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막 ‘미츠모토 저택 객실’
객실 가운데에 놓여 있는 테이블 주변에 쥰케이, 쥰이치, 마이, 타도코로, 소지로의 아들인 타카미, 모리타 교수가 서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마후유는 메이드 복장으로 음료를 나르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히라노야의 다이후쿠쵸와 미사가 기입한 복식부기 장부가 펼쳐져 있다.
쥰이치 : 이노우에 자작이 쭈뼛대며 돌아가는 모습이라니! 모리타 교수님도 그 장면을 보셨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리고 마이님의 늠름한 모습도 꽤 멋졌고요.
모리타 : 그거 볼 만 했겠군요.
마이 : 어머, 무슨 말씀을. 저는 그렇게 ‘늠름한’ 사람이 아닌걸요.
타카미 : 저도 보고 싶었습니…
타카미의 말을 끊기라도 하듯 소지로가 미사를 이끌고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미사는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다. 타카미의 누이의 드레스였다.
모리타 : 참으로 아름답군요.
쥰케이 : 복식 부기의 여신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군.
쥰이치 : 하카마 차림보다 이런 옷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마이 : 옷이 날개라고 하잖아요.
마후유 : 미사상만 예쁜 옷 입고… 치사해요. 왜 난 메이드 복장인데 미사상은 드레스인가요?
미사는 쑥쓰러운 듯 어색하게 웃으며 소지로의 손에 이끌려 객실 중앙까지 걸어갔다.
쥰케이 : 복식부기의 여신이여, 이 쪽은 테이코쿠대학 교수인 모리타 교수일세.
모리타 : 처음 뵙겠소. 잘 부탁하오.
모리타는 그렇게 인사를 하며 한 쪽 무릎을 꿇더니 비단 장갑을 낀 미사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마후유 : 미사상 치사해요.
마이 : 옷이 날개라니까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예요.
소지로 : 이 쪽은 내 아들인 타카미일세. 타카미, 이 쪽은 이번에 복식 부기라는 것을 발명한 미사양이다.
타카미는 미사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소지로 : 타카미, 지금 그 태도는 뭐냐. 숙녀에게 실례를 범하는 것 아니냐. 당장 제대로 인사 하지 못해?
쥰이치 : 부끄러워 하는 것 같은데요.
갑자기 모리타가 미사의 앞으로 다가왔다.
모리타 : 아까 전에 쥰이치군, 쥰케이님께서 자네가 발명했다는 복식부기라는 것에 대해 말씀 하시더군. 내가 가르치는 전공 과목이 상법이다 보니 전 세계의 장부 기입법에 대해 연구를 했네만, 자네의 그 ‘복식부기’ 비슷한 것도 본 적이 없어.
미사 : 역시 여기는 복식부기가 없는 세계구나…
‘아무래도 여기는 평행세계가 맞나봐. 언젠가 비슷한 얘기를 읽은 적이 있어.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무수한 평행세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던가? 그나저나 어쩌다 이런 세계로 들어 오게 된 거지?’
쥰케이 : 복식부기의 여신양 뭘 그리 인상을 쓰고 있나. 자, 자 다들 잔을 들게. 우선 건배부터 하세나.
쥰이치 : 복식부기의 ‘여신’이라… 아무리 봐도 복식부기 ‘소녀’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마후유 : 미사상 나이를 봐선 ‘소녀’라고 하긴 힘들죠. 뭐, 저도 그렇지만…
‘아직 소녀 소리 들어도 될 것 같긴 한데 말이지…’
쥰케이 : 그래? 내가 보기엔 미사양에게는 여신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말이야. 뭐, 그렇다면 젊은이들의 의견을 따를까? 자 그럼 우리의 ‘복식부기 소녀’를 위하여!
건배가 끝난 뒤, 미사는 잔에 담긴 샴페인을 원샷했다.
일동 : 야, 술 시원시원하게 잘 마시네!
그런 와중에 타카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다.
쥰케이 : 우리의 복식부기 소녀는 술도 잘 마시는구만.
미사 : 그렇지도 않아요.
마후유 : 미사상만 즐기고… 치사해.
미사 : 마후유상도 한 잔 할래?
소지로 : 메이드가 술을 마시면 쓰나. 일이나 하게.
마후유 : 네. 일 할게요.
마후유는 빈 술잔을 들고 부엌쪽으로 힘 없이 걸어갔다.
