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DY 2018 10 야마시타 미즈키 2만자 인터뷰 (1/3)
'노기자카46의 미래를 야마시타 미즈키에게 맡기고파'
도쿄돔에서 하나로 이어진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2017년 11월.
노기자카46에게 있어 첫 도쿄돔 콘서트인 '노기자카46 한 여름의 전국투어 2017 파이널 도쿄돔 공연'이 열렸다.
데뷔 한 지 5년 8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겨우 서게 된 '꿈의 무대', 도쿄돔 공연에는 이틀에 걸쳐 10만명이나 되는 관객들이 찾아주었다.
이로 인하여 같은 해 노기자카46의 라이브장을 찾은 사람은 총 46만명 이상에 달하여, 노기자카는 명실상부 '일본을 대표하는 아이돌'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열광과 감동으로 가득 찼던 도쿄돔 공연이 한창이던 때의 일이다.
팬들의 열렬한 환성을 받으며 무대 중앙에 난 하나미치를 걷던 야마시타 미즈키는 문득 객석 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실 저, 이전에 도쿄돔에 왔었어요. 마에다 아츠코상의 졸업 콘서트를 보러 왔었거든요. 분명 2층 앞에서 3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지요. 그래서 '당케 셴'이나 '하우스!' 때 객석으로 갔었을 때, '아, 나도 예전에 저기서 공연을 봤었지'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 당시 오시멘이자 동경의 대상인 오오시마 유코상과 한 순간 시선이 마주친 적이 있는데, 솔직히 '이렇게 뒷자리니까 무대에서 보일 리가 없어. 그냥 기분탓일거야'라고 넘겼었어요. 하지만 정작 제가 무대에 서고 보니 예전에 제가 앉아 있던 자리의 팬분 얼굴이 너무 잘 보이더라고요. 그 때 알게 되었지요. 오오시마상도 이렇게 나를 봐 주셨겠구나. 라고. 그리고 그 순간, 6년 전… 13살이었던 저와 현재의 제가 하나로 이어진 것 같았어요."
회장을 가득 메운 팬들의 환성과 박자에 맞추어 울려퍼지는 박수소리, 그리고 회장을 빛으로 가득 채운 사이리움 불빛까지… 수 많은 모습들이 한 데 오버랩 되며 야마시타의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때, 그녀는 마음 속으로 다시 한 번 '팬 한 분 한 분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맨 뒷자리에 앉아 계시는 분들께서도 즐기실 수 있도록 열심히 하자'라고 다짐을 되새겼다. 그리고 동시에 한 가지 꿈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싹을 틔웠다.
"도쿄돔 콘서트가 끝나고나서, 앞으로 어떤 것을 해야할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일반적으로 아티스트분들은 '우선 부도칸을 목표로 열심히 하자. 그리고 그 뒤에는 도쿄돔'이라는 목표를 세우곤 하시잖아요. 그런데 저희 3기생들은 첫 공연장소가 바로 그 '부도칸'이었고, 데뷔 한 지 겨우 1년만에 도쿄돔에 서게 된 거였죠. 그렇기에 더더욱 '그룹'이 아닌 자신의 목표를 잘 세워야만 했어요. 그런 점을 감안하여 자신의 꿈이 무엇인가를 생각 해 본 결과, 이렇게 말씀드리면 되게 바보같기는 하지만… '슈퍼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돌이 되자'는 것이 제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어머니의 애정과 교육, 학교에서 경험한 좌절과 포기
1999년 7월 26일.
유명한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가 '7월 하늘에 공포의 대왕이 강림할지니'라며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 예언했던 그 해, 그 달에 이 세상에 태어난 야마시타 미즈키.
그렇게 태어난 야마시타는 외동딸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다.
