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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상의 졸업을 앞두고 그토록 염원해 왔던 사제간의 대담이 실현 되었네요. 매우
기대가 됩니다.
코미야마 (이하 ‘코’) : 정말로 기뻐요!
시바타 (이하 ‘시’)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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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선 이 말부터… 코미야마상, 총선거
21위 축하드립니다.
시 : 와! 축하해!! (박수)
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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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감상을 말씀 해 주시겠어요?
코 : AKB48에 들어 온 이래로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남긴 건 처음이거든요. ‘난 대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거지?’라고 고민 한 적도 많았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모순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렇기에 더더욱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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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자면 시바타상과 다카미나상이야말로 코미야마상을 이 자리까지 이끌어 준 ‘스승님’이라 할 수 있는데요, 두 분이 처음 만난 건 분명 ‘AKB48 여행소녀’였지요? 코미야마상은
그 전부터 시바타상을 동경했다고 하고…
코 : 제가 AKB 활동을 하면서
모순을 느껴 고민하고 있을 때, 항상 시노부상께서 ‘선배들
중에도 온갖 역경을 견뎌내고 자신의 노력으로 올라 온 멤버들이 많단다. 그러니까 힘 내렴’이라고 격려 해 주시곤 했어요. 어느 날인가 시노부상에게 ‘대체 어느 분 얘기신가요?’라고 물었더니 아야쨩 이름이 나오더라고요.
시 : 에~! 그 얘기 처음 들었는데.
코 : ‘아야짱은 아마도 그룹 내에서도 팬들과의 유대감이 가장 강한 멤버일거야’라는 말씀도 하셨지요. ‘스스로의 노력과 팬분들의 열의로 선발까지
올라 온 아야쨩의 모습을 보며 코미쨩도 스스로를 믿고 노력 해 주었으면 해’라고도 하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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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여행소녀’를 다시 보면
코미야마상이 어렵사리 꺼낸 ‘고민’을 마치 일도양단 하듯
해결 해 주는 시바타상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고 믿음직해 보이죠. 시바타상은 그 당시 코미야마상의
이야기를 들으며 과거의 자신을 떠올려 보곤 했나요?
시 : 고민을 들을 것도 없이, 만난
순간 느꼈지요. ‘아, 이 아이는 내 부류다’라고. (웃음)
코 : 물론 아야쨩 이전에도 많은 멤버들,
스태프 분들께서 제 고민을 들어 주시고 조언도 해 주셨지만 아야쨩의 말은 정말로 설득력이 있었어요.
아야쨩 자신이 지금껏 걸어 온 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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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바타상은 지난 6월 24일, 졸업을 발표하셨죠.
코 : 사실 이전부터 ‘졸업 하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 했어요… (눈가에 눈물이 맺히며) 아… 눈물 날 것 같아요.
시 : 에에!!
코 : AKB49 무대에도, 총선거에도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분명 뭔가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라고
생각했어요. 아야쨩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니까 스스로의 목표를 향해 가려 하는 건가… 싶었어요. (눈물을 흘리며) 하지만
제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선배들이 점점 졸업 해 버리는
게 정말 슬프고 쓸쓸해서…
시 : 정말 기쁘다… 그런 얘기
해 주는 사람… 없거든. (웃음)
코 : 아마 앞으로도 다카미나상이나 아야쨩 같은 사람을 만날 수는 없을 것만
같아요… (눈물을 흘리며)
시 : 아니 뭐 죽는 것도 아니고 괜찮다니까. (웃음) 앞으로 코미쨩이 어떤 벽에 부딛히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경험 한 범위 내의 것이라면 언제건 최선을 다 해 도와줄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카미나상도 나랑 같은 마음일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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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상, ‘여행소녀’때 ‘자포자기하지 않고 부단히 노력을 하다 보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런 모습을 보아 줄 것’, ‘푸시를 받지 못 하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기어 올라가는 게 스토리 면에서도 재미있으니 너 스스로에게 자신을
갖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라’고 말씀하신 적 있죠.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시바타상이 ‘꾸준한 노력이 스토리가 되어간다는 희망’을
보여 준 것이 코미야마상에게 있어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진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작년
총선거가 끝난 뒤 맞이한 9월 21일의 코미야마상 생탄제
때 시바타상이 써 주신 편지는 정말 감동적이었지요.
코 : 그 편지에서 아야쨩이 ‘(코미하루는) 나와 처지가 비슷하다’고 말 해 주었던 것을 듣고 크게 자신을 얻었어요. ‘나도 꾸준히 노력하면 아야쨩처럼 될 수 있을거야’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아야쨩을 저 자신의 ‘이정표’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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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상 ‘코미쨩은 최고의 아이돌’이라고도
쓰셨었죠?
시 :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필사적으로 노력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 생각하거든요. 보통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맞추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버리기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코미쨩은 팬 여러분을 소중히 하면서, 자기 자신을 믿고 끊임
없이 노력 하거든요. 그것도 항상 웃으면서 말이죠. 그런
모습을 보며 ‘정말 대단한 아이돌이다’라고 생각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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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야마상은 그 해 총선거에서 권외에 머물렀었죠. 그 생탄제는 그런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을텐데 시바타상의 편지가 가슴 저리게 와 닿았을 것 같네요.
