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TURE 002 - MARIKA ITO ONE AND ONLY
MARIKA ITO ONE AND ONLY
1. 패션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패션 디자이너셨던 엄마가 정기구독을 하셨던 ‘소엔’을 읽으면서부터였습니다. 중학생 때였던 것 같네요. 그 당시에는 항상 옷을 엄마에게서 물려 받았기에, 그런 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어요.
같은 반 친구들이 중학생 대상 패션잡지들을 보는 것을 보고 저 역시 그런 잡지들을 보기도 했지만, 엄마에게 그런 모습을 들키는 게 뭔가 좀 무서웠어요. 엄마 몰래 다른 아이들과 함께 옷을 사러 간 적도 있지만, 사고 난 뒤에는 항상 후회를 했습니다. 아무래도 친구들과 산 옷은 그 때 그 때 유행에 맞추어 산 옷들이기에 1년만 지나도 ‘아 역시 이 옷 사지 말걸…’이라고 후회하는 것들 뿐이었어요.
이런 실패를 몇 번이나 경험하고 나서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덮어놓고 유행을 좇는 것은 제게 맞지 않는다는 것 말이지요. 주변 친구들과 비슷한 옷을 입는다고 엄마가 뭐라 하시는 경우는 없었지만, 엄마는 내심 제가 금방 방황을 끝내고 돌아 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고 해요.
그 뒤로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을 딱히 신경쓰지 않게 되었어요. 혼자서 엄마가 자주 가시는 패션샵에 가기도 했고요. 노기자카의 다른 멤버들과 저는 패션 경향이 좀 다르기는 해도, 다른 멤버들 역시 유행을 의식하면서도 자신들만의 고집이 있기에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있어요.
2. 아트
어릴 때부터 노트와 펜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이었어요. 여유만 있으면 그림을 끄적였지요. 오사카에서 살 때는 미술학원에 다녔는데, 거기 선생님께서 그림 칭찬을 많이 해 주셨기도 하고, 당시에 순정만화에 빠져 있기도 했기에 장래 희망이 만화가였습니다. 학교 미술 성적 역시 5(※수우미양가의 ‘수’에 해당)였고요. 그림 그리는 것 하나는 자신이 있었어요.
노기자카에 들어 온 뒤로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나쨩이나 와카츠키, 마이마이처럼 그림을 잘 그리는 멤버들이 많다 보니 어필하기가 좀 힘들더군요. 하지만 8번째 싱글에 실려 있는 다큐멘트 영상 ‘노기자카의 4인’의 감독이신 쿠마사카상의 단편소설 ‘날개짓하는 시체’의 일러스트를 그린 뒤로는 ‘나만이 그릴 수 있는 그런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창작 의욕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번에 그린 그림은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어요. 한 번 완성 한 뒤에 그림을 보다보니 아무래도 임팩트가 좀 더 필요한 것 같아서 다시 고쳐 그렸지요. 최근에 자주 그리는 그림은 이런 추상화 종류인데요, 전체적으로 좀 어두운 터치가 많아서 이번 작품은 일부러 좀 밝은 느낌으로, 뭔가 폭발하는 느낌으로 그려보았어요.
테마도 딱히 정해 둔 것은 아니라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그리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조금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정도가 딱 좋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웃음)
3. 과거
유소년기 : 매사에 청개구리에 항상 정신머리 없는 아이였어요.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해서 괜찮은 사진이 남아있지 않은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 당시에는 오빠, 오빠 친구들이랑 놀곤 했기에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논 기억이 별로 없어요.
초등학생 때 : 그냥 평범한 아이였어요. 그림을 자주 그리는 아이였지요.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건 괜찮았는데 어째선지 가족들과 사진을 찍으면 표정이 뾰루퉁 해지곤 했지요. 반항기라 해야 하나요, 그저 웃는 게 부끄러웠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 해 보면 딸로선 최악이었지요. 엄청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습니다.
중학생 때 : 중학생 때 만난 친구들은 정말 좋은 아이들뿐이었어요. 딱히 학교 부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4살 때 시작했던 발레에 몰두했던 시기였습니다. 딱히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던가 하는 꿈은 없었지만 춤 추는 게 그저 좋았어요. ‘내 춤을 봐 줘’라는 느낌이랄까요.