쥰이치 : 아, 미사양. 미사양이 기입한 복식 부기가 히라노야의 재판에서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을 지에 대해 모리타 교수님께 여쭤보는 건 어떨까요. 때마침 모리타 교수님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상법학자시고 말이죠. 교수님께서 인정하신다면 재판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쥰케이 : 타도코로 점장에게 부탁해서 다이후쿠쵸와 자네가 적은 복식부기 장부를 빌려 왔네.
쥰케이는 그렇게 말 하면서 테이블 위에 펼쳐진 장부를 가리켰다.
마이 : 어떻게 해서든 그 야만스러운 재무장관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어요. 그런 작자가 귀족이라니… 왕족의 일원으로서 수치스러워요.
미사 : 저도 동감입니다. 그 자는 정말이지 악독한…
쥰이치 : 우리 복식부기 소녀는 할 말은 하는 성격이군요.
모리타 : 이 재판의 쟁점은 참으로 간단한 것입니다. 바로 ‘빌려 준’ 것인가 ‘빌린’ 것인가라는 점이지요. 하지만 차용증에 ‘히라노야 상점이 이노우에 자작에게 돈을 빌렸다’고 되어 있는 한, 어지간한 증거로는 이기기 힘들 겁니다. 뭐, 귀족을 상대로 돈을 빌려 줄 때는 ‘빌렸다’고 거짓말을 하는 풍습이 있다는 것 정도는 저도 잘 아니까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쥰케이 : 그렇다면 미사양에게 부탁해서 히라노야의 최근 거래를 전부 복식부기로 기록 해 보는 것은 어떨까?
모리타 : 사실 저도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던 차입니다. 이노우에 자작과 히라노야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게 반년쯤 전이니,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최근 1년간의 거래를 전부… 그 뭐라 했지요? 분개라고 했던가요? 그 방법을 이용해서 기록 해 보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이 ‘분개’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계정과목’간의 연동과, 같은 사안에 대하여 여러 번 확인하는 ‘복식’이라는 특성을 활용하면 알기 쉽겠지요. 다시 말 해 이노우에 자작과의 돈거래를 제외한 모든 거래의 내역, 음… 돈을 빌려주거나 되돌려 받거나 하는 거래 내역과 현금 잔고가 아귀가 맞는다면 문제는 이노우에 자작과의 거래 뿐이겠지요. 그러니 이노우에 자작과의 거래 금액과 현금 잔고를 비교 해 보면 돈을 빌린 것인지, 빌려 준 것인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쥰이치 : 아! 그렇네요! 복식으로 거래를 기록하면 모든 계정과목이 연동되니까 어떤 거래 내역이 사실과 다를 경우 반드시 현금 잔고와 맞지 않게 되니까요!
마이 : 대체 무슨 말씀들을 하고 계신 건지 모르겠네요. 쥰이치님은 전부 이해가 되시나요?
쥰이치 : 아, 저도 전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 복식 부기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장부 기입방식과는 전혀 다르네요. 모든 ‘거래’를 원인과 결과로 나누어 ‘분개’ 하나로 표현을 한다는 점이 재미 있군요.
소지로 : 개인적으로는 거래를 ‘차변’과 ‘대변’으로 나누어서 보기 쉽게 만든다는 점이 마음에 드네만.
쥰케이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 역시 이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다름 아닌 ‘보기 쉽다’는 점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실 지금까지의 방식은 솔직히 보기 힘들었지요. 주판을 이용해서 검산을 해야만 하는 방식이었기에 장부만 봐서는 어느 것이 현금 잔액인지도 알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복식 부기는 분개… 복식부기 소녀의 표현에 따르자면 ‘거래의 일기’를 이용해서 하나의 거래를 ‘차변’과 ‘대변’으로 나누어 깔끔하게 알 수 있게 되어 있지요. 그리고 이 ‘분개 내역’ 들을 하나로 정리한 ‘총 계정원장’은 매달 행해진 거래의 대차(빌리고 빌려줌)의 총 합계를 바로 알 수 있도록 월별로 기록하게 되어 있잖습니까. 이런 발상이야말로 앞으로의 장부 기입을 바꿀 한 수라 생각합니다.
