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명제와 싸우던
정신없는 나날들
그룹이 결성되고 반년가량이 지났다. 운영 스태프들조차도 생각하지 못 한 엄청난 속도로 일들이 전개되어갔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숙명적으로 ‘거대 명제’를 짊어지고 만들어 진 그룹이라는 것. 멤버들은 물론이고 운영측도 그 점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었다. ‘실패는 용납 될 수 없었다.’
멤버들 뿐 아니라 스태프들 역시 엄청난 압박감과 싸우며 이 프로젝트에 임했다는 것을 상상하는 건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케야키자카의 치프 매니저인 모기씨의 말이다.
“정말로 데뷔하기 전부터 빡빡했지요. 2주일 정도를 주기로 엄청 거대한 일들이 물밀듯이 밀려왔거든요. 일반적으로는 몇 년에 걸쳐 경험 할 법한 일들을 불과 몇달만에 해 치우는 그런 스피드였지요. 정식 데뷔를 눈앞에 두었을 때, ‘도쿄 국제포럼 A홀에서 단독이벤트를 해 보지 않겠느냐’는 오퍼가 들어왔습니다.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콘노상께서도 ‘그럴 운명을 타고 난 모양이다’라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그 부담감이라는 건 정말 엄청났지요.” (모기)
참고로 케야키자카가 가장 처음으로 출연한 음악 방송은 ‘2015FNS가요제 THE LIVE’에, 처음으로 출연한 라디오 방송은 ‘올나잇 닛폰’이며 처음으로 라이브를 연 곳은 ‘요요기 제 1체육관’이었다.
“처음부터 축복받은 환경인 건 분명했죠. 그 덕에 수 많은 기회를 받은 것도 사실이고요. 일반적인 신인 그룹은 상상도 못 할 일들이었어요. 멤버들 역시 ‘이렇게 기회를 받았는데 우리가 제대로 해 내지 못하면 노기자카 선배님께 면목도 없을 뿐 아니라 폐를 끼치게 되니 잘 해 내야만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점은 긍정적인 부분이라 생각합니다만. 겉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잘 없지만 케야키 멤버들은 지기 싫어하는 부분이 강해요. 그런 면에서는 체육계 성향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네요. 하여간 그렇다 보니 멤버들 역시 필사적으로 일에 임해 주었어요.” (모기)
그렇듯 정신없는 매일매일을 보낸 멤버들은 그 때의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정신을 차려 보면 새로운 일들이 생겨났을 정도니까요. 쫓아가는 것 만으로도 벅찼지요. 음악 방송에 나가게 되었지만, 저희 실력은 도저히 TV에서 퍼포먼스를 할 정도가 아니었기에, 항상 ‘해 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거나, ‘그 때 까지 완성 시킬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앞섰어요. 하지만 이미 날짜는 결정 되어 있었고, 저희가 출연한다는 것 역시 뉴스나 홈페이지 등에 공표되어 있었기에 ‘해 낼 수 밖에 없었’어요. 레슨이나 워크숍 등을 할 때도 다들 필사적으로 달라 붙은 덕분에 어찌저찌 해 낼 수 있었지요.” (스즈모토 미유)
보이지 않는 신의 손에 의해 완성된
‘기적의 MV’
노기자카46의 뒤를 잇는 ‘사카미치 시리즈’ 제 2탄 그룹, 케야키자카46. 결성 기자회견 당시 운영 스태프들은 ‘앞으로 이 그룹이 어떤 팀 컬러가 될 지, 어떤 그룹으로 성장 할 지는 지금 모인 멤버들에게 달려있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다시 말 해, ‘노기자카의 자매그룹’이 될 지, ‘라이벌’이 될 지 확실히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키모토 야스시가 콘노씨를 불러 ‘데뷔곡의 세계관’을 이야기했다. ‘노기자카와 비교해서 케야키 멤버들이 아직 어리다는 걸 감안하여, 젊은이들의 충동을 큰 축으로 한 작품을 만들어 볼 생각’이라는 이야기였다. 아키모토씨의 이런 이야기를 들은 콘노씨는 케야키자카의 ‘비주얼 세계’를 어떻게 구성 해 나갈 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노기자카와 어떻게 차별화를 해 나갈 거냐에 대해 개인적으론 막연하게나마 이미지가 있었어요. 초기부터 ‘프랑스’의 이미지를 가져갔던 노기자카에 비해 케야키자카는 ‘잉글랜드’의 이미지라는 것이었지요. 프랑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딱 떠오르는 분위기, 다시 말 해 화려하고 패셔너블한 분위기가 노기자카라 한다면 ‘록 문화’로 대표되는 잉글랜드의 분위기를 케야키자카에 도입하고자 했지요. ‘잉글랜드에 실재하는 계급 차이에 대한 젊은이들의 분노’라고나 할까요. 때 마침 아키모토선생님께서도 ‘싸워 나간다는 것을 테마로 할 생각이라면 의상 콘셉트는 군복에서 따 와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말씀 해 주셨기에, 제복 색깔을 브리티쉬 그린으로 결정했지요.” (콘노)
그룹의 비주얼이미지가 확정이 된 뒤, 콘노씨는 그런 이미지를 구현 할 ‘의상 디자인’과 ‘제작’에 착수하였다. 콘노씨의 시선이 향한 곳에 있는 디자이너는 다름아닌 오나이 키미카였다. 그리고 오나이씨의 손에 의해 완성 된 것이 바로 ‘그린을 기조로 한 타이트한 제복’이었다. 그것은 ‘귀엽고 고급스러움’을 기저에 깔고 있는 노기자카의 제복과는 확연히 다른, 남성적이고 스타일리시한 제복이었다.