고등학생 때 : 사진은 노기자카 오디션에 응모 한 상태에서 나갔었던 마지막 발레 발표회 때 사진이에요. 고등학교에 들어 와서도 발레에 몰두했었어요. 노기자카에 합격하지 않았다면 그 다음 발표회 때는 주역자리를 맡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예계에 대한 꿈이 있었기에 발레를 포기하고 노기자카를 선택했어요. 이 때가 제 인생의 큰 터닝포인트였지요.
4. 가족이 말하는 ‘이토 마리카’
오빠가 동생에게
제 동생은 한 번 빠진 것에 대해서는 거의 완벽하게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멋 내기에 빠진 뒤로는 어느 사이엔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옷을 사 온다던가, 제가 외출을 할 때 제 패션을 평가하며 놀린다던가. 뭐, 이건 요즘은 잘 안 합니다만. 최근 들어 빠져있는 것은 요리인 것 같아요. 자주 요리를 만들어 주곤 하거든요. 반대로 흥미가 없는 것은 철저하게 안 하는 구석이 있기에, 그런 부분은 좀 고쳤으면 합니다.
엄마가 딸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면 팔불출이라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마리카는 어릴 때부터 센스가 있는 아이였어요. 숫자도 잘 못 셀 정도로 어릴 때부터 젓가락을 능숙하게 사용한다던가, 글씨를 예쁘게 쓴다던가, 그림도 잘 그렸고, 발레도 곧잘 했습니다. 제게 있어 유일하게 센스가 있는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예요. 그렇기에 함께 쇼핑을 가는 게 참 즐겁습니다. 앞으로도 스스로의 센스를 믿고, 더더욱 많은 것을 추구하며, 그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발신하여 응원 해 주시는 여러분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빠가 딸에게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요… 마리카가 갑자기 ‘난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때 저는 ‘그래. 마리카라면 그렇게 될 수 있을거야’라고 확신을 했지요. 그렇기에 노기자카 오디션을 받게 되었을 때도 붙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팔불출 부모의 시선이라 신빙성은 없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디자인 센스나 색을 고르는 센스를 볼 때는 프로 디자이너인 저조차도 깜짝 놀랄 때가 있지요. 노기자카 활동을 통해 더 많은 분야에 도전 해 보았으면 해요.
5. 노기자카46
- 노기자카 초기에 자신이 아이돌이라는 자각은 있었나요?
마리카 (이하 ‘마’) : 처음에는 ‘아이돌이란 게 뭘까?’라는 의문을 가진 채 활동을 했어요. 지금 생각 해 보면 프로 의식이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데뷔를 하고, 그룹이 선발과 언더로 나뉘게 되면서 ‘아… 여기도 서열이 생기는구나’라고 느낀 뒤로는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더 강해져서 여러 모로 갈등하게 되었지요.
- 소위 말하는 ‘아이돌 다운 모습’, 다시 말 해 반짝반짝거리는 소녀스러운 모습을 연기해야 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나요?
마 : 그다지 없었어요. 방송에서 좀 더 샷을 받기 위해서는 캐릭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만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기에는 저 말고도 그림 잘 그리는 멤버가 많았고, 발레를 내세우기에는 셋쨩(※미야자와 세이라)의 실적에 못 미치고… 그런 상황이었기에 캐릭터를 만들려고 초조해했어요. 사실 털털한 부분을 내세워서 ‘아저씨 캐릭터’를 밀어보기도 했지만, 주변 평가가 영… (웃음)
- 제 기억이 맞다면 동안 캐릭터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 ‘베비땅’이었던가요?
마 : ‘베비땅’이라… 사실 캐릭터도, 별명도 정착이 안 되어 초조해 하고 있을 때, 멤버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어요. 사실 저 스스로는 제가 동안이라는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지만, 일단 그렇게라도 별명이 생긴 게 기뻤어요. ‘이걸 밀면 팬분들께서 날 기억 해 주시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안심도 되었고요. 지금 생각하면 흑역사지만. (웃음)
- 그럼 아까 얘기로 돌아 가 볼까요. 선발과 언더로 나뉘게 되었다는 게 그룹 활동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나요?
마 : 아이돌로서의 활동이 본격화 된 것 역시 그 때부터였거든요. 미디어에 자주 나가는 멤버와 저를 비롯하여 미디어 출연이 적은 아이들로 나뉘기도 했고. 사실 발레를 할 때는 제가 열심히 연습만 하면 그게 결과로 이어졌기에 투쟁심이 생겼거든요. 물론 그런 투쟁심을 잃었던 것은 아니지만, 딱히 입 밖으로 내지 않고 홀로 고민하는 경우가 더 늘었다는 게 문제였지요.