시 : 저 원래 다른 사람 약점 공격하는 게 능하거든요. (웃음)
코 : 아야쨩 이런 부분이 좋아요. (웃음)
‘벽’과의 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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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상 역시 이전까지는 코미야마상처럼 눈 앞에 솟아있는 ‘벽’에 부딛히며 많이 고민하셨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벽’들을 뛰어넘어 지금 이 위치까지 올 수 있었던 데에는 뭔가 계기가
있었나요?
시 : 총선거가 컸어요. 총선거에서
처음으로 랭크인 했을 때, ‘아, 열심히 하기만 하면 언젠간
보답을 받을 수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거든요. 그렇기에 자신을
갖고 코미쨩에게 ‘괜찮다’고 이야기 해 줄 수 있었던 것이고요. 제 인생은 그 날, 그 총선거날을 기점으로 엄청나게 변해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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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벽’을 하나 뛰어 넘는다
해도 곧바로 다른 ‘벽’이 솟아나곤 했지요?
시 : 네. 그렇죠. 총선거에서 아무리 좋은 성적을 낸다 해도 저 자신이나 팬 여러분이 기대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아마 코미쨩 앞에도 그런 ‘새로운 벽’들이 무수하게 솟아 날 것이라 생각해요.
코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 가장 두려운 게 그거예요.
시 : 응. 그런 ‘벽’은 반드시 솟아 오를거야.
코 : 네.
시 : ‘왜 쟤가 선발인데 나는 뽑히지 못 하는 거지?’라던가 ‘왜 나는 그 일에 뽑히지 않은 거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일도 많을 거고, 그런 모순들을 견디다 못해
자포자기하고 싶어 질 경우도 있을 지 몰라. 하지만 나는 코미쨩이 그런 것들에게 지지 않고 다 뛰어넘어
주었으면 좋겠어. 총선거에서 상위에 랭크인 되어도, 아무리
악수회를 잘 팔아도 푸시라는 것을 받을 수 없어서 ‘아 할만큼 다 했다. 이 이상은 무리야’라고 생각하게 되는 날도 찾아 올 지 몰라… 하지만 난 말이지, ‘이번 총선거에선 몇 등이었어’라던가 ‘이번 총선거에서는 누구누구를 이겼어’ 같은 일에 연연하지 않게 된 순간, 자신의 꿈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해.
코 : 팬 여러분께서도 ‘선거에서
상위에 들었는데 상황이 변하지 않았을 때가 가장 힘들다’고 말씀 해 주시곤 해요. (웃음)
시 : 네. 가끔씩 다른 멤버
팬분께서 내 악수회에 오셔서 그런 상담을 하시곤 하거든. (웃음) ‘매년
상위에 랭크인 하는데도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서 말이지. 하지만
언젠간 반드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알게 되는 때가, 순위나 악수회 판매 같은 데 연연하지 않고 더 넓은 세계를 보게 되는 때가 찾아 올 거야. 그 때가 언제 올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때가 오면 자신을 괴롭히던
모순으로부터 해방 될 수 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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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벽’들을 돌파 해 내고
그 너머의 세계에 들어선 시바타상에게도 ‘넘어 설 수 없었던 벽’이란
게 있었나요?
시 : 네. 있었어요. 총선거에서 선발에 들었음에도 SKE의 프론트 멤버냐고 물으면 자신있게
그렇다고 할 수 없었고 말이죠…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결과’로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해요. 당장 포지션에서는 이기지 못 해도 긴
시야로 보았을 때 결과적으로 이길 수 있다면 그게 더 좋은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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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경지에 다다른 것 같네요.
시 : 다다라 버렸나봐요. (웃음) 한 1년쯤 전 부터는 포지션 같은 데 연연하기 않게 되었어요. ‘두고 보라고!’ 정도는 생각하지만.
코 : 와! 아야쨩다워! (웃음)
시 : 하지만 코미쨩은 아직 이 정도까지는 오지 않아도 돼 (웃음) 아직 AKB에서
더더욱 위로 올라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거든. 응. 분명
올라 갈 수 있을 거야. 지금 하는 것 처럼 계속 노력한다면 반드시 선발에 들 수 있을거야. 관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모르지만 팬 분들은 분명히 봐 주시고, 인정
해 주실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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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시바타상은 ‘여행소녀’때도
‘팬분들께 인정을 받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었죠.
시 : 네. 정말로 중요해요. 다른 멤버들이 어떻게 생각 할 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코미쨩은 벌써 ‘좋은
팬분들’이 함께 해 주고 계신다고 생각해요.
코 : 아, 그건 저도 실감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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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코미야마상이 직면 할 것으로 보이는 ‘벽’들과 어떤 식으로 싸우면 좋을 지, 조언을 해 주신다면?
시 : ‘보답받지 못 하는 건 아닐까’ 라던가
‘뭘 하건 결국 변하는 것 없다’고 생각하게 될 때가 올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그럴 때에도 변하지 말고 지금처럼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생각해요. ‘스스로의 힘으로 기어 올라 온’ 사람은 ‘푸시’를 받아서 올라 온 사람에 비해 ‘모티베이션을 유지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해요.
코 : 정말 대단해요.
시 :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변하지 말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
코 : 항상 배우는 점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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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야마상은 시바타상의 졸업발표가 있던 날, 구플을 통해 ‘아야쨩이 보여준 아이돌의 길을 내가 이어받고 싶다’고 이야기 하셨죠. 시바타상이 보여준 ‘아이돌의 길’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코 :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응원 해 주시는 팬 여러분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확실히 말로 전달하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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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이 바로 나오네요. (웃음) 자
그럼 이번에는 시바타상, 졸업을 결의 한 시점에서 내린 결론이랄까요,
스스로의 ‘아이돌의 길’은 어떤 것이었나요?
