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DY 2016/12
케야키자카46 ‘혁명 다큐멘트’
~21명이 도달한 단 하나의 진실~
14살짜리 소녀가 보여 준
‘나이를 초월한 존재감’
2015년 8월 21일. 지하철 개찰구를 지나 지상으로 올라 오니 눈부신 한 여름 햇볕과 푹푹 찌는 열기가 덮쳐왔다. 주 초부터 이어져 왔던 지리한 비가 그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르기만 했다.
양 귀를 간신히 덮을 정도의 단발을 한 소녀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그다지 입지 않는 색조였다. 딱히 좋아하는 옷도 아니었지만, ‘하늘색 옷이 잘 어울린다’는 누군가의 조언을 따라 입어 본 터였다.
소녀는 깜빡이는 신호등을 보며 발걸음을 재촉하여 잰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목적지로 향했다. 익숙하지 않은 도쿄라는 도시의 풍경에 초조함을 느낌과 동시에, 혼자 힘으로 먼 곳까지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언제나 ‘내가 있던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어 왔던 것이다.
“일단은 ‘새로운 세계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오디션에 떨어졌다면 해외로 유학을 갈 생각이었지요. 저 자신의 성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내향적이고, 낯가림도 심하고,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도 싫어하고. 수업 때 선생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어요. 그런 스스로의 성격을 어떻게든 바꾸고 싶었지요.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간다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히라테 유리나)
도쿄도 미나토구에 위치한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노기자카빌딩. 이 날, 이 곳에서는 노기자카의 뒤를 이을 ‘사카미치 시리즈’ 제 2탄 그룹인 ‘토리이자카46’의 최종 오디션이 열렸다. 4년 전 이 날, 이 곳에서는 노기자카46이 탄생하기도 했다.
응모 총 수는 22509명. 그 중에서 선별에 선별을 거쳐 뽑힌 최종 후보 45명이 이 곳에 모여들었다. 오디션 회장에 마련된 대기실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 든 아이돌을 꿈꾸는 소녀들이 모여 있었다. 화장을 고치는 사람, 자기 PR을 연습하는 사람, 각자가 나름대로 오디션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세련되고 도회적인 소녀들이었기에, 겨우 14살밖에 되지 않은 히라테 유리나는 분위기에 짓눌려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긴장감이 가득한 분위기를 깨며 눈치 없이 큰 소리로 떠드는 아이도 있었다.
“불량해 보이는 아이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죠. (웃음)” (오다 나나)
“(그 아이는) 대화의 중심에 서 있었어요. 사실 저도 말을 걸어볼까 했지만, 결국 말을 걸지 못 하고 그저 부러워 하며 바라 볼 뿐이었죠.” (모리야 아카네)
이렇게 많은 멤버들이 ‘오디션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아이’로 꼽는 것이 바로 ‘댄스’로 팀을 이끄는 그룹의 대들보격 존재, 사이토 후유카였다.
“멤버들 대부분이 하는 말이긴 한데요, ‘오디션 땐 무서웠다’고 하더라고요. 아니면 ‘오디션 때 정말 시끄러웠다’던가. (웃음) 하지만, 대기실 분위기가 너무 무겁고 조용했기에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어요. 기왕 보는 오디션, 모두 함께 즐겁게 보면 좋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솔선해서 말을 걸고 다녔지요. 다른 멤버들 입장에서는 귀찮았을 지 모르겠지만요. (웃음)” (사이토 후유카)
“사실 3차 심사때쯤부터 ‘쟤(후유카)랑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 했어요. 그래서 최종심사 땐 일부러 후유카 옆자리에 앉아서 ‘전부터 이야기 해 보고 싶었다’고 이야기 했지요. 허세를 부린다던가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 자리를 즐기고 있달까요. 엄청 자연스러웠지요. 그래서 ‘얘는 정말 좋은 아이겠구나’라고 생각했지요.” (시다 마나카)
개성이 넘치는 수 많은 후보생들 가운데, 사이토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큰 임팩트를 남긴 멤버가 또 있었다.
“엄청 눈에 띄었어요. 긴장감 넘치는 회장에서도 웃음소리가 날 정도였으니까요. ‘얘는 무조건 붙겠구나’ 했지요.” (오제키 리카)
“뭘 물어도 대답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그 멤버) 덕분에 회장에 있는 사람들이 웃을 수 있었죠. 이렇게 긴장감이 팽배한 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웃게 할 수 있는 이 애는 대체 어떤 앤가 싶었죠.” (사토 시오리)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심사위원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 소녀의 이름은 ‘오다 나나’. 상냥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어느 사이엔가 멤버들에게 ‘엄마’라고 불리기까지하는 그 멤버였다. 케야키자카46의 치프 메니저인 모기 토오루씨는 최종 오디션때의 오다의 인상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질의응답 때 아키모토 선생님께서 ‘노기자카의 노래 중에서 좋아하는 곡은?’이라고 물으셨어요. 그 때 오다의 대답은 ‘사실 잘은 모르는데요… 너의 이름은 어쩌고 하는 곡…’였지요. 아키모토 선생님은 이에 대해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곡도 있었지’라고 대답 하시더군요. (웃음) 후보자 대부분이 ‘노기자카를 동경한다’고 어필하는 가운데, 잘 모른다는 걸 당당하게 아키모토 선생님께 말씀드리는 모습이 정말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모기 토오루)
“노기자카 선배님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사실 그 때는 갓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라 곡명이 확실히 떠오르지 않았어요. 죄송합니다!!” (오다 나나)
그리고 오디션에서 상기한 둘 외에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소녀가 한 명 더 있었다.
