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13. 23:54
1-1. 5년전. 모든 것은 1장의 광고에서 시작되었다.
2005년 7월.
도쿄 도내 각지 (역, 길거리 등)와 오디션 잡지에 한 광고가 실렸다.
그 광고에는 새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적힌「아키하바라48프로젝트, 시동! (秋葉原48プロジェクト始動!)」라는 문구와 '총 프로듀서 아키모토 야스시'라는 글자, 그리고 아키모토 프로듀서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전설의 아이돌그룹 '오냥코 클럽'을 길러 낸 그 아키모토씨가 새로운 아이돌 그룹을 만든다!」
그 광고는 아이돌을 꿈꾸는 수많은 소녀들에게 금세 유명해 지게 되었다.
코지마 하루나는 "제가 처음 본 것은 역에 붙여 져 있던 포스터였어요. 응모방법에 '사진은 샤메(※1 )라도 OK'라고 쓰여 져 있길래, '아, 샤메라면 귀엽게 찍힐 자신이 있어'라고 생각했지요. 그 광고를 보기 전에도 여기저기 오디션을 받으러 다니기는 했지만, 고교생활에 있어 마지막으로 이 오디션을 받아 볼 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아키모토 선생님 말고도 모무스의 안무 담당으로 유명하신 나츠(※2)선생님 이름도 적혀 있길래 '이거, 엄청난 오디션이잖아!'라고 생각했어요."라고 그 때를 추억했다.
이타노 토모미는 "저는 어릴적부터 춤 추는 것을 매우 좋아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커서는 춤을 잘 추는 아티스트가 되고싶다고 생각 해 왔었지요. 하루는 집에서 엄마랑 '데뷔 (오디션 정보 잡지)'를 읽고 있는데, 아키모토 선생님의 그 광고가 실려있더라고요. 그 때 엄마가 '아키모토 야스시라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야. 이 오디션 한 번 받아보지 그러니?'라고 말씀하셔서 오디션을 받게 되었지요."라고 밝혔다.
이렇게 가슴 가득 꿈을 품은 전국의 소녀들이 도쿄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1차로 서류심사가 끝난 뒤, 제 2차심사는 도쿄 시바우라 부두 부근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열리게 되었다.
오디션 당일에 대해 우라노 카즈미 (현 SDN48)은 "솔직히 회장 분위기는 살벌했어요. 저는 혼자 갔었는데 불안하고 무서워서 어찌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고요. 춤 심사와 노래 심사가 있었는데... 춤 심사는 처음에 안무를 설명 해 주고 빠른 시간에 외워야 하는 거였어요. 외울 시간을 조금 주고 나서는 아키모토 선생님과 나츠 선생님이 앉아서 보고 계시는 앞에서 춤을 춰야 햇지요. 모두들 긴장을 해서 잘 추지 못했다고 해요. 물론 저도 그렇고요."라고 회고했다.
심사는 착착 진행되었다. 아키모토씨를 비롯한 심사위원 앞에서 소녀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 소녀들 중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가야했다.
오디션은 여러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리고, 최종심사일이 다가왔다.
2005년 10월 30일.
최종심사까지 살아남은 소녀 50여명은 모두들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긴장하고 있었다. 이후 아키모토 프로듀서에게 'AKB의 작은 대들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는 다카하시 미나미는 고개를 들지 못 한 채 떨고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저는 14살이었어요. 이 전에도 많은 오디션을 보아 왔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엄마가 '이제 슬슬 포기하고 학업에 전념하렴'이라는 얘기를 하셨었지요. 그래서 '이번 오디션에 떨어지면 아이돌이 되는 건 포기할게요'라고 엄마와 약슥을 했었습니다. 말 그대로 '마지막 도전'이었지요. 심사가 전부 끝나고 초조함에 포기하고 싶어졌을 무렵, 스탭분이 저희 방에 들어 오셔서 'XX번, OO번..'이라고 번호를 부르시기 시작했어요. 번호가 불린 아이들은 기뻐하며 다른 방으로 옮겨 갔지만, 번호가 불리지 않은 아이들은 얼굴을 감싸고 울었지요. 그런 모습을 곁눈질 하면서 '무섭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 번호가 불렸을 때 바로 튀어 오르듯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긴장으로 몸이 굳어 버렸답니다. 합격자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가 보니 '해 냈다'며 기뻐하는 사람에, 긴장이 한 번에 풀린 듯 멍 해있는 사람에 각양각색이었지요. 엄청난 광경이었어요." 다카하시 미나미의 말이다.
