고 무대 위에서 춤 춰 보고 싶어’
그나마 고등학교 때 까지는 학교 댄스부 활동을 하거나 발레 교실에 다니며 춤을 추기는 했지만 대학생이 되어 그나마도 하지 않게 된 뒤, 오히려 ‘라이브’에 대한 열망이 커져만 갔다. 그리고 바로 그 타이밍, 그녀가 대학에 들어 온 지 2달도 채 되지 않은 타이밍에 히라가나 케야키의 오디션 응모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하고 싶은 일들은 전부 해 보자’ 라는 모토로 살아 온 미야타는 오디션 광고를 보고 부모님께는 비밀리에 오디션에 응모를 했다.
머지않아 문제가 생겼다. 1차 심사 합격 통지서를 아무 생각 없이 어머니 앞에서 뜯었고, 그 내용을 그녀의 어머니가 확인 한 순간,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집 앞 편의점을 갈 때에도 꼭 어머니가 붙어서 데리고 갈 정도로 애지중지 키워 온 외동딸이 자기 몰래 아이돌 오디션에 응모했다는 것을 안 그녀의 어머니가 격노하여 딸이 보는 앞에서 합격 통지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 때는 딸도 가만 있지는 않았다. 지금껏 크게 반항도 안 했던 미야타이지만 이 날 만큼은 집요하게 어머니에게 맞서 결국 아버지를 자기 편으로 하는 데에 성공, 두 분 부모님 앞에서 서약서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대학은 4년 딱 맞추어 졸업 할 것’
‘대학에 다니는 동안 사서 자격증을 딸 것’
이 두 가지 조건이 적힌 서약서에 지장을 찍고 나서야 겨우 오디션을 봐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이 때까지만 해도 딸이 아이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미야타가 최종 심사에 합격한 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녀의 어머니는 ‘너 정말로 아이돌 할 생각이야?’라고 질문을 했다. 그리고 미야타는 이런 어머니의 질문에 딱잘라 대답했다.
‘응. 할 거야. 여기까지 와 버렸는걸.’
미야타는 어릴 때 부터 친구들과 놀러 가는 것 보다 부모님과 함께 외출하는 것을 좋아했을 정도로 가족애가 강한 아이였다. 지금껏 부모님의 말에 거스른 적도 없었지만 이 오디션에 대해서만큼은 시종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던 것이다.
본인은 기억하지 못 하는 듯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에 의하면 이런 ‘자신이 정한 일에 대해서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 면’은 사실 어릴 때 부터 종종 드러났다고 한다.
차 안에서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두르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미야타는 ‘나, 이렇게 강한 면도 있었구나’ 라고 내심 놀랐다고 한다.
떨어진 후보생들이 남기고 간 편지
그런 미야타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최종심사날에 있었던 일이다. 최종심사를 앞두고 운영측은 후보생들을 10명 정도씩 나누어 각자 다른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했다. 미야타가 속해있던 그룹은 같은 방이 된 뒤, 한 차례 자기소개를 하고는 다들 침묵을 지켰다. 숨막힐듯한 침묵과 어색한 분위기 안에서 후보생들은 그저 자기 차례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였다. 옆 방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아!!’
옆 방 멤버들은 방 안에서 발성 연습을 하고 있는 듯 했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큰 소리로 노래 연습을 하는 소리, 자기 소개를 연습하는 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왔다.
사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날 미야타와 같은 방을 썼던 후보자 중 최종 합격 한 것은 미야타 한 명 뿐이었다. 반면 왁자지껄했던 옆 방 멤버들 중에서는 토미타 스즈카, 니부 아카리, 마츠다 코노카, 와타나베 미호, 코사카 나오 총 5명이 합격했다.
옆 방에서는 토미타나 와타나베가 개인기를 하며 다른 후보생들을 웃기는 등, 시종 좋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미야타를 놀라게 한 ‘아!’라는 소리도 그 방에 있던 누군가가 ‘이번이 마지막 심사니 최선을 다 하고 싶다’는 말에, 전원이 벽을 향해 ‘아!’하고 소리를 지르기로 한 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옆방 멤버들은 마지막까지도 ‘다 함께 힘 내자’며 서로를 다독였다. 방에서 나와 무대 뒤에서 대기를 할 때엔 감정이 벅차올라 서로를 끌어안기도 했다. 코사카와 와타나베도 이 때 ‘힘 내자’며 서로를 끌어 안았다. 둘은 그 날 처음 만난 사이였다. 사실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 히라가나 케야키로 활동을 시작 한 뒤로도 각별한 관계가 이어져 오고있다.
그런 좋은 분위기는 최종심사에도 이어졌다. 한 멤버가 자기소개를 할 때면 다른 멤버들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합격자가 발표 된 후, 불합격한 후보자는 먼저 귀가하고 합격자들만이 남아 사진을 찍게 되었다. 미야타와 옆방에서 합격한 5명 외에도 카네무라 미쿠, 카와타 히나, 하마기시 히요리가 합격했다.