“학교 교복을 입고 온 건 단 한 명 뿐이었기에 엄청 눈에 띄었지요. 스타일도 좋고, 귀엽기까지 해서 ‘세상에 이런 애도 있구나’라며 계속 눈으로 좇았지요.” (나가사와 나나코)
‘아우라가 넘친다’, ‘정말 귀여운 아이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던 교복차림의 소녀. 그 소녀의 이름은 이시모리 니지카였다. 미야기현 출신인 그녀는 스스로가 겪은 3.11 지진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심사위원들에게 ‘저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당당하게 어필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가창심사에서 그녀가 선택한 곡은 다름아닌 ‘꽃은 피고’ (동일본 대지진 부흥지원송).
“오디션때 어떤 옷을 입을까 많이 망설였어요. 갖고있는 옷들이 하나같이 촌스러웠거든요. (웃음) 교복이라면 익숙하기도 하고, 마음도 편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들고 간 가방도 학교에 들고다니는 가방이었기에 말 그대로 하굣길에 들른 것 같았기에, 개중에는 ‘잘못 온 것 아닌가’ 라고 생각 한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네요. 오디션 때 번호가 37번이었는데, 36번이 하부쨩이었어요. 옆에 서서 ‘아, 이렇게 서 있으면 이래저래 비교 당하겠구나’ 싶어서 초조했지요. 하지만 가창심사가 끝난 뒤, 하부쨩이 ‘노래 엄청 잘 하더라’라고 칭찬을 해 주어서 ‘얘 정말 좋은 애구나. 만약 내가 떨어지더라도 얘는 미워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어요. (웃음) 합격발표 때 하부쨩 이름이 불렸기에 ‘아 떨어졌구나’라고 생각했어요. 36번 뒤에 37번이 연이어서 불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이시모리 니지카)
그리고 조금 다른 이유로 주목을 받은 후보생도 있었다. 단순히 ‘이 옷이 제일 날씬해 보이니까’라는 이유로 고등학교 때 학교 체육복을 입고 사진을 찍어 서류에 붙여서 낸 멤버였다. 다름아닌 ‘최연장자’ 바로 그 멤버 말이다.
“와타나베 리카는 정말 대단했죠. 2차심사때는 켄다마를 갖고 와서 ‘특기는 켄다마입니다. 지금부터 해 보겠습니다’라며 켄다마를 시작하는데 제대로 한 게 한 번도 없었어요. 결국 끝까지 성공을 한 번도 못 시키고 시간이 다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게 본 실력인지 아니면 일부러 실패를 한 것처럼 보인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웃음)” (모기 토오루)
“최연장자인 베리카랑은 같은 그룹이었어요. 베리카의 발언 덕분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모습이나, 심사위원마저도 웃게 만드는 모습을 보며 엄청 대단한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는 해야 할 때는 확실히 합니다’라고 단언하던 모습도 엄청 기억에 남아요.(웃음)” (스가이 유카)
이런 ‘전설’들에 대해 본인에게 확인을 해 보니, 본인은 ‘음…’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자기 PR 때 뭘 해야 할 지 몰랐어요… 하지만 뭔가 하긴 해야 하니까 켄다마를 했지요. 연습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성공은 한 번도 못 했지만…” (와타나베 리카)
초등학생 때, 히라테는 피아노와 발레를 배웠다.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어 배운 것은 아니었다. 중학생이 되어 농구부에 들어 간 것 역시 어디까지나 ‘친구가 농구부에 들어 간다고 했기에 어쩌다 보니’ 들어 간 것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태어 나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로 행동에 옮긴 것이 바로 오디션이었다. ‘새로운 세계에 가 보고 싶다’, ‘스스로를 바꾸고 싶다’는 마음을 가슴에 품고.
“오디션을 본 적이 없었기에 엄청 긴장했어요. 그 때 어떤 질문을 받았는 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지요. 기억에 남아 있는 건 3차 심사때, 오전에 비가 왔었기에 회장에 도착했을 때 샌들이 더러웠던 것 정도네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 깔끔하게 차려 입고 있었기에, ‘아 어쩌지… 더러운데…’라고 창피했었거든요.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도 머릿속에는 샌들 생각으로 가득했죠.” (히라테 유리나)
그렇다면 운영측은 그런 히라테에게서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
“히라테를 처음 본 건 3차 심사때였던 것 같네요. 아직 어린 아이가 똑부러진데다가,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눈빛을 갖고 있었기에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춘기 특유의 ‘위험함’을 느끼기도 했지요. 질의응답을 끝내고 댄스 심사를 할 때였는데, 과제곡이었던 ‘태양노크’가 울려 퍼지고, 춤을 추기 시작 할 때 히라테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더군요. 이전까지는 한 번도 웃지 않았거든요.” (모기)
곡이 흘러 나온 순간, 상큼하게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추기 시작한 히라테의 모습을 보며 심사위원들은 하나같이 당황 할 수 밖에 없었다. 모기씨 역시 ‘그 때 본 그 미소는 지금까지도 잊혀지지가 않는다’며 그 때의 광경이 뇌리 깊숙한 곳에 새겨 져 있다고 이야기 할 정도였다.
