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7일. 메이저 데뷔로부터 3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 첫 앨범인 ‘투명한 색’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는 데뷔곡인 ‘구루구루 커튼’ 부터 당시 최신 싱글이었던 10번째 싱글, ‘몇 번째 보는 푸른 하늘인가?’까지 전 싱글의 타이틀곡과 더불어, 니시노 나나세와 이쿠타 에리카의 솔로곡 등 신곡 몇 곡, 그리고
팬들의 리퀘스트로 선정 된 커플링곡들이 실려 있었다. 말 그대로 ‘노기자카 46의 집대성’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내용이었다.
자연스레 이 시기에는 멤버들이
미디어에 출연 할 때 마다 앨범 선전이 이루어지곤 했다. 그 중에서도 앨범이 릴리스 된 직후인 1월 9일에 출연 한 ‘음악의
시간 ~Music Hour~’ (후지 TV 계열)에서 앨범 이야기가 나왔을 때, 당시 사회자였던 후쿠이 요시히토 아나운서가
‘구루구루 커튼’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여성이 다른 여성을 좋아하는 내용을 그린 곡이지요?”
‘가사를 읽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이야기 하는 후쿠이 아나운서를
보며 멤버들이 ‘아니예요. 소녀들 사이의 우정을 그린 곡입니다’ 라고 웃으며 정정 해 주는 훈훈한 광경으로 이 해프닝은 마무리 되었지만, 사실
바로 그 후쿠이 아나운서의 해석이야말로 ‘노기자카46의 표현
세계’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정서를 날카롭게 통찰 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키모토 야스시씨가 작사
한 ‘구루구루 커튼’의 가사는, ‘두 소녀가 교실 창가 커튼을 둘둘 말고 그 안에 들어 가, 창
밖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과 햇볕을 느끼며 둘만의 비밀을 공유하고, 때로는 서로를 격려 해 주는’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려 낸 것이다. 물론 가사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사이 좋은 두 소녀가 비밀리에 나누는 이야기가 ‘연애 고민’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같은 것이기에, 두 소녀의 관계가 연애관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두 소녀가 있는 ‘커튼 속’이라는 공간이 ‘남자들은 들어 올 수 없는’ 소녀들만의 세계, 더 나아가 ‘다른 여성들조차 들어 올 수 없는’ 당사자 둘만의 세계라는 점을 감안하면 두 소녀의 관계가 다분히 ‘배타적’이고 극히 ‘친밀’하다는
것 역시 알 수 있다. 후쿠이 아나운서가 ‘여성과 여성간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라 생각하게 된 것 역시 이런 측면에 착안한 탓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그렇다면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이미지 중, 어느 쪽이 더 작사가의 의도에 가까운 지 알아보기 위하여 ‘구루구루 커튼’의 MV를
분석 해 보자.
원래 사진작가인 쿠리가미
카즈미가 감독을 맡은 이 MV는 멤버들이 무대의상을 입고 노래하고 춤 추는 ‘퍼포먼스’ 파트와, 세라복을
입고 가사의 세계관을 연기하는 흑백 ‘이미지’ 파트로 이루어
져 있다. 이번에 우리가 분석 해 볼 것은 MV 러닝타임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이 ‘이미지’ 파트이다.
이 MV는 한 학교의 교실을 흑백 영상으로 비추어 주며 시작된다. 카메라가
천천히 맨 앞자리부터 맨 뒷자리까지 교실을 훑어 주는데, 마치 잠이라도 자듯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멤버들 뒤로 비추어 지는 것은 교실 창가에 걸려있는 새하얀 커튼과, 그 커튼 안에 들어 가 있는 네
쌍의 멤버들의 실루엣이다.
이 원샷은 카메라에 가까운
책상과 그 위에 엎드려 있는 멤버들을 ‘어둡고 흐릿’하게
처리하고, 빛이 들어오는 창가, 그 곳에 걸려 있는 흰 커튼과
그 안에 들어 가 있는 멤버들을 밝고 눈부시게 처리하여 두 공간을 확연히 구분짓고있다. 이는 다시 말
해 ‘교실’과 ‘커튼
속’이라는 두 공간을 구분 지음으로 하여 ‘커튼 속’이라는 공간을 더욱 더 ‘특별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영상은 이후, 소녀들이 모여서 떠들고, 즐기는 ‘쉬는
시간’ 풍경이나 커튼 속에 들어 간 소녀들의 모습 등을 묘사 해 간다.