자, 이런 혹독한 심사를 거쳐 드디어 24명의 소녀들이 AKB48로 선발되게 된 것이다.
아키모토 프로듀서가 선발 된 24명의 소녀들에게 "나를 믿어 주세요. 나를 믿고, 따라 와 주길 바라요"라고 말을 건 순간, 길고 험난한 '아이돌의 길'이 시작 된 것이다. 길을 떠나기 위해 출발선에 선 24명의 소녀들은 불안과 동시에 희망을 품고 이를 악물었다.
1-2. 눈물의 첫 공연, 그리고 이어지는 괴로운 나날들.
합격 발표가 난 다음날부터 발빠르게도 레슨이 시작되었다.
AKB48은 '아키하바라의 전용 극장에서 매일 공연을 한다'는 컨셉을 정하였고, 극장 오픈날짜 역시 12월로 정해 둔 상태였다.
오픈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1달뿐이었던 것이다.
다카하시 미나미는 "정말 힘들었어요. 레슨 첫 날에 나츠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그러시더라고요. 'XX가 레슨에 늦었길래 합격을 취소시켰다'고요. 정말 무서웠어요. 하지만 무서움과 동시에 '그래, 여기는 진심으로 부딛혀야 할 곳이야. 열과 성을 다 해 진지하게 임해야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운동신경이 제로라서 스킵도 제대로 못 했어요. 그 덕분에 항상 다른 사람들이 돌아가도 남아서 연습을 해야 했지요. 지금 생각 해 보면 남아서 춤 연습했던 건 저랑 우라노 언니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가끔씩 앗쨩 (마에다 아츠코)나 사토 유카리쨩 정도일까요? 일단 남겨진 사람은 몇 시간이고 될 때 까지 춤을 추는 거예요. 그만큼 뭔가를 열심히 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라고 술회했다.
당시, AKB48은 '최종적으로 48명의 멤버를 두고 각각 24명씩 1군과 2군으로 나눈 뒤, 팬의 인기투표(※3)로 1/2군을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스탭들 역시도 연습하고 있는 멤버들에게 '너희들은 서로 동료가 아냐. 라이벌이지!'라고 충격을 주곤 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몸이 아파서 레슨을 쉬게 된 멤버는 '다음번에 레슨 나가면 혹시 이미 내 자리는 없는 것 아닐까'라는 불안감에 울기도 했다고 한다.
이타노 토모미가 말하길 "어릴적부터 힙합 계열의 춤을 춰 왔기에 자신이 있었어요. 하지만 나츠 선생님께 '네가 추는 춤은 아이돌에게 어울리는 춤이 아냐'라는 말을 듣고는 친하게 지내던 멤버와 포지션 (안무 등을 할 때 서 있는 위치)를 바꾸게 되었지요. 춤은 자신 있었는데... 이젠 어쩌지... 라고, 몇 번이고 포기할 뻔 했어요. 솔직히 그 당시에 있었던 일들은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힘들고 엄한 레슨, 피로, 수면부족, 중압감... 거기에 더해 자기 자신을 지탱 해 주던 자신감마저 산산조각으로 부숴진 채 시간은 흘러갔다.
그리고 12월 8일을 맞이했다.
처음에 생각했던 오픈보다는 1주일 늦었지만(※4), 돈키호테 도쿄 아키하바라점 8층에서 AKB48극장의 막이 오른 기념스러운 날이었다.
오디션 최종합격자에서 4명이나 탈락하고 최종적으로 확정 된 멤버는 20명.
