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비 소설판 - 1장
- 겨우 7일만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제 1장
야마무로 카에데는 잠에 빠져 있었다.
관광버스 내부는 교복 차림 소녀들이 내는 소음으로 시끌벅적했다. 그렇게나 시끄러운데도 그녀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잠 든 그녀의 얼굴은 마치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도 깊게 잠이 든 탓일까, 그녀의 얼굴은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수학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기에 그동안 쌓여있던 피로가 얼굴에 드러나 죽은 것 처럼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버스는 잠 든 그녀를 태운 채 산길을 달린다. 저녁 빛이 드리우는 삼나무 숲 사이를 달리고 또 달린다.
갑자기 버스가 크게 흔들렸다. 그 충격에 잠들어있던 카에데가 눈을 떴다.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지...?”
카에데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이죠 아스미에게 말을 걸었다.
“계속 잠만 자길래 죽은 건 아닌가 했어.”
짓궂게 웃으며 아스미가 대답했다.
“뭐라고?”
카에데는 프리지아 학원 중등부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내 온 아스미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프리지아 학원.
중, 고등학교 일관으로 운영되는 기숙제 여학교이다.
관련시설도 전부 학교 부지 안에 완비 되어 있으며, 학생들은 그 안에서 중, 고등학교 6년간을 보내는 것이다.
또한, 프리지아 학원은 소위 말 하는 ‘미션 스쿨’로, 부지 내에는 채플, 다시 말 해 교회도 있었다.
카에데와 친구들은 오랜만에 학교 밖으로 나와 수학여행을 하고, 다시 그 학교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난 모양이야. 그래서 지금 국도로 돌아가고 있어.”
앞 쪽 자리에서 반장인 모로즈미 미노리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이야기했다.
“그래?”
카에데는 그렇게 대답을 하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미노리의 말 대로 고속도로가 아닌 산길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자는 사이에 고속도로에서 벗어났구나…)
잠에서 덜 깬 상태로 카에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이미 운전석에서는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카 내비게이션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운전대를 잡아 온 버스 운전사조차도 처음 보는 에러였기에 어떻게 손을 써 볼 수도 없었다.
자신들이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 지 아무도 모르는 채, 버스는 소녀들을 태우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카에데는 버스 앞 좌석 등받이에 설치되어 있는 그물망에 다 읽은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집을 쑤셔넣었다. 그물망 안에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수학여행 일정표도 꽂혀 있었다.
카에데는 한숨을 쉬며
“아, 아직도 나가노현이야? 학교에 도착하면 대체 몇 시일까…”
라고 한탄했다.
“그러게…”
카에데의 말에 맞장구 치는 아스미의 목소리에서도 불만이 뭍어났다.
생각 같아선 빨리 학교로 돌아 가 쉬고 싶지만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노릇. 다른 학생들은 이미 포기 하기라도 한 듯 친한 그룹들끼리 모여 각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는 아이도 있었고 기념으로 사 온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수다를 떠는 아이들도 있었으며 거울을 보며 몸단장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각자 자신들만의 방식대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학생들과는 대조적으로 담임인 미야가와 아이는 연신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지연된 일정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 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점만 보아도 선생과 학생의 차는 역력히 드러났다.
(다시 잠이나 잘까. 잠 좀 자면 시간도 가겠지.)
그렇게 생각한 카에데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녀가 눈을 감은 순간, 끼기긱 하는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버스가 급정거했다.
버스 안을 가득 메운 소녀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비명을 질렀다. 카에데 역시 눈을 뜨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아스미가 깜짝 놀라서 이야기했다. 평소보다 큰 목소리였다.
다행히 패닉 상태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소녀들의 웅성거림은 멎을 줄 몰랐다.
“상황 파악이 끝날 때 까지 자리에 앉아 기다려 주세요.”
담임인 미야가와는 학생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운전수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눈 뒤, 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차 밖으로 나갔다.
차창 밖으로 흰 연기가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차체 아래에서 피어 오르는 것 같았다. 이윽고 흰 연기는 빽빽하게 늘어선 삼나무 숲 사이로 흘러갔다.
삼나무 숲 속으로 흘러가는 연기를 눈으로 쫓던 카에데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그녀의 시선이 멎은 곳은 삼나무 숲 속 오솔길 옆에 세워진 지장보살상 부근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지장보살상이 아니었다. 바로 지장보살상 사이사이를 가득 메우듯이 세워 져 있는 무수한 ‘손’들이었다.
손바닥을 활짝 펼치고, 마치 무언가를 갈구하듯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손들이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이다.
그 ‘손’들은 돌로 만들어 져 있는 것 처럼 보였다. 어떤 것은 왼손, 어떤 것은 오른 손… 좌우로 기울어 져 있는 것들도 간간히 보였지만 대부분은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펼친 모양새였다.
