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식부기 입문편
제 1막 ‘히라노야 개화당 가게 안’
배경 ‘서막으로부터 6년 전’
- 이 곳은 서력 2016년의 일본이다. 다만, 이 곳은 ‘복식부기’라는 개념이 없는 평행세계.
‘복식부기’가 없기에 자본집약적 공업 경제가 발전되지 않았기에 생활 양식은 메이지, 다이쇼와 크게 다름이 없는 수준에 머물러있다.
정치나 경제 역시 인구의 1%에 불과한 귀족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어, 99%에 달하는 서민들은 근검한 생활을 강제당하고 있다.
이 세계의 특징이라 하면 인구 변화도, 급료나 물가 변화도 거의 없는 ‘극히 안정된’ 사회라는 점. 다만 이것은 다르게 해석하면 정체되어 있는 사회, 극도로 노회하여 활기가 없는 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레이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사이엔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고풍스러운 목조 건물 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낮은 칸막이 너머로 상품이 들어찬 쇼윈도가 늘어 서 있었고, 삼베로 만든 주머니나 양철 캔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차 있었다.
‘응? 여긴 대체 어디지?’
짙은 고동색 책상 위엔 메모용지로 보이는 종이들이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었다. 미사는 흐트러진 종이 중 한 장을 손에 들었다. 거기에는 누군가의 이름과 금액이 적혀 있었다.
‘뭐지 이거?’
정면 벽에는 큰 그림이 두 장 걸려 있고, 그 그림 사이에 타원형 거울이 걸려 있었다. 미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녹색 바탕에 붉은 색과 노란 색 세로 줄무늬가 들어 간 고소데(※소매가 없는 일본 전통 복식)를 입고, 푸른 리본으로 머리를 묶은 자신의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마치 다이쇼시대의 여학생들이나 입을 법한 복장이었다.
‘어? 나 왜 하카마를 입고 있는 거지?’
미사는 아는 사람들이 없나 싶어 주변을 돌아 보았다. 가림만 건너편에서 자신과 비슷한 복장을 입고 삼베 주머니를 들어 나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어딘가 눈에 익었다.
‘어, 쟤 마후유네?’
미사 : 마후유상?
‘어? 나 왜 지금 상을 붙여서 부른거지?’
마후유 : 미사상 왜요?
‘마후유도 나한테 ‘상’을 붙여 부르네… 평소완 다른걸…’
미사 : 마후유상, 쇼윈도 정리 끝났어요? 난 장부 정리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아. 장부 적는 거 좋아하는데 어쩌다 잠이 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응? 생각과는 달리 말이 막 나오는데…’
마후유 : 정리 아직 안 끝났어요. 아무리 정리를 해도 어디선가 물건들이 나온다니까요. 끝이 안 나네요.
‘이거 무슨 대사 같은 건가… 뭐 저렇게 격식을 차려 딱딱하게 이야기 하는 거지… 메이지 시대나 다이쇼 시대가 배경인가?’
그 순간, 가게 안 쪽 문이 열리며 카키색 수트를 입고 베레모를 쓴 남자가 나타났다.손에는 삼베 주머니를 들고 있다.
타도코로 : 장부는 다 썼나?
‘장부? 아… 이거 촬영이구나. 어디선가 카메라가 찍고 있겠군.’
미사 : 아 죄송해요. 아직 하는 중이에요.
타도코로 : 아직 못 끝낸거야? 장부 정리를 잘 한다고 하길래 기껏 고용 해 줬더니만.
미사 : 열심히 하겠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원활하게 대사를 칠 수 있다니. 어쩌면 나, 타고 난 배우일지도 몰라!!’
타도코로 : 마후유군, 이 커피는 저기 있는 진열대에 놔 둬주게.
마후유에게 지시를 내린 남자는 다시 가게 안 쪽 문 안으로 사라졌다.
미사 : 마후유상, 오늘 며칠이었죠?
마후유 : 3월 10일이에요.
