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STEP BEYOND
MISA ETO
10월 28일에 리리스 될 노기자카46의 13번째 싱글,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누군가가 있어’에서 3열을 떠나 프론트로 발탁 되는 쾌거를 거둔 에토 미사.
좌절, 방황, 고난, 갈등… 그런 어둠 속에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걸어 온 에토 미사에게 드디어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졌다.
파트 1.
에토 미사와 ‘BEAUTY’
커다란 눈동자가 인상적인 ‘유리구슬 언니’ 에토 미사.
‘정통파’ 아이돌 노기자카의 얼굴인 미사미사의 ‘미용’을 통해 본 올바른 ‘노기자카46을 만드는 방식’.
초등학교 저학년 때, 엄마 몰래 엄마 화장품을 쓰곤 했어요. 물론 엄마는 다 알고 계셨던 것 같지만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생 때 까지는 스포츠 소녀였기에 ‘화장 같은 건 별로 신경 안 썼’지만, 고등학생이 된 뒤로는 다시금 화장의 매력에 눈을 떠, 스스로 화장품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도쿄로 상경 했을 때에는 미용에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어요. 하지만 노기자카46의 멤버로서 사람들 앞에 서게 되는 일이 늘면서 의식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이에 메이크업 해 주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그 분들께서 화장 해 주시는 게 정말 흥미진진했지요. 보다가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으면 여쭤보기도 했는데, 그 때마다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곤 했어요. 그 뒤로는 제가 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여러 화장품들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멤버들과도 화장에 관련해서 정보 교환을 하곤 합니다, 가장 빠르게 전속 모델이 된 마이얀 같은 경우에는 모델 활동을 하면서 여러 메이크업 아티스트분들과 함께 일을 하곤 했기에 그렇게 알게 된 정보를 알려주곤 합니다. 반대로 제 아이라인을 보고 마이얀이 항상 칭찬 해 주곤 해서, 방송 같은 데 나갈 때에는 제가 마이얀의 눈 화장을 도와주기도 해요.
때로는 ‘이 아이는 이런 식으로 화장을 하면 더 잘 어울릴 텐데’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어요. 히메탄에게 파운데이션을 추천 해 주거나 마리카나 키타노에게 치크 화장을 해 주기도 하고… 뭐, 단순한 참견쟁이일지도 모르지만요. (웃음) 제게 있어 ‘아이돌 메이크의 룰’이란 ‘화장을 옅게 하면서도 너무 심한 내추럴 메이크는 아닌 정도를 지킬 것’ 입니다. 아직 공부가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화장품을 프로듀스 하거나 해 보고 싶어요.
파트 2.
에토 미사와 ‘과거’
운동신경, 괄괄함, 각오, 그리고 고난을 버텨 낼 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예전과 그다지 변하지 않은 부분이 많은 에토.
그녀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 에토 미사의 내면을 알아보도록 하자.
유소년기
4살까지는 항상 밖에서 뛰어 노는 활발한 여자아이였어요. 오빠나 오빠 친구들과 놀곤 했기에, 당연히 괄괄한 말괄량이로 자랐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여자아이들이 좋아했던 ‘세일러 문’도 보지 않았어요. 오히려 ‘유희왕’이나 ‘울트라맨’을 좋아하곤 했습니다. 다리에 종양이 생긴 4살 때 부터는 휠체어에 앉아 생활을 했지요.
초등학생 때
휠체어 생활이 끝날 때 까지는 주로 실뜨기나 종이 접기 같은 것을 하며 놀곤 했어요. 실바니안 패밀리도 좋아했고요. 부모님께 졸라서 실바니안 패밀리의 빨간 지붕 집 장난감을 샀었는데, 엄마 말로는 ‘지출이 너무 컸다’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이후 초등학교 1학년 때 다리가 나아서 2학년 때부터는 평범하게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이후 3학년 때에는 릴레이 선수로 뽑혔고, 중학교 때엔 릴레이 앵커 (마지막 주자)로 뛰기도 했어요. 오이타현 대회에서 우승하곤 했던 아이에게는 이기지 못 했지만, 나름 발은 빠른 편이었어요.