“도대체 저건 뭐지…”
아스미가 카에데의 손을 잡으며 나직이 내뱉었다. 그녀도 지장보살과 ‘손’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십 수년간 살아오면서 이런 그로테스크한 광경을 목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대체 이건 무엇일까. 지장보살 신앙과 손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떨렸다.
“…여러분.”
공포에 질린 카에데의 귓가에 미야가와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 덕분에 카에데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버스를 고칠 때 까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그리고 여기는 어째선지 무선도,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것 같네요.”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일단 버스에서 내립시다. 휴대폰이 터지는 곳 까지 걸어 가, 다른 버스를 불러서 돌아가죠. 여러분 내릴 때 귀중품은 잊지 말고 챙기세요.”
학생들은 투덜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반장인 미노리가 솔선해서 학생들을 이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은 버스에서 내렸다. 카에데는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저녁놀이 물든 하늘은 금새 어두워 질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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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전파가 안 터지다니! 말도 안 돼!”
컴컴한 산길을 걸으며 카네무라 유이가 투덜댔다.
유이는 카에데의 반에서도 눈에 띄는 학생이다. 교내 서열로 봐도 상위권에 있는 학생이고,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는 이지메 그룹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때로는 반장인 미노리, 카에데 등과 충돌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불량학생은 아니었다. 국내외 할 것 없이 최신 패션에 밝은 정보통이기도 했고, 패션 센스 역시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아버지가 병원 경영자이고 어머니가 통번역가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정보가 빠르고 센스가 좋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버스 무선도 안 터진다고 하잖아. 빨리 휴대폰 전파가 있는 곳을 찾아서 선생님께 연락 드려야 하지 않겠니?”
미노리가 투덜거리는 유이를 다독였다.
“아니 그렇다 해도 우리들이 걸어다니며 찾을 필요가 있었어?”
“음… 다 함께 찾아보자는 얘기지.”
미노리의 말에도 유이는 불만스러운 모습이다.
사실 카에데를 포함, 9명의 학생들은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상황이었다.
인솔하던 담임 선생님을 따라가던 중에 길을 잘못 들었는데, 당황해서 찾아보겠다 한 게 화근이었다. 결국 숲 속에서 완전히 미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느 사이엔가 해가 져, 숲 속은 완전히 깜깜해졌고, 불빛이라곤 스마트폰의 라이트가 전부였다.
“…선생님 그룹은 이미 전화 터지는 곳 까지 갔을걸…”
하나무라 호노카가 털썩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지병인 천식 탓에 이렇게 오랫동안 걷는 것은 몸에 주는 부담이 심했던 것이다. 체력이 없어서 미술부에 들었지만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재능에 눈을 떠, 여러 차례 상도 받은 바 있는 그녀였다. 그 뿐 아니라 성적 역시 전교 톱클래스였다.
“호노카, 힘 내.”
주저앉은 그녀를 격려 해 준 것은 사키카와 유즈키였다.
호노카와는 절친한 관계로, 마치 언니처럼 호노카를 세심하게 챙겨주곤 했다.
취주악부에서 색소폰 파트 리더를 맡을 정도로 리더십도 있고, 다른 사람을 잘 챙겨주는 성격이다.
그런 유즈키가 호노카의 팔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려 한 순간이었다. 그녀들의 머리 위에서 무언가가 갑작스레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이윽고 공기를 찢어버리기라도 할 듯한 굉음이 사방을 가득 메웠다.
“와… 이거 실화냐..”
사사키 세나가 질려버린 듯 읊조렸다.
그녀는 테니스부 주장이자 뛰어난 스포츠 우먼에 사람들을 이끄는 힘도 있는 ‘좋은 사람’이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입이 험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런 그녀에게도 소녀 감성이 남아 있었기에 ‘천둥번개’는 그녀가 무서워 하는 것 중 하나였던 것이다.
“번개와 천둥 소리가 차이가 얼마 안 나. 이거 자칫 잘못하면 위험하겠는데.”
세나가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아스미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운도 없지…”
“그러게.”
카에데도 아스미의 말에 동의했다. 정말이지 재수가 지지리도 없었다. 버스는 고장나지, 휴대전화는 안 터지지, 산 속에서 길을 잃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천둥번개까지 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아마 조금 있으면 비도 내릴 기세였다.
아스미는 목에 건 DSLR이 신경쓰이는 눈치다. 사진부이기에 수학여행 사진을 찍기 위해 일부러 가져 온 것이었다. 귀중품이기에 버스에서 내릴 때도 소중히 챙겨 왔던 것이다.
“자, 자, 빨리 길을 찾아 보자.”
미노리가 다시 모두를 독려했다. 그 말에 학생들은 다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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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삼나무 숲을 지나고 나니 아래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나왔다.