시 : 저는 사실 아이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해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춤도 못 추고, 아이돌처럼 귀엽게이야기 하지도 못 하고, 오히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툭툭 내뱉는 타입이고 말이죠. (웃음)
코 : 후후후
시 : 하지만 ‘아이돌’이란, 결국 자신을 응원 해 주시는 팬 여러분을 소중히 하는 것 만으로도
괜찮은 것 아닌가 싶어요. 사실 전 오해 사기 쉬운 타입이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 팬 여러분께서 기뻐 해 주신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지 않나 생각해요. (웃음)그렇기에 팬 여러분들을 위해 노력하는 게 가장 좋은 것 아닐까요? 선거
때나 악수회 때나 저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 해 주시는 것이 팬 여러분이니까요. 그런 팬분들을 위해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진심’밖에 없으니까요… 아마도. (웃음)
새로운 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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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시바타상이 ‘팀 E에서 KⅡ로 이적 한 것을 계기로 나 자신보다 팀을 먼저 생각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죠. 개인적으로는 그 말씀이 정말 인상적이었는데요,
그러고 보니 시바타상이 본격적으로 활약하시기 시작 한 것 역시 KⅡ로 이적하신 직후였지요.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코미야마상도 최근 들어 그룹, 팀, 동기 등 ‘동료’나 ‘집단’에 대한 애정을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하신 것 같아요. 얼마 전에 개봉했던 최신 다큐멘터리 영화 완성 피로시사회 회견때도 코미야마상은 ‘언젠가 AKB48를 위해 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멤버가 되고 싶다’고 말씀하셨고요. 역시 ‘팀을
위해서’라는 의식을 갖고 활동 하는 멤버들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할까요, 독선적인 멤버들은 넘볼 수 없는 일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시 : 네. 그런 건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런 걸 깨닫기까지 3년 정도 걸렸지만 말이죠. 처음에는 저 역시 ‘개인전’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룹의 상황이 좋으면 그만큼 자기자신에게도 돌아오는 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그렇기에 자신을 위해서라도 팀을 먼저 생각하는 게 낫다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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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타상은 말 그대로 그렇게 팀을 생각하면서 좋은 흐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이군요.
시 : 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처음에는 ‘팀만 생각하다가는 결국 나 자신의 꿈이나 목표가 흔들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 생각 해
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이죠. 자신이 속해있는 팀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 기분도 좋을 뿐더러 자기 자신에게도
좋은 영향이 되돌아오기 마련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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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을 짊어지고 있다는 각오를 내 보였을 때, 비로소 한 사람의 아이돌로서 급격하게
성장 하기도 하죠. 그렇기에 저 개인적으로는 코미야마상이 총선거에 랭크인 하고, 소감에서 작년 다카미나상의 소감을 계승했을 때, ‘코미야마 하루카라는
존재에게 AKB48이 깃들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코미야마상이 더 높은 곳까지 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코 : ‘여행소녀’ 때 아야쨩이
‘다른 그룹에 이적하라 하면 바로 그만 둘 거다’라고 이야기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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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랬지요.
코 : 당시 저는 아직 팀 4가
아니라 자기 자신밖에 생각하지 못 했어요. 그렇기에 ‘내가
더 위로 갈 수만 있다면 이적 하는 것도 상관 없다’고 이야기 했지요.
하지만 최근 들어서 겨우 그 때 아야쨩이 했던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저는 아직 경험이
적기에 겸임은 어떨 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적만은 거절 할 것 같아요. 앞으로도 AKB의 멤버로서 노력 해 가고 싶고, 다카하시 쥬리 팀 4에 들어 온 뒤로부턴 팀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게 되었어요. 팀 4의 멤버로서 더 위로 올라가고 싶고, 동기인 15기와 함께 위로 가고 싶어요. AKB48의 멤버로서는 말 할 것도 없고요. 그런 의식이 싹 튼
것은 요 1년사이에 있었던 일이지요. 정말 많은 것이 변한
한 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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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B48의 숨겨진 역사’ 다큐멘터리나 수 많은 인터뷰들을 통해 수 많은 팬분들께서도
코미야마상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해요. 그리고 그 결과가 이번 총선거 순위로 나타난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코 : 그렇기에 이번 선거에서 AKB48이
제 1당이 된 게 정말 기뻤어요. 그것도 팀 4가 가장 많이 랭크인 했으니까요. 지금껏 관심이 없었다고 하면 어폐가
있겠지만, 최근 들어 AKB48에 대한 마음이 크게 변한
것은 사실이에요. 선배님들이 만들어 오신 역사, 그리고 브랜드를
저희가 계승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누구에게도 질 수 없지요. 그리고 지지 않기 위하여 일치단결해야만 하고 말이죠. 앞으로 AKB48이 어떻게 변해 갈 지 정말 기대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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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야마상, 얼마 전에 구플에 ‘언젠가
아야쨩을 뛰어넘고싶다’고 쓰신 적 있지요. 시바타상의 유전자를
이어 받은 코미야마상이, 시바타상조차도 뛰어넘지 못 한 ‘벽’을 돌파 할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할 것 같아요.