그리고 콘노씨가 케야키자카를 이야기 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하는 ‘키 퍼슨’과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다름아닌 데뷔 싱글때부터 케야키자카의 안무를 담당하고 있는 세계적인 댄서 TAKAHIRO씨와의 만남이었다.
“사실 TAKAHIRO씨와 처음 접선을 했던 건 꽤나 예전이었어요. 하지만 그토록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께 아무렇지 않게 일을 부탁하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 좀처럼 오퍼를 할 기회가 생기지 않았죠. 그러던 와중에 ‘모든 개는 천국에 간다’를 하게 되었는데, 연극 관계자분께서 ‘안무를 TAKAHIRO씨에게 부탁드려볼까 합니다’라고 말씀을 하시길래 ‘부디…’라고 부탁을 드렸죠. 그리고 그 결과물은… 정말 대단했어요. 그것을 보고 ‘아, 이 사람은 정말 천재구나’라고 생각했지요.” (콘노)
그리고 동시에 ‘지금이야말로 이 사람에게 안무를 부탁 할 때구나’라는 생각 역시 자신의 뇌리를 스쳤다고 하는 콘노씨.
의상, 안무가 정해 진 뒤엔 영상 디렉터 이케다 카즈마씨에게 MV 촬영을 오퍼하였다. 이케다씨는 이전에도 노기자카의 ‘제복 마네킨’, ‘고독형제’등을 통해 호흡을 맞춘 바 있는 감독이었다. 콘노씨의 말에 따르면 ‘데뷔 싱글 MV를 이케다감독에게 부탁드리기로 한 것 역시 오래 전에 정한 것’이라고.
“무엇보다도 히라테 유리나가 내뿜는 분위기가 ‘제복 마네킨’을 떠올리게 했던 게 컸지요. 그리고 그녀들의 첫 퍼포먼스였던 ‘FNS가요제 THE LIVE’에서 선보인 ‘제복 마네킨’을 원점으로 하여, 거기서 어떻게 자신들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더해 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렇기에 더더욱 (제복 마네킨의 감독인) 이케다상에게 감독을 부탁드려야겠다 생각했지요.” (콘노)
곡, 의상, 안무가 완성 된 뒤, 본격적으로 MV촬영준비가 시작되었다. 촬영 장소 후보로 거론 된 장소들 중 눈을 끄는 곳이 있었다. ‘시부야’ 였다. 하지만 그렇게 거론 된 곳들 중에는 규제가 심해 져 좀처럼 허가를 얻기 힘든 곳도 많았다. 하지만 콘노씨와 이케다씨는 오히려 ‘잘도 이 곳에서 MV를 찍었구나’싶은 곳에서 MV를 찍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 하던 이케다감독이 ‘촬영 장소’로 정한 곳은 다름 아닌 구 도큐도요코선 시부야역 플랫폼터, 선로터였다. 2018년 완공을 목표로 한 고층 복합시설 건설이 한창이던 에어리어였다.
“사실 도큐전철에서 ‘안전상 문제가 있다’며 한 차례 거절 하셨었지요. 하지만 어떻게든 그 곳에서 촬영을 하고 싶었기에, 다시 한 번 부탁을 드려 보았습니다. 때마침 그 당시 저희를 담당 해 주셨던 분이 ‘케야카케’를 보던 분이셔서 ‘며칠 뒤에 이틀간 공사를 안 하는 날이 있긴 있는데, 그 때라면 촬영 할 수 있다’고 말씀 해 주셨지요. 신기하게