이마이즈미 유이는 오디션 당시에 본 히라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질의응답 때도 똑부러지고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떠받들여지고 싶어 오디션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딱 잘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와! 대단하다!’라고 감탄했고, 몸이 떨릴 정도였어요. 그렇기에 오디션이 끝나고 기자회견을 할 때 부터 ‘쟤가 바로 센터가 될 존재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아우라라고 할까요, 뿜어내는 분위기가 달랐어요.” (이마이즈미 유이)
케야키자카46 운영위원회 위원장인 콘노 요시오씨의 말은 이렇다.
“처음 받은 인상은 ‘주머니 속 송곳처럼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 아이군’이었습니다. 14살 밖에 안 된 아이가 이런 분위기를 내다니… 말로 표현하기가 좀 힘든데, 나이라는 것을 초월한 존재감을 느낀 것 만은 확실합니다.” (콘노 요시오)
오디션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치열했다. 자연스레 심사에 소요되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다. 그 정도로 매력적인 후보들이 모여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정된 시간보다 무려 2시간이나 지난 시점에 결과 발표가 이루어졌다. 합격자는 22명. 1000대 1 이상의 극심한 경쟁률이었던 것이다.
합격자 발표가 이루어 진 직후, 매스컴에 의해 포토세션이 열려 새로이 아이돌의 길을 걷게 된 22명의 멤버들이 처음으로 피로되었다. 하지만 이런 의미깊은 때, 아무도 예상치 못 한 깜짝 발표가 있었다. 그룹 이름을 당초 예정했던 ‘토리이자카46’에서 ‘케야키자카46’으로 바꾼다는 발표였다. 갑작스러운 발표에 멤버들은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멤버들을 보며 콘노씨는 ‘일본 국민 누구나 이 어려운 ‘케야키(欅 )’라는 한자를 쓸 수 있게 될 정도로 열심히 하자’고 다독였다.
“사실 이래저래 사정이 생겨서 ‘토리이자카’라는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후보군을 물색 한 결과, 도쿄 롯폰기에 위치한 ‘케야키자카(けやき坂)’가 거론되었지요.” (콘노)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생각지 못 한 실수가 벌어진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운명이라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운영 스태프들이 새로운 이름 후보를 물색하며 그 이름이 가진 성명학적 운세를 알아 볼 때, 롯폰기에 위치한 ‘케야키자카(けやき坂)’를 잘못하여 한자 ‘케야키자카(欅坂)’로 검색 해 버린 것이다.
“여러 모로 점을 봤었는데, 한자 ‘케야키자카’가 모든 면에서 운세가 좋다는 결과가 나왔지요. 하지만 아키모토 선생님께서는 ‘히라가나로 표현 된 케야키자카는 실재하는 지명이지만, 한자 케야키자카는 실재하지 않는다’며 고민을 하시더군요. 하지만 역시 한자 ‘케야키자카’가 갖고 있는 운이라는 게 정말 대단했기에, 아키모토 선생님도 ‘비록 실재하지는 않는 이름이지만, 그 이름이 가진 강한 운에 도박을 걸어보자’고 말씀 해 주셨어요. 다시 말 해 현재 쓰는 ‘케야키자카46’이라는 이름은 정말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결과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후 언더 개념으로 ‘히라가나 케야키’를 발족시킨 것 역시 이 때 나왔던 논의를 감안 한 결과입니다.” (콘노)
이렇게 ‘사카미치 시리즈’의 새로운 프로젝트, ‘케야키자카46’이 시동을 걸게 된 것이다.
행복했던 매일이 끝나고
노도와 같은 레슨 기간이 시작되다.
최동 오디션으로부터 약 1개월이 지난 시점에 지방 출신 멤버들의 도쿄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단체생활을 시작하게 된 멤버들 가운데엔 극심한 낯가림 때문에 앞으로의 생활에 불안을 갖고 있는 멤버도 있었다. 효고현 출신 코이케 미나미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간토 출신이나 도호쿠 출신 등, 여러 곳에서 멤버들이 모이다 보니까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어요. 이전까지는 간사이벤이 너무나도 당연한 환경에서 지냈었기에, 너무 당연히 써 왔던 단어가 통하지 않거나 해서 초창기엔 솔직히 좀 힘들었지요. 한 편으로는 여자아이들이 모이면 으례 생기는 그런 알력이 있으려나? 했는데, 케야키에는 그런 게 전혀 없는데다가, 다들 좋은 아이들뿐이고,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분위기라 안심했어요.” (코이케 미나미)
“여자아이들끼리만 생활하다보니 서로 껄끄러워지는 경우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내면적인 면으로도 어른스럽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이해 할 줄 아는 아이들이 많았죠. 잘은 몰라도 모두들 의식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 하기도 했을 것 같아요.” (우에무라 리나)
나이도, 출신지도, 개성도 각각 다르지만 모두 ‘동료’라는 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면서 멤버들간의 거리감도 점차 줄어들었다.