시 : 분명 뛰어 넘을 수 있을거야. (웃음)
코 :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정말 대단하다 생각하는 게 다카미나상과 아야쨩이거든요. 그런
아야쨩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제게 있어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요. 물론 엄청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엄청난 대상이기에 뛰어넘고 싶어지고, 그렇게
성장한 제 모습을 아야쨩이 지켜 봐 주었으면 해요. 신세를 진 아야쨩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보은이
바로 그것이라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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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사제관계’군요. 시바타상, 앞으로도 코미야마상이 역경에 처해있을 땐 도와주세요.
2009년 봄. 주말을 중심으로 열리던 극장공연도 서서히 평일 공연 수를 늘려가고 있었고, 그에
부응하듯 오타들의 열기 역시 가속화 되었다. 공연이 있는 평일 밤이면 공연에 들어가진 못 한 오타들이라
할 지라도 선샤인 사카에 앞에 모여 공연을 보고 나오는 동료들과 합류하여 그 날 공연의 감상을 듣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곤 했다. 팀 S의 1st세트 리스트였던 ‘PARTY가 시작돼요’ 당시에는 그다지 서로간의 유대감을 느끼지 못 하고 있던 오타들의 결속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강해져만 갔다.
2009년 5월 24일, SKE48의
첫 단독 콘서트 ‘첫 과외수업’이 열렸다. 이 날, SKE48의 2기생들은
처음으로 스테이지를 밟게 되었던 것이다. 2기생들은 이 날 ‘만나고
싶었어’, ‘벚꽃 잎들’, ‘SKE48’ 세 곡을 피로하였고, 바로 그 다음날, 2기생들을 중심으로 한 새 팀, 팀 KⅡ이 발족되었다. 2008년 10월에 첫 공연을 한 지 불과 반년만에 SKE는 2팀 체제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일견 그룹이 순조롭게
굴러가고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사실 ‘팀 S’으로부터 충격을 받았던 지역 오타들에게 있어서는 너무 이른 결정이었다.
“결성은 겨우
반년밖에 차이가 안 났지만, 솔직히 말해 S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팀이라고 해야하나… 그 구성원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멤버 한 명
한 명이 갖고 있는 힘 자체가 너무나도 차이가 났어요. 그 모습을 보고 ‘어리다고 다 좋은 건 아니구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지요. 첫 공개때 그나마 관심이 갔던 건… 굳이 말하자면 (무카이다) 마나츠 정도였을까요. 이목구비가
잘 정돈된 얼굴이구만… 하는 정도의 관심이었지만. 사실 1기생들 중에서 (사토) 미에코와 (사토) 세이라가 팀에 들어 간 걸 보고 ‘잘 됐네’라고 생각 한 정도였어요.
“ (모 고참 오타)
공연이 끝난
뒤, 정산을 해 보았을 때 2기생의 생사진은 엄청난 수의
재고가 남아 버리기도 했다. 팀 S의 시작 역시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킬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임팩트가 강한 팀 S 특유의
색에 익숙해 져 버린 오타들에게 있어 KⅡ는 너무나도 특색이 없고, 약해
보였던 것이다.
마키노 안나라는
호랑이 선생님의 지도 하에 철저하게 단련을 받아, 퀄리티가 높은 퍼포먼스력과 끈끈한 단결력을 갖추게
된 S에 비해 KⅡ는 아무래도 긴장감이 부족해 보였다. 팀 내 1기생과 2기생간의
거리, 리더격 존재의 부재로 인한 난잡함, 멤버가 되었다는
데에 만족하여 그 이상 발전하려 하지 않는 프로의식의 결여… 물론 개중에는 사이토 마키코나 후루카와
아이리처럼 춤이나 노래 실력이 있는 멤버도 있기는 하였지만, 팀으로서의 결속력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러, 차근차근 KⅡ의 공연 데뷔를 향해
일들이 진행되어 갔다. 안무를 배우고, 포지션이 정해지고, 센터에 무카이다 마나츠와 사이토 마키코가 발탁되는 등 큰 청사진이 그려졌다.
하지만 그 청사진을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 세세한 부분들이 아직 희뿌옇게 흐려진 상황이었던 것이다. 팀 S가 어떤 팀이었는지, 어떤 식으로 해 왔는 지를 뼈저리게 알고 있던
사토 세이라와 사토 미에코는 그런 모습을 보며 속이 탔다. 하지만 그런 두 사람의 애 타는 마음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KⅡ의 첫 공연, ‘만나고 싶었어’ 초연의 막이 올랐다.
“솔직히 아무런
인상도 못 받았어요. 애초에 ‘만나고 싶었어’ 공연은 그렇게 분위기가 달아 오르는 공연도 아니고 말이죠. 게다가
좌장공연이다 보니, 센터만 부각되어버리거든요. 그렇기에 ‘아, 센터는 마키코와 마나츠구만’ 정도
밖에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네요. (앞서 언급된 고참오타)
“센터가 둘인데
한 명은 귀여운 대신 춤이 젬병이고, 춤을 좀 추는 것 같은 애는 생긴 게 머스마같고… (웃음) 심지어 그 둘 말고 딱히 시선을 끄는 아이도 없었거든요. ‘이 팀, 괜찮으려나? 이대로
얼마나 가려나?’ 싶어서 걱정이 다 되더군요. 뭐, 그렇게 말 하면서도 결국 저 같은 경우에는 계속 공연 가긴 갔습니다만, 첫
공연땐 앞으로 얘들이 발전 해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KⅡ 고참 오타)
상기한 고참
오타들의 발언대로, KⅡ의 ‘만나고 싶었어’ 공연은 한동안 인기를 얻지 못 하고 침체된 상황이 이어졌다. 언제나
‘KⅡ는 S에 비교하면…’이라는
말을 들으며 ‘나고야의 열등생’이라는 낙인이 찍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2)
총선거가 바꾸어 버린 것.
