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다카하시 미나미
-AKB48과 눈물, 그리고 나-
AKB48 그룹의 초대 총감독으로서 300명이 넘는 멤버들을 이끌어 온 그녀. 아키모토 총 프로듀서에게 ‘AKB48이란 곧 다카하시 미나미를 뜻한다’는 찬사를 받은 작은 리더가 살아가는 방식에는 수 없이 흘러 온 눈물이 스며있었다.
‘극장에 오는 것도 이제 졸업 공연 한 번 남았나…’
총 8번에 걸친 ‘프로듀스 공연’을 끝낸 뒤, 다카미나의 눈에는 눈물이 어른거렸다.
4월 8일에 태어났고, 신장 역시 148.5cm인 그녀.
극장 입구 간판을 바라보며 ‘평생 ‘48’이라는 글자와는 떨어 질 수 없겠네요’라 읊조리는 그녀는 이 극장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려 왔던 것일까.
그 눈물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AKB48과 다카하시 미나미의 지난 10년을 알 수 있으리라.
‘가수’에 대한 꿈이 싹튼 초등학교 4학년때의 가라오케.
- 결성 10주년이 되었는데요.
다 :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었어요. 14살 때부터 이 곳에 있었기에, 지금 생각 해 보면 제 인생에서 상당 부분을 이 그룹에 써 왔던 것이라 새삼 깨닫게 됩니다.
- AKB48에 들어 와, 연예계에 데뷔 하신 것이지요?
다 : 부모님은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연예계로 보내고 싶어하셨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름을 지을 때도 연예계에 잘 맞는 획수 (※일본은 이름 획수로 점 치는 것이 일반적)로 지으셨다고 해요. 어릴 때엔 연예계 같은 데 흥미가 없었는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랑 같이 가라오케에 갔다가 노래 잘 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 나카모리 아키나상에게 빠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때부터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싹 터, 오디션을 받기 시작했지요.
- 어릴 적에는 어떤 아이였나요?
다 : 지금이야 ‘리더’의 이미지가 있지만, 어릴 때는 정반대였어요. 머리도 금발로 물들였었고 말이죠. (웃음) 허세도 심했고, 열혈스러운 체육계에 대해선 ‘촌스럽다’ 던지 ‘뭐 하러 저렇게 쓸 데 없이 땀 흘리고 있냐’며 비웃곤 했어요.
- 의외네요.
다 : 열혈 스토리인 만화는 좋아했지만, ‘나는 어차피 저럴 수 없어’라 냉정하게 분리해서 생각했었거든요. AKB48에 들어와서도 한동안은 되게 얌전하게 눈에 띄지 않으려 했어요. 여자들끼리 있는 사회도 별로 안 맞았고, 귀찮은 일에 말리기도 싫었거든요.
- 그랬던 것이 변한 계기가 있나요?
다 : 활동을 하다 보니 점점 재미있어졌어요. 레슨 때, 제가 제대로 춤을 못 춰서 결국 안무를 바꾼 적이 있거든요? 말 그대로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본 거잖아요. 그게 정말 분했어요. 그래서 다신 그런 일이 없도록 열심히 노력을 했더니, 1년쯤 뒤에 나츠 마유미 선생님께서 다른 멤버들에게 ‘다카미나처럼 추라’고 해 주시더라고요. 이전, 학교에 다닐 땐 딱히 좌절할만한 경험도 없었기에, 이 곳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저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나… 이 정도로 분해 할 줄 아는구나’ 라던가 ‘다른 사람의 평가를 받는다는 게 즐겁기도 하구나’ 라던가. 노력하는 것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보답이 주어지는 과정을 배우게 되었지요. 이전까지는 무언가에 열중하고 뜨거워 지는 것에 대해 꼴사납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그것이 정말 멋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저 스스로도 ‘만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초창기에 ‘언니’역할을 해 주었던 오리이 아유미상이 졸업한 07년도경부터 그 뒤를 이어 그룹의 리더 역할을 맡게 되셨는데요.
다 : 당시에는 멤버들 사이에 연령차가 있었기에, 대기실 안에서도 자연스레 나이에 따라 갈라지게 되었어요. 그런 연장자층과 연소자층을 이어주던 것이 아유네였지요. 아유네의 그런 모습은 지금도 제가 어린 멤버들을 대하는 데 반영되어 있습니다. 모범이라 할까요. 아유네가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원진 구령을 붙이게 되었지요.