이 날 이후로도 여러 팀 (AKB48의 팀 K, SKE48의 팀 S)이 초연때 공연한 레파토리인 '파티가 시작돼요 (PARTYが始まるよ, 파티가하지마루요)'공연이 시작되었다. 약 2시간, 전 13곡에 이르는 레파토리였다.
극장의 설계 사정상 제거 할 수 없었던 큰 기둥 2개가 객석 좌우에서 멤버들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그 두 기둥 사이에 연예계 관계자들과, 새로 생긴 아이돌 그룹에 흥미를 보이던 아이돌 팬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 날의 이 공연에 대해 멤버들에게 물으면 모든 멤버가 입을 모아 이렇게 대답한다.
"기억이 나지 않아요." 라고.
합격부터 첫 공연 사이의 한달간 마음속에 쌓아왔던 중압감, 극도의 긴장 등이 그녀들의 기억을 하얗게 날려 버린 것일까... 다만, 모두들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공연이 끝 난 순간, 대기실로 돌아 가 모두 함께 펑펑 울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소녀들이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 온 한달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진정 괴로운 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손님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매일 무대는 이어진다. 첫 날에야 연예계 관계자들이 와 주었기에 그럭저럭 관객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관객이 줄어들어 정원 250명인 극장에 들어 와 있는 관객이 십수명 수준으로까지 줄어들게 되었다. 심할 때에는 한자리수 관객을 기록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다카하시 미나미는 이 당시를 떠올리며 "한 자리수라는 것도 심각했지만, 관객분들 중에 뒷자리에 서서 보시는 분도 계셨어요. 스테이지 위에 서 있는 저희들에게는 안 보였던 것이죠. 결국 저희가 본 관객분은 단 두 분 뿐이었어요. 막이 열리고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 마음 속으로 '두 명 뿐이야?!'라고 놀랐었지요. 솔직히 그런 상황에서는 저희가 무대 위에 올라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 질 지경이었지요."라고 이야기했다.
무대 끝편에 서 있는 멤버들의 경우를 상상 해 보면 자신의 앞에 있는 좌석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상태인데다가, 관객쪽에 있는 큰 기둥때문에 중앙에 앉아 있는 그 '두 명'의 관객마저 보이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안무로 겨우겨우 스테이지 중앙에 오더라도 자기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워서 차마 객석에 앉아 있는 그 '두 명'의 관객과 눈을 마주 칠 수 없다. 눈물로 객석이 흐려지곤 하는 것이었다.
모든 곡이 끝나고 대기실에 돌아 가, 모두들 의기소침 해 져 있었다. 개중에는 '솔직히 더 이상은 무대에 나가고 싶지 않아'라며 우는 멤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매일 막이 오르면 무대에 올랐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극장이 오픈 한 지 2주일이 지난 어느 날, 대기실에 가 보니 짐이 도착 해 있었다. 오오시마 마이와 다카하시 미나미 앞으로 하나씩... 그것은 AKB가 결성 이후 처음으로 받은 팬레터였다.
그 때를 떠올리며 다카하시 미나미는 "우와!! 편지가 왔어!!라고 모두들 엄청나게 들떴었습니다. 모두들 대기실에 모여서 '누구야?' '기쁘다'고 이야기 했죠. 마치 축제 같았어요. 그 때 느낀 기분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솔직히 편지라는 거, 평상시에도 받기 힘든 거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저희를 위해 편지를 써 준 거예요. 내용을 보니 '솔직히 처음에는 좀 우습게 봤어요.', '이 극장에서 이렇게 멋진 공연을 하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덕분에 기운이 났습니다'라고 쓰여 져 있었어요. 그 편지를 보고는 울어버렸습니다. 매일같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느라 거의 죽고싶은 상황이 되어 있던 저희에게 손을 뻗어 주신 분들이 계셔서 정말로 '목숨을 구한 것' 처럼 느껴졌어요. 정말 뭐랄까요... '희망'이라는 것을 보았달까요... 멤버들과 함께 펑펑 울었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1-3. 카페 아르바이트에서 전격 발탁된 시노다 마리코.
