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새로운 한 걸음]
2015년 4월 4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오시카는 흐리기만 했다. 이윽고 식이 시작 될 무렵에는 조금씩이지만 날이 개어 햇볕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나는 내 모교이기도 한 긴키대학교의 헤이세이27년도 (2015년) 입학식을 프로듀스하기 위하여 전날부터 가족과 함께 오사카에 돌아 와 있었다.
아침 5시 반 가량에 미리 준비 해 두었던 아침밥을 먹었다.
이 날은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1년 반 만에 무대 화장을 하는구만’
나갈 채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호텔 창 밖으로 오사카성, 그리고 오사카성 홀이 보였다.
내가 밴드를 결성하고 활동을 시작한 ‘출발점’, 오사카성공원역에서 오사카성까지 이어 진 긴 도로가 호텔 아래로 보였다. 어디에나 있는 단순한 ‘통로’였던 이 길을 ‘노상 라이브’ 장소로 바뀌게 한 것이 바로 내가 소속된 샤란Q, 그리고 우리와 함께 활동을 하던 당시의 ‘동료’ 들이었다.
샤란Q가 아마추어였던 당시, 매주 일요일이면 이 곳에서 라이브를 했다.
‘무조건 프로가 되겠어’, ‘성공 해 주겠어!’ 라는 생각을 가슴에 품은 채 그저 언제까지고 노래를 하던 나날이었다.
‘그 당시의 나 자신에게 ‘괜찮으니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렴. 너는 얼마 뒤에 프로가 되어서 밀리언 셀러도 내게 된단다’ 라고 이야기 해 준다면, 아마도 그 당시의 나는 우쭐해져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될 테니, 만에 하나 과거의 나를 만난다 해도 그런 사실을 알려주지는 말아야겠다.’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준비를 계속했다.
오랜만에 화려하게 차려 입고, 짙게 화장을 하는 아빠를 보며 아이들도 조금 흥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이번에 프로듀싱을 하게 된 이번 입학식이 예정대로 무사히 끝날지였다.
신입생들에게 있어서 평생에 한 번 뿐인 입학식. ‘이 대학교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리고 앞으로의 대학생활에 기대를 가질 수 있는 입학식이 되기를!’ 이라 속으로 조용히 기원했다.
10시에 시작되는 입학식 일정을 감안하여 8시 조금 넘었을 때, 회장인 긴키대학교 기념회관에 들어섰다.
지난 해에도 입학식 프로듀스를 했지만, 그 때는 입학식 직전에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참석 할 수 없었다. (참고로 그 전 해, 그러니까 2년 전의 입학식 때는 게스트로 초빙되어 연단에 서기도 했고, 교가도 부른 바 있었다.)
입학식은 예정대로 시작되었다. 오프닝 VTR영상이 흐르고, 그 뒤 재학생과 신입생들이 구성한 ‘KINDAI GIRLS’가 첫 선을 보였다.
나는 무대 옆에서 가족들과 함께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난 2002년, 내가 ‘모닝구 무스메。’를 위해 만든 곡인 ‘이 곳에 있다고!’ 를 ‘KINDAI GIRLS’가 선보이고 있었다.
‘KINDAI GIRLS’가 비추어지는 모니터 하단에는 자막으로 가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벌써 10년도 더 전에 쓴 가사임에도 필사적으로 공연을 하는 ‘KINDAI GIRLS’의 모습과 겹쳐 져, 나의 아마추어 시절을 떠오르게 했고, 동시에 지금까지 잊고 있던 무언가를 생각나게 해서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KINDAI GIRLS’의 공연이 끝났다.
퍼포먼스를 끝마치고 돌아가는 멤버들 역시 모두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멋진 눈물이었다.
프로 가수가 라이브 때 마다 눈물을 흘린다면 프로듀서인 나는 주의를 주었을 것이다.
‘매번 최선을 다 하고, 납득할 만한 퍼포먼스를 하는 건 당연한거지!’ 라고 지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선보인 그녀들의 무대는 달랐다.
그녀들이 ‘프로가 아니’기에 그런 ‘감동’을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 아이들은 울어도 괜찮아.
그렇게 생각했다.
옆에서 함께 보고 있던 아이들도 처음에는
‘항상 보던 누나들이 아니네’라며 큰 흥미를 보이지 않고 내 뒤에서 쭈뼛거리고 있었지만, 그녀들의 퍼포먼스에 감동을 받았는지 공연이 끝난 뒤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KINDAI GIRLS’ 멤버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러 갔다.
그 모습을 보며 일단 마음이 놓였다.
내 차례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 이상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일단 대기실로 돌아갔다.
내가 오늘 연단에 선다는 것은 직전까지 공표되지 않았다. 당일, 공식 트위터를 통해 참가 할 지도 모른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기는 했지만 정식으로는 언급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뉘앙스를 풍기며 학생들이 ‘오늘 어쩌면 층쿠가 올 지도 몰라’라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대기실에 돌아 간 뒤, 갑작스레 ‘배고파’라고 칭얼거리기 시작 한 7살 짜리 장남에게 학교측에서 준비 해 준 도시락을 먹이기도 하고, 아침부터 내게 찰싹 붙어서는 떨어질 줄을 모르던 장녀 (장남과 쌍둥이 남매), 그리고 갓 네 살이 된 차녀를 돌보며 시간을 보냈다.