미사 : 아, 그럼 곧 졸업식이네요. 우리도 드디어 졸업 하는군요.
마후유 : 저는 좀 더 빨리 졸업 하고 싶은걸요. 빨리 사회로 나가고 싶어요.
미사 : 마후유상은 일 하는 걸 좋아하니까 그렇겠죠. 부럽기도 하네요. 저는 좀 더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다른 생각도 안 들고, 순수하게 즐거우니까.
마후유 : 고민거리라도 있나요?
미사 : 요즘 경기가 영 안 좋잖아요. 고향 집에서 만들어 파는 소주도 잘 안 팔린다고 하고…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며 정성을 들여 만들다 보니 가격이 좀 나가서 말이죠…
‘아, 소주 주조소 딸이라는 설정이구나… 어느 사이엔가 ‘술’ 이미지가 정착 된 걸까.’
마후유 : 헤이세이(※1989~)가 시작 된 지도 벌써 스물 여덟해 (※헤이세이 28년 = 2016년)네요. 어느 사이엔가 학교도 졸업을 앞두고 있고. 저 자신은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세월은 잔혹하게도 눈 깜빡 할 사이에 흘러 가 버리네요.
‘어? 메이지나 다이쇼가 아니라 헤이세이가 무대인거야?’
타도코로 : 이봐! 너희들 말이야, 수다 떨지 말고 일에 집중 좀 하지?
타도코로는 그렇게 말 하며 손에 들고 있던 삼베 주머니를 마후유에게 건넸다. 주머니를 건넨 타도코로는 미사가 앉아 있는 책상으로 다가와서는 장부를 손에 들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타도코로 : 뭐야, 하나도 정리가 안 됐잖아. 너 말야, 정말로 장부 쓸 줄은 아는 거니? 좀 이따가 아야노코지남작님 댁에 미수금을 받으러 가야 하니까,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남작님 장부는 우선적으로 정리 좀 해 줘.
미사 : 알겠습니다.
미사는 생긋 웃으며 타도코로를 바라보았다. 미사의 미소를 본 타도코로는 머쓱한 듯 뒤돌아 서더니 마후유를 도와 상품 정리를 시작했다. 잠시 뒤, 실크햇을 쓴 남자가 건장한 남자들을 거느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이노우에 : 뭐, 이딴 허접한 것들이라도 팔아 치우면 최소한 이자 정도는 나오겠지. 얘들아, 여기 있는 것들 전부 쓸어 담아라!
타도코로 : 손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남자들이 상품에 손을 대려 하자, 타도코로가 황급히 남자들의 손을 쳐 냈다.
이노우에 : 지금 뭐 하냐고 했나?! 기껏해야 서민주제에 지금 재무장관인 이 몸에게 말대꾸를 하는 게야?!
타도코로 : 아, 이거 실례했네요. 이노우에자작님이셨군요. 그런데 오늘 히라노 사장님은 가게에 출근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노우에 : 사장이 있건 없건 그딴 건 상관 없어. 난 그저 빌려 준 돈의 이자라도 받기 위해 온 거고, 돈이 없어 보이니 상품이라도 받아 가려 하는 것 뿐이야.
타도코로 :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 건에 대해서는 지금 재판이 진행중이지 않습니까.
이노우에 : 자네는 귀족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가 되어먹질 않았구만. 감옥에서 예의 범절을 배워 볼 텐가?
타도코로 : 제 행동에 무례한 부분이 있었다면 사과 드립니다. 하지만 상품을 가져 가시면 나중에 제가 사장에게 크게 혼이 나오니, 부디 그만 두어 주십시오.
이노우에 : 네 녀석이 혼이 나건 말건 이 몸이 알 바는 아니지. 자, 이놈들아 뭣 하고 있느냐! 어서 상품들을 밖으로 나르지 못 할까!