"엄청 과보호였어요. 저 자신이 보기에도 '우리 부모님께서 정말 많이 아껴 주셨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지요. 아기가 태어나면 곧바로 수건으로 감싸주잖아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그 수건마저도 엄청 좋은 소재를 쓰는 비싼 브랜드 수건이었을 정도예요. 그 수건을 사 가서 간호사분께 '우리 아가는 이 수건으로 감싸주세요'라고 말하며 넘겨 주었더니, 상자마저 고급스러워서 간호사분께서 이걸 버려도 될 지 몰라 병실 구석에 수건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리고 머리 손질은 항상 엄마가 해 주셨는데요, 항상 유치원에 가기 2시간 전부터 일어나서 엄청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머리를 땋아주시고, 잘라주시고 했어요. 매일 머리 스타일이 달랐을 정도였지요."
어린 시절에는 낯가림이 심하고 매사에 소극적이었다는 그녀. 본인 말에 따르면 '과묵하고 얌전하며, 표정변화도 얼마 없는 아이'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단생활이 잘 맞지 않았어요. 그렇기에 친구들과 밖에 나가서 놀기보다는 집에서 혼자 노는 경우가 많았지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가 만들어 주신 프렌치토스트나 팬케이크를 먹으면서 의자에 앉아 드라마나 버라이어티 방송을 보곤 했어요. 심할 땐 의자에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이기도 했지요. 정말로 항상 집에만 있으면서 말도 한 마디 안 하곤 했지요. 표정도 밝지 않았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언제나 어두웠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웃음)"
그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 해, 야마시타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은 계기가 찾아왔다. 그녀의 생일에 부모님이 노트북을 사 주었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휴대폰도 엄마가 쓰시던 것을 받았던 것이었기에 제 전용 노트북이 생긴 뒤로는 단숨에 세계가 확 넓어졌지요. 아이돌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그 때였고요. 저랑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는 사람들인데도 사는 세계가 너무 달라 '엄청나'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때를 기점으로 거의 매일같이 아이돌 동영상에 빠져살았어요. 혼자서 아키하바라나 나카노 브로드웨이에 가서 생사진을 교환하기도 했고요. (웃음)"
그 당시는 AKB48이 공전절후의 붐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때였다. 야마시타, 그리고 그녀 주변의 친구들 중 많은 수가 AKB48의 팬이었던 점은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외동이다 보니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그리 익숙치는 않았어요. 친구는 있지만 그냥 데면데면한 정도였달까. 사실 저 자신도 '이렇게 행동하면 평범한 사람 같겠지'라고 정해 둔 면도 있었기에 학교에서도 딱히 눈에 띄는 단독행동은 하지 않고 적당히 주변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남들 하는 걸 남들 하는 만큼 하는 그런 학생이었지요. 반 안에서도 '특별한 일부'보다는 '기타 다수'안에 들어가고 싶었고, 그렇게 되기 위하여 튀지 않으려 했지요.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너무 위도 아래도 아닌 그저 '극히 평범한' 중간 위치에서 살아 왔다고 할 수 있겠네요.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선택한 '처세술'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말하는대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일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녀가 이토록 '평범'이라는 말에 의미를 두는 것은 그녀가 주변으로부터 '귀엽다'던가'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기에, 그에 대한 반동으로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숙여 왔던 방증은 아닐까.
"이목구비가 뚜렷하다보니 세보인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많았어요. 표정도 풍부한 편이 아니다 보니, '쟤는 대체 뒤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거나 '성격 나빠 보인다'는 말을 듣는 경우도 종종 있고요. 그 결과, '다가서기 힘들'다던가 '차가운 아이'라는 오해를 사곤 해요. 그렇기에 그런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따뜻해 보이려고 노력했지요. 하지만 그러다가 좀 오버 해 버리거나 하면 '쟤는 되게 나댄다'라던가 '저런 거 전부 연기'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고요. 어느 쪽으로 가도 힘들었어요."
