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은 대충 들었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죠슈히가시고교 1학년 아즈마라 합니다.”
“테넬리타스여학원 2학년 카토리예요. 히가시고교 아즈마상, 강녕하신지요.”
와… ‘강녕하다’는 말을 실제로 쓰는 사람이 있었구나…
“부 활동으로 바쁘실텐데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 괜찮아요.”
매사 당당해 보이는 몸놀림과 말투지만 그렇다고 고압적이지는 않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물론 ‘아직까지는’ 말이다. 목소리도 너무 높거나 너무 낮거나 하지 않고 딱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자, 그럼 신중하게 이야기를 이어 가 보자.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 가지 신경쓰이는 점을 질문 해 볼까.
“음… 저기요. 혹시 ‘에이스를 노려라!’라는 만화, 좋아하시나요?”
“네. 좋아해요.”
“그럼 나비부인과 비슷한 외견은…?”
“좋아하는 캐릭터거든요.”
너무나도 명쾌한 대답이다. 이유가 너무나도 단순하다. 보통 이럴 땐 ‘난 딱히 의식하지 않는데 남들이 그렇게 부르더라고’라는 식으로 나오는 법인데, 너무나도 간단히 ‘좋아하니까 따라했다’는 식으로 털어놓다니. 하지만 아무리 좋아하는 캐릭터와 비슷하게 따라한다 해도 결국 다른 차원의 존재, 그 차원의 차이에서 오는 위화감이라는 것은 쉬이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2차원에서 그대로 뛰쳐나온’ 것만 같은 외견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실사화’에 까탈스러운 2차원 오타쿠들도 납득 할 수 있으리라.
“사실 주인공보다는 눈에 띄는 조연을 더 좋아하거든요.”
눈을 깜빡이는 순간마저도 아까울 정도로 너무나도 완벽한 ‘나비부인’이 말을 이었다. 이쯤 되면 왜 그녀 등 뒤 배경에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지 않나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별말씀을요. 나비부인에 비하면 한참 멀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제 팬분이시라던데.”
“네. 사실 요 전에 시합하시는 걸 봤거든요. 플레이가 너무 훌륭해서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어요.”
“…그… 그렇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팬인 척 하며 성격을 좀 알아보자. 아무리 얼굴이 예뻐도 성격이 나쁜 사람이라면 내 계획의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머릿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갑작스레 상대방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날아왔다.
“거짓말 하시는 거죠.”
“에?”
“저 아직 시합에 나간 적이 없는걸요.”
“…에… 설마…”
“정말이에요. 만년 보결멤버인걸요.”
…생각도 못 했던 맹점이다. 이렇게 테니스라는 종목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정작 테니스는 못 칠 줄이야. 애초에 ‘나비부인’이라는 별명은 테니스 코트에서 플레이를 하는 모습이 마치 나비처럼 우아하기에 붙은 별명이 아니던가. ‘미모’, ‘기품’, ‘실력’을 전부 겸비한데다가 고교생임에도 ‘부인’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관록마저 넘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바로 ‘나비부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하면 비록 겉모습은 나비부인 그 자체일지라도 그 세박자 중 ‘실력’이 결여된 이 사람을 ‘나비부인’이라 부르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 그럼 거짓말은 그만 하시고 솔직하게 털어 놔 보시죠. 왜 그런 거짓말을 하시는 건지, 그리고 여기까지 오신 진짜 이유는 뭔지.”
“아… 사실은…”
나만 그런건지 다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란 사람은 거짓말을 하다 들키면 잠시간 패닉에 빠져서 머리가 제대로 돌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거짓말을 더 큰 거짓말로 덮는 그런 작전도 취하지 못 하고 그저 그 자리를 벗어나기에 급급한 얄팍한 거짓말 밖에는 하지 못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괜히 바로 들킬 거짓말은 관두고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상책인 것 같다.
“아… 이 학교에서 제일 예쁜 학생이 누구인지 찾으러 왔어요.”
“…”
“갑작스레 이런 말을 들으시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모르시겠지요. 죄송합니…”
“아, 이제 알겠네요! 자신에게 어울릴만한 친구를 사귀러 오신 거군요.”
나는 내 말을 끊으며 갑작스레 내 쪽으로 몸을 숙이고 눈빛을 빛내는 그녀의 모습에 압도되었다.
“에? 네? 뭐라고요?”
“어떻게 알았는 지 궁금한가요? 사실 나도 그런 사람을 찾고 있었거든요.”
‘나와 어울릴만한 친구’라니… 뭐, 학교 여자아이들 중에 친구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만… 물론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 아이는 있긴 하지만 딱히 함께 몰려다니는 패거리는 없는 게 사실이다. 입학한 지 2달밖에 안 되었으니 별 수 없다고 정신승리를 하고 있긴 해도, 학교 내에 ‘친구’라고 부를법한 존재가 없는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아가씨’는 그런 내 약점을 한 번에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생각 해 보면 작년… 그러니까 중 3때만 해도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갖고, 이상적인 친구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곤 했었다. 하지만 정작 고등학생이 되고 보니 내 ‘이상’을 충족시켜줄만한 아이가 없었다. 물론 나름대로 귀여운 아이야 있었지만, 내가 이상으로 생각 해 왔던 ‘인형처럼 아름답고, 그러면서도 어른스럽고, 청초하며 상냥한’ 친구 후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아마 다들 ‘친구를 얼굴로 고르는 건 이상하다’고 할 지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장기적인 안목으로 친구를 고를 때에나 할 이야기고, 입학식 직후에는 누구나 우선 반 아이들을 쭉 훑어보고 귀여운 아이들이랑 친구가 되려 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나 뿐인걸까?