중학생 때
중 2때부터 고 1때까지 3년 정도는 반항기가 왔었기에 가족들 속을 꽤나 썩였습니다. 세면대를 쓰려 할 때 아빠가 수염을 깎고 있기라도 하면 ‘방해되니까 저리 가!’ 라고 하곤 했어요. 뭐랄까, 아빠가 ‘거슬렸다’고나 할까요. 아빠는 제 교복 치마가 짧아 보이면 ‘그렇게 짧은 치마 입을 거면 그냥 팬티만 입고 가지 그러냐.’ 라는 식으로 이야기 하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욱해서 ‘왜 내가 그딴 소리를 들어야 돼?!’ 라면서 아침부터 싸우곤 했어요. 지금 생각 해 보면 어렸죠. (웃음)
고등학생 때
문화제나 운동회 때엔 항상 5시 반에 일어나서, 친한 친구랑 둘이서 다른 여자아이들 머리를 해 주곤 했어요. 방과후에 친구랑 놀려고 해도, 살던 데가 시골이었기에 매번 윈도우 쇼핑 한 뒤, 스티커 사진을 찍고 노래방에 가는 정도였어요. 아!! 볼링도 자주 치러 다녔어요! 오빠랑 OBS 볼링장에 가서 하루에 8게임 정도 하곤 했어요. 친구들이랑 자주 먹으러 갔던 가게는 ‘후나이야키’ 였고요. 오코노미야키랑 타코야키 중간 정도의 느낌인데, 정말 맛있어요!
노기자카에 들어오기 전
가수가 되고 싶어서 상경한 뒤, 곧바로 ‘미스 매거진’에 응모했어요. 많은 배우분들을 배출한 등용문이기도 했고, ‘그라비아 = 섹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각오를 하고 도전 했어요. 지금도 힘들어지곤 할 때, 그 때를 떠올리면 용기를 얻곤 해요. 연예계에 첫 발을 내딛었던 것이 솔로 활동이었던 것이, ‘노기자카 멤버’로서 개인 일을 얻었을 때에도 책임감 있게 일을 할 수 있는 근간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파트 3.
가족들이 이야기하는 ‘에토 미사’
남동생이 누나에게
제가 초등학생 때 얘기예요. 제가 멋대로 누나 과자를 먹고 있으려니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오더라고요. 항상 다정했던 누나인데, 제가 멋대로 자기 과자를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엄청 화를 냈어요. 그게 결국 싸움이 되고, 결국 누나가 집을 나갔습니다. 다행히 30분쯤 뒤에는 집에 돌아왔지만요. 그 뒤, 곧바로 화해했어요.
오빠가 동생에게
미사쨩과는 정말로 사이가 좋아요. 어릴 적에는 ‘개 놀이’라는 이상한 놀이를 하기도 했지요. 그 때마다 둘 다 서로 ‘개’를 하겠다고 나서서 결국 누가 개를 하느냐를 두고 싸우기도 했어요. 제가 야구를 시작 한 뒤로는 거의 매 주말 제가 경기하는 곳마다 따라 와서 응원을 해 주기도 했지요. 미사쨩 본인도 하고 싶은 일이 많았을 텐데, 제 시합이 있는 때마다 따라 와서 응원 해 줄 정도로 가족을 생각하는 좋은 여동생이예요. 여러분께서는 미사를 보고 ‘믿음직스러운 언니’에 ‘똑부러지는 아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어딘가 맹한 구석이 있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응석쟁이 여동생이랍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기억하고 있으려나… 내가 회사 사정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던 시기와 미사의 상경 시기가 겹쳐서 엄마, 아빠, 그리고 미사가 같은 비행기를 탔었던 그 때를 말이야. 그 날 이후로 미사는 정말 노력 많이 했다고 생각해. 금전적인 이유로 고향에 돌아오지 못 했던 예전과 ‘바빠서’ 고향에 내려오지 못 하는 지금을 생각하면 더더욱. 라이브가 끝난 뒤, 분명 많이 지쳤을 텐데도 가족들을 위해 집에서 춤을 보여주기도 하고, 만날 때 마다 말 하는 것이나 우리를 대하는 것이 점점 어른스러워지는 미사. 더욱 더 멋진 여성이 되어주었으면 해. 설날 때 집에 돌아오면 함께 보리 소주 한 잔 하자꾸나.