바로 그렇기에 야마시타는 항상 '눈에 띄지 말자', '주변에 녹아들자'라며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것이다. '중간'에 위치함으로 하여 학교생활,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온갖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 해 보면 그냥 제가 너무 깊이 생각했던 것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 나이또래 아이들에게 있어선 학교가 전부잖아요. 그렇기에 다른 아이들에게 밉보이면 그대로 인생이 끝나버린다는 공포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를 너무 신경쓰다 보니 저 자신을 남들 시선에 맞추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누가 뭐라건 나는 나야.'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어린 야마시타의 마음은 너무 여렸다. '친구들 뿐 아니라 주변 어른들의 표정도 살피며 살아왔다'고 이야기 하는 그녀.
"특히 부모님의 압박이 컸지요. 학교에서는 학급위원을 하고, 성적은 항상 톱클래스여야만 한다는 것이 저희 엄마의 이상이었거든요. 엄마도 머리가 좋으시다 보니 저 역시 그렇게 되길 바라셨던 것 같아요. 그렇기에 그런 부모님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하여 성적을 항상 상위권으로 유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경우, 애초에 머리가 나쁘다 보니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성적이 나오질 않았어요.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머리가 잘 돌아가잖아요. 요령이 좋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렇기에 시험을 앞두고는 3일 연속으로 밤을 새서 교과서를 읽고 또 읽었어요. 그러다 보니 시험기간만 되면 살이 쫙쫙 빠져서 부모님이 '못 봐주겠다'고 걱정하실 정도였지요. (웃음)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필사적으로 공부 해도 1등이 되질 못 했어요. 그 때, '아, 내 인생에서 1등이 될 일은 없겠구나'라고 자포자기하게 되었습니다."
후회를 없애기 위해 인생을 다시 시작하다.
가만히 숨을 죽인 채 학창시절을 보내던 야마시타. 하지만 그녀가 고 2였던 해 여름, 그녀의 인생을 크게 좌우할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
2013년 5월에 2기생들이 가입한 이후로 3기생을 모집하고 있지 않던 노기자카46가 3년만에 3기생을 모집하기 위하여 오디션을 개최하였던 것이다.
그럼 그녀는 어떻게 그 오디션을 보게 된 것일까.
"고교생활도 나름 즐거웠었지만, 내심 매사에 타협하고 있다는 후회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특히 중학교 시절은 매사에 어중간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기억이 고교생이 된 이후로도 마음 한 구석에 찝찝하게 남아 있었거든요. 중화요리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공부를 하며 어영부영 살아가다 보니 문득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대로 가다 보면 대학교도 좋은 데는 못 들어 갈 것 같았고…"
자신의 장래에 대한 예상이 전혀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저 하루하루 따분하게 흘러 갈 뿐… 그저 주어 진 시간동안 교실 구석에 앉아있기만 하던 무기력한 자신에 대해 혐오감마저 느꼈다고 하는 그녀.
"인생은 단 한 번 뿐인데 이렇게 낭비해도 되는걸까… 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식으로 청춘을 보낼 바에는 그냥 모든 것을 다 던져 버리고 다른 세상으로 가 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노기자카46의 3기생 오디션을 알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오디션을 볼 생각은 없었는데 이대로 약한 저 자신에게서 도망쳐서는 언제까지고 변하지 못하고 평생 도망만 다니게 될 것 같았지요. 그렇다면 이 오디션에 모든 것을 걸어 보자!! 지금까지 어중간하게 살아 온 데 대한 후회를 전부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노기자카에 들어가서 인생을 다시 시작 해 보자! 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다 타버린 재 속에 숨어 있던 희미한 불길…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희미한 꿈은 아직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불길은 다시 한 번 야마시타의 마음 속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인생을 리셋하자' 그런 일념을 마음에 품고, 야마시타는 3기생 오디션에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1기생, 2기생 모집때의 그것을 크게 상회하는 4만 8986명의 응모자 중 선택을 받은 12명의 멤버 안에 그녀의 모습이 있었다.
야마시타 미즈키가 아이돌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