물론 내가 이 학교까지 찾아 온 이유는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내 진정한 목적, 그것은 사실 ‘친구를 만든다’고 하는 스케일이 작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갖 미디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전 국민들을 위해 내 한 몸을 희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원대한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고비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이런 원대한 이야기를 해 봤자 이상한 사람 취급만 당할 게 뻔하다. 우선은 그녀가 이야기 했던 대로 ‘친구를 찾으러 왔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하신 질문에 대답을 아직 안 해 드렸네요. 저희 세이난 테넬리타스 여학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학생은… 아마 저일거예요.”
저런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녀. 만화로 비유하자면 등 뒤로 ‘당당’이라는 두 글자가 배경에 크게 새겨 질 것만 같은 태도였다. 그녀의 그런 당당한 모습에 살짝 압도되면서도 동시에 그 대답을 바라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 나는 드디어 ‘보스’와 만난 것이다.
“역시 그렇겠죠? 아니, 말씀하신 대로라 생각해요. 저 역시 아름다운 분과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늘 생각 해 왔답니다.”
“어머나, 그거 참 대단한 우연이네요. 제가 보기에도 그 쪽과 함께라면 서로의 미모가 상승효과를 일으킬 수 있을 것도 같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매사 지루했기에 재미있는 뭔가를 찾고 있었거든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5분 정도나 되려나… 그녀는 지치지도 않고 지금껏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불만들을 내게 토로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처음 만나는 사람의 고민을 5분이나 들었던 적이 없었기에 뭔가 재미있는 경험이기도 했다.
그녀의 길디 긴 불평들을 간단히 요약 해 보자면 결국 ‘나도 좋아서 이 학교에 들어 온 게 아니다’, ‘방과후에 테니스 이외에 딱히 할 것이 없다’는 것. 다시 말 해 매일매일 너무나도 평온하기만 한 시골 생활에 울분이 쌓였었다는 얘기다.
“음… 제가 ‘재미’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쪽 인생에 양념 정도는 쳐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표현 좋네요. 양념. 지금 이 심심한 인생에 양념이 필요했어요.”
이건 완전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것 아닌가. 어느 사이엔가 그녀와 나 사이의 입장이 역전되어 그녀가 나라는 양념을 너무나도 간절히 바라는 그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런 입장 차이 덕분에 나는 손쉽게 그녀의 연락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카토리 선배님! 코치님께서 다들 모이라고 하시는데요.”
코트 저 편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곧 갈게요.”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곤 내 쪽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슬퍼보이는 표정이다.
“기껏 이렇게 와 주셨는데 미안하네요.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실례하겠어요. 바로 연락 드리지요. 그럼 그 때까지 강녕하시길.”
“잘 부탁드려요.”
나도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등을 돌려 테니스 코트를 떠났다.
그녀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혹시 모르는 일이니 돌아 나가는 길에 만난 학생들 몇몇에게도 ‘이 학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인지 질문을 해 보았다. 그리고 그 중 8할에 가까운 학생들이 입을 모아 ‘카토리상요. 저 왜 세로 방향으로 컬이 들어 간 머리를 양 옆으로 늘어뜨리신…’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듣고 내심 안심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어느 사이엔가 예의 그 ‘아이러니 소녀’에게서 받은 상처는 말끔하게 아물어, 주변 학생들에게 마음 놓고 말을 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 하루 사이에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엄청나게 레벨업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전에 영어 검증시험 2급에 합격했을 때 느꼈던 것과도 비슷한 만족감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 가, 철제 현관문을 열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이웃집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 평소와 같이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그녀를 흉내내어 ‘강녕하신가요’라고 인사를 했더니 뭔가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시는 표정으로 ‘어라, 이제 오니?’라고 대답을 하셨던 게 인상 깊었다. 어쩌면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이리라. 대체 어떤 대답을 기대했던 걸까… 그렇게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평소와 변함 없는 주변 환경들이 너무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 왔어.”
현관을 닫으며 작게 인사를 한 뒤, 거실에 들리지 않고 곧바로 5조(다다미 5장 넓이)짜리 내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 가, 책상 의자에 앉아 잠시동안 오늘 있었던 일들을 회상 해 보았다. 아… 잘도 그런 짓을 했구나. 그래도 임무를 달성 해 낸 자신이 기특했다. 처음 해 본 것 치고는 정말 잘 했던 것 같다.
‘부잣집 아가씨인데다가 미인이고, 그 미모로 유명하다’ 라…
나는 이노 타다타카(에도시대의 측량가, 지도 제작자)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잘 만든, 내 자신작 동네 지도를 책상 위에 펼치고 지도 아랫편에 위치한 ‘세이난 테넬리타스 여학원’에 크게 X자를 그었다.
동시에 지도 옆에 펼쳐 져 있던 진로지도조사서에 시선이 닿았다. 아직 손도 대지 않은 깨끗한 상태였다. 내가 의사 같은 거창한 목표를 갖고 있었더라면 우선 저 진로조사서를 빽빽하게 채우고, 공부를 했으리라. 하지만 지금 내게 있어 더 중요한 목표, 노력 할만한 가치를 가진 대상은 따로 있었다.
다시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세이난 테넬리타스 여학원을 정복(?)한 내 눈에 다음 목표가 들어왔다. 고등 전문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은 분명 인기가 있다고 했었지…
지도에서 눈을 떼고 팽개쳐 뒀던 휴대전화를 손에 들었다. 어느 사이엔가 아까 연락처를 주고 받은 ‘아가씨’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나는 그녀를 ‘미나미 (南, 남쪽)’라고 저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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