그 순간, 짙은 자주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가게로 들어선다. 마이였다. 그리고 마이의 뒤를 따라 키요하라 쥰케이와 그 아들 쥰이치도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쥰케이와 쥰이치는 흰 바지 위에 진남색 자켓을 걸치고, 목에는 실크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
마이 : 어머 이게 누구세요. 재무장관님 아니신가요.
이노우에 :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다우시군요. 마이님.
이노우에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마이 : 뭔가 소란스러워서 들어 와 봤는데, 무슨 일 있으신가요?
이노우에 : 이 가게 사장인 히라노라는 자에게 돈을 빌려 주었는데, 원금은 커녕 이자조차도 갚으려 하지 않지 뭡니까. 별 수 없이 물건이라도 받아 가려 온 참입니다.
마이 : 어머 그런가요. 그건 그렇고 참 저급한 얘기네요. 재무장관쯤 되시는 분이 그런 일 까지 하실 줄이야…
이노우에 : 아니 뭐, 이 근처에 볼 일이 있어 온 김에 겸사겸사…
쥰케이 : 이노우에자작, 오랜만이구만.
이노우에 : 아, 키요하라 후작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쥰케이 :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놈은 처음 만나는 것 아닌가? 쥰이치, 재무장관이신 이노우에 자작님이시다. 인사 드려라.
쥰이치 : 처음 뵙겠습니다. 키요하라 쥰이치라 합니다.
이노우에 : 아, 잘 부탁하네.
쥰케이 : 아까 얘기가 나왔던 ‘이자’ 건 말이네만, 히라노야 상점이랑은 지금 현재 재판이 진행중이지 않던가?
이노우에 : 건방지게도 재무장관인 이 몸을 고소 할 줄이야. 정말 화가 나더군요.
쥰케이 : 재무장관 자네는 히라노야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고 주장하는 한편, 히라노야는 오히려 자기들이 자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고 하는 것 같던데?
이노우에 : 이 몸이 돈을 빌려주었다는 증서가 있으니 재판까지 갈 것도 없는데 말이지요.
쥰케이 : 하지만 생각 해 보면 히라노야는 본디 환전이 본업이니 말일세. 개인적으로는 환전을 본업으로 하는 히라노야가 현금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린다는 게 영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단 말이지. 자, 어떤가.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자네의 주장을 들려주지 않겠나. 우리 아들놈 공부도시킬 겸, 마이님께 상거래의 묘미도 알려 드릴 겸 해서 말이야.
마이 : 그거 재미있겠네요.
이노우에 : 아… 거 뭐냐… 아, 오늘은 급한 일이 있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노우에는 황급히 가게를 떠났다.
타도코로 : 마이님, 쥰케이님, 쥰이치님 정말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마이 : 재무장관씩이나 되어서 하는 짓은 강도나 다름 없네요. 전 저 사람 정말 싫어요.
쥰케이 : 군인 출신으로 재무장관 자리까지 기어 오른 사람입니다. 필요에 따라선 물리력을 쓸 수도 있다는 얘기겠지요. 이번에 타겟으로 삼은 건 이 히라노야 상점이군요. 정말 큰 일이겠소.
‘이거, 귀족들은 하고 싶은대로 뭘 해도 괜찮다는 설정인가? 메이지 시대는 정말로 그랬다는 얘기는 들은 적 있지만…’
쥰케이 : 예나 지금이나(※메이지 시대 초기에 실제로 일어났던 ‘오사리자와 동광산사건’ 이야기) 귀족이 상인에게 돈을 꿔 놓고 체면이다 뭐다 하며 오히려 상인이 귀족에게 돈을 꿔 간 것 처럼 문서를 위조하는 악습이 끊이질 않는군요. 놀라운 일입니다.
마이 : 그런 악습이 있나요?