- 스태프 분들도 다 파악하지 못 하는 멤버 개개인의 성격 등도 다카미나상은 알고 계신다고 하던데요.
다 : 예전부터 인간 관찰은 좋아했어요. 수 많은 타입의 멤버들이 혼재하는 ‘전국시대를 살아 온 덕이기도 하고요. (웃음) 많은 멤버들을 보아 왔기에, 다른 멤버들을 보며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구나’ 라고 생각 할 수 있게 되었지요.
다른 이들에게는 이야기 하지 못 한 마음 속 갈등
- 15년도 총선거에서 ‘인생이란 모순과 싸우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다카미나상은 과연 그런 ‘모순’에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셨던 건가요?
다 : 사실 그런 사실을 깨달은 것은 꽤나 초기의 일이에요. 처음엔 아츠코와 제가 함께 센터였기에 함께 그룹을 이끌어 가려고 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아츠코가 혼자 센터가 되고, 제가 다시 센터 자리에 서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함께 센터였던 그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고민했던 적도 있었지만, 저 뿐 아니라 다들 각자의 고민을 끌어 안고 있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마음을 추스렀느냐…라, 그저 ‘지기 싫었던 것’ 뿐이예요.
- 그런 갈등이 있었군요…
다 : ‘석양을 보고 있니?’ 가사를 읽고 역 플랫폼에서 펑펑 울었던 적도 있고, 괜히 부모님께 화풀이를 했던 적도 있어요. 센터 자리를 경험 했었기에, 그 자리에서 끌어 내려지는 것 같아 괴로웠어요. 물론 저 혼자 갈등한 것이 아니라, 다들 나름대로 마음 속에 갈등을 안고 있었어요. 하지만 유코가 아츠코와 센터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며 ‘센터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야기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거, 사실 유코, 아츠코는 물론이고 아키모토 선생님께도 이야기 한 적 없는데요.
- 그럼 어떻게 그 갈등을 극복하셨나요?
다 : 총감독이 된 덕분일거예요. 제가 이 그룹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것 밖에는 없었거든요. 어떤 포지션에 서더라도 그 곳에 전념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 다카미나상은 자주 우시는 것 같은데, 그게 부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아요.
다 : 아무도 이해 해 주지 않을 상황에서 우는 건 좀 아니지요. 그건 정말 꼴사나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면’ 잊을 수 있거든요. 네, ‘잊기 위해’ 우는 거예요. 울고, 머리를 비운 뒤 개운한 마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살아간다는 건 목이 마르는 것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 생각해요.
- 지금까지 흘린 눈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다 : 첫 도쿄돔 공연 (2012년) 때, 본 원진을 하기에 앞서 1기생 6명이 작게 원진을 했었는데 그 땐 정말 엄청 울었어요. 그 날로부터 3일 뒤, 아츠코가 졸업을 하고, 그 뒤엔 마리코사마와 토모찡이 그룹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3명만 남으면 더 이상 ‘원’도 만들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거든요. 그토록 꿈꾸어 왔던 도쿄돔 공연을 앞두고 있다는 즐거움과 동료들과 헤어져야만 한다는 쓸쓸함이 뒤섞여서 복잡한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그 때, 결속력 역시 생겨났습니다. ‘여기서부터 다시 힘 내 보자’고.
- 참고로, AKB48이 크게 인기를 얻었다고 실감했던 건 언제인가요?
다 : NHK의 ‘MUSIC JAPAN’이라는 프로그램이었어요. 이전에는 ‘아키하바라 발상, 아키모토 야스시 프로듀스 AKB48’이라 소개되었는데, 2010년 즈음부터 갑자기 ‘국민적인 아이돌 그룹 AKB48’이라 소개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리고 녹화 현장에 다른 아티스트 분들의 팬들도 많이 계신 가운데, 저희에게도 환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런 것을 보고 자신감이 생겼지요.
- 실제로 그 때쯤부터 인기가 급상승했지요.
다 : ‘사요나라 크롤’ (2013) 즈음에는 매 주 CM 촬영을 하기도 하는 등, 거의 매일 매일 녹초가 될 정도의 나날이었어요. 물론 지금 상황도 대단한 상황이라 생각합니다만, 그 때가 정말 맥스였지요. 시대적인 배경 역시 저희에게 순풍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 팬 분들의 수나 열기를 직접 느끼곤 했었나요?