그럼 그렇게
‘열등생’들이 모인 KⅡ를
보며, 오타들이 SKE48이라는 그룹에 대해 실망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오타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KⅡ는 엉망이었지만
뭐, S는 괜찮았으니까요.”
어느 사이엔가
오타들에게 있어 ‘나고야의 자랑’으로까지 자리매김한 팀 S.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손을 맞잡고’ 공연이 거듭 될수록 눈에 보이게 성장 해 나가는 S 멤버 본인들의
눈부신 발전상에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마츠이 레나의 각성과 성장이었다. ‘PARTY’ 공연에선 뒷줄에 서서
눈에 띄지 않는 멤버였던 그녀가 불과 4개월만에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손을 맞잡고’ 공연에서는 어느 사이엔가 맨 앞줄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3월에는
AKB48의 11번째 싱글, ‘10년 벚꽃’에서 마츠이 쥬리나와 함께 당당히 AKB48의 선발 멤버에 이름을
올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불과 반년 남짓한 짧은 시간동안 보여주었던 그녀의 성장과, 그런 그녀를 믿고 뒤를 받쳐 준 오타들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포지션 면에서
보면 쥬리나의 뒤를 이어 2인자이긴 한데, 사실 현장에서의
인기는 엄청났어요. 내심 ‘쥬리나 곧 레나한테 역전 당하겠네. 괜찮으려나?’라고 걱정이 될 정도.
레나 팬들 중에는 엄청 뜨거운 사람들이 많았고요. 솔직히 ‘비의 피아니스트’는 저도 엄청 좋아하고 말이죠. 거의 완벽하게 곡에 빙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어요.” (쥬리나
오타)
“레나의 오타들은
뭐랄까 올곧은 사람들이 많다 해야하나... 가끔 사람들이 ‘쥬리나에
대한 대항의식 같은 건 없냐’고 묻곤 하거든요. 하지만 정말로
그런 게 아니란 말이죠. 레나쨩이 즐겁게 공연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걸로 된 거예요. 딱히 누가 이기고 누가 지고 같은 건 사실 큰 관심이 없어요. 그저
마츠이 레나가 좋고, 마츠이 레나를 보러 공연장에 가고, 마츠이
레나를 응원하는 것 뿐. 다른 사람들이 W 마츠이네 뭐네
하면서 경쟁을 붙이고 비교하는 것 뿐이지요. 아마 그런 생각은 저희 뿐 아니라 쥬리나 오타들도 마찬가지로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고참 S 오타)
오시멘에
대한 그저 단순하고 올곧은 ‘애정’. 그리고 그와 비슷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큰 ‘팀
S’에 대한 자부심. 나고야의 오타들 사이에 퍼져가던 감정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 당시의 S는 정말로 ‘누가 더 뛰어난가’ 따위에
연연하는 팀이 아니었어요. 물론 춤이라 하면 쿠와바라나 모에가 뛰어났고, 인기면에서는 쥬리나나 레나가 다른 차원에 있었지만, 멤버 개개인의
특색이나 개성 면에서는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았거든요. 개개인의 능력으로만 보면 물론 그 중에서
뒤쳐지는 애도 있었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진짜 기적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겁니다. 멤버들의 특색과 유닛 곡의 파트들이 적절하게 매치 되어 있었기에 더더욱 어디
한 군데가 비어보이거나 약해보이거나 하는 게 전혀 없었어요. 사실 그건 0인 상태부터 쌓아 올려 간 1기생이기에 손에 넣을 수 있는 오리지널리티, 완성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오타)
최강의 팀, 그리고 그런 팀이 선보이는 최강의 공연. 그 곳에서는 선발주자인 AKB48에 대한 열등감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최강 아이돌 팀 S다’라는
자부심이 있었을 뿐.
그리고 그런
와중에 7월 8일, ‘AKB48
13th싱글 선발 총선거 ~하느님께 맹세코 진심입니다~’가 열리게 되었다. 아이돌들에게 순위를 매겨 줄세우기를 한다는 이유로
찬반양론이 나뉘는 가운데에도 오타들을 열중하게 만들었던 제 1회 총선거가 막을 올렸던 것이다. 팀 S에 대한 드높은 자긍심, 그리고
멤버들에 대한 애정으로 유명한 나고야의 오타들이었기에 총선거에 대한 반응도 뜨거우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헤~ 선거를 하는구만. 하지만 어차피 저거 AKB 이벤트 아냐?’ 라는 느낌이었어요. 애초에 어떤 이벤트인지 감도 잡기 힘들었기에 딱히 표를 모으자는 적극적인 움직임도 없었어요. 일단
CD를 사는 김에 투표는 하긴 했지만.” (쥬리나 오타)
“당시에는
‘본점과 지점’이라는 관계에 대해 딱히 크게 의식 하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이벤트 이름 자체가 ‘AKB48 선발 총선거’였고요. 뭐 SKE는 AKB가 아니니까 딱히 참가 안 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랬기에 솔직히 결과를 보고도 딱히 별 생각 안 들었고요. 쥬리나나
레나의 성적을 보고 든 생각은 ‘뭐, 어차피 AKB의 이벤트인데 뭐.’ 정도였다고 할까요.” (S오타)
지금이야
전 48그룹 오타들 중에 가장 총선거에 열정적으로 참가하는 SKE오타들
조차도 당시에는 자신들이 응원하는 그룹이 ‘48그룹’의 일원이라는
점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단순히 프로듀서가
같을 뿐인 독립적인 그룹’ 정도의 이미지였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SKE48 멤버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오타들과는 180도 다른 생각이었다. 비록
AKB48의 선발 경험이 있는 쥬리나, 레나는 각각 19위, 29위를 마크하며 괜찮은 성적을 남겼지만, 그럼에도 쥬리나는 분루를
흘리며 ‘이 결과에는 만족 할 수 없다’, ‘언젠가 꼭 1위를 손에 넣겠다’고 단상에서 선언하였던 것이다. SKE의 최전선에 서서 막연한 꿈을 쫒던 소녀들과, 자신의 지역이, 극장이 자신들은 물론이고 멤버들에게도 최고의 현장이라 믿어왔던 오타들의 마음은 그렇게 서로 교차했던 것이다.