쥰케이 : 예전에는 고작 ‘서민’이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귀족에게 돈을 빌려준다는 건 ‘무례’한 일이라며, 차용증을 쓸 때 형식적으로 ‘귀족이 돈을 빌려 준 것’으로 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아서 그 악습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지금 재무장관이 하는 짓은 그런 악습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타도코로 :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저희 히라노야는 외환과 환전을 주력 사업으로 번창한 기업이지요. 그렇기에 재무장관님께 돈을 빌릴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이 저희 사장, 히라노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아까부터 계속 환전이 어떻다 얘기를 하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쥰이치 : 아, 새로 온 직원이신가요?
쥰이치가 미사 쪽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아, 이제 내가 대사를 할 차례구나’
미사 : 네. 오늘부터 일하게 된 에토 미사라고 합니다. 장부 정리 담당이지요.
쥰이치 : 미사라… 이름이 참 예쁘군요.
미사 : 감사합니다. 아…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쥰이치 : 질문? 하시죠.
미사 : 아까 전에 ‘실제론 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용증은 빌린 것으로 기입하는 악습’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만, 차용증을 엉터리로 쓰더라도 장부를 보면 누가 누구에게 돈을 빌렸는 지 한 눈에 알 수 있지 않나요?
쥰케이 : 장부만 보고 그걸 알 수 있다는겐가?!
미사 : 아마도요… 아직 그 장부를 보지 않았으니 확신은 못 하겠지만요.
쥰케이 : 그렇군. 그럼 문제는 장부가 어디 있느냐인데…
타도코로 : 그 장부라면 여기 있습니다. 재무장관이 사람을 사서 훔쳐 갈 지도 모르는 일이라, 재무장관의 다이후쿠쵸(※매매장부)만은 이 곳에 숨겨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다이후쿠쵸라고?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데… 그나저나 이 촬영, 엄청 길게 하네. 언제쯤 끊어 가려나…’
다시금 가게 안으로 들어 간 타도코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장부 한 권을 손에 들고 나왔다.
‘와…세로 쓰기에다가 한자 투성이잖아. 이것만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미사 : 음… 죄송해요. 이 장부만 봐서는 확실히 히라노야가 돈을 빌린 것으로 되어 있네요. 하지만 이 내용이 맞는 지 아닌 지는 이것만 갖고는 증명 할 수 없겠는걸요.
‘이상하네… 외운 적도 없는 대사가 자연스레 나오는데. 뭐랄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말을 하는 것 같달까… 아, 어쩜 이거 촬영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는건가? 꿈이라기엔 묘하게 현실적인데… 뺨이라도 꼬집어 볼까? 어?! 팔이 안 움직여… 역시 꿈인가…’
타도코로 : 역시 차용증이 저래선 재판에서 이기긴 힘들겠지요?
쥰케이 : 귀족에게 돈을 빌려 주고 차용증은 반대로 쓰는 풍습이 있다는 것 정도는 재판관들도 알고 있을터이니, 그 차용증이 그렇게 쓰여졌다는 것만 증명 해 내면 될 거라 생각은 하네만…
마이 : 재판에서 지면 이 가게도 없어지겠군요.
타도코로 : 아무래도 금액이 금액이니 말이죠… 특히나 이 개화당은 사장이 취미삼아 시작한 가게다 보니 가장 먼저 문을 닫겠지요.
마후유 : 이대로라면 제 일자리도 사라져버리겠네요.
마이 : 어머, 새로 들어 온 직원이 한 명 더 있었군요.
마후유의 표정은 어딘가 화가 난 것 처럼 보였다.
미사 : 그럼 저도 해고되는 건가요?
타도코로 : 그러고 싶진 않지만 가게가 망하면 별 수 없지…
마이 : 여기 홍차가 맛있는데… 망하면 곤란해요.
