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페지움 (사다리꼴)
제 1화 '남쪽에 사는 불사조'
왼손 손가락 세 개를 가만히 경동맥에 갖다 대니 격렬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애써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보려 하지만 자연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 가는 것조차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경황이 없었다.
바닷가를 따라 나 있는 큰 길. 한 차례 급 커브를 꺾고 나면 100m가량 직선 도로가 이어진다. 그리고 그 직선도로가 끝나는 곳에는 고등학교가 하나 위치 해 있다.
지금 시간은 오후 4시 57분. 나는 지난 밤에서야 '계획'을 실행 할 마음을 먹고 오늘 이렇게 방과 후에 전철을 타고 집에서 2정거장 떨어 진 이 곳에 온 것이다.
높게 솟아 있는 두개의 흰 기둥 사이에 거대한 학교 정문이 자리잡고 있었고, 두 기둥 중 오른쪽 기둥에는 '세이난(聖南) 테넬리타스 여학교' 라는 이름이 새겨진 교패(학교 간판)이 박혀 있었다. 마치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연상케 하는 고풍스러운 서체를 보아하니 아마도 설립자의 의도는 이 교패에서 '부유층들이 다니는 학교' 이미지를 내고 싶었던 것 이리라. 실제로 이 지역 공립학교 학생들은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아가씨들' 뿐이라고 냉소하곤 했다.
"적으로 삼기에 부족함 없군."
교문까지 남은 거리는 15걸음 정도.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저리 말하며 미소지었다. 사전에 구글 스트리트뷰로 조사를 했기에 이 학교에 따로 수위실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호화스러운 정문에 경비원이 배치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좀 이상했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노인, 어린아이, 그리고 그 어린아이의 부모들이라는 데에 익숙해 져 무방비해 진 것인 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역시나 평범한 나 같은 인간들이 이해하기엔 어려운 점을 고수하는 이 학교의 방침에 내심 감사하는 마음도 들었다. 나중에 하다하다 유괴범이 된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될 날이 온다면 이 학교를 타겟으로 삼아야겠다는 실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수업을 끝마치시고 우아하게도 호화 저택으로 귀가하시는 잘난 부잣집 아가씨들이 눈에 띄지 않는 순간을 노려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나는 우선 주변을 탐색했다. 이윽고 17시가 되자 부활동을 하지 않고 집으로 갈 학생들은 일단 대강 학교를 떠난 듯 보였다. 학교에 남아있는 것은 부활동에 매진하는 부잣집 아가씨들 뿐. 인기척이 드문 지금이야말로 계획을 실행할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이 학교것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이 호화스러운 정문 한 가운데 서서 당당하게 외치고 싶은 말이.
정문 한 가운데 서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으려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정문을 통해 바다쪽으로 불어나가는 바람에 내 뒷머리가 날려, 뭔가 멋진 연출이라도 한 것 같은 효과를 주었다. 뭐라 할까, 1류 기업의 CM에서 볼 법한 하늘하늘 휘날리는 머리모양이라고나 할까.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한 뒤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이리오너라~~~~~!!!"
나란 인간, 의외로 겉보기에 집착하는 타입이다. 그렇기에 저런 고풍스러운 말투를 택한 데 후회는 없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테넬리타스 고교의 '아가씨' 한 사람이 마치 석상이라도 된 양 굳어있었다. 표정까지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십중팔구 별 이상한 놈 다 본다는 표정이리라. 타이밍을 제대로 재지 못 한 통한의 미스였다. 분명 아까까진 사람이 없었지만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사이에 사람이 나올거라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아까까지 시원한 바닷바람에 자아도취 해 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 눈빛으로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라고 호소하며 교문으로 들어섰다. 이게 지금 어찌 된 일인지 감을 잡지 못 하는 가련한 '아가씨'는 그저 멍하니 내 모습을 바라 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까워 질수록 내 상상은 현실이 되어갔다. 크고 동그란 눈, 백옥 같은 피부를 한 전형적인 부잣집 아가씨였다.
갑작스레 큰 소리를 내서 놀라게 한 사죄로, 그녀를 스쳐지나는 타이밍에 꾸벅 목례를 했다. 그러자 예의 그 '미소녀'는 자신을 스쳐 지나려는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네… 네!!"
"잠깐 얘기 좀 하실 수 있나요?"
음? 대체 나랑 무슨 얘기를 한다는 거지?
"네. 무슨 일이시죠?"
"아까전에 '이리오너라!'라고 소리 치셨잖아요. 왜 그러신거죠?"