모리타 :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앞으로는 장부 기입을 함에 있어 단순히 상인들이 자신의 매상을 관리하기 위해서 기입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상인들에게 투자한 자본가들에게 ‘당신이 투자 해 준 재화는 이렇게 쓰이고 있다’라고 보고 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할 테니까요. 저 역시도 오랜 기간동안 그런 새로운 장부 기입 방식에 대해 궁리 해 보았지만, 미사양이 개발한 이 방식이야말로 앞으로의 변화에 가장 걸맞는 방식이라 생각이 듭니다. 자, 여러분 위대한 복식부기 소녀를 위해 건배 합시다!
모리타의 말에 모두들 건배를 외쳤다. 건배가 끝난 뒤, 미사가 다시 한 번 샴페인을 원샷하자 그 모습을 본 모두가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냈다.
모리타 : 제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바로 ‘주식회사법’이라는 것인데요, 다름 아니라 자본가들로부터 막대한 투자를 받아 공업을 중심으로 한 각종 산업을 육성하는 방식입니다. 사실 잉글랜드가 이런 식으로 ‘리미티드 파트너십’ 계약을 발전시켜 막대한 자본을 투자받고, 그 투자를 원동력으로 산업혁명을 일으켜 세계 최강대국이 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주식회사법’은 말하자면 ‘회사법’을 뜻함. ‘리미티드 파트너십 계약’이란 투자자와 기업가를 이어주는 계약을 뜻하며, 이 ‘리미티드 파트너십 계약’이 산업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은 실제 역사와는 다른 이 소설의 설정) 우리나라 역시 그런 잉글랜드를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식회사법을 하루바삐 가결시켜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한 눈에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장부’라고 하는 것을, 다시 말 해 ‘주식회사를 만드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요소’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기념비적인 날을 위해 한 잔 더 하시죠!
모리타의 말에 모두들 다시 한 번 건배를 했지만, 미사는 ‘이 이상은 못 마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복식부기에 대해 이렇게 기뻐 해 주니 나도 기쁘긴 한데… 어째서 저렇게까지 복식부기에 감동 하는 거지?’
미사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마후유가 새로운 음료가 실린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마이 : 어려운 얘기들이라 사실 어떤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복식부기라는 것이 있으면 얄미운 재무장관을 혼쭐 내 줄 수 있다는 얘기지요?
모리타 : 그렇게 되도록 저 역시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히라노야의 지난 1년간의 거래를 전부 복식부기로 기입해야 하겠지요.
소지로 : 그렇군. 미사양, 어떤가, 해 줄 수 있겠나?
타도코로 : 오너인 히라노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부디 장부 정리를 해 줬으면 좋겠어. 히라노야를 구한다고 생각하고 해 줘.
미사 :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지만… 재판의 증거가 될만한 장부를 제가 만들 수 있을지…
‘사실 자신이 없는데… 옛날에 있었던 환전상이라 하면 은행 같은 거잖아. 그 거래를 전부 분개 할 수 있으려나…’
마이 : 만약에 가게가 망하면 당신, 일자리를 잃게 되는 걸요.
미사 : 일자리를 잃는 건 곤란한데요. 이번 달에 학교도 졸업하니 제대로 일자리를 잡아야만 하니까요.
쥰이치 : 그러고 보니 미사양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온가쿠여학원에 다니시나봐요?
미사 : 저기 있는 마후유상과 함께 온가쿠여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쥰이치 : 그럼 거기서 배우는 건 뭔가요? 노래? 악기?
미사 : 노래를 배웠어요.
쥰이치 : 노래군요. 그거 멋지네요. 어려운 장부 얘기는 이쯤 해 두고 노래 한 곡 들려 줄 수 있나요? 타카미군, 피아노 좀 쳐 줄래? 자네 잘 치잖나. 피아노.
타카미 : 음.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자, 그럼 미안하지만 난 이쯤에서 실례 하겠네.
그런 말을 남기고 타카미는 방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남은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타카미의 행동에 말을 잃은 채 타카미의 등만을 바라보았다.
쥰이치 : 저 친구 왜 저러지? 아까 전부터 상태가 별로더니.
소지로 : 내가 미사양에게 저 드레스를 입힌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마이 : 그러고 보니 그 드레스, 타카코 언니의 드레스지요?
소지로 : 키가 같길래 잘 됐다고 생각했었네만…
마이 : 타카미씨는 아직도 타카코 언니가 폐하의 제 2 왕비로 들어 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겠죠.