“모리야 아카네, 시다 마나카, 와타나베 리카, 나가사와 나나코랑은 항상 함께 있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우리도 언젠간 뮤직 스테이션에 나가자’라던가. 서로의 꿈을 이야기 했죠.” (오다)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이었기에 여유가 있는 편이었어요. 그렇게 여유가 있을 땐 항상 오다 나나를 비롯한 멤버들이랑 이야기를 나누곤 했어요. 어찌 보자면 학교 생활의 연장선 같았달까요. 정말 편하고 즐거웠어요.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렇게 매일매일 ‘학교 생활’비슷한 생활을 하면서 ‘이대로 괜찮은건가? 우리가 이대로 아이돌을 할 수 있는건가?’라는 불안도 있었어요. ‘이렇게 행복하게 매일매일을 보내도 되는 걸까?’랄까요. “ (시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중학생, 고등학생이었던 소녀들. 당시에는 딱히 ‘아이돌’이라는 자각이 없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복한 나날’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 뒤로부터 노도와도 같은 매일매일이 시작 되리라고 생각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본격적인 레슨이 시작되었다. 연기, 워킹 연습은 물론이고 보이스 트레이닝 등 매일매일 빡빡한 스케쥴을 소화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댄스 레슨은 난이도가 높았다. 허들이 높은 과제를 매일같이 멤버들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댄스의 기본인 스탭조차도 제대로 밟지 못 하는 멤버들은 레슨장에서 뭘 해야 하는 지 알지 못 해 멍하니 서 있기도 했다. 어릴 때 부터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취미였던 ‘인도어파’ 나가사와 나나코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댄스레슨이었던 것 같아요. 애초에 댄스 자체를 잘 하지도 못 했기에 부모님께서 ‘정말 괜찮은 거니?’라고 걱정을 하실 정도였어요. 그리고 실제로 레슨이 시작 되고 보니 생각했던 것 보다도 훨씬 힘들었지요. 초기에는 집에서 레슨을 받으러 다녔기에 평일 레슨에는 참가 할 수 없었거든요. 나중에 상경하기 전까지는 동영상을 보며 혼자 집에서 춤을 연습하거나, 학교에서 춤 잘 추는 아이에게 배우거나 했어요.” (나가사와)
붙임성이 좋고 천진난만한 여동생 캐릭터인 하라다 아오이. 발레를 10년 이상 배웠던 그녀에게도 ‘댄스레슨’은 힘든 것이었다.
“예전부터 춤을 배워보고 싶어서 엄마에게 춤 레슨 보내달라고 했었거든요. 하지만 엄마는 발레를 좋아했기에 춤 배우는 걸 반대했어요. 하지만 정작 케야키에 들어 와 댄스레슨을 받아 보니 정말 힘들더라고요. 학교에 다니면서 병행했었기에, 공부도 해야했고 말이죠. 시간은 없는데 외어야 할 건 엄청 많아서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어요. 다른 멤버들에 비해서 뒤떨어 지는 부분이 많았기에 춤 자체가 싫어지거나, 춤을 추는 게 괴로워지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춤, 노래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다는 건 평범하게 인생을 보냈다면 경험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레슨을 열심히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하라다 아오이)
레슨 때는 매번 다양한 장르의 춤을 배웠다. 그 중에서도 힙합 댄스는 물론이고 재즈댄스에 이르기까지 난이도가 높은 댄스들이 주를 이루었다. 예상과는 달리 ‘아이돌다운’ 귀여운 춤은 거의 연습하지 않았다. 멤버들 중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건 대체 뭘까’라며 불안해 하는 멤버도 있었다고 한다. 힘든 매일매일에 도망가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그녀들은 이를 악물고 매일 필사적으로 땀을 흘렸다. 꾸준히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다보면 언젠간 아름다운 꽃을 피우리라 믿으며.
처음으로 직면하게 된
‘아이돌’세계의 냉혹함.
10월 4일. 케야키자카의 첫 레귤러 칸무리 방송인 ‘케야키라고 쓰지 못해? (이하 케야카케)’가 시작되었다. 지금이야 카메라를 앞에 두고도 즐겁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으로 버라이어티쇼에 임하게 된 당시의 멤버들에게 있어 녹화란 당혹스러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긴장한 멤버들 가운데에서 천진하게 떠들어 대는 모습과 독특한 움직임으로 두각을 드러낸 멤버가 있었다. 바로 오제키 리카였다.