‘무엇보다 큰 문제는 장부 기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거야. 이런 이상한 장부 말고 제대로 된 복식부기로 장부를 적으면 좋았을텐데…. 아, 어차피 꿈인데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면 재미 있을 지도 모르겠어!! 자, 그럼 시와케(※부기용어. 국내에선 보통 ‘분개’라고 불림. 거래의 내용을 차변과 대변으로 나누어 기입하는 것. 차변은 빌린 돈(차입)을 기입하는 쪽, 다시 말 해 복식부기부의 왼쪽을 뜻하고, 대변은 빌려 준 돈 (대여)을 기입하는 쪽, 다시 말 해 복식부기부의 오른쪽을 뜻함)부터 하자, 시와케!! 저 장부를 시와케 해서 다시 정리 하면 되겠지. 자… 시와케 한다고 얘기 하는 거야!!’
미사 : 저기… 시와케 해 보면 될 것 같은데요…
마이 : 시와케? 그게 뭔가요?
미사 : 아니 뭐냐고 물으시면 저도 잘 설명은 못 하겠지만…
마이 :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미사 : 아니… 사실 아까부터 계속 머릿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아서요. 아까부터 누군가가 ‘시와케를 하고 계정과목을 보면 빌린 돈인지 빌려 준 돈인지 한 눈에 알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게 들려와요.
마이 : 머릿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고요? 시와케를 한다? 계정과목? 농담도 때와 장소를 가려 주셨으면 좋겠네요.
미사 :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머릿 속에서 누군가가 ‘시와케 하게 해 줘’라고 소리 치고 있는걸요… 정말 죄송하지만 이노우에 자작님의 건, ‘시와케’란 걸 해 봐도 될까요?
‘아, 갑자기 내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네.’
미사는 옆에 놓여있던 연필을 주워 들고는 장부 여백에 ‘1/1 이노우에 자작 200,000,000 / 현금 200,000,000’이라고 적었다.
타도코로 : 엥?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사 : 아무래도 이게 ‘시와케’란 것 같아요.
쥰이치 : 자기가 써 놓고 ‘같다’니… 꽤나 특이한 아가씨군요.
미사 : AB형이긴 합니다만…
‘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여기서 혈액형 얘기가 왜 나와…’
쥰케이 : 호오… 이 ‘시와케’란 거, 왠지 흥미가 생기는걸. 좀 더 자세히 설명 해 주겠나?
미사가 시와케 한 장부를 손에 들고 찬찬히 훑어 보던 준케이가 입을 열었다.
‘아,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있네!! 그럼 먼저 차변과 대변에 대해 설명을 해야겠다. 차. 변. 대. 변…. 아, 왜 이렇게 입이 마음 먹은대로 움직이지 않지.’
미사 : 차변과 대변…
쥰이치 : 차변?
미사 : 시와케를 할 땐 장부 칸을 좌우로 양분 해서 쓰거든요.
마이 : 가로쓰기를 하시네요. 세련된 서양풍이군요.
미사는 벽에 걸린 그림들, 다시 말 해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미사 : 음… 저 그림을 이용해서 설명을 해 볼게요.
마후유 : 옷을 벗은 여인의 그림으로?
미사 : 음… ‘프란시스코 고야’라는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지요.
마후유 : 고야? 미사상, 미술 공부도 하셨었나요?
미사 : 아, 미술은 그렇게 잘 알지 못 하는데… 그러고 보니 나, 어째서 저 그림을 알고 있는 거지?
‘어? 나, 고야에 대해 이렇게 잘 알았었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도 이젠 내 생각대로 말이 나오는구나.’
마이 : 네. 유명한 그림이죠. 옷을 입은 마하와 벌거벗은 마하.
마후유 : 추리 소설이라면 좋아하지만 미술쪽은 영…
마이 : 당신에게 한 말 아니에요.
마이의 냉정한 말에 마후유는 토라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사 : 제 기준으로 왼쪽에 있는… 그러니까 ‘옷을 입은 마하’를 ‘차변’이라 해 보죠. ‘차변’은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미사는 일어나서 진열장 앞에 놓여 있던 커피 주머니를 들더니 ‘옷을 입은 마하’앞에 놓았다.