미사 : 드레스, 안 입는다고 말씀 드리는 건데 그랬어요…
소지로 : 자네 탓이 아닐세.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말이야 쉽지… 신경이 쓰이는 걸. 집안 사정이 굉장히 복잡해 보이네… 아니, 그런 가정 사정 다 빼고 봐도 이 드레스 너무 꽉 조여서 힘들단 말이지. 빨리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싶은데…’
모리타 : 여러분.
축 처진 분위기를 바꾸기라도 하려는 듯, 모리타가 입을 열었다.
모리타 :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모의 재판을 한 번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재정장관이 이 복식 부기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론을 할 지 연습도 되지 않겠습니까. 일단 제가 재정장관측 변호인을 할 테니 미사양이 원고측 증인이 되어서 말이죠.
쥰이치 : 교수님 그거 재미있을 것 같네요. 그럼 제가 원고측 변호인을 하겠습니다.
모리타 : 그거 좋군요. 그럼 소지로님, 판사를 해 주시겠습니까?
‘갑자기 재판을 한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미사와 쥰이치, 모리타는 각각 좌우로 갈라섰다. 그 중심에 소지로가 들어 와 섰고, 다른 이들은 조금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소지로 : 그럼 지금부터 원고 히라노야, 피고 이노우에 자작의 대부금 사건에 대한 심리를 시작하겠소. 원고측 증인 앞으로 나오시오.
미사는 망설이며 소지로 앞에 가 섰다.
소지로 : 자 그럼 피고측 변호인, 심문을 시작하시오.
모리타 : 증인이 작성한 이 장부를 보아하니 왼쪽 항목에 ‘차변’이라고 적혀 있군요. ‘차변’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증거물 – 총 계정원장>
이노우에 자작
차변 1/1 현금 200,000,000 15 현금 180,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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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
1/25 현금 20,000,000 31 잔액 360,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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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 380,000,000 |
합계 : 380,000,000 |
미사 : 복식 부기에서는 돈을 빌리거나 해서 자산이 증가했을 경우에는 그 내역을 차변에 적게 되어 있습니다.
모리타 : 그렇다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데요. 돈을 빌렸(借, 빌릴 차)는데 어째서 ‘자산이 증가’ 한 것이 되나요?
미사 : 그냥 그러기로 되어 있는 건데 왜 그렇게 되냐고 물어 보시면…
모리타 : 원고인 히라노야는 현재 이노우에 자작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지요. 게다가 돈 거래가 있었을 때 양 측이 함께 작성한 차용증에는 ‘이노우에 자작이 히라노야에게 돈을 빌려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증거라고 이 장부를 제출 하셨는데, 일단 이 장부의 1월 1일의 거래 내역을 보도록 하지요. 현금 2억엔이 적혀 있는 것은 ‘차변’ 입니다. 이노우에 자작의 이름이 적혀 있고 ‘차변’ 다시 말 해 빌린 내역에 2억엔이 적혀 있다는 것은 히라노야의 주장과는 반대로 히라노야가 이노우에 자작에게 2억엔을 ‘빌렸’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말 그대로 이노우에 자작에게 돈을 ‘빌렸’기 때문에 ‘차변’에 기입을 한 거죠. 제 말이 틀립니까? 증인?
미사 : 차변이라는 표현에 빌릴 ‘차’자가 사용되기는 합니다만, 그 차변이라는 표현이 문자 그대로 ‘빌린 돈’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생각 해 보니 나도 왜 저렇게 헛갈리는 표현을 쓰는 지에 대해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네. 학교에서 배울 때도 일단 무작정 외우면 된다고 했었고… 생각 해 보니 이상하긴 하네… 자산이 증가했는데 왜 차변에 기입하는 걸까? 음… 이 분개는 사람 한 명 한 명에 대한 분개니까… 아, 어쩌면 이런 이유일지도!’
미사 : 정확한 설명이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경우에는 분개를 할 때 계정항목으로 해당 인물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빌린/빌려 준’ 주체는 히라노야가 아니라 해당 인물이라는 것이지요.
쥰이치 : 재판장님! 저 말이 맞습니다. 바로 영어에서 말하는 SV 문형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맞아! 그거야! …아마도…’
미사 : 맞습니다. 영어의 주술관계인 SV문형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이노우에 자작이라는 특정인의 이름이 ‘주어(S)’가 되는 것이기에 이 장에 적혀있는 행동(V)들은 전부 이노우에 자작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경우, 돈을 빌린 것이 이노우에 자작이고, 돈을 빌려서 자산이 증가 한 것도 이노우에 자작이므로 차변’, 다시 말 해 ‘빌린’ 측에 2억엔을 기입하는 것이지요.