그리고 그 중에는 검으로 풍선을 불어서는 가까이 대는 등 ‘키스’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나 커튼 속에 들어 가 있는 한 소녀의 발이 다른 소녀의 발에 가볍게 닿는 모습, 어깨를 손으로 감싸는 장면, 상대방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서 귓속말을
하는 모습 등도 포함되어 있다. 동시에 바람에 펄럭이는 커튼 틈 새로 숨으려 하는 소녀들의 모습을 묘사하며
어딘가 일말의 ‘금기’를 떠올리게 하는 묘사도 있다. 이런 일련의 ‘이미지’ 영상은
남성, 어른 등 그 어떤 외부 존재도 개입 할 수 없는 ‘소녀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효과를 내며, 동시에 ‘커튼 내부’라는 공간을 ‘특권화’ 시킴으로써 ‘소녀들의 관계’를
더욱 더 특별하고 친밀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MV ‘구루구루 커튼’에서 사용 된 표현이 곡 자체가 갖고 있는 ‘소녀들의 친밀한 관계’라는 테마를 순화하는 동시에 극대화 시킨 것이며, 그 결과, 그런 소녀들의 관계성을 말하자면 ‘백합’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 여지를 준다.
여기서 말하는 ‘백합’이란, 쉽게 말 해
‘여성간의 애정관계’를 칭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어원은1970년대에 발간되었던 ‘장미족’이라는 남성 동성애를 주로 다루던 잡지로 인해, 남성간의 애정관계를 일컬어 ‘장미/장미족’이라 불렀던 데 대응하는 의미로 여성간의 애정관계를 ‘백합/백합족’이라 불렀던 데에서 기인한다.
이렇게 생겨 난 ‘백합’이라는 단어는 점점 일반
대중에게도 받아들여지게 되는데, 당시에 주로 쓰였던 것은 ‘남성
대상 포르노그래피 시장’의 은어로, ‘레즈비언물’을 지칭 할 때였다.
한 편, 소녀들을 주 독자층으로 상정하는 소위 ‘순정/소녀 소설’ 분야에서 ‘백합’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기 한참 전, 다이쇼시대(1912~1926)에도 여학생들간의 친밀한 관계나 젊은 여성들의 애정을 그린 작품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작품을 들자면 요시야 노부코가 쓴 ‘꽃 이야기’등이 그 범주에 든다.
당시에는 이런 관계를 ‘시스터후드 (Sisterhood)’의 이니셜을 따서 S(에스)라고 불렀으며, 이
‘에스’라는 은어는 쇼와
(1926~1989) 초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상기한 바와 같이, 1970년대 이후로는 ‘백합’이
그 자리를 완벽하게 차지하고, 현재까지 폭 넓게 사용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백합’이라는 단어는 문학적인 뉘앙스나 플라토닉한 뉘앙스까지 포함한
광의적인 개념이 되었으며, 특히 애니메이션이나 만화라는 매체의 대두에 따라 ‘여성간의 애정’을 그리는 ‘장르’ 자체를 포괄하는 단어로 쓰이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그러한 여성
캐릭터에 대해 독자들이 행하는 ‘독해 행위’ 그 자체도 ‘백합’이라 부르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백합’이라는 단어는 의미나 적용 범위가 매우 광범위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극히 힘든 광의적인 개념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사용하는 ‘백합’의 범위를 설정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사용하는 ‘백합’의 범위는 이전 ‘에스’라고 불렸던 개념에 가깝게, 다시
말 해 1. 연애 감정으로도 해석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호의를 동반하는 친교관계, 2. 육체적 관계, 혹은 동성애까지는 발전하지 않지만 일관되게 성적
기호를 표현하는 것 에 한정하도록 한다.
작가주의적 설명에 자주
등장하는 말 중 ‘처녀작에는 그 작가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말이 있다. 노기자카46의 표현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크리에이터를
통해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경우가 많기에, 어느 것이 처녀작이라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노기자카46 명의의
영상작품’ 중 처녀작을 뽑자면 바로 첫 번째 싱글 타이틀 MV인
‘구루구루 커튼’이 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처녀작’안에
표현 된 ‘소녀들만의 세계’, 그리고 ‘백합’을 연상시키는 묘사는 ‘처녀작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말을 구체화 하여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이후에 만들어 지는 노기자카46의 영상 작품, 그 중에서도 특히 ‘스토리’성을 중시한 작품들에서 자주 나타나게 된다.
곡 자체는 한없이 이성애적인
내용을 표현하고 있음에도 MV의 표현 양태가 일종의 ‘특권성’을 갖고 표출된다고도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소녀들만의 세계’, 그리고 ‘백합’.
이런 요소들은 노기자카46의 표현세계의 ‘핵심’을
찾는 데 있어 중요한 실마리로서 작용 할 것이며, 이번 2장에서는
그런 요소가 잘 드러난 MV 작품들을 분석함으로 하여 노기자카46의
표현세계의 ‘핵심’에 도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참고로 2장에서 다루는 스토리 MV의 등장인물들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멤버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것 역시 의미심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