“원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거나 하는 타입은 아니었어요. 그렇기에 제가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죠. 하지만 ‘케야카케’에서 ‘오제키스타일’이라는 별명을 받고, 방송에서 부각시켜주신 덕분에 저를 기억 해 주시는 팬분들도 많기에, MC인 츠치다상, 사와베상께는 정말 감사드리지요.” (오제키)
그리고 오디션 당시 주변을 웃음짓게 만든 소녀, 오다 나나 역시 자신이 갖고 있던 버라이어티적인 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엔 와타나베 마유상같은 정통파 아이돌이 되고 싶었는데 말이죠…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웃음) 하지만 어릴 때 부터 다른 사람들을 웃기는 것 자체는 좋아했었기에 어떻게 보자면 그런 캐릭터가 생긴 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딱히 그런 캐릭터가 되려고 계산을 한 건 아지미나, 멤버들이나 팬 여러분께서 ‘재미있다’고 해 주시는 것을 보고, 그런 면에서는 자신을 갖게 되었어요.” (오다)
버라이어티 방송에 출연하거나 잡지에 그라비아 화보가 실리는 등, 미디어 노출이 점차 늘어나면서 그룹의 이름 역시 서서히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멤버들 각자의 캐릭터 역시 침투 해 가기 시작했다.
11월에는 첫 이벤트인 ‘오미타테회’가 열렸다. 멤버들은 팬들을 앞에 두고 각자 자기소개와 특기를 선보이고 팬들은 그 모습을 보며 ‘누구의 오시가 될 것인가’를 검토하는 이벤트였다. 처음으로 서는 스테이지에 긴장감을 숨기지 못 하는 멤버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멤버들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모노마네를 하거나 하는 등 자신의 마음을 필사적으로 어필하였다. 그리고 이벤트 마지막에는 팬들이 자신의 ‘오시멘’을 정하여, 그 멤버와 악수를 한다고 하는 그룹 최초의 ‘악수회’도 개최되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이벤트였어요. 태어 나 처음으로 악수회를 한 것도 그렇지만, 직접 팬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나를 응원 해 주고 계시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팬 여러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정말 기뻤기에, 더더욱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부 미즈호)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뭐냐고 물으시면 망설임 없이 ‘오미타테회’를 꼽을 거예요. 눈 앞에 관객분들이 계시고, 그 분들이 오시멘들 고르는 이벤트였는데… 처음으로 다른 멤버들과의 격차가 눈에 들어 왔다고 할까요, ‘아 이게 현실이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 정말 힘들었습니다. 정말 여러 모로 궁리해서 한 어필인데도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거든요. 그 때는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 (사이토)
무대 위에선 미소를 짓고 있다가 무대 뒤로 돌아가선 눈물을 흘리던 멤버도 있었다. 어쩌면 이 때, 그녀들은 처음으로 아이돌이라는 ‘냉혹한 세계’를 처음으로 경험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예상도 하지 못 했던 신멤버 가입. 그 뒤에 숨겨진 눈물과 비명
이틀에 걸쳐 열린 ‘오미타테회’를 무사히 성공시킨 뒤,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멤버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룹 자체를 뒤흔들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케야카케’를 통하여 언더 그룹인 ‘히라가나케야키’의 결성, 그리고 케야키자카46의 최종심사에 결석을 하였던 나가하마 네루가 신멤버로 가입한다는 소식이 발표 된 것이다.
“처음으로 멤버들과 만난 게 바로 ‘케야카케’ 스튜디오였어요. 이전까지는 혹여 멤버들과 맞닥뜨릴까 녹화가 시작되기까지 홀로 차 안에서 기다리다가 촬영이 시작 된 뒤에 살며시 스튜디오로 들어갔지요. 그리고 녹화중인 멤버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나가하마 네루)
나가하마의 소개, 그리고 나가하마가 가입하게 된 경위가 설명 된 VTR이 흐른 뒤, 정식으로 신멤버로서 가입하게 되었다는 발표가 난 순간, 스튜디오에서는 ‘꺄악!’이라는 비명이 울려퍼졌다.
“솔직히 혼란스러웠어요. 히라가나 케야키가 결성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기에 모든 게 안 좋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마음이 정리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지요.” (이시모리)
“처음엔 솔직히 ‘왜?’라는 의문이 먼저 떠올랐어요. 우리도 이제야 겨우 제대로 시작하려 하는 타이밍이었기에… 초반엔 ‘아마 네루랑은 말 섞기 힘들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어요.” (와타나베 리사)
“엄청 동요했어요. 아마도 초조했던 것이겠지요. 네루 가입 발표 직전에 ‘오미타테회’에 관한 녹화가 있었는데 그 때 악수 인기 랭킹이 발표 되었거든요. 그 때 랭킹에 제가 들어 있지 않아서 ‘아, 난 인기가 없구나’라는 걸 실감 한 직후였었거든요. 그리고 그 직후에 네루가 가입하게 되었다는 게 발표 되었기에 ‘안그래도 위기인데 새로운 멤버까지 들어오면 어쩌라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다른 멤버들에 비해 뛰어난 부분이 하나도 없었기에… 녹화가 끝난 순간 엄청 울었어요.” (코바야시 유이)
나가하마의 가입, 그리고 히라가나케야키의 결성이라는 소식은 멤버들을 크게 동요시켰다. ‘왜?’라는 의문을 가진 멤버는 와타나베 리사 뿐만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우리 중에는 소극적인 아이들이 많다 보니 방송에서 쓸 게 없어서 새 멤버를 받는 건가?’라던가 ‘우리들만 갖곤 데뷔가 무리라는 얘긴가?’, ‘우리가 성과를 못 내니까 새 멤버들 받는 거구나’라는 식으로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멤버들도 적지 않았다.