계단 폭이 좀 좁긴 해도 잘 정비된 계단이다. 계단 양쪽으로는 석등이 늘어 서 있어, 어슴푸레하게 주변을 밝혀주고 있었다.
계단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을 옮기려니 지금까지 함께 걸어 온 멤버 중 한 명이 요지부동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카이 히지리였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녀는 말하자면 교내 서열 최하위에 위치한 아이였다. 오컬트를 좋아하고 오타쿠적인 면이 강한 탓일까, 자신이 흥미를 갖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엔 흥분해서 끝도 없이 말을 늘어놓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사실인지 뜬소문인지는 모르지만, ‘영감이 있다’는 소문도 떠도는 아이였다.
“너 거기서 뭐 해?”
갑자기 멈추어 선 히지리를 향해 아키요시 린이 말을 걸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였지만 말투에는 불만이 묻어 나왔다.
평소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반의 무드메이커격인 존재인 린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한 마디였다.
하지만 히지리는 좀처럼 계단을 내려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같이 내려가자.”
린이 다시 한 번 상냥하게 말을 걸었지만 히지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려퍼졌다.
히지리는 ‘여기 서 있다간 번개라도 맞겠다’라는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걸이는 주저하는 듯 무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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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계단은 끝 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가을이라곤 하지만 밤 시간대, 그것도 산 속은 추웠다. 교복인 점프 스커트와 블라우스, 타이츠만으로는 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지도 한참 되었기에 체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피로와 배고픔이 최고조에 달해 있는 상황에서 안개까지 자욱하게 껴, 그녀들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돌계단이 한 차례 끊긴 곳까지 내려왔을 때에야 휴식을 위해 발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발걸음을 멈추길 기다리기라도 한 듯, 갑작스레 번개가 번쩍이며 밤 하늘을 갈랐다.
번개의 섬광으로 발 아래의 풍경이 한 순간이나마 눈에 비쳤다. 나무 사이로 언뜻 보인 것은 산 사이 계곡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소녀들은 다시 기운을 내서 그 ‘마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두에는 미노리가 서서 친구들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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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가 저 멀리 눈에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길 양 옆으로 무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오래된 자연석 비석,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화강암 비석 등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지만 마을 규모에 비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무덤이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뿐 아니었다. 아무리 한밤중이라 해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불이 켜져 있는 것이 자연스러울 터인데, 그런 등불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마을 풍경에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민가를 몇 채인가 지났을 때, 갑작스레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 눈 깜빡할 사이에 소녀들의 교복을 적셨다.
갑작스러운 비에 소녀들은 달리기 시작했지만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흙길과 주위를 가득 채운 어둠 탓에 생각만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앵클 스트랩이 붙어 있는 교복 구두가 연신 미끄러졌다.
“아, 정말 최악이야.”
유이가 진절머리 난 듯 소리쳤다. 다른 아이들도 말로는 꺼내지 않아도 같은 생각이리라.
미끄러운 흙길을 종종걸음으로 달리다 보니 눈 앞에 거대한 건물 그림자가 보였다.
오래된 절이었다.
본당으로 보이는 건물과 구리(※주지가 거주하는 별채, 혹은 부엌)로 보이는 건물 사이에 아치형 다리가 놓여 있었다. 마을 규모로 보아 이상할 정도로 호화로운 절이었다.
소녀들은 본당으로 보이는 건물 입구로 향했다.
그녀들은 입구 부근에 도착 한 뒤로도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구두를 벗은 뒤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
“아무도 없는걸까?”
아스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답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아무도 안 계시나요?”
미노리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빗줄기는 점점 거세져만 갔다.
“아무도 없는 것… 같지?”
역시 이번에도 그 질문에 대답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미노리는 간논비라키(※양쪽 여닫이) 문을 조용히 열었다.
‘끼기기긱’ 무거운 소리를 내며 서서히 문이 열리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공간이 소녀들의 눈 앞에 펼쳐졌다.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컴컴한 공간만이 있을 뿐.
그 순간, 천둥소리가 소녀들의 등 뒤를 때렸다. 소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건물 내부로 뛰어들었다.
“너무 어두워…”
누군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미노리는 조용히 스마트폰 라이트를 켰다. 라이트에 비춰지는 내부 모양을 보니 이 건물은 예상대로 본당이 맞는 듯 보였다.
본당 내부에 위치한 내진(※본존이나 부처를 모시는 곳)에는 각양각색의 불상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부처는 물론이고 무서운 표정을 한 명왕들이나 자애로운 미소를 띈 보살상, 심지어 승려의 모습을 한 좌상들이 가득 들어 서 있었다.
“아…”
미노리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장지문이 있었다. 살짝 열려있는 장지문은 아무래도 다른 건물로 이어지는 복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치형 다리로 된 복도에는 지붕이 있었고, 그 지붕에는 작은 범종이 매달려 있었다.