"아… 그거요. 그냥 기합 넣는 의미였어요. 부끄러운 장면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어머, 왜 기합을 넣으시는데요?"
하긴… 누구라도 자기 학교 정문에서 웬 타교 학생이 '이리오너라'라고 외치면 이상하게 생각 할 거다. 거짓말을 해 봤자 수상하게 생각 할 테니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게 나으려나. 뭐, 여기서 솔직히 털어놓고, 이 학교 학생인 이 사람이 허락 해 준다면 내 목적도 달성하는 거고 말이다. 각오 한 것에 비해 너무 허무하게 달성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하지만 다르게 생각 해 보면 이 학교 내에는 이 맹해보이는 학생보다 강한 자가 얼마든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달성하기에는 좀 이른 느낌도 들고, 뭔가 아쉽기도 하다. 애초에 게임이건 소설이건 간에 보스는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아니던가. 그렇게 보자면 이 사람이 내 '계획 수행 대상'으로 적합한 사람인지 아닌지 확신이 가지 않는다. 우선 킵 해 두는 방향으로 가 볼까…
"아, 사실 친구를 만들어 볼까 해서요."
"네?!"
"괜찮으시다면 저랑 친구가…"
"아, 죄송해요. 할 일이 있었는데 깜빡 하고 있었네요. 먼저 실례할게요. 애초에 그 쪽처럼 멋진 교복을 입으신 기품 넘치는 분의 친구가 될 자신이 없네요. 전."
'미소녀'는 내 말을 중간에서 싹둑 잘라먹고는 성급히 자리를 떴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태세변환에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이게 뭔…"
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래 테넬리타스 다녀서 더럽게 좋겠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입고 있는 죠슈히가시고등학교의 교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학교 교복은 이 근처 학교들 중에서도 '가장 촌스러운 교복'으로 악명이 높은 교복이다. 예전에 한 잡지에서 본 전국조사 결과에 따르면 실제로 진학, 수험 때 '학교 교복을 본다'고 대답한 중학생은 전체의 6~7할에 달하고, '학교를 고르는 데 있어 교복 역시 중요한 포인트'라고 한 사람도 반 이상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수험 모의시험 당시 내 성적 편차치는 60 가량. 죠슈히가시고등학교 합격 라인을 간신히 넘는 성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같은 이유로 '촌스러운 교복'을 감수하고 이 학교에 온 것이었다. 물론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편차치도 조금 더 높고 교복도 더 귀여운 죠슈고교에 갈 수 있었는데… 라는 후회를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런데 뭐? '멋진 교복을 입었'다고? 비꼬는 것도 정도란 게 있는 법이다. 라틴어로 '상냥함'이라는 뜻을 지닌 '테넬리타스' 학생인 주제에 학교 이름이랑은 너무 안 어울리는 말뽄새가 아닌가. 저런 불량학생은 학교를 위해서도 하루 바삐 퇴학을 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 '아이러니 여학교'라는 학교가 있다면 거기로 보내야 하는 건 아닐까.
예상치 못한 데에서 일격을 당해 기세가 한 풀 꺾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왕 이렇게 찾아 온 거, 학교 내부로 들어 가 보기로 했다.
학교 내부로 조금 걸어 들어가니 마치 잘 정돈된 절 같은 정원이 나왔다. 꼼꼼하게 관리되고 있는 게 한 눈에 보이는 잔디밭이며 잔디밭과 콘크리트 도로 경계선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들 하며, 그저 걷는 것 만으로도 마치 공주님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정원이었다. 그 뿐 아니라 교정을 빙 둘러싸듯 심어 져 있는 나무들도 깨끗하게 정비가 되어 있었고, 나무들 아래에는 더운 여름날 따가운 햇볕을 피할 수 있는 나무 벤치들도 놓여 있었다. 그리고 정원 한 가운데에는 너무나도 우아하게 물보라를 뿌려 대는 분수대마저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점심시간엔 부잣집 아가씨들이 이 벤치에 앉아 우아하게 독서를 즐기겠지만,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지금 시간대에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까지 쳐들어 와 놓곤 갑자기 좀 소심해져서 차마 교사 내부까지는 들어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운동장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운동장이라면 운동부 활동을 하는 학생들도 아직 남아 있을 터.
운동장으로 향하는 도중에 4명 정도 하교하는 학생들을 마주치긴 했지만 아까 받은 심적 데미지 탓인지 차마 말을 걸 수 없었다.