입학식은 별 문제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어느 사이엔가 내 차례가 다가왔다.
무대에 서기 직전, 다시 한 번 차림새를 체크하고, 식순을 재차 확인하였다.
체크가 끝난 뒤, 가족들과 함께 무대 옆에 서서 올라 갈 준비를 하였다.
무대에 오르기 전에 이렇게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경험이었다.
대부분 아무리 늦어도 공연 10분 전에는 가족이나 게스트들을 객석에 마련 된 자리로 돌려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날은 달랐다. ‘관객’으로서 내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기분을 맛 보며 무대 옆에서 지켜 봐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이럴 때,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이 날은 그런 긴장감 없이 내 차례가 오기를 평온하게 기다렸다.
생각 해 보면 이 날을 위해 꽤나 오랜 시간을 준비 해 왔다.
‘내년에도 입학식 프로듀스를 해 주십시오’ 라고 대학측에서 의뢰를 해 온 것은 2014년 가을, 내가 후두암 증상이 나아졌다고 알린 직후였다.
이후, 암이 나은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성대 적출수술을 받은 뒤, 아내와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긴키대학교 입학식때 복귀 선언을 할 수 있도록 힘 내자’ 고.
수술을 받기에 앞서 받았던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내 목과 등이 점점 굳어갔다. 그 영향인지 음식물들을 삼키는 것이 곤란 해 졌기에, 사실상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병에 걸리기 전에는 60kg 대였던 몸무게가, 성대 적출수술을 받은 뒤에는 52~53kg까지 줄어들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성대를 적출 해 낸 뒤로는 딱딱한 것을 삼키거나 하면 식도를 꼬맨 부분에 걸려 찢어 질 위험성이 있었기에, 주의해야만 했다. 물론 실제로는 ‘딱딱한’ 것은 커녕 푹 삶은 브로콜리 조차도 삼키지 못했지만 말이다.
수술이 끝난 직후 한동안은 죽 같은 유동식을 먹었다. 며칠 시간을 두고 부드러운 고형 식품을 먹게 되기는 했지만, 그런 부드러운 식품이라 해도 수 차례 씹어 형태가 사라 질 정도로 작게 만들지 않고서는 삼킬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 목에 걸리기라도 하면 그 뒤로는 아무 것도 삼킬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심한 경우에는 역류해서 코로 나오게 되는 경우도 있었던 데다가, 무리해서 삼키려 하다가는 꼬맨 부분이 파열 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가장 싫고 귀찮았던 것이 바로 ‘식사’ 였다.
‘이렇게 귀찮게 뭘 먹어야 한다면 차라리 그냥 매일 스포츠 음료 젤리나 먹는 게 낫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아내가
“당신, 4월 달에 긴키대학교 입학식 연단에 선다면서? 이렇게 잔뜩 말라서 연단에 설 생각이야? 그렇게 상태 안 좋은 사람에게 응원을 받아봤자 신입생들이 기쁠까? 오히려 당신 걱정부터 하지 않을까?”
라고 설교를 했다. 이어서
“못 먹겠다고 포기 할 게 아니라, 의무적으로 먹어야 해. 먹으려고 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먹어야지 몸도 건강 해 질 거라는 건 당신도 알고 있잖아.”
라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런 아내의 격려도 있고 하여 입원중에도 열심히 힘 내서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 먹었다. 아내 역시 매일같이 직접 당근을 갈아 주스를 만들어 오거나, 닭고기를 푹 삶아 오거나, 마늘과 생강을 많이 넣어서 닭죽을 만들어 오거나 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아내가 만들어 준 양념 주먹밥은 정말로 맛있었다.
먹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이것도 일이라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밥을 먹었다.
퇴원 뒤에도 아내는 나를 위해 매일 매 끼니마다 먹기 좋고, 영양도 있으며 보기에도 좋은 요리를 해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서 먹어도 3살짜리 딸보다도 먹는 속도가 늦었다.
이전까지는 아이들에게 ‘조금 더 빨리 먹으렴’이라고 주의를 하는 편이었는데, 그런 내가 가장 먹는 속도가 느려 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아비를 응원 해 주었다.
“내가 아빠보다 빨리 먹었어!” 라며 자랑하던 아들의 모습이 정말로 귀여웠다.
조금씩이지만 몸무게도 늘어났고, 체력도 붙기 시작하자 성격도 조금씩 밝아지고 긍정적으로 변했다. 신입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응원’을 하기 위해서 일단은 내가 ‘먹어야만’ 했다.