엄마가 딸에게
어릴 적에는 항상 밖에서 뛰놀던 활발한 소녀였지. 오빠, 그리고 오빠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레 말괄량이로 자라게 되었지만, 동시에 멋 내기 좋아하는 일면도 있어, 헤어 스타일을 여러 모로 바꾸어 보기도 하고, 옷도 좋고 싫음이 확실한 아이였어. 초식동물들을 풀어놓고 만질 수 있게 해 놓은 동물원에 갔을 때, 라마에게 먹이를 주다가 손을 물려서 방방 뛰면서 라마를 쫓던 미사의 모습이 정말 귀여웠어. (웃음) 고등학교 때는 버스로 통학을 했었는데, 한 번 ‘자전거 타고 가 보지 그러니?’라는 내 말에 자전거를 타고 갔었지. 그리고 그 날, 돌아와서는 그 큰 눈을 더 똥그랗게 뜨고 ‘두 번 다시 자전거 타고 안 가!’라고 했던 것도 기억 나. 그 뒤로는 정말 계속 버스 타고 갔었지.
파트 4.
에토 미사와 ‘가족’
에토가 지금까지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존재가 큰 버팀목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에토 본인과 어머니 사이의 신기한 공통점이란?
- 에토상에게 ‘어머니’란 어떤 존재인가요?
에 :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고, 달리 여자 형제도 없었기에 제가 태어났을 때, 엄마가 정말로 기뻐하셨다고 해요. 저 역시 엄마에게는 숨기는 것 없이 무엇이건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엄마와 저는 정말로 많이 닮아 있기에 한 때는 엄마에게서 저 자신의 싫은 부분을 발견하고 해서 거북하기도 했지만요. 특히 ‘왜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해?’ 라며 반발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 ‘공부 좀 해’ 라는 식으로 잔소리를 하신다거나?
에 : 그런 잔소리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제가 4살 때, 생명에도 영향이 갈 정도로 큰 병을 앓았던 적이 있거든요. 그 뒤로는 항상 ‘미사는 살아 있어 주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되셨다고 해요.
- 그 얘기, 조금 자세하게 들려주실 수 있나요?
에 : 유치원 고학년이 되었을 때였어요. 운동회에서 할 공 던져 넣기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점프를 할 때마다 다리가 휘청거려서 넘어지곤 했어요.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니 다리에 종양이 있었던 거예요. 정밀검사 결과, 종양은 양성이었어요. 이게 악성이었다면 ‘뇌 까지 전이되어도 이상 할 것이 없’었다고… 결국 수술을 받게 되었지요. 수술을 받으면서 다리 뼈를 깎아 냈기에, 초등학교 1학년 때 까지는 휠체어에 앉아 생활을 했어요.
- 그랬던 에토상이 지금은 이렇게 대단한 점프력을 뽐내시는 것이군요.
에 : ‘몸’이 기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웃음) ‘멘탈이 튼튼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자칫 잘못 했으면 죽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좀 힘들어도 ‘뭐, 이 정도야’ 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어릴 적부터 ‘살아 있는 것 만으로도 전부 이득 보는 거야’라는 소리를 들어오기도 했고요.
- 상경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어머니가 금방 이해 해 주시던가요?
에 : 네. 제가 뭔가 하고 싶다고 하면 대부분 ‘그래’라고 인정 해 주시거든요. 그리고 저희 엄마 역시도 한 때 연예계로 가려 했던 사람이거든요. 모 유명 영화의 오디션을 봐서 최종심사까지 간 적이 있었을 정도예요. 다만, 그 당시에는 교토의 미대에 다닐 때였던 데다가, 학교를 졸업하면 기모노 염색업체에서 일 하기로 내정을 받은 상태였기에, 도쿄에서 열리는 오디션에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뭣 때문에 너를 대학까지 보냈다고 생각하니?’라고 반대를 해서 포기했었다고 해요. 그렇기에 ‘자기 인생임에도 자기 뜻 대로 못 했’었던 과거가 있었다고…
- 마치 드라마 ‘아마쨩’ 같은 이야기네요.
에 : 고등학생 때, 엄마에게 ‘엄마, 왜 그렇게 노래를 잘 해?’라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엄마가 이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내 꿈을 이뤄야지’ 라는 생각이 더 커졌어요.