아홉 명의 소녀들은 조심스레 복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지붕이 낮아 머리가 부딪힐 것 같았다. 몰아치는 천둥번개에 깜짝 깜짝 놀라면서도 복도를 건너고 나니 아까 보았던 구리가 나왔다.
생활에 필요한 집기가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주지스님 가족이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아무도 안 계시나요…?”
미노리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장작에서 불똥이 튀는 듯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 보니 구리 내부에 깔려 있는 다다미(※짚으로 짠 일본 전통 건축재료) 한 가운데에 전통식 화로가 설치 되어 있었고, 그 화로에는 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 뿐 아니라 화로 위에 걸려있는 찻주전자에는 물이 들어 있어, 그 물이 끓고 있었던 것이다.
“아!”
미노리는 방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 한 듯 뛰어 들어갔다.
미노리가 향한 곳에는 오래 된 검은색 전화기가 놓여있었다. 미노리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 돼?”
아스미의 질문에 미노리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연결이 안 되는 모양이다.
“아, 더 이상은 못 버티겠어.”
호노카가 다다미 위로 털썩 쓰러졌다.
“그래, 그럼 잠깐 여기서 쉬자.”
미노리의 제안에 소녀들은 한 명씩 다다미 위에 걸터앉기 시작했다. 피곤한 나머지 전등을 켤 생각도 안 한 채.
장지문 앞쪽에 자리 잡은 것은 카에데와 아스미, 미노리였다.
천둥 소리, 빗소리는 점점 심해져만 갔다.
하지만 천둥 소리와 빗소리 사이사이로 다른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딱딱한 나무들끼리 부딪히는 듯 한 높고 새된 소리였다.
‘깡… 깡… 깡… 깡…’
(이건 무슨 소리지?)
카에데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신경을 집중하니 또 다른 소리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디갔느냐 헤메고있느냐 어디갔느냐 숨어버렸느냐 어디갔느냐 돌아가버렸느냐
아님죽어버렸느냐 도망가라도망가라 땅이움직인다 손이뻗어온다 내일이온다
되살아나리라 되살아나리라 잠비가온다 바로네뒤에 바로네뒤에있다
(이건 뭐지? 노래?)
아무래도 어린아이, 그것도 어린 여자아이 두어명이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아무리 들어도 어린아이들이 부를 법한 밝은 곡조의 동요가 아니라 너무나도 불쾌한 멜로디였다. 말하자면 옛날부터 내려오는 주술적인 동요 같은 느낌이었다.
“너도 들려?”
카에데는 아스미에게 말을 걸었다. 아스미는 잔뜩 겁 먹은 표정으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무슨 소리야? 노래…?”
호노카도 잔뜩 겁을 먹은 채 입을 열었다.
유즈키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고, 아스미는 조용히 카에데에게 기대며 ‘무서워’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불길한 노래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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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벽에 걸린 시계가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뎅… 뎅… 뎅… 뎅… 뎅… 뎅… 여섯 번 시계가 울린 것을 보면 지금 시간은 아마도 새벽 여섯시이리라.
시곗소리를 듣고 카에데는 눈을 떴다.
밝은 아침 햇살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밤새 그녀를 괴롭혔던 천둥번개와 비는 어느 사이엔가 그쳐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나 보네)
그러고 보니 잠 든 기억이 없다. 이상한 소음과 노랫소리에 잔뜩 겁을 먹었었지만 그런 공포조차도 피로에는 이기지 못 했던 것이리라.
문득 주변을 살펴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방 안을 전부 뒤져보았지만 역시나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어디 간 거지?)
다시 한 번 방 안을 둘러보다 보니 어제는 보지 못 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벽에 모셔져 있는 긴 봉이었다.
카에데의 키 보다도 길고, 단면이 육각형인 것을 보면 아마도 절에서 쓴다고 하는 육척봉(※보통 봉술을 익힐 때 쓰는 2미터 내외의 봉.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스님들의 무예 수련에 자주 쓰임)인 것 같았다.
봉 앞에는 금줄이 드리워져 있었고, 금줄의 양쪽 끝에는 부적이 붙어 있었다.
그 아랫쪽에 설치 된 제단에는 양초가 두 개 세워 져 있었는데, 불이 붙어있는 것 보면 필시 누군가가 잠든 사이에 들어 와 양초에 불을 붙인 듯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마치 무언가를 봉인이라도 하는 듯 한 느낌이었다.
카에데는 자신도 모르게 그 제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카에데가 제단에 도착하기 전에 어디선가 불어 온 바람에 촛불이 꺼지고 말았다.
‘분명 창문이나 문이 전부 닫혀 있는데 대체 그 바람은 어디서 불어 온 것일까’라 생각하니 갑자기 소름이 돋아 햇볕 아래로 도망 가기라도 하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카에데는 친구들을 찾아 마을을 뒤졌다. 오래된 건물들은 햇빛을 받아도 음울해 보였다.