모리타 :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은 궤변 같군요. 말장난을 하는 것 뿐, 히라노야의 주장을 속시원하게 증명 해 주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진실을 가리기 위한 얄팍한 술수에 불과합니다!
‘아닌데…’
모리타 :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히라노야가 이노우에 자작에게 돈을 빌렸기에 ‘차변’에 기입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차용증과도 앞뒤가 맞고 말입니다. 자, 증인 이 말에 반론이 가능합니까?
‘아… 말꼬리나 잡고 말이지. 제대로 상대 해 줘야겠어.’
미사 : 하지만 그 말씀대로라면 다른 계정항목과 비교 해 보았을 때 모순이 생깁니다. 분개 장부를 보시면 아실 수 있는데요, 분개를 할 때 대(빌려줄 대 貸)변에 쓴 ‘현금 2억엔’이라는 것은 다시 말 해 히라노야에게 있어 현금이라는 자산이 2억엔 어치 ‘줄어들었다’는 얘기죠. 다시 말 해 총 계정원부에서 ‘현금’ 항목을 찾아 보시면 2억엔이 줄어들어 있는 상태일 것이고, 현금 잔액 역시 2억엔 부족한 상태일 거예요. 돈을 빌렸는데 현금이 줄어들었다면 그것이 모순 아닐까요?
※참고 : 분개 장부의 내역 - 1/1 이노우에 자작 200,000,000 / 현금 200,000,000
모리타 : 백보 양보해서 실제로 현금이 줄어 있는지 아닌 지 알 방법이 있나요? 장부야 그냥 고치면 되는 것이고.
미사 : 현금이라는 것은 실제로 히라노야에 보관중인 실체가 있는 재산이므로 장부만 조작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죠. 상식적으로 그냥 히라노야 금고에 들어 있는 돈을 세어 보면 될 일 아닌가요?
쥰이치 : 판사님. 히라노야에 실제로 현금이 얼마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증인이 책임을 질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지로 : 변호인의 말에 일리가 있군. 실제로 현금이 얼마나 있는 지까지 증인이 책임을 질 필요는 없지. 피고측 변호인, 이 점을 고려 하여 심문을 이어 가시오.
모리타 : 알겠습니다. 자 그럼 다시 장부로 이야기를 돌려 보지요. 아까 특정 인물을 계정항목으로 사용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증인의 논리에 따르면 이번 대부금에 있어서는 특정 인물, 다시 말 해 이노우에 자작을 계정항목 삼아 분개를 하였기에 주어가 이노우에 자작이 되는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이노우에 자작의 이름을 ‘차변’에 쓴 것은 ‘이노우에 자작이(주어) 빌렸다(술어)’라는 의미가 된다는 얘기인데요. 제가 이해 한 바가 맞나요?
미사 : 네. 이번에는 대부금이지만, 다른 거래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이노우에 자작님이 히라노야 개화당에서 외상으로 커피를 1만엔 어치 사 가셨다고 치죠. 이 거래를 분개한다면 차변에는 ‘이노우에 자작’이라는 계정항목으로 1만엔을, 대변에는 ‘매상’이라는 계정항목으로 1만엔을 적어서 분개 할 수 있어요.
※참고 : 이 경우 분개 장부의 내역 - ?/? 이노우에 자작 10,000 / 매상 10,000
모리타 : 돈거래 뿐 아니라 외상 거래 역시 ‘차변’에 이노우에 자작의 이름을 적는다는 얘기군요.
미사 : 그렇죠. 상품을 거래했을 때 생긴 외상 역시 차변에 적습니다. 대변을 보면 이번 거래로 발생한 이익이 ‘매상’이라는 계정항목으로 기입이 되어 있으니, 이번 거래를 통해 히라노야가 1만엔 어치 매상, 다시 말 해 자산의 증가가 있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지요. 그러므로 이 경우, 비록 ‘차변’에 이름이 적혀있긴 해도 이 1만엔이 이노우에 자작의 것이 아닌 히라노야의 것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머리를 쓰는 건 오랜만인걸…’
모리타 : 그건 그것대로 또 이상하군요. 원래 ‘대변’에는 자산이 감소한 내역을 쓰는 것이라 하지 않았나요? 어째서 ‘매상’을 대변에 쓰는 것이지요? 앞뒤가 안 맞지 않나요?