합격자들은 사진을 찍은 뒤, 대기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기실은 이미 텅 비어 있어, 불합격한 후보자들의 모습은 없었다. 하지만 테이블 위에는 편지가 한 통 놓여있었다.
‘우리 몫까지 열심히 해 줘! 응원할게!’
메시지 아래에는 떨어진 아이들 전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최종심사에 임하기 전에 함께 찍은 사진과 이 편지만이 떨어진 아이들이 이 곳에 함께 있었다는 증거였다.
2017년 8월 13일.
이 날 열린 최종심사 결과, 9명의 히라가나 케야키자카46의 추가 멤버가 확정되었다. 1만 5천명이나 되는 후보자 중에서 선택을 받은 9명의 멤버들은 히라가나 케야키의 2기생으로서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들의 선배, 히라가나 케야키 1기생들의 활동이 ‘한자 케야키와는 다른, 히라가나 케야키다움’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면 2기생들의 활동은 다름아닌 ‘선택받은 자의 책임을 다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 중 하나가 바로 ‘선택받은 자로서, 자기 스스로도 무엇인가를 선택해야만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9명의 멤버 중 가장 먼저 이런 힘든 선택을 강요받게 된 것이 바로 하마기시 히요리였다.
너무 울어 퉁퉁부은 눈으로 올려다 본 호텔 천장
하마기시는 언니의 영향으로 3살때부터 발레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발레 교실을 바꾸어 엄격한 선생님의 지도를 받게 된 이후로는 발에 잡힌 물집이 터져 발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연습을 계속하고, 학교에 있을 때 조차 발레 노트를 읽을 정도로 발레에 몰두했다. 그녀에게 있어 장래 희망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발레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 뿐 아니라 초등학생 때 부터 패션잡지를 즐겨 읽었던 그녀는 청소년 대상 잡지는 물론이고 20대 대상 패션지까지 섭렵했다. 사실 패션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예쁜 모델을 보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패션지를 읽었다고 하는 그녀는 중학생이 되어, 오디션을 받을 수 있는 연령이 되자 스스로 오디션에 응하여 2년 연속으로 최종 후보자에 들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합격은 하지 못 했다. 패션잡지 오디션에 떨어져 낙담해 있는 하마기시에게 ‘이런 오디션도 있는데 받아볼래?’라고 어머니가 권해주신 것이 바로 히라가나 케야키의 추가 멤버 오디션이었다.
사실 하마기시는 나가하마 네루의 팬이었다. 하마기시는 당시만 해도 한자/히라가나 겸임이었던 나가하마의 귀여운 얼굴과 목소리에 푹 빠져있었다. 게다가 발레 발표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귀여운 의상을 입고 춤을 출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결국 하마기시는 어머니가 권해 준 오디션을 받았고, 보기 좋게 합격 해 냈다.
하지만 합격 직후, 예상도 못 했던 일이 벌어졌다. 하마기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가 발레 교실에 전화를 해서 그만 두겠다고 말을 한 것이다.
‘왜 엄마 맘대로 선생님한테 전화 했어? 왜? 왜? 왜?!’
사실 이 때 하마기시는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에 발탁되어 이미 두 달 넘게 맹연습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안무도 완벽히 숙지하였고 자기 몸에 맞춘 의상도 완성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10년 이상 발레를 해 오면서 꿈에도 그리던 큰 무대가 코 앞에 있었다.
하마기시는 집을 박차고 나와 발레 선생님에게 라인을 보냈다.
‘저 이번 역할 포기 안 해요. 발레도 절대로 그만두지 않을 거예요.’
집으로는 돌아가기 싫어 밖에서 펑펑 울고 있으려니 차를 타고 하마기시를 찾으러 나온 아버지와 맞닥뜨렸다. 우는 딸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하마기시를 한 호텔로 데려 가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말하자면 부모님이 허락한 가출이었다.
딱히 TV를 볼 마음도 들지 않고 그렇다고 샤워를 할 생각도 들지 않아 그저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뒹굴거리던 하마기시는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호텔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 보았다. 천장을 가만히 보다 보니 여러 생각들이 밀려왔다. 언제나 내 편이던 어머니가 어째서 자신에게서 발레를 빼앗으려 한 것일까,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그 때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두 가지를 모두 양립한다는 건 무리겠구나. 아이돌이 되기 위해선 발레를 그만 둬야 하는 거구나. 엄마도 그걸 알고 나를 위해 선생님께 연락 드려 준거야…’
하마기시는 그 전까지는 막연하게 두 가지를 모두 양립해 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 해 보면 히라가나 케야키의 멤버가 되어 활동을 한다는 것은 발레를 그만두고 도쿄로 상경하여 ‘아이돌’이라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선택 받은’ 자들은 자신들 스스로도 ‘선택’을 해야만 하는 법이라는 잔인한 섭리를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발레 교실을 그만둔 뒤, 적어도 자신이 나올 예정이었던 무대는 보러 갈 생각이었지만 그조차도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본디 자신이 서 있어야할 곳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9명의 선택받은 소녀들은 각자의 사정을 가슴 속에 품은 채, 화려하지만 험난한 아이돌의 길로 한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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