아침 바람은 상쾌하다기 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한기가 느껴졌다.
어디갔느냐 헤메고있느냐 어디갔느냐 숨어버렸느냐 어디갔느냐 돌아가버렸느냐
어젯 밤에 들려왔던 노랫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이번에는 자신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눈 앞에 오래된 건물이 보였다.
그 건물 처마 아래에는 사람 하나가 들어 가, 쭈그리고 앉을 수 있을 만큼 큰 통이 놓여 있었다.
얼룩덜룩 더러운 큰 통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뚜껑이 붙어 있었다. 몸통 주변으로는 이중 삼중으로 붉은 실이 감겨져 있었으며 붉은 실 곳곳에 시데(※일본 신사에서 금줄에 끼워 놓는 종이. 결계나 봉인의 의미)가 끼워 져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흰 색이 아닌 붉은색 시데였다.
곰곰히 생각 해 보니 이 집 뿐 아니라 다른 집에도 이런 통이 놓여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마도 이 지방의 풍습 같은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문득 뒤통수 쪽에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낮은 계단 중턱에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초등학생 정도일까, 병적으로 흰 피부에 새까만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새빨간 원피스를 입고 종아리를 반쯤 가리는 긴 흰색 양말을 신고 있는 아이였다.
복장만으로는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팔에 안고 있는 인형이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인형이기 보다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지푸라기로 만든 인형’이었다.
갑자기 또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그녀의 주변 사방에서, 마치 그녀를 포위하고 있기라도 한 듯한 시선’들’이었다.
카에데는 시선을 좇아 주변을 한바퀴 빙 둘러보았다.
저 집 처마에 놓인 통 위에는 노파가, 그 건너편 집 통 위에는 노인이 서 있었다. 아까까지는 없었던 사람들이 통 위에서 그녀를 향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에 있어선 안 돼. 빨리 다른 아이들을 찾아야 해’
카에데는 달리기 시작했다.
집과 집 사이에 난 작은 골목길을 달려, 난간도 없는 위험한 다리를 건너기까지 하며 친구들을 찾아 보았지만 어디에도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로 간 거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 마을 외곽까지 왔을 때, 갑자기 발이 걸려 넘어졌다. 바닥에 무릎이 부딪혀 아팠지만 참아내고 몸을 일으켰다. 대체 뭐에 발이 걸려 넘어졌는지 확인하고자 바닥을 보니 세로로 쪼개진 돌 불상이 나뒹굴고 있었다. 버려진 뒤 오래 되었는지 표면이 심하게 마모 되어 있었다. 의외의 광경에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킨 순간, 그녀 근처 풀숲에서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중년 남성 하나가 풀숲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키가 크고 안경을 쓴 남자다. 두꺼운 렌즈 너머로 남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더니 무뚝뚝하게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니?”
라고 말을 건다.
“네?”
“빨리 나가!”
남자는 소리 치며 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 저기… 길을 잃었어요.”
주저앉은 채 그렇게 말을 하는 카에데의 얼굴을 의심쩍은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곧이어 손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모리구치 타쿠마라 한다. 기자지.”
“저는 야마무로, 카에데, 라고 합니다.”
카에데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 일어나면서 자기 소개를 마쳤다.
“길을 잃었다고? 뭐, 그래.. 일단 따라 와.”
모리구치의 말에 카에데는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숲에서 나와 마을로 돌아가는 길, 우거진 덤불 너머로 연못이 보였다.
“어? 저건 뭐지?”
연못 가운데에 도리이(※신사 입구를 나타내는 돌/나무로 만든 구조물.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잇는 입구 역할이자 결계 역할을 한다. 생긴 건 ⛩ 이렇다)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묘했던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땅에 박혀 있어야 할 도리이 다리 부분이 어째서인지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말 그대로 ‘거꾸로 세워진 도리이’였다.
카에데가 조용히 수면에 비친 도리이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모리구치가 입을 열었다.
“이 쪽을 보고 있어.”
“네?”
무슨 소리인지 물어보려 하는 카에데를 손짓으로 제지하며 모리구치가 걷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건 묻지 마. 이 세상엔 모르는 게 더 나은 일들도 있으니.”
그 말을 들은 카에데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모리구치의 등 뒤를 따라 걸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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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구치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마을 중앙에 있는 신사 부근까지 돌아왔다.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들어 본 적 있는 웃음소리다.
탁 트인 공간에 다다라 주변을 돌아보니 신사 경내였다.