“멤버들이
생각하는 총선거와 오타들이 생각했던 총선거는 전혀 달랐지요. 멤버들에게 있어서는 자신 자체를 숫자로
평가받는 일이기에 엄청 큰 압박이었겠지요. 특히 쥬리나나 레나는
AKB48 선발에 들어 함께 활동하는 경우도 많았고, 본인들이 SKE48이라는 그룹을 대표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더더욱. 1회 총선거를
겪으며 그런 점을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나고야의 오타들은 ‘AKB48라는 그룹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안게 된 겁니다.” (KⅡ오타)
AKB에게 있어 2009년이라 하면, 상기한 1회
총선거 외에도 투표권이 동봉되었던 전작 ‘눈물의 서프라이즈’, 총선거
싱글인 ‘변명 Maybe’가 오리콘 주간 차트에서 2위를 기록하고, 후속작인 ‘River’에서
처음으로 오리콘 주간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굵직한 사건이 많은 한 해였다. 연말에는 홍백가합전에 처음으로 단독 출장하는 등, 그룹에 있어 큰
터닝포인트를 맞이한 기념비적인 한 해였다. 점점 거대해 져 가는 플래그십 (기함, 구심점, 주력상품)의 모습은 아무리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의식 할 수 밖에 없는 법.
“사실 그
이전까지는 쥬리나, 레나 오타 이외에는 그냥 ‘공연이 재미있으면
됐지’라는 인식이 가했거든요. 하지만 SKE가 AKB의 콘서트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카에의 오타의 시야가
넓어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넓어진 시야 저 편에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도쿄’의 모습이었습니다. 쥬리나와
레나는 AKB48의 선발 단골이 되어, AKB로서 활동을
할 때마다 SKE를 어필하고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람이
변하게 되기 마련이죠.” (KⅡ오타)
이전까지는
그저 오타들 사이에서 소비되는 데 그쳤던 SKE. 하지만 ‘플래그십’인 AKB가 규모를 키우면 키울수록 세간의 시선은 ‘SKE는 AKB의 2군
그룹’이라는 식으로 고정 될 뿐이었다. 이런 편견에 대한
반발, 그리고 자신들이 응원하는 소녀들의 높은 꿈을 이루어 주고 싶다는 오타들의 마음은 어느 사이엔가
크게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1년 9월 어느 날 밤, 오빠와
나는 거실에서 AKB48의 버라이어티 방송, ‘AKBINGO!’를
보고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잠 든 고요한 밤이었다.
얼마 전에 발매 된 ‘플라잉 겟’이 크게 히트를 치며 5작품
연속으로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는 등, 당시 AKB48의 인기는
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나 역시 AKB48에 관심을 갖기 시작 했던 때였기에, TV에 AKB48이 나온다고 하면 빼 놓지 않고 챙겨 보고 있었다. 당시
내가 좋아하던 멤버는 센터였던 마에다 아츠코상. 얼굴도 귀엽고 목소리도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도 초등학생 때부터
춤을 배웠었기 때문에 AKB48의 춤을 보는 게 참 좋았다. 그렇기에
거의 매 주 밤을 새 가며 오빠와 방송을 챙겨보곤 했던 것이다.
매 주 그렇게 AKB48의 멤버들이 데이트 등의 시추에이션에 맞추어 코디네이트를 하고 나와,
그것을 평가 해 보거나 요리 대결을 하거나 하는 모습을 보며 웃고 즐기곤 했었지만, 그
날 방송 말미에 올라 온 광고는 평소완 다른 것이었다.
AKB48 그룹 중 나고야를 본거지로 하고 있는 SKE48의 5기생 오디션이 열린다는 광고였다.
현재는 후쿠오카(HKT), 니이가타(NGT)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JKT)나 중국(SNH) 등 해외에 까지 그 영역을 넓힌 AKB48 그룹이지만, 당시에는 도쿄의 AKB48과 나고야의 SKE48, 오사카의 NMB48 세 그룹만이 존재하고 있는 때였다.
내가 살고 있는 나고야에 SKE48가 생긴 건 2008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AKB48 본체의 싱글 선발에도 발탁 되었던 마츠이
쥬리나상과 마츠이 레나상, 다시 말 해 ‘더블 마츠이’나 특유의 격렬한 댄스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 이상은 잘 알지 못 했었다.