- 어머니께 자주 전화를 한다고 하던데요.
에 : 전화를 자주 하게 된 건 최근 이야기예요. 기껏 집에 전화를 하는 건데, 가급적이면 좋은 보고를 하고 싶으니까요. 언더에 있을 때에는 선발 발표 때라던가 정말로 힘들 때에만 전화를 했어요. 저희 엄마 역시 ‘왜 우리 딸이 선발에 안 뽑히는 거야’ 라고 의문을 갖고, 노기자카46라는 그룹을 싫어했던 적도 있었다고 해요.
- 남들이 멋대로 자신의 딸을 평가 해 대는 게 마음에 안 드셨던 것이겠지요.
에 : 네! 네! 그거예요. 저희 엄마는 자식바보라서 ‘저 아이보다 우리 미사가 더 귀여워’라고 이야기 하곤 하거든요. 저는 그게 싫어서 엄마에게 ‘다른 멤버들 블로그 같은 것도 좀 읽고, 다른 멤버들에 대해 알아 봐 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던 적도 있어요. 저희 엄마가 제가 소속된 노기자카46라는 그룹을 싫어하는 건 싫으니까, 주로 좋은 이야기만 했어요. 7번째 싱글 때 부터는 ‘우리 미사와 함께 노력 하는 동료들이라 다른 멤버들도 좋아졌다’며 노기자카 팬이 되셨지만요.
- 지금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팬이시겠군요.
에 : 제가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다름아닌 ‘가족의 따뜻함’ 이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받아주는 가족이 있기에, 한계가 닥쳐와도 힘을 낼 수 있어요.
파트 5.
에토 미사와 ‘뮤’, ‘쿠키’, ‘초코’, ‘긴’
지금 오이타의 집에 개를 네 마리 키우고 있어요. 강아지가 없는 인생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랍니다. 동물 중에서도 사람과 가장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것이 강아지잖아요. 그리고 저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들은 하나같이 머리가 좋아요! 정말이예요! 친구네 집 강아지들은 이름을 불러도 오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저희 집 아이들은 이름을 부르면 바로 쪼르르 다가오곤 해요. 정말 사람 같다니까요!!
중학교 때, 오빠가 당시에 키우던 래브라도 리트리버와 함께 러닝을 하다가 자전거에 치어서 크게 다쳤던 적이 있거든요. 그 때 그 리트리버가 집으로 달려와서 엄청 짖어댔어요. 무슨 일인가 나와 본 엄마를 이끌고 오빠가 있는 곳 까지 데리고 가 주었지요. 게다가, 근처에 사는 아주머니 말씀에 따르면 집으로 가던 리트리버가 신호등 신호도 확실히 지켰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제가 집에 돌아가면 강아지들이 신나 하는 게 정말 귀여워요. 사람이었다면 기뻐서 어쩔 줄 몰라 ‘이거 어쩌지’ 라고 하는 것만 같아요.
파트 6.
에토 미사와 ‘노기자카46’
노기자카46 활동에 대한 인터뷰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3번째 싱글 선발 발표가 있기 전, 그리고 발표가 이루어 진 뒤에 각각 인터뷰를 한 것이다. 우선 선발 발표 이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을 근거로 그녀의 마음을 파악 해 보도록 하자.
- 에토상에게 있어 큰 분기점이 되었던 것은 에토상과 동갑인 멤버 셋 (시라이시, 마츠무라, 하시모토)이 프론트에 섰던 ‘걸즈 룰’ 때였다고 하던데요.
에 :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다지 동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당시에는 저 역시 미숙했었던 데다가 선발에 단 한 번도 들지 못 했을 때였기에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었던 점도 있어서 엄청 힘들었어요. 다만, 그 때 느꼈던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라는 감정이 지금의 저 자신을 있게 해 주었다고 생각해요. ‘이 대로라면 안 돼’라며 스스로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지요.
- 에토상은 7번째 싱글인 ‘바렛타’ 에서 처음으로 선발에 들었습니다만, 다음 작품인 ‘깨닫고 보니 짝사랑’ 에서 바로 선발에서 제외되었지요. 그래서 그토록 바라던 ‘뮤직 스테이션’에도 출연하지 못 했었는데, 그 사건이 큰 충격이지 않았나요?