아무리 먹는 게 힘들고 시간이 걸려도 ‘먹었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도 조금씩 건강 해 졌고, 나중에 가서는 ‘외식’에도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조금씩 몸도 움직이게 된 뒤에는 킥복싱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몸 관리를 해 온 결과가 지금의 ‘나’ 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지금까지 수 없이 경험 해 온 ‘라이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새로운 무엇인가가 시작 될 것이라는 예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차례가 오기 직전, 곁에 있던 첫째 딸이
“아빠 혼자 어디 가지 마. 꼭 함께 있어야 돼!’
라며 손을 꼭 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병에 걸린 뒤로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 난 탓인지, 내가 화장을 하거나 무대에 서거나 하면 ‘아빠가 멀리 가 버리는’ 것 같아서 그런 게 싫었던 것 같다.
‘지켜 봐 줘. 아빠 어디 안 가. 항상 같이 있을테니까.’ 라고 생각을 하며 딸을 꼭 껴안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무대 위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내 새로운 출발점이다.
여기서부터 새롭게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나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 온 ‘새로운 나 자신’
그러니까 오늘은 잘 해내야 해.
위축되지 마.
‘나’ 답게 해 내자!
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 하면서, 나에게 보내지는 박수갈채를 온 몸에 받으며 무대에 올랐다.
내가 무대 중앙에 서자, 스크린을 통해 내가 쓴 ‘축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BGM은 ‘Love is Here~희망의 빛~’ 이었다. 동일본 대지진 직후에 쓴 곡이었다.
축사
2015년도 긴키대학교 신입생 여러분, 입학을 축하합니다.
저는 이 대학 졸업생인 ‘츤쿠♂’라고 합니다.
솔직하게 말씀 드리지요. 오늘 이 자리에는 필사적으로 공부해서 이 대학에 오신 분도, 처음부터 목표로 삼아 오신 분도, 결과적으로 원하던 학교에 못 가시고 이 학교에 오게 되신 분도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여러분께 이 학교가 ‘정답’이었느냐…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지금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당신들 자신이 ‘긴키대학교에 들어가길 잘 했다’고 생각 하실 수 있도록 학창시절을 보내면 된다는 점입니다.
제가 어째서 오늘 입학식 축사를 읽지 않느냐 하면, 바로 성대를 적출 해 냈기 때문입니다.
작년부터 목 치료를 해 왔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제가 앓던 암은 낫지 않았기에 결국 적출 해 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평생 가장 소중히 해 왔던 목소리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길을 골랐습니다.
그런 제게 이 학교는 ‘올 해도 긴키대학교의 입학식을 프로듀스 해 달라’고 의뢰를 해 주셨습니다.
그 때 느꼈습니다. ‘아, 이 대학에 들어가길 잘 했다. 이런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최선을 다 해 노력해야겠다’고 말입니다.
작년 연말부터 대학 관계자 분들과 여러 차례 메일로 연락을 취하거나, 스태프를 통해 연락을 하면서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KINDAI GIRLS 여러분, 취주악부 여러분, 응원부 여러분, 그 외 수 많은 재학생분들께서도 이 날을 위하여 열심히 연습 및 준비를 해 왔습니다. ‘모두 함께 신입생들을 맞이 해 주자!’ 고 말입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는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살아 온 분도 계실 지 모릅니다.
부모님이 시키니까, 학교 선생님들이 하라고 하니까 해 온 분들도 계시겠지요. 하지만 여러분은 이제 성인입니다. 자신만의 인생을 스스로 걸어 나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후회 해도 의미가 없는 일이니까요. 스스로의 힘으로 앞으로 나가 주십시오.
스스로가 정한 길을 걸어가다 보면 분명 얻는 것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윽고 다음 기회로 이어져 나갈 것입니다.
저 역시 목소리를 잃고 새롭게 걸어 나가기 시작한 ‘1학년’ 입니다. 여러분과 같지요.
그렇기에 가능한 것, 이런 저이기에 가능한 것.
그런 것들이 무엇이 있을 지 생각 하면서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려 합니다.
여러분께서도 여러분 자신밖에 할 수 없는 것, 자신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학력이나 성적이 아닌, 당신만의 인생이, 당신을 대신 할 사람은 없는 그런 인생이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긴키대학교는 무슨 일이건 도전하게 해 주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선택을 할 경우,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인생을 고르게 되고, 반대로 ‘스스로 열어가는 길’을 고른다면 더더욱 큰 사람으로 길러 내 주는 대학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친구들, 지인들을 많이 만드시고, 더 큰 세계를 시야에 넣으며 인생을 걸어 가 주십시오.
저 역시 여러분들에게 지지 않도록 앞으로의 새로운 인생을 걸어 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긴키대학교에 입학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중에 ‘좋은 학창시절이었어!’라고 생각 할 만한 대학생활을, 셀프 프로듀스 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 이렇게 여러분과 만날 수 있었던 점을 감사 드립니다.
2015년 4월 4일.
긴키대학교 입학식 프로듀서
츤쿠♂
입학식이 끝나고 회장을 나서니, 어느 사이엔가 구름이 걷히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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