그리고 그 곳에 있었던 것은 반 친구들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에데는 안도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어딘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신사의 구조가 지금까지는 못 보았던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사 하이덴(※배전이라고도 하며, 참배가 이루어지는 곳) 앞에 작은 사당이 있고, 그 사당을 빙 둘러싸는 형태로 대나무 통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대나무 통 위에는 어째서인지 바람개비가 꽂혀 있었던 것이다.
바람개비 날개는 6장, 전부 나무로 만들어 져 있었으며 날개 표면에는 독특한 문양이 들어 간 와시(※일본 전통 종이)가 발려있었다.
“와, 이거 사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려야지!”
“그거 괜찮겠다.”
유즈키가 스마트폰으로 연신 바람개비 사진을 찍으며 말을 하자 호노카가 맞장구 쳤다.
심지어 아스미는 꽂혀있던 바람개비를 뽑아서 손에 들고 있기까지했다.
아스미는 바람개비를 손에 들고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었지만, 바람개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친구들의 모습과는 달리, 카에데의 시선은 사당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카에데는 비틀거리며 사당을 향해 다가갔다. 도중에 히지리가 말을 걸었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에데의 마음 속에는 ‘사당 정면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사당 앞에 다다른 카에데는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고신타이(※신사에서 모시는 신, 혹은 그 신을 상징하는 물건)로 보이는 ‘거울’이 보였고, 그 뒤에 보이는 벽에는 부적이 붙어 있었다.
부적에는 붉은 무늬가 그려 져 있었으며 무슨 뜻인지 모를 글자가 검은 먹물로 적혀 있었다.
카에데는 2례3박수 (※신사에서 참배나 기원을 할 때 하는 인사법) 뒤 합장했다.
‘으어어어어어어….’
순간적으로 사당 안쪽에서 무언가가 괴로워하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어?!)
카에데는 지금 자신이 들은 것이 착각인지 아니면 실제로 들린 것이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친구들은 아직도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유이는 기도를 드리는 카에데의 모습을 찍고있기까지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당장 그만둬! 너희들 지금 사진 찍는거냐!”
갑자기 모리구치가 학생들에게 소리를 쳤다. 안색이 창백했다.
그런 모리구치의 모습을 보며 아스미는 손에 들고 있던 바람개비를 등 뒤로 감추었다.
사당 앞에 서 있는 카에데를 중심으로 해서 나머지 친구들은 각자 바람개비 부근에 서 있었다.
마치 사당을 빙 둘러싼 바람개비들처럼.
학생들은 전원 모리구치를 응시했다.
그 순간, 카에데의 귓가에 다시 한 번 ‘으어어어어어…’라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당장 거기서 나와!”
어디선가 갑자기 백발 노인이 나타나 학생들에게 소리치며 이 쪽으로 다가왔다.
말투부터가 사투리인 걸 감안하면 이 지역 주민이리라.
노인은 손에 든 큰 전정가위(※정원 관리시 나무 가지치기를 위해 사용하는 가위)를 마구 흔들며 소녀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 썩 나가지 못할까!”
노인의 기세에 눌려 학생들은 도망치듯 신사를 나섰다.
카에데는 모리구치에게
“여기는 대체…?”
라고 질문을 했다.
모리구치는 고개를 돌려 사당쪽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비마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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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놀. 어디선가 교회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이 곳은 프리지아 여학원.
카에데와 친구들은 나가노현 부근에 위치한 수수께끼의 마을, ‘잠비마을’을 무사히 탈출하여 학교로 돌아왔던 것이다. 물론 갑자기 사라져 버린 데 대하여 선생님들께 꾸지람을 들었지만 그 외에는 큰 벌 같은 것은 받지 않았다.
학교측에는 선생님들이 사정을 설명 해 준 모양이라 설교도 최소한으로 듣고 끝났다. 자신들보다 먼저 학교에 도착 해 있었던 캐리어 백을 끌며 기숙사로 가니 낯익은 수위 아저씨가 밝게 웃으며 맞아 주었다. 기숙사에 들어가니 후배들이 웃으며 그녀들을 환영 해 주었다.
근대적인 구조의 기숙사는 모든 사람에게 개인실이 주어졌다.
각 방은 원룸 맨션 같은 구조로, 문을 열면 내부가 전부 다 보이게 되어 있었다. 비록 화장실과 주방은 공용이었지만, 그만큼 생활 스페이스를 넓게 쓸 수 있는 구조였다.
기본적인 책걸상, 수납용 붙박이장 등은 있었지만 그 외의 가구들은 각자 사 와서 자기 취향에 맞게 꾸밀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방 구조나 인테리어를 통해 방 주인의 개성을 알 수 있는 것이 재미있는 점이기도 했다.
기숙사 1층은 공통 현관과 식당 등 공용 공간이 있으며, 두 곳 모두 채광에 신경을 써서 만들어 졌기에 언제나 밝은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말 하자면 ‘기숙사’라기에는 조금 호화로운 느낌이 드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호화로움’도 학생들에게는 익숙한 매일 보는 풍경이요,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녀들은 이제서야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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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방에 들어 가, 평상복으로 갈아 입고 나서야 겨우 마음이 놓였다.