“오디션조차 보지 않고, 나중에 가입하는 것이니까요. 다른 멤버들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은 했어요. 자연스레 기댈 사람도 없었기에 ‘난 앞으로 어떻게 활동을 해야 할까’라고 고민했지요.” (나가하마)
칸막이 넘어로 들려오는 멤버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 있던 나가하마의 눈에는 어느 사이엔가 눈물이 맺혀있었다.
스스로 가혹한 운명을
짊어지기로 한 나가하마.
잠시 시간을 되돌려 2015년 8월로 돌아 가 보자.
한 소녀가 있다. 소녀의 이름은 나가하마 네루. 나가사키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 진학고에 다니며, ‘전국 고교생퀴즈선수권’ 나가사키대회에서 결승에 진출 한 적도 있는 재능이 넘치는 소녀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히라테와 마찬가지로 ‘지금 있는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꿈꾸는 소녀였다.
“오디션을 보기로 한 이유는 지금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가사키현은 좋아하지만, 시골 출신이다 보니 그만큼 도시에 대한 환상도 있었고, 책을 읽으면서 제가 모르는 세계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나가하마)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시키는 일들을 착실하게 수행 해 온 우등생, 반항이라 할만한 것 역시 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러해 왔듯이 ‘깔려있는 레일 위’를 나아가리라 생각 해 왔던 나가하마.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러한 자신의 상황에 지긋지긋함을 느끼며 ‘빨리 어른이 되어서 다른 어딘가로 가 버리고 싶어’라는 생각을 가슴 한 켠에 숨기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손에 넣은 ‘다른 세계로 통하는 티켓’. 그것이 바로 아이돌 오디션이었던 것이다.
“오디션을 받기에 앞서 친구들에게 상담을 했어요. 그 친구는 유학을 가 있었는데, 스스로의 의지로 신념을 갖고 자신의 길을 고르고 나아가는 친구였지요. 그렇기에 그 친구를 만날 때 마다 ‘나는 이대로 괜찮은걸까’라고 스스로를 비교 해 보곤 했어요. 하지면 항상 결국은 용기가 없어서 도전 해 보지 못 하고 가장 안전한 길만 골라서 걸어 왔던 것이죠. 그 친구에게 ‘오디션을 받을 지 어쩔 지 고민중이야’라고 하니 ‘정말로 원하는 일이라면 위험을 감수하고 해 보는 게 어때?’라고 이야기 해 주었어요.” (나가하마)
친구의 지원을 받은 나가하마는 한 발 내딛을 용기를 얻었다. 후쿠오카에서 열린 2차심사 땐 ‘오디션 땐 생얼로 가야한다’는 소문을 곧이 곧대로 믿고 생얼로 참가하기도 했다. 서클렌즈를 끼고 화려하게 화장을 한 여자아이들 사이에 파묻힌 나가하마는 ‘아 여기서 시골뜨기는 나 하나구나’라고 생각했다 한다.
그 당시 나가하마는 어떤 인상이었을까? 모기씨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후쿠오카 회장에서 나가하마를 봤던 건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가사키 억양이 심하고, 소박해 보이는 아이였지요. 자기 어필 때 ‘마릿카 ‘17’을 불렀는데, 동글동글하니 귀여운 아이란 생각은 했지만, 그보다 더 인상 깊었던 건 ‘독특한 아이’라는 것이었죠.” (모기)
뒤이어 열린 3차 심사. 나가하마는 언니에게 부탁하여 화장을 하고, 런던에서 산 흰 톱에 남색 치마를 입고 오디션에 임했다.
“지도를 보면서 길을 찾다 보니, 역에 귀여운 여자아이들이 많이 모여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아이들이 가는 곳으로 따라갔습니다. 엄마랑 함께 온 아이들도 많았는데, ‘오디션 잘 보고 오렴’이라며 안아주시는 모습을 보며 왠지 좀 슬퍼졌어요.” (나가하마)
무사히 3차 심사를 통과한 나가하마. 하지만 뒤이어 열린 최종심사 자리에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붙건 떨어지건 관계 없으니 당장 돌아오라’며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데리고 나가사키로 돌아 가 버렸던 것이다.
“보호자가 데리고 돌아 가 버린 건에 대해서는 저희가 어쩔 수 있는 수단이 없으니까요. 가족들의 판단을 존중 할 수 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나가사키로 돌아 간 나가하마가 계속 울고만 있는 모습을 보고 아버님이 매우 걱정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딸의 인생에 얼마 되지 않을 기회를 빼앗아 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죠.” (콘노)
방에 틀어박혀 울기만 하는 딸의 모습을 보며, 나가하마의 아버지는 오디션 스태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 전화는 이윽고 책임자인 콘노씨에게 연결되었다.
“나가하마의 아버님께서 어찌 할 줄을 모르겠다고 연락을 하셨어요. 하지만 저 역시 부모로서 그 마음은 잘 알겠더군요.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저 역시 최대한 아버님의 의견에 힘을 실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콘노)
나가하마의 부친과 상담을 한 콘노씨는 바로 다음주, 후쿠오카 국제센터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노기자카46의 콘서트에 나가하마와 그녀의 부모님을 초대하였다.