에 : 노기자카46라는 그룹이 처음으로 엠스테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점은 진심으로 기뻤어요. 다만, 그 날 집에 도착 한 것이 때마침 생방송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안 보는 것도 좀 그렇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TV를 틀었는데, 그 순간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었어요. 어폐가 좀 있을 지도 모르지만 ‘아, 이렇게 버려지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다른 이들을 쫓아 가는 데에만 필사적이고, 남들 앞에 서서 이끌어 가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나는 결국 이런 인생을 살게 되겠구나’ 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 9번째 싱글인 ‘여름의 Free & Easy’에서 다시 선발에 복귀, 그토록 열망하던 엠스테 출연을 했지요. 선발로서 활동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에 : 9번째 싱글 때는 정말로 ‘열심히 하자’는 일념으로 필사적이었어요. 하지만 10번째 싱글에서도 선발에 남게 되었을 때, ‘내게는 맛층이나 카즈밍 같은 확 끌리는 개성이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지요. 사실 그렇지도 않은데 ‘뭐든 어느 정도는 다 해 내는’ 이미지도 생겨 버려서, 다른 멤버 팬분들께서 ‘미사미사는 뭐든 잘 하니까 걱정 없지?’라고 이야기 하시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 얘기를 들을 때 마다 상처 받았습니다.
- ‘뭐든 잘 하는’ 캐릭터를 자신의 무기로 삼아 볼 생각은 안 했나요?
에 :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죠시라쿠’ 때에도 ‘안정적’이라는 말에 고민 한 적도 있지만, 그렇게 고민 한 덕분에 그런 고민들을 돌파 해 낼 힘도 기를 수 있었던 것인지 최근 들어서는 고민 하는 기간도 짧아졌어요. (웃음) 그 당시, 한 팬분께서 해 주신 ‘도전 할 수 있는 것은 안정된 상황인 사람뿐이야’라는 말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 연기면에서 보아도, 확 특징적인 면은 없지만 꽤 높은 레벨에서 ‘안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에 : 다양한 타입의 연기자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특징적인 연기를 하시는 분들은 저처럼 스탠더드한 연기는 하기 힘드신 것이고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서 고민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뭐, ‘죠시라쿠’ 때는 꽤나 애드립을 치기도 했고요. (웃음)
- 8번째 싱글 때에는 CD 특전으로 개최 된 언더 라이브입니다만, 에토상이 선발이 된 9번째, 10번째 싱글 때에는 하루 뿐 아니라 수 일에 걸쳐 열릴 정도로 대규모화 되었습니다. 에토상은 그런 언더 라이브의 기세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에 : 솔직히 말하자면 복잡한 느낌이었던 적도 있었어요. 그것도 전부 제가 미숙한 탓이겠지만요. ‘복신’은 ‘복신’ 나름대로, ‘언더’는 ‘언더 라이브’로 각각 기세를 더해가는 가운데, 저는 점점 설 자리가 없어졌거든요. ‘미사미사는 언더에 있었던 편이 낫지 않았을까?’ 라고 말씀하시는 팬분들도 적지 않았고요. 그 당시, 언더 라이브를 보면 마음이 흐트러 져 버릴 것 같아서 결국 언더 라이브를 보러 갈 수 없었어요. 언더 라이브 2nd 시즌 파이널 공연 때에서야 처음으로 언더 라이브를 보게 되었는데, 그제서야 순수하게 언더 멤버들의 퍼포먼스를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나서, 멈추지 않았어요.
- 이젠 선발 단골이 되었습니다만, 4작품 연속으로 포지션은 3열이지요. 포지션 면에서의 갈등 같은 것은 없었나요?
에 :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한 편으로는 아무 대책 없이 그저 ‘앞으로 나가는’ 것 만을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더욱 더 넓은 시야로 보았을 때, 노기자카에 있는 수 많은 개성적인 아이들 중, 앞에 서는 것이 단순히 ‘저 아이가 가장 나으니까’라는 이유에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전체적인 밸런스를 생각해서 누가 어디에 설 지를 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너무 초조해 하지 않고 기회를 기다리자고 생각했습니다.