미사 : 네. 기본적으로는 ‘자산이 감소한 내역’을 대변에 씁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수익이 증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매상’이라는 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4장을 참조)
모리타 : 그건 궤변 아닌가요. 재판장님, 증인은 지금 이 복식부기라는 것에 대해서 ‘이 경우에는 이렇고 저 경우에는 저렇다’라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증언은 증거로서 효력이 없습니다!
‘그런 게 아닌데… 이 사람 너무하는걸…’
소지로 :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자, 증인. 그러면 지금 이야기가 복잡해 지는 것이 특정 인물의 이름을 계정항목으로 사용해서 주어가 어떻다 하는 말이 나오는 것 같은데, 아까 전의 외상 거래를 인명 계정항목을 사용하지 않고 분개 할 수는 없는거요?
미사 :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대신 ‘외상 미수금’이라 적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 : 이 경우 분개 장부의 내역 - ?/? 외상 미수금 10,000 / 매상 10,000
모리타 : 자 그럼 ‘외상 미수금’을 갖고 분개를 한다고 생각 해 보죠. 이 경우는 당연히 ‘외상 미수금’이 주어겠지요? 아까 논리대로라면 ‘외상 미수금’이 1만엔을 빌렸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요?
미사 : 외상 미수금은 사람이 아니니까 돈을 빌리거나 하지 않지요.
모리타 : 그렇다면 더 이상하지 않나요? 외상 미수금은 ‘사람’이 아니니 아까 말한 영어의 SV구조가 적용되지 않음에도 미수금의 증가를 왜 ‘차변’에 쓰는 거죠? 아까는 ‘히라노야가 아니라 이노우에 자작이 주어이기에, 차변에 이노우에 자작을 써도 된다’고 하더니?
미사 : 아.. 그건… 확실하진 않지만, 원래 복식 부기는 특정 인물의 이름을 계정항목으로 사용 하는 데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해요. 그 때 왼쪽은 차변, 오른쪽은 대변이라는 원칙이 정해져서 이후에 여러모로 계정항목의 종류가 늘어난 뒤로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모리타 : ‘아닐까 싶다’고요? 재판장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항상 엄정하게 관리되어야 할 장부가 ‘이럴 땐 이렇’고 ‘이 계정항목은 이렇’고 ‘아마도 예전에는 이랬을 것이다’ 라는 식으로 변명에 불과 해 지면 증거로서의 효력이 없는 것 아닐까요?
쥰이치 :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것에 예전에 쓰이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닙니다!
미사 : 복식부기라 함은 기본적으로 차변과 대변이라는 두 항목만으로 모든 거래를 도식화 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기에 엄정한 규칙이 있으며, 제 편의에 맞추어서 이렇게 해석했다 저렇게 해석했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리타 : ‘엄정한 규칙이 있다’고 했나요? 지금?
‘아… 지금 여기서 자세히 설명 하라 하면 곤란한데…’
쥰케이 : 재판장님.
쥰케이가 갑자기 소지로를 불렀다.
쥰케이 : 분위기가 과열 된 듯 싶으니 잠시 휴식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요? 복식부기 소녀도 지쳐버린 듯 하고 말이죠. 지쳐버린 미녀를 보는 건 마음이 아프군요.
‘다행이다… 쥰케이님은 역시 신사야.’
소지로 : 그렇군요. 그럼 잠시 휴식 시간을 갖도록 하지요. 저도 좀 피곤하군요. 모리타 교수, 괜찮겠지?
모리타 : 물론이죠. 너무 몰아붙인 것 같기도 한데, 너무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미사양.
미사 :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긴장한 탓인가 너무 피곤한데…’
휴식시간이 시작되자 다들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마후유 : 차변, 대변 같은 두 가지 화제만으로도 이렇게까지 달아오를 수 있군요.
쥰이치 : 이것저것 설명하는 것도 귀찮은데 그냥 ‘왼쪽이 대변(빌려 준 것)입니다’라고 얘기 해 버리면 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정말로 내가 만들어 낸 개념이라면 그래도 되겠지만, 이건 전 세계 공통의 기준이라서요… 엄밀히 말하자면 차변은 Debit의 번역어, 대변은 Credit의 번역어란 말이지요…’
미사 : 왼쪽이 차변, 오른쪽이 대변이라는 건 정해진 거라서요…
제 3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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