다 : 하라주쿠에서 있었던 악수회 이벤트 때, 줄이 너무 길어져서 경찰분들이 출동하셨던 적도 있고, 아키하바라의 UDX 앞에서부터 티켓을 사기 위해 ‘운동회’가 열리기도 하고 했지요. 팬 분들이 늘어나기 시작 한 시점이 언제인지도 알고 있기에, 그런 변화는 금방 눈치 채곤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 온 멤버들은 ‘눈 앞의 회장이 꽉 차 있는 것’만 보았고, 사람이 없던 당시를 알지도 못 하기에, ‘차이를 알라’고 이야기 한다 해도 쉽사리 알지 못 할 것이라 생각은 해요.
- 그렇다면 앞으로 AKB48는 어떻게 변해가야 할까요?
다 : 자신들이 어떤 것을 해 나가야만 하는 지에 대해 더욱 더 깨달아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여성 아이돌 그룹에게는 ‘넘어 서야만 하는’ 벽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높은 목표를 갖지 않는다면 그룹이 10년, 20년 이어 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AKB48의 원점은 ‘장난기’
- 졸업을 앞두고 AKB48 극장에서 ‘프로듀스 공연’을 하셨는데요.
다 : 우선 생각했던 것은 졸업하기 전에 조금 더 극장 무대에 서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저 스스로가 기획하고 진행했지요. 하지만 단순히 공연을 하는 것 만으로는 재미가 없잖아요. 거기서 착안 한 것이 ‘AKB48 그룹은 단순히 귀엽기만 한 그룹이 아니다’, ‘다양한 면에 특화 된 멤버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맞추어 멤버들을 모아 봐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멤버가 많아서 각각의 개성이 흐려진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멤버가 많기에 시도 해 볼 수 있는 일도 있으니까요.
- 후배들도 이 공연을 통해 느낀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 : 그렇게 생각 해 준다면 고맙겠네요. 이번에는 말하자면 ‘개성의 발표회’ 같은 것이었습니다만, 이런 발상이 어떤 방식으로건 남아 준다면 좋겠어요. 저 역시 8공연에 전부 출연하느라 55곡을 외워야 했기에, 힘들기도 했습니다만 엄청 즐겁기도 했어요.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 번 극장의 가능성을 느끼기도 하였고요.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사이엔가 ‘극장 공연은 이런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이 팬 분들 사이에서도,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생겨 버렸거든요. 하지만 애초에 AKB48라는 그룹은 하나야시키(※도쿄도 아사쿠사에 위치한 놀이공원. 1853년에 개원)에서 이벤트를 하거나, 팬 여러분들께 주먹밥을 만들어 드리거나 하는 식으로 ‘무엇이건 했’던 그룹이거든요. 말 그대로 ‘무엇이건 할 수 있’는, 그런 ‘장난기’를 잃는 순간, 그 그룹은 AKB48이라 부를 수 없을 것 같아요.
- 그렇다면 앞으로의 AKB48에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다 : ‘얼마나 발버둥 칠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해요. 물론 ‘발버둥 친다’는 거, 참 폼 안나는 일입니다만, 최선을 다 해 ‘발버둥 치는’ 사람은 존경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거든요. AKB48을 보고, 사람들이 ‘엄청 노력하네’라고 생각 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런 AKB48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AKB48이라는 그룹은 만화 같은 그룹이에요. 만화처럼 등장인물들이 차례차례 등장 하고, 무엇보다 ‘재미 있’거든요!! 1권부터 계속 나오는 캐릭터도, 10권쯤부터 갑자기 등장하는 캐릭터도 있지요. (웃음)
- 마지막으로 다카미나상에게 ‘아이돌’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다 : 아이돌을 꿈꾸는 아이들에게 이 세계는 엄청 반짝반짝 빛 나는 세계로
보일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빛’을 내기 위해서 수 많은 갈등들을 겪고, 나름의 달성감을 느끼기도
하고, 웃기도 울기도 하지요. 아이돌들이 갖고 있는 감정은
‘인간’ 그 자체라 생각합니다. 네, 아이돌이란 바로 ‘인간’이라 생각해요.
'출판물 > 출판물-AKB'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6 다큐 팸플릿 - 팀 A (겸임) 시로마 미루 (0) | 2016.07.12 |
---|---|
2016 다큐 팸플릿 20문 20답 - 하마 사유나 (팀8) (0) | 2016.07.12 |
AKB 공식 10년사 -눈물은 구두점- 01 (0) | 2016.03.30 |
팀 8 '해피 일본 백경' - 01 (0) | 2015.03.19 |
비 선발 아이돌 - 4장 (0) | 2014.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