이전까지는 ‘나는 아무 장점도 특징도 없어’라고 생각했었지만, ‘노기자카 공사중’의 ‘혼자 마시기 기획’이라던가 레귤러 방송 ‘야구 좋아! 모여라! 사무라이 재팬’이라던가, ‘언니 캐릭터’ 라던가… 제게도 조금씩이지만 ‘특징’이라는 것이 생겨 났기에 그런 저만의 개성을 더더욱 깊이 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야구’나 ‘혼자 마시는 모습’ 같은 것에 너무 속박되지 않고, 이번에 오버추어에서 했던 것 처럼 ‘뷰티’ 관계의 특집이라던가, 가족에 대해 이야기 한다던가 하면서 더 많은 분께 저에 대해 알려드리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그런 것들이 다시 다 제 ‘개성’이 되고, ‘존재감’이 커 지고, 결과적으로 언젠가 ‘복신’에 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어요.
- 만약 13번째 싱글에서 ‘복신’이 된다고 쳤을 때, 가장 기쁜 것은 무엇인가요? ‘노래 파트가 늘어나는 것’ 인가요?
에 : 네. 단순히 앞 자리로 나간다던가 중앙에 선다는 것 보다는 더 많은 소절을 노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가장 기쁠 것 같아요. 물론 3열 멤버들이 부르는 후렴구 직전의 소절도 좋아하지만, 노래 파트는 많으면 많을수록 기쁠 것 같아요.
- 그럼 반대로, 만약 13번째 싱글에서 언더로 내려가게 된다면?
에 : 어떤 곳에서건 열심히 할 자신은 있어요. 노래 하는 것도 좋아하고, 가족도 저를 전폭적으로 지지 해 주고요. 팬 여러분의 존재도 제게는 매우 큽니다. 어지간한 일로 꺾이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지난 4년 동안 헛수고 한 게 되겠지요.
- 작년 말쯤부터 ‘팬들이 떨어져 나가는 데 대한 불안’을 느껴왔다고 하던데…
에 : 아, 그런 불안은 이미 극복 했어요. (웃음) 최근 들어서는 예전부터 팬이던 분들께서도 더더욱 제게 흥미를 가져 주시곤 하거든요. 그리고 그런 팬분들 중에는 ‘미사가 노기자카를 졸업한다고 해도 응원 할 거야’라고 말씀 해 주시는 분들이 계셔요. 그게 정말 기쁘답니다. 아, 물론 졸업 할 생각은 아직 없지만요. (웃음)
제 팬분들께서 ‘미사가 노래 부르는 것이 좋아’라고 해 주시곤 해요. 물론 ‘귀엽고 예뻐서 좋아’라고 말씀 해 주시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건 나이를 먹으면서 변해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하지만 노래는 평생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렇기에 제 노래를 좋아 해 주시는 팬분들이 늘어 나 주셨으면 해요. 물론 지금 있는 팬 분들도 소중히 할 거고요.
- 정말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노래 하는 것이 ‘즐거운’가요? 아니면 노래를 불렀을 때, 다른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좋아하는 건가요?
에 : 노래는 ‘들어주는 사람이 있기에’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 친척 결혼식에서 하나*하나의 ‘아, 잘 됐다’라는 노래를 부른 적 있는데, 그 때 잘 불렀다고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아직까지 강하게 남아 있거든요. 어쩌면 그 때의 기억 덕분에 노래가 좋아졌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노래 좀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노래를 엄청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13번째 싱글 선발 발표가 있었다. 언제나 선발 3열에 위치하던 에토는 프론트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내었다. 선발 발표 후, 다시 한 번 에토와 인터뷰를 가졌다.
- 13번째 싱글 선발 멤버가 발표 되었을 때, 에토상의 마음은 어땠었나요?
에 : 마치 제트코스터에 올라 탄 것 같이 시종일관 두근두근 거렸어요. 3열에서 제 이름이 불리지 않았을 때,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어요. 2열로 갔거나 언더로 갔거나. 프론트라는 선택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발표 된 2열 발표에서도 제 이름이 불리지 않았기에 순간적으로 ‘내가 무슨 2열이야’ 라는 생각이 들어, ‘2열일지도 몰라’ 라고 생각 한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졌어요.
- 프론트 멤버 네 명 발표만 남았던 시점에는 어떤 생각을 했나요?