콘서트가 끝나고, 콘노씨와 만난 나가하마의 모친은 ‘아이돌이라는 게 이렇게 멋진 것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며 ‘딸에게 너무 심한 짓을 한 것 같다고 후회하였다. 그리고 나가하마의 부친은 ‘네루가 저런 멋진 일을 해 낼 수 있을 지 걱정이 되었다’고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콘노씨에게 ‘네루에게 단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였다.
“가족들의 진심이 가슴저밀 정도로 느껴졌지요. 하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결론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일단 상담을 해 보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했지요. 그리고 아키모토 선생님께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키모토 선생님께서는 ‘나 역시 그녀가 좋은 재목이라 생각하기에 당장이라도 기회를 주고 싶지만, 팬분들께서 납득하실지가 걱정이다’라고 말씀 하셨지요. 그리고 선생님께서 내리신 결론이 바로 ‘히라가나 케야키’였지요. 언더로서 나가하마 본인이 노력하고, 다른 멤버들이 그런 그녀를 인정한다면 팬분들께서도 납득을 해 주시리라는 이야기였지요.” (콘노)
그리고 운영 스탭들 역시도 회의에 회의를 거듭 한 결과, 나가하마는 ‘특례’로서 그룹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케야키자카46의 언더 그룹, ‘히라가나케야키자카46’의 멤버로서 활동을 하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나가하마 본인도 매우 힘들었을 겁니다. 원칙적으로 보자면 오디션을 보지 않고도 합격을 한 거니까요. 지금이야 모두가 그녀를 인정하지만, 그런 드라마틱한 특례 가입에 대해 탐탁찮게 생각 한 멤버들도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 하고, 무엇보다 본인이 고독했으리라 생각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특례’건 아니건 그녀가 선택을 받은 건 사실이죠. 선택을 받고, 이렇게 함께 활동을 하고 있으니, 더 이상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제가 얘기 하지 않아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만요… 물론 그런 운명을 짊어질 수 밖에 없는 부분도 있긴 합니다만…” (콘노)
신년 첫 이벤트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된 두 사람
시간은 흘러 2016년 1월이 되었다. 케야키자카에게 있어 두 번째 이벤트인 ‘신춘! 오모테나시회’가 개최되었다. 21명이 된 멤버들은 각각 ‘방송부’, ‘음악부’, ‘미술부’, ‘연극부’, ‘댄스부’, ‘서도부’로 나뉘어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팬들을 대접(오모테나시)했다.
“방송부에 들어 가, 우에무라 리나와 함께 종합 사회를 보게 된 게 인상 깊었어요. 이전까지 사회를 본 경험이 없었기에 엉망진창이었지만요. (웃음) 하지만 둘이서 시행착오를 해 가며 만들어 간 ‘오모테나시회’는 정말 즐거웠답니다.” (오제키)
“저는 댄스부였는데, 사실 춤 연습을 시작 한 게 이벤트 1주일 전부터였어요. 하지만 그 연습을 하면서 ‘열심히만 한다면 뭐든 해 낼 수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정말 즐거웠기에 끝나지 않길 바랄 정도였지요.” (히라테)
운영 스태프로서 ‘오모테나시회’를 주도한 소니 뮤직 레코즈 A&R의 모리 신이치로씨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름은 ‘연극부’였지만, 사실 그 땐 어떤 멤버가 연기에 관심이 있는 지 알지 못했거든요. 그저 함께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가는 달성감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가끔씩 멤버들이 ‘다시 하고 싶다’고 이야기 할 정도거든요. 그리고 그 이벤트를 통해 여러 모로 새로운 부분을 알게 된 점도 있습니다.” (모리(신))
멤버들 역시 오모테나시회에 대해 입을 모아 ‘즐거웠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무대 뒷편에서 남들 모르게 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사실, 마지막까지 네루랑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건 저였어요.”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밝은 미소와 온화한 성격으로 멤버들로부터 사랑받는 인텔리 멤버, 요네타니 나나미가 바로 그 멤버였다.
“물론 인사 정도는 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이야기를 나누기는 힘들더라고요. 저 역시 네루와 마찬가지로 부모님들이 맹반대를 하셨기에 몇 번이고 설득을 하여 오디션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이 너무 비슷했기에 더더욱… 불편했어요. 그리고 그런 불편한 마음을 가진 채로 이야기하는 게 아무래도 쉽지가 않더라고요.” (요네타니 나나미)
“요네랑은 이야기 하지 못 하는 날이 길었어요. 물론 요네가 어떤 마음인 지 알고 있었지만… 제가 먼저 말을 거는 것도 좀 이상한 것 같았기에…” (나가하마)
요네타니, 나가하마…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 한 채, 평행선을 그린 상태로 시간만 흘러갔던 것이다.