해가 바뀌어 2006년이 되었다.
질풍노도와도 같은 힘든 나날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극장 부속시설인 카페(※5)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노다 마리코'가 팬들의 추천에 힘입어 1월 22일, AKB48의 멤버로 가입하게 된 것이었다. 시노다 마리코는 1기생 오디션을 받은 경험이 있었으며, 실제로 최종심사까지 진출하였었으나 최종적으로 '이름이 불리지 않은' 소녀들 중 한 명이었다.
당시를 떠올리며 시노다 마리코는 "솔직히 말해서 19살 당시의 저는 지금보다도 자신 만만한 성격이었어요. '꼭 합격 할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옆에 있던 후보가 유카링 (사토 유카리)였는데, 솔직히 유카링은 좀 소박한 타입이잖아요. 그래서 솔직히 유카링에게도 이야기 한 적 있지만 '이렇게 촌스러운 애가 합격 할 리 없어'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예요. 또, 유카링 옆에 있던 사람이 (다카하시) 미나미였는데... 미나미 같은 경우는 뭐랄까, 지금보다 어른스러웠다고 해야 하나요? 솔직히 좀 나이 들어 보였기에 속으로 '얘는 대체 몇 살일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주변 사람들을 보니 붙을 자신이 생겼었어요. 그런데 정작 제 이름은 불리지 않아서 '어째서 내가 떨어진거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너무 크게 쇼크를 받아서 멍하니 있다가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그 때까지 남아 있던 몇 명에게 지배인인 토가사키씨가 다가와서 '혹시 생각이 있다면 AKB 굿즈를 파는 곳에서 아르바이트 해 볼 생각 없니?'라고 말을 걸어 주시더라고요. 저에게도 그렇게 말을 걸어 주시길래, 솔직히 분한 마음도 있어서 '할게요'라고 대답했지요...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면 너무 분합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시노다.
그녀는 "당시, AKB는 1군과 2군으로 나누어 공연을 하는 컨셉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1군과 2군을 나누기 위해 운영진은 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지요. 팬의 목소리를 듣기 위하여 택한 것이 앙케이트 였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멤버의 이름을 앙케이트 용지에 적어서 투표하는 방식이었지요. 그런데 그 앙케이트에서 멤버도 아닌 제 이름을 적어 내는 팬 분들이 많았다고 해요. 어느 날, 아키모토 선생님께서 카페에 오시더니 '4일간 11곡 (안무 및 노래)을 외울 수 있겠어? 외워 낸다면 무대에 올라가게 해 줄 테니 연습 해 볼래?'라고 말을 걸어주셨어요. 너무 기뻤습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어'라고 생각하였지요. 그래서 카페에서 일하는 다른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잠도 안 자면서 연습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AKB48라는 엄청난 그룹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 역시 그 때 쯤이었다. 그리고 극장이 오픈 한 지 2달이 지난 2006년 2월 4일, 처음으로 극장 좌석이 만원을 기록한다. 빈 틈 없이 채워 진 객석을 보며 21명의 멤버들은 하나가 되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런 기쁜 순간도 잠시, 그녀들에게 폭풍우가 닥쳐오고 있었던 것이다.
1장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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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진이 포함 된 핸드폰 메일. '샤메'는 '사진 메일'의 줄임말로.
※2 나츠 마유미. 모무스의 안무 담당으로 유명한 안무가. 아이돌을 꿈꾸는 소녀들에게 있어선 동경의 대상이다.
※3 당시 극장에는 인기투표를 하기 위한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4 원래는 12월 1일 오픈 예정이었으나, 안무 담당인 나츠 마유미가 '지금 저런 상태로 무대에 올릴 수는 없다'고 판단, 오픈을 1주일 늦추게 되었다.
※5 만약 공연 표가 매진 되었을 경우, 카페에 설치 된 모니터로 공연을 관람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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