미사 : 반대로 오른쪽에 있는 ‘벌거벗은 마하’는 ‘대변’에 해당됩니다. 당연히 ‘대변’은 재산이 줄어 드는 것을 뜻하죠.
거기까지 이야기 한 미사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과도를 집어서 ‘벌거벗은 마하’ 앞에 놓았다.
마후유 : ‘재산이 줄었’으니 옷을 벗게 되는 건가요. 괜히 두근거리네요.
마이 : 어머, 그런 거 좋아하셨어요?
마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후유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마후유는 실제로 야한 거 좋아하지. 평소 보여주는 성실하고 진지한 모습만 봐선 상상도 하기 힘들지만 말야.’
미사 : 아, 말씀 드리는 것을 깜빡 했는데, ‘재산’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플러스 재산과 마이너스 재산이 그것이죠.
‘아까보단 훨씬 수월하게 말이 나오긴 하는데… 이거 뭔가 로보트를 조종하는 것 같네. 내가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안 들어. 이거 어쩌면 꿈이 아닐지도..’
쥰이치 : 마이너스 재산이라… ‘돈을 빌리는’ 것을 뜻하는 건가요?
미사 : 네. 보통 플러스 재산은 ‘자산’, 마이너스 재산은 ‘부채’라고 부른답니다.
쥰이치 : 자산과 부채라… ‘재산’을 두 종류로 나눈다는 얘기군요.
미사 : 그럼 과연 이노우에자작에게 빌려 준 돈은 과연 ‘플러스 재산’일까요? ‘마이너스 재산’ 일까요?
마이 : 어머! 지금 저한테 질문 하시는 거예요?
마후유 : 아! 알겠어요! ‘플러스 재산’이죠!!
미사 : 정답!! 나중에 돌려 받을 수 있는 재산이기에 ‘플러스 재산’이지요. 다시 말 해 ‘자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 해, 빌려 준 돈이 늘어난다는 것은 다시 말 해 ‘자산’이 늘어 나는 거죠.
그렇게 말 하며 미사는 커피가 든 삼베 주머니를 더 가져 와서 ‘옷을 입은 마하’ 앞에 쌓았다.
미사 : 자, 그럼 옷을 입은 마하 앞에 ‘자산’이 늘어 났으니, 이노우에 자작에게 빌려 준 2억엔은 ‘차변’에 쓰겠습니다. (1/1 이노우에 자작 200,000,000 / ) 아까 말씀 드린 ‘계정과목’- 이건 시와케를 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만- 을 적는 방법은 다양해요. 그냥 빌려 주거나 빌린 금액만 쓰는 경우도 있지만, 누구에게 돈을 빌렸냐, 빌려 줬느냐를 알기 편하도록 사람의 이름을 쓰는 경우가 일반 적이에요. 여기에 이노우에 자작이라 쓴 것도 그래서고요. 이렇게 이름을 쓰면서 기입하는 것은 ‘인명계정’이라 합니다.
마후유 : 그럼 저 ‘옷을 입은 마하’는 저 ‘자산’을 자기 주머니에 넣겠군요.
미사 : 그렇게도 생각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남들에게 돈을 빌려주게 되면 자신이 갖고 있는 현금은 줄어들게 되죠. 자신의 자산이 줄어든 것은 ‘대변’, 다시 말 해 오른쪽에 기입을 해야겠지요. 이 경우에는 ‘현금’이 줄어들었으니, 오른쪽 ‘벌거벗은 마하’ 쪽에 그 내역을 기입합니다. (1/1 이노우에자작 200,000,000 / 현금 200,000,000)
‘아… 저 그림, 잊혀지지 않겠네.’
미사 : 이렇게 내역을 나누어 적는 것을 ‘시와케’라 합니다. 포인트는 한 번의 거래를 한 번의 시와케로 정리해야 한다는 점. 시와케만 딱 봐도 그 거래에 대해 전부 알 수 있도록 적어야 하는 것이죠.