에 : 마이얀, 나쨩, 마이마이 셋에 새롭게 언더에서 올라 올 누군가가 들어가겠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기에 제 이름이 불렸을 때, 아마도 표정이 엄청 복잡미묘했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도 그럴 것이, 3열에서 단숨에 프론트로 나간 거잖아요! 항상 뒤에만 있던 제가 맨 앞으로 나간다는 데 대해 망설임이 더 컸거든요. 정말이지 꿈이 아닌가 싶었지요.
- 프론트에 선택 받은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주던가요?
에 : 제가 직접 콘노상에게 물어봤어요. ‘왜 제가 프론트예요?’ 라고
- 뭐라고 하시던가요?
에 : ‘네가 지금까지 노력 해 왔으니까. 그게 이유 아닐까?’ 라고 하시더라고요. 저 뿐만 아니라 다들 노력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저를 보아 주셨다는 게 정말 기뻤습니다.
- 노래 분량도 이전과는 다르겠군요.
에 : 네! 제 파트가 A멜로에 들어 있다는 사실에 감동 받았어요!! 이런 날이 올 줄이야!!
- 팬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
에 : 정말 감사드린다는 말이요. 제가 한 건, 그저 포기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자포자기해서 막나가지 않았던 것 뿐이거든요. 나머지는 전부 팬 여러분 덕분이예요.
- 에토상이 성실하게 팬 여러분을 대해왔던 것 역시 큰 이유 아닐까요.
에 : 의식적으로 해 왔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대해왔던 것 뿐이예요. 악수회를 예로 들자면 ‘어떻게 해야 일부러 와 주신 여러분을 기쁘게 해 드릴까’를 생각했을 뿐이예요.
- 8번째 싱글 때 까지는 선발멤버가 다른 사정이 있어서 못 나올 때, 그 자리를 에토상이 메꾸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 때, 포기하고 싶지 않았나요?
에 : 그 때는 ‘꼭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이 컸지요. 그리고 예를 들어 나나밍이 그 날 못 나와서 제가 그 자리를 메꾸게 되었을 때엔, 나나밍 팬분께서 ‘미사가 나와주어서 다행이야’ 라고 납득 하실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퍼포먼스를 했을 따름이예요.
- 다른 멤버들보다 외워야 할 것도 많았을 텐데요.
에 :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닌걸요. (웃음) 허세를 부리려는 게 아니라, 그저 서는 위치 번호랑 안무가 조금 변하는 것 뿐이예요. 다른 멤버들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걸요.
- 에토상이 우선적으로 불렸다는 건 결국 스태프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이야기 같은데요.
에 : 그런 기회 하나 하나가 전부 큰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2년 전에 있었던 ‘CDTV’ 라이브 때 이코마쨩 대신에 ‘걸즈 룰’을 부르게 되었었는데, 그 때의 퍼포먼스를 계기로 제 팬이 되어 주신 분도 계셨거든요. 그 외에도 인터뷰 기사 때의 별 것 아닌 발언을 계기로 저를 좋아하게 되시거나 하는 분도 계시거든요. 정말이지 ‘찬스’ 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기에 언제나 항상 긴장감을 잃지 않도록 의식하고 있어요.
- 프론트에 뽑힌 데 대해 어머니께 보고 드렸나요?
에 : 누구보다 먼저 이야기 했어요. 우연히도 그 날, 반년에 한 번 정도 있는 ‘가족들이 모여서 밥을 먹는 날’이었기에 일부러 좀 놀라게 해 주려고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사실 오늘 선발 발표가 있었는데…’라고 입을 열었지요. 그랬더니 엄마가 고민 상담이라도 할 것 처럼 반응을 해 주더라고요. 프론트가 되었다고 이야기 하니 다들 정말 기뻐 해 주었어요. 다음날, 엄마가 전화를 하더니 ‘어젯 밤에 했던 이야기, 사실이니? 암만해도 꿈만 같아서…’라고 하시더라고요. 꿈이라 생각했다니 엄마고 딸이고 똑 같았던 거죠. (웃음) 현재 상황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과는 보게 될 풍경도, 주어지게 될 과제도 크게 변화 할 것이기에, 저 스스로가 앞으로 어떻게 성장 해 나갈 수 있을까가 정말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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