-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았나요?
마 : 네네에게는 자주 상담 했지만, 지금 생각 해 보면 그것도 전부 냉정한 현실을 알고 낙담했던 것 뿐이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프로의식이 없었던 것이죠. 그런 와중에 행운이 찾아왔어요. 바로 퍼스트 싱글 개인 PV(야나기사와 쇼 감독의 ‘나이프’)가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 개인 PV가 없었더라면 저는 그냥 낙담한 채로 다시 일어서지 못 했을 거예요. 정말 그 PV가 좋은 계기를 마련 해 주었습니다.
- 그 개인 PV를 찍기 전까지 연기 경험이 있었나요?
마 :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나이프’라는 작품의 분위기가 제가 항상 동경해 왔던 분위기였기에 저 나름대로 작품을 해석하고 촬영에 임했습니다.
- 나이프 이후로도 마리카상의 개인 PV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요. 특히 5th 싱글에 수록된 ‘마릿카’17’은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요.
마 : ’마릿카’17’은 2nd 싱글 개인 PV를 찍어주셨던 후쿠시마 마키 감독님께서 ‘다시 한 번 마리카와 촬영을 하고싶다’고 말씀 해 주셨다는 얘기를 듣고, ‘이런 일도 있구나’라고 감동해서 찍은 작품이에요. 아직까지도 ‘마릿카’17’가 좋았다고 이야기 해 주시는 분들이 많을 정도로, 그 작품이 아니었다면 제 이름이 지금처럼 퍼지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당시 17살이던 제게 딱 맞는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곡이 저보다 더 유명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웃음)
- 작년(※2015년) 2월에 있었던 버스데이 라이브(요코하마 아리나)에서 ‘마릿카’17’을 선보이셨지요.
마 : 사실 그 얘기를 듣고, 스태프분께 울면서 ‘무리예요. 저 같은 게 솔로무대를 한다니 말도 안 돼요’라고 이야기 했었어요. 하지만 정작 무대에 서서, 팬분들께서 그 가사를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어요. 버스데이 라이브 때 선보였던 그 무대로 저에 대해 알게 되셨다는 분도 계시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 연기 얘기를 계속 해 보지요. ‘16명의 프린시펄’ 도 경험하셨지요?
마 : 저보다 먼저 연기를 하는 멤버들의 모습을 보며, 연기를 할 줄 아는 멤버와 그렇지 못 한 멤버가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든 생각은 ‘그럼 나는 어느 쪽인가’라는 점이었지요. 그런 생각을 갖고 무대에 섰습니다. 2012년에 열렸던 1회째 ‘프린시펄’ 때는 꽤나 고전을 했지만, 2회 때는 저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연기를 했고, 3회 때는 여러 가지 역할을 소화 해 본다는 목표를 세우고 무대에 임하여, 그 목표를 달성하기도 했어요. 앞으로도 연기는 쭉 도전 해 나가고 싶어요.
- 작년에는 언더 라이브가 열렸었지요. 마리카상은 8번째 싱글, 9번째 싱글에서 언더 센터를 경험하시고, 그 경험을 10번째 싱글 언더 센터인 이노우에상, 11번째 언더 센터인 나카모토상에게 이어 주셨는데요.
마 : 제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 가는 이벤트라 생각 해 왔던 언더 라이브가 이렇게 커 질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언더 라이브는 정말 좋은 경험의 장이었지요. 2014년은 1년 내내 언더 멤버였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정말 후회 없는 1년이었습니다. 사유나 히메카가 곁에 있어 주었기에 안심할 수 있기도 했고, 그런 언더 라이브의 정신은 앞으로도 이어져 내려 갈 것이라 생각해요.
- 노기자카라는 그룹에 들어 왔기에 마리카상이 자신을 표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마 : 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일반적인 아이돌 그룹이었다면 개인 PV라는 시도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노기자카라는 그룹이 갖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도 좋고요. 노기자카에 들어 왔기에 아이돌이라는 일 자체를 계속 해 올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그룹에 들어갔더라면 이번 특집 기획처럼 제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특집 기사에 저를 다뤄 주시지도 않았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이번 특집 기사를 읽으시는 분들께서 ‘아이돌답지 않은’ 저에 대해 알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기회를 받았을 때엔 저 자신을 감추지 않고 더욱 더 표현 해 나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