‘나가 봐’
오빠가 씩 웃으며 다시
한 번 말을 걸었다.
‘난난 정도라면 붙을걸’
삼 형제의 둘째, 오빠랑 남동생 사이에 끼어서 자란 나는 어릴 때부터 오빠가 축구나 수영, 검도
같은 것을 배우기 시작하면 바로 ‘나도 할래’라며 따라 하곤
했었다. 오빠 역시 그런 나를 귀여워 해 주었기에, 아직까지
나를 ‘난난’이라고 마치 어린 아이를 부르듯 부르곤 한다. 약간 시스콘틱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 나 역시 브라콘 경향이 있을
지 모르는 거니…
그런 얘기는 차치하고, 본론으로 돌아 가 보자.
오빠는 내게 ‘SKE48의 오디션을 보라’고 몇 번이고 권유를 했다.
아이돌이 된다? 내가?
‘뽑힌다니까’
애초에 팔랑귀인 것도 있어,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렜다.
‘정말로? 그래, 뽑힐지도
몰라!!’
라고 가볍게 오빠에게 맞장구를
쳐 버린 것이다.
1-2. 생각 해 본 적도 없었는데.
사실 이전까진 ‘아이돌이 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AKB48은 어디까지나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아이돌이기에 중학생인 내게 있어 너무나도 먼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SKE는 이 고장에 본거지를 둔 아이돌.
그리고 SKE에 들어 갈 수만 있다면,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춤을 배우기
위해 레슨비를 낼 필요도, 의상을 입기 위해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역시 마음을 자극했다. 의상을 만들기 위해 천을 사러 돌아다닐 필요도, 엄마를 졸라 옷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리고 무대 위에서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더 할 나위 없는 일이
아니던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창피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이지만, 나는 아무런 각오도, 숙고도 없이
저런 가벼운 마음만으로 SKE48 5기생 오디션에 응모하게 된 것이다.
우리 가족은 자동차 메이커에
근무하시는 아빠, 전업 주부인 엄마, 3살 많은 오빠와 2살 어린 남동생에 나까지 5인 가족이다.
나는 나고야시 외곽의 공립중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다른 동급생들과 마찬가지로 성적에 맞는 공립 고등학교에 진학 할 생각이었다. 중학교 때 성적은 중간에서 조금 위 정도로, 5단계로 점수가 매겨지는
성적표에는 ‘4’가 가장 많았다. (대학교 수험 때와는 달리, 당시에는 과학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다시 말 해, 딱히 공부를 잘 하는 것도, 못 하는 것도 아닌 극히 평범한 중 3이었던 것이다.
중학교 때 부활동은 검도부. 부 활동이 없을 땐 집 근처 도장에 가서 수련을 하곤 했다. 나름
재능도 있다고 칭찬도 들었고, 그게 기뻐서 열심히 수련 하기도 했었기에, 중 3때 2단을 따 내기도
했다.
1-3. 장래 희망은 아무로쨩의 백댄서.
검도 이외에도 초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해 온 것이 있었다. 바로 ‘댄스’ 였다. 어릴 때부터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 했었기 때문이다. 한 살하고 2개월 때쯤에 가족 여행으로 하와이에 갔던 적이 있는데, 해변에서 파티를 하던 사람들이 켜 놓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해서 엄마를 깜짝 놀라게 했던 적이 있다고
할 정도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힙합댄스 스쿨에 다니기 시작 한 뒤, 재즈댄스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재즈댄스 동작을 더 잘 하기 위해 클래식 발레를 잠깐 배우기도 했다. 그 정도로 춤 추는 것을 좋아했고, 열중 했기에 댄스 스쿨의 발표회
때 무대에도 설 수 있었고, 전국대회에서 8강에 들기도 했었다.
그저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것, 그 자체가 너무나도 즐거웠다. 춤을 추고 있을
땐 머릿 속에 잡념이 사라지고, 나를 둘러 싼 세계가 멈춘 것 처럼 보이곤 했다. 그런 감각은 일상에선 맛 볼 수 없는 엄청난 쾌감이었다.
춤 연습도 좋았다. 거울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체크하며 부족한 부분을 메워 가는 그 과정도 즐거웠고, 스테이지 위에 섰을 때, 나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며 텐션이
확 올라가는 것도 좋았다.
초등학생 때 나의 꿈은
‘아무로쨩 (아무로 나미에)의
백댄서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잘 받는 데다가, 팔랑귀인 탓에 그 뒤로도 내 꿈은 수 없이 바뀌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땐, 아야세 하루카상이 OL로 나오는 드라마, ‘호타루의 빛’을 보고 ‘회사에
들어 가 이벤트 기획을 하거나 이벤트 준비를 하고 싶다’는 이유로
OL이 되고 싶어져, ‘어떤 직업을 가져야 저런 일을 할 수 있냐’고 아빠에게 묻기도 했다.
그리고 중 3 당시, 나의 꿈은 다름 아닌 ‘중학교
선생님’ 이었다.
중 2때 담임이셨던 20대 중반 선생님이 정말 열정적인 분이셨기에, 축제나 운동회 등의 이벤트 때 마다 앞장서서 이끌어 주셨던 데다가, 항상
학생을 생각 해 주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그 선생님을 정말로 따랐었기 때문이다. 급식 시간에는 항상 선생님 옆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하거나 했다.