카에데는 짐정리를 하며 모리구치의 말을 떠올렸다.
‘잠비마을’
스마트폰을 켜서 검색 사이트에 ‘잠, 비, 마, 을’을 쳐서 검색 한 뒤 스크롤을 내리며 내용들을 훑어보았다. 그 중 유난이 눈에 띄는 문서가 있었다.
‘잠비마을의 민속과 전통 (나가노현)’
카에데는 그 항목을 터치했다. 그러자 곧바로 동영상이 흘러나왔다.
동영상은 오래된 기록영화 같은 느낌이었다. 영상에 찍혀있는 사람들은 흰 수의 같은 옷을 입은 채 어떤 의식을 행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윽고 ‘신슈(※나가노현의 옛 이름)의 깊은 산에 위치한, 옛 잔미(※残美, 발음은 ‘잔비’)신앙이 남아 있는 마을’ 이라는 자막과 함께 그 자막을 읽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오래 된 기록영화에서 들을 법한 목소리였다.
그 뒤로는 짧은 흑백 영상들이 언뜻언뜻 흘러갔다. 특이하게도 배경 음악은 전혀 들어 가 있지 않았다.
필름이 손상되기라도 한 걸까, 군데군데 영상이 흔들렸다. 딱 봐도 엄청 오래 된 영상이었다.
나레이션이 끝난 뒤에 표시된 타이틀은 ‘잔미신앙’ 네 글자.
‘잠비라는 건 무참하다(※일본어로는 無残)에 나오는 ‘잔인할 잔’자와 미인이라 할 때의 ‘아름다울 미’자를 쓰며,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존재들을 뜻한다.’
라는 나레이션과 함께 흘러나오는 영상은 노파가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찍은 영상이었다. 노파는 잘라낸 나무조각을 대패로 밀고, 평평한 나무 판이 완성되자 그것을 모아 둥근판 주변에 둥글게 세웠다. 노파가 그렇게 모은 나무 판에 금속 띠를 둘러 쇠망치로 쳐 완성한 것은 다름아닌 나무통. 나무통을 완성한 노파는 마지막으로 나무통에 실을 빙 둘러 감았다.
이상한 것은 노파가 작업하는 모습과 음향이 미묘하게 빗나갔다는 점. 마치 영상을 찍고 이후에 음향을 덧씌운 것 처럼 들렸다.
노파는 실이 둘러진 나무 통에 뚜껑을 덮었다. 뚜껑 가운데 부분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오각형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완성된 나무 통은 다름아닌 ‘좌관’, 다시 말 해 죽은 사람을 앉혀서 매장할 때 쓰이는 ‘관’이었다.
‘예로부터 이 마을은 이런 좌관을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해 왔다. 하지만 어느 날, 이 좌관에 갖혀 생매장 되었던 여인이 살아 돌아와, 마을에 재앙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이 마을의 이름은 통칭 ‘잠미마을’이라 부른다.’
이런 나레이션이 흐른 뒤, 장면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전부 꺼림칙한 장면의 나열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카에데가 직접 목격하였던 신사와 사당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화면은 이윽고 또 다른 의식 장면으로 바뀌었다. 이번에는 무당같아 보이는 사람이 등장했다. 무당의 가슴팍과 등에는 별모양 문신 혹은 낙인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무당이 땅에 바람개비를 꽂자 가면을 쓴 사람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면에는 부적이 붙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가구라(※일본 전통극. 신을 모시기 위하여 바치는 춤과 노래)는 아니다. 이 의식은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다섯 사람이 사당을 둘러싸고 웅얼웅얼 알 수 없는 말로 기도 같은 것을 올리고는 영상이 끝났다.
(이거 뭐야?)
꼭 쥔 카에데의 손엔 땀이 흥건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상 중간중간에 자신이 아는 것들이 섞여 있었다. 나가노현, 잠비마을, 그리고 나무 통이라 생각했던 ‘좌관’.
카에데는 그 페이지를 즐겨찾기에 추가 해 두고 인터넷 브라우저를 닫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카에데는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 낼 겸 목욕탕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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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미는 자신의 방에 돌아와 짐을 풀기 시작했다.
카에데가 동영상을 보기 시작한 때보다 조금 앞선 시점의 일이었다.
짐으로 챙겨갔던 옷들을 세탁 할 것과 안 해도 될 것으로 나누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삐걱… 삐걱… 삐걱… 삐걱… 지금까지는 기숙사에서 들어 본 적 없는 소리… 무언가가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테이블 위, 꽃병에 꽂아 둔 나무 바람개비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잠비마을에서 가져 와서는 꽃병에 꽂아 두었던 것이다. 사실 되돌려놓으려 했지만 갑작스럽게 마을을 도망치듯 나오게 되어 되돌려놓지 못 한 것이었다.