마이 : 아까부터 ‘시와케’라는 말을 계속 하는데, 그건 그 쪽이 쓰는 장부의 이름인가요? ‘다이후쿠쵸’랑 다른 종류의 장부?
‘그러고 보니 ‘시와케’는 너무 당연한 개념이라 딱히 그 이름이 어떤 의미를 갖는 지 생각도 안 해 봤네… 저렇게 대 놓고 물어보니 할 말이 없어…’
미사 : 음… 시와케는 말이죠… ‘계정과목’을 활용해서 거래를 나누어 정리하는 것을 뜻해요. 아까 말씀드린 ‘차변’과 ‘대변’으로 나누어 기록하는 것이죠. 시와케를 하는 장부는 ‘시와케쵸’ (시와케장부)라고 부르고요.
쥰케이 : ‘대변’에 현금 2억엔이라 쓴 것은 그 돈을 이노우에자작에게 빌려주어 현금자산이 줄어들었기 때문이고, 반대로 그 결과 이노우에자작에게 ‘빌려준 돈’이라는 자산이 생겼으니 ‘차변’에 쓴다는 얘기구만. 이 ‘시와케’만 보아도 이번 거래, 다시 말 해 이노우에자작에게 2억엔을 빌려주는 ‘거래’의 전모를 한 눈에 알 수 있군 그래.
미사 : 다시 말 하자면 ‘현금이 줄어 든 것은 빌려 준 돈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쥰케이 : 그렇군. 두 개의 ‘계정과목’은 서로 연동되어 있는 게로군. 원인과 결과, 겉과 속처럼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존재구만.
‘키요하라 후작… 상당히 댄디하고 멋진 사람이네.’
쥰케이 : 아까전에 아가씨가 ‘시와케를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고 했는데, 그건 결국 히라노야가 행한 모든 거래들을 이 룰에 따라 ‘시와케’ 해 두면, 결국 원래 히라노야가 갖고 있던 재산에서 2억엔이 늘었는지 줄었는지만 파악하면 그 2억엔이 빌린 돈인지 빌려 준 돈인지를 알 수 있다는 얘기겠구만.
마이 : 쥰케이님. 조금 알기 쉽게 설명 해 주시겠어요?
미사 : 2억엔을 빌려 주었다면 현금 잔고가 줄어 들었을테니까요.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매일 현금 잔고를 체크 할 것 아닙니까. 2억엔을 빌려주었다면 어느 시점에선가 현금 잔고가 2억엔 줄어들었겠지요.
쥰이치 : 하지만 잔고를 확인 할 생각이라면 딱히 ‘시와케’라는 걸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요? 어차피 잔고 파악은 그 날 장사가 끝난 시점의 잔고를 적는 거니까 의미도 없어 보이고.
쥰케이 : 물론 잔고는 장사가 끝난 시점의 잔고를 적겠지. 문제는 말이다, 잔고가 ‘어째서 그렇게 되었느냐’라는 점이지. 그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그것도 누가 보더라도 금세 알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한 것이야. 그래야만 증거로서 의미가 있는 게고.
‘정답입니다!!’
마후유 : 미사상, 질문이 있는데요.
미사 : 뭔가요?
마후유 : 시와케를 할 때, 가로쓰기를 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에… 질문이란 게 그거였어? 음… 그러고 보니 애초에 시와케는 왜 좌우로 나눠서 적는 걸까? 세로쓰기로 위 아래로 나눠도 될텐데…. 아!!’
미사 : 한두건이라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수 많은 거래를 ‘시와케’ 하기 위해서는 가로쓰기가 더 편하니까요. 가로쓰기를 하면 숫자들이 정렬되잖아요. 숫자가 정렬되면 나중에 합계를 내기도, 계산을 하기도 훨씬 편하거든요.
마후유 : 와… 무슨 암호같네요. 실제 암호라면 너무 간단한 암호겠지만요. 하지만 그런 ‘단순함’ 속에 깊은 뜻이 숨겨 져 있는 것만 같아요.
제 1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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