그 선생님과는 무슨 일이건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었다. 특히 연애 이야기를 자주 했다. 내가
‘누구누구가 좋다’고 하면 선생님께선 웃으면서 ‘너는 연애랑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이야기 해 주시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도 ‘학생들이 무슨 일이건 믿고 상담 할 수
있는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곤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돌’이 되리라는 생각은 정말 눈꼽만큼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1-4. 인생 첫 오디션
오디션을 받아 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뒤, 바로 부모님께 말씀 드렸다.
의외로 부모님께서는 별달리
반대 하시지 않았다.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별다른 반응
자체가 없었다.
엄마는 ‘아, 그래?’라고 넘기셨다. 아마도 내가 정말 응모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아빠는 ‘그래? 재미있어 보이네’ 정도의
반응이셨다. 엄마 보다야 반응이 있었지만, 아빠 역시 ‘어차피 좋은 추억이 되겠지’ 정도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두분 다 ‘어차피 붙을 리 없다’고
생각 하고 계신다는 게 너무 잘 느껴졌다.
‘가볍게 넘기시네. 뭐, 너무
기대 하시는 것 보다야 낫지만. 하지만, 만약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두 분 다 놀라시겠지?’ 라 생각하긴 했지만, 지난
밤, 오빠랑 들떠 있던 때 보다는 아무래도 풀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응모에 필요한 전신 사진과
상체 사진은 내 방에서 몰래 찍었다. 하지만 응모 동기와 자기 PR 칸을
채우는 데 크게 고전 한 결과, 응모 원서를 우편함에 넣은 것은 마감 전날이었다.
원서를 보내고 ‘어차피 떨어졌을 거야’라 생각하고 있으려니, 서류 심사 통과 연락이 왔다.
고작 1차 서류심사 통과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기분이 업 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당시 오디션에 응모한 사람은 5,988명이나
되었다고.
나한테 오디션을 추천 해
준 오빠는 서류심사 통과 소식을 듣고 ‘에? 정말로 붙은
거야?’라며 깜짝 놀랐다. 그렇게 ‘붙을 거야’라고 한 주제에.
2차 심사는 단체 면접이었다. 회장은 나고야 최고의 번화가, 사카에에 위치한 SKE48 극장.
SKE48의 공연이 매일같이 열리는 홈 그라운드였다. 쇼핑을 하다 극장 앞을 지나치는 경우는
있었어도 안에 들어 가 보는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심사 당일, ‘성숙하고 귀여운 느낌이 좋겠지’라 생각한 나는 평소에 즐겨 입던
청바지나 화려한 힙합풍 T셔츠를 봉인하고 청초한 분위기의 크림색 가디건과 녹색 체크 스커트를 입었다. 마지막 포인트는 베레모.
주저하며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객석에 심사위원분들이 다섯 분 정도 앉아 계셨다.
오디션 참가자들이 5명씩 앞으로 나가 심사위원분들 앞에 서서 각자 2분 정도씩 자기 PR을 하고, 자기 PR이
전부 끝난 뒤에 심사위원분들께서 질문을 하는 식으로 오디션이 진행되었다.
인생 첫 오디션. 물론 긴장도 되었지만 중학교 때 학생회장을 했었기에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오디션이 끝난 뒤, ‘우물쭈물하지 않고 할 말 했으니 됐어’ 라며 자기만족에 젖어들었다.
1-5. 가라오케에서 연습을 하다.
전화가 울렸다.
‘2차심사 통과’를 알리는 전화, 동시에
‘최종 심사에 참가 하라’는 연락이었다.
최종심사는 춤과 노래 심사였다.
춤 심사는 자신이 있었기에, 마지막 심사에 춤 심사가 있다는 것이 행운으로 느껴졌다.
문제는 노래…
내가 고른 곡은 이키모노가카리의
‘제멋대로 로맨틱’.
이전까지는 가라오케에 가
본 게, 가족과 함께 갔던 2~3번 정도뿐이었기에 그 곡을
제대로 불러 본 적은 사실상 없다시피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 곡이 주제곡으로
쓰인 드라마를 좋아했었기에 노래 자체는 알고 있었고, 잘 하면 부를 수 있을 것 같기는 했다. 그리고 업템포 곡이기에 신나서 부르다 보면 노래를 잘 부르는 지, 못
부르는 지 크게 티가 안 날 거라 생각했던 것 역시 이 곡을 고른 이유였다.
최종 심사를 앞두고 매일같이
아빠와 함께 집 근처 가라오케로 가, 연습을 했다. 매일 2시간씩 같은 곡을 부르고, 또 불렀다. 아빠는 ‘몸이나 손을 가볍게 움직이는 게 인상에 남을 거야’ 라는 식으로 열심히 조언을 해 주셨다. 내심 ‘그건 가수들이나 하는 거지, 나 같은 초보가 그게 될 것 같아요?’라고 창피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나를 생각해서 해 주시는 그런
조언이 기쁘기도 했다.
그리고 2011년 10월 16일. 최종 심사날이 밝았다.
최종 심사를 앞두고 목을
풀어두기 위해 아빠 차를 타고 아침 일찍부터 사카에로 나가, 한 시간 정도 가라오케에 들어 가 노래를
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노래는
사실 엄청 못 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SKE48의 노래는 단체로 부르니까. 사실상 노래보다 중요한 것은 퍼포먼스, 특히 한 사람 한 사람 바로
눈에 들어 오는 춤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시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