조금 걷고 나니 멀리 테니스 코트가 보였다. 눈부시게 하얀 테니스웨어를 걸친 부잣집 아가씨들이 테니스를 즐기고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저 곳이라면 이야기를 걸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5분 정도 펜스 너머로 테니스 연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숏컷을 한 학생이 한 명 내 쪽으로 다가온다. 어딘가 좀 어설퍼보이는 걸 보면 아마도 저 중에선 가장 후배라 귀찮은 임무를 떠맡게 된 것이리라. 가까이서 보니 눈썹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게 좀 신경쓰였다.
"저기요, 테니스부에 용무라도 있으신가요?"
"…"
"저희 학교 학생 아니시죠?"
"아, 죠슈히가시고교 다녀요."
"아, 히가시고 학생분께서 저희 학교에는 무슨 일이시죠?"
아까는 여기서 서두르다 역공을 당했었지. 이번엔 좀 신중하게 접근 해 보자.
"아, 사실은 말이죠…"
그리고 그 순간, 내 시야에 뭔가 번쩍이는 것이 비춰졌다. 그것은 마치 어지러이 빛을 산란시키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아니 눈부신 빛을 발하는 황금 덩어리와도 같은 걸출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것이었다. 세로방향으로 둥글게 컬을 준 머리를 양 옆으로 늘어뜨리고, 앞머리는 산뜻하게 올려서 예쁜 이마를 드러 내며 뒷머리는 핑크색 리본으로 살짝 묶어 정리 한 미소녀가 그 곳에 있었다.
나는 그 미소녀에게 한 눈에 빠져, 그녀를 '타겟'으로 정했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고는 입을 열었다.
"여기 테니스부에 '나비부인' 처럼 아름다운 분이 계시다는 소문이 있길래 한 번 만나뵐까 하고 찾아 왔어요."
"…."
어? 왜 저런 표정을 짓는거지? 하지만 이런 침묵에 기 죽을 정도로 소심하지 않다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예의 그 '눈썹 소녀'가 입을 열었다.
"아, 카토리선배님 말씀이군요. 카토리 선배님 유명하시죠. 하지만 이렇게 학교까지 찾아오시는 팬분이 계실 줄은 몰랐네요. 괜히 뿌듯한걸요."
다음 순간, 코트쪽에서 '히로미!'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눈썹아가씨는 '아, 선배님 불러드릴게요'라며 내게 윙크를 하곤 뭔가 만족한 듯 코트쪽으로 돌아갔다. 일상생활에서 윙크를 하는 건 서양사람들 뿐이리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내 고정관념이었나보다. 아니, 그저 이 부잣집 아가씨들만의 세계가 특이한 건가?
윙크 눈썹 아가씨는 선배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아마도 '쟤 누구야?'라는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겠지. 그리고 열심히 사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일단 문전박대는 피했구나'라고 왠지 모르게 안심했다.
사실 아까 '나비부인'이라고 이야기 한 건 반쯤 도박이었다. 예전에 본 만화 캐릭터 중에 그 카토리라는 소녀와 닮은 캐릭터가 있었던 것이다. 도박을 걸어 본 게 통해서 정말 다행이다.
생각 해 보면 그 도박이 통했던 것도 신기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캐릭터가 나오는 만화… '에이스를 노려라'는 이미 지금으로부터 30~40년 전에 나온 만화, 그리고 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아닌가. 아무리 당시 일세를 풍미했던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의 작품이니까… 물론 그 작품 덕분에 당시 여중/고생들 사이에서 일대 테니스붐이 일어났다는 점이나 그 유명한 마츠오카 슈조(일본의 테니스선수 출신 탤런트)상 역시 테니스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이 작품이라던가 해서 테니스와 관계가 깊다는 점을 믿었던 게 정답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테니스 업계에서 유명한 작품이라고는 해도 이 시대를 사는 고교생 중에 그 옛날 작품 영향을 받는 학생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수확이었지만 말이다.
아, 참고로 그 작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다름 아닌 '나비부인'. 그렇기에 그런 '나비부인'과 닮은 사람을 실제로 만났다는 게 기쁘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내가 노리는 '사냥감'이 코트를 가로질러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어떨까, 성격은 어떨까 망상을 부풀리는 사이에 '나비부인'은 펜스를 빙 돌아 내 곁까지 다가 와 주었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나도 모르게 자세를 가다듬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고 정돈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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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에이스를 노려라'에 나오는 나비부인
https://namu.wiki/w/%EB%A5%98%EC%9E%90%ED%82%A4%20%EB%A0%88%EC%9D%B4%EC%B9%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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