“오모테나시회 때, 요네와 함께 연극부에 소속되었어요. 연극부는 모리야, 시다, 하라다, 베리사, 오다, 요네, 그리고 저 이렇게 7명이었는데, 저랑 요네 이외의 5명이 정말 사이가 좋았던 터라… 그 멤버들이 쇼핑을 가거나 밥을 먹으러 다니거나 할 때, 요네랑 둘만 남으면 서로 말을 걸지 못 하고 휴대폰만 보거나, 창 밖만 보거나 했지요.” (나가하마)
“네루는 연극부에서 겉도는 느낌이었어요. 본인 나름대로는 이 쪽에 대해 배려 해 준 거라 생각하지만, 쉬는 시간에도 혼자 멀찍이 떨어져서 교과서를 읽고 있거나 공부를 하거나 했지요. 특히 요네타니랑 거리가 있었어요. 연극부 멤버들끼리 서로의 연기를 보며 ‘이건 아니고 저건 어떤가’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네루가 연기를 하면 요네타니가 말을 안 하곤 했지요.” (모리(신))
하지만 요네타니의 머릿 속에는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순 없어. 언젠간 꼭 말을 걸어야 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네루가 먼저 말 걸기는 힘들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그런 걸 더더욱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 네루가 정말 좋은 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내심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있었기에, ‘오모테나시회’ 때 반드시 타이밍을 봐서 말을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 기회에 말을 걸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계속 될 것 같았거든요…” (요네타니)
“제게 있어 ‘오모테나시회’는 처음으로 팬 여러분 앞에 서는 기회였기에, 정말로 긴장되었어요. 그것도 ‘연기’라는 걸 하는 게 처음이었기에 더더욱 긴장되어 결국 무대 옆에서 울음이 터져버렸지요. 그 순간이었어요. 스테이지에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요네가 제쪽으로 다가와서 제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면서 ‘힘 내’라고 해 주었지요. 단 한 마디였지만, 그 말 덕분에 처음으로 요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어요. …그 한 마디에 울음이 더 커졌지만요.” (나가하마)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모리씨는 그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기억한다.
“요네타니가 울면서 스태프쪽으로 오더니 ‘저, 드디어 네루랑 이야기 했어요’라고 이야기 하더군요. 같은 나이 또래 여자아이들이 21명이나 있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있기 마련입니다만, 그럴 때 마다 어른들이 중재를 하는 건 사실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예를들어 제가 두 사람을 불러 ‘자, 요네타니랑 나가하마 이야기 해 보렴’이라고 강요 해 봤자 아무 해결책도 되지 않죠. 역시 본인들이 넘어서야만 하는 문제니까 말이죠.” (모리(신))
‘오모테나시회’를 통해 요네타니와 나가하마는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점차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함께 숙제를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요네타니에게는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역시 네루에게 제대로 사과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사이가 좋아지면 좋아 질 수록 사과를 할 타이밍이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래서 언제였는지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네루랑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아 지금이 기회다’라고 생각했지요.” (요네타니)
“요네랑 둘이서 숙제를 하고 있었어요. 하다 보니 밤이 늦어서 ‘나 먼저 가서 쉴게’라고 이야기 하고 제 방으로 돌아가려 하니까 요네가 ‘네루’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왜?’라고 대답하니까 ‘…미안해. 네루가 들어 온 뒤, 지금까지 한 일… 정말로 미안해’라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정말 생각도 못 했었지요!! 하지만 그런 방식, 정말 요네답다고 생각해요. 요네는 정말 좋은 아이이기에, 그 말을 하기까지 엄청 신경 쓰고, 이야기를 해 줬을거라 생각하거든요. 지금은 정말 사이가 좋답니다.” (나가하마)
그리고 요네타니 외에도 많은 멤버들이 차례차례 나가하마에게 먼저 다가가고, 나가하마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말 걸기가 힘들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네루가 다정하 아이였기에 금세 스스럼 없이 말을 걸 수 있게 되었지요. 자연스레 거리가 줄어들었어요.” (코바야시)
“히라가나 케야키가 발표되었을 땐 납득이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 해 보면 히라가나가 없었다면 네루도 없었을 거란 얘기고, 히라가나 멤버들도 없었을 거란 얘기잖아요. 그 당시의 제 사고방식은 정말 최악이었다고 생각해요.” (와타나베 리사)
“역시나 네루의 성격이 컸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저희에게 존댓말을 썼어요. 언제나 한 발 물러서서. 그렇게 항상 겸허한 모습을 보며 저희 역시 태도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사이토)
‘네루였기에 다행이야’, ‘네루가 아니었다면 사이가 이렇게 좋아지기 힘들었을 거야’… 멤버들의 이런 평가는 나가하마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런 그녀가 멤버들과 친해지기 위해 했던, 눈물겨운 노력이 있다.
“처음에 했던 건 멤버들의 생일을 외우는 거였어요. 휴대전화 달력에 멤버들의 생일을 입력했지요. 그 땐 ‘히라테 유리나상’, ‘사이토 후유카상’, ‘하라다 아오이상’ 처럼 풀네임에 ‘상’을 붙여 넣어 뒀는데 (웃음) 그 데이터가 아직도 남아 있답니다. 당일이 되면 알림이 오는데, 풀네임에 상을 붙여 등록한 알림을 보면 아직도 그 당시가 떠오르곤 해요.” (나가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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