“이거 이상하네…”
아스미는 바람개비를 손에 든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처음 손에 든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리 세게 입김을 불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던 바람개비가 갑자기 돌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이러지?”
여섯 장의 날개는 끊임 없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멍하니 바람개비를 손에 든 채 서 있던 아스미의 뒷편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꼬질꼬질한 흰 수의를 입은,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의 모습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갑자기 아스미에게 달려들어 아스미의 머리와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는 크게 입을 벌렸다.
깊은 동굴 같은 입 안에서 새빨갛고 긴 혀가 춤추며 튀어 나왔다.
마치 뱀의 그것처럼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그것’의 혀는 순식간에 아스미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아스미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떴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사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녀 자신도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파악을 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리라.
노파의 모습을 한 ‘그것’은 뒤이어 아스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미의 목덜미에서 검은 핏줄이 솟아올랐다. 검은 핏줄은 순식간에 아스미의 얼굴까지 타고 올라갔다.
잠시 뒤, ‘그것’은 아스미의 목덜미에서 얼굴을 떼었다. 아스미의 목에는 깊게 패인 이빨 자국과 두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아스미의 얼굴을 타고 올라가던 검은 혈관이 안구 부근까지 다다른 순간, 아스미의 눈동자가 흰 색으로 흐려졌다.
그리고 아스미는 정신을 잃었다.
잠시 뒤, 아스미는 정신을 차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꿈인가?)
주변을 찾아 보아도, 물렸던 목 부근을 자세히 뜯어 보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꽃병에는 바람개비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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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에데가 목욕탕에 도착했을 때, 아스미는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고 있었다.
“정리하는 데 한 세월이네. 그렇지?”
카에데가 말을 걸어도 아스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스미?”
“잠이 든 것이오, 아니면 이미 죽은 것이오?”
갑자기 아스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카에데는 눈썹을 찌푸렸다.
문득 아래를 바라본 카에데는 경악했다.
세면대에는 아스미의 검은 머리카락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들은 아스미가 빗질을 할 때마다 늘어만 갔다.
“아, 아스미..?!”
카에데의 말에 아스미가 반응을 보였다.
잔뜩 겁에 질려있는 카에데의 표정을 보고 안 좋은 예감이 들었던 것일까, 아스미도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아스미의 눈에 자신의 머리카락이 비쳤다.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아스미는 시선을 눈 앞의 거울로 옮겼다. 동요를 감추지 못 하는 표정이었다.
“아스미!”
카에데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아스미는 절규하며 욕실을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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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에서 도망쳐 나온 아스미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다.
방으로 뛰어 오는 도중에 슬리퍼가 벗겨졌지만 눈치 채지도 못했다.
방에 들어 온 그녀는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왼쪽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 그냥 일그러져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얼굴 반쪽이 마치 아스미와는 다른 존재에 지배 받기라도 하는 듯이 멋대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아스미는 손에 힘이 빠져 거울을 놓쳐버렸다.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거울 파편이 어지러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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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에데는 기숙사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절규하며 뛰쳐나간 아스미의 뒤를 쫓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사이죠 아스미’라는 이름판이 걸려있는 방 앞에 다다른 카에데는
“아스미! 아스미!”
라 외친 뒤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안에서 잠근 듯 문이 열리지 않았다.
“…들어오지마!”
친구의 절규가 들렸다. 완전한 거부의사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카에데는 친구의 방문을 두드리고, 문 손잡이를 돌렸다.
계속해서 ‘오지마!’라고 외치는 아스미에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 났다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아스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변하더니 말이 뚝 끊겼다. 마음이 급해진 카에데는 아스미의 방문에 몸을 부딪혀 억지로 열어젖혔다.
“아스미!”
방 안으로 들어갔지만 아스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아스미…?”
창문이 열려있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차가운 밤바람이 커튼을 흔들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카에데는 창문을 향해 달려갔다.
창 밖을 바라본 카에데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네 층 아래 아스팔트에 무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친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스미의 팔다리는 제각각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고, 머리에서는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풀린 두 눈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 채 뜬 채였다.
카에데는 절규하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 친구가 떨어져 있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아스미..?!”
하지만 카에데가 도착했을 때, 아스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몸은 물론이고 그토록 대량으로 흘러나왔던 피조차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건 없었다는 듯이.
문득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아스미 방의 열린 창문과 그 안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이 카에데의 눈에 들어왔다.
그저 멍하니 서 있던 카에데의 귓가에 비명과도 같은, 혹은 야수의 위협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교내의 나무에서도, 그리고 먼 곳의 산에서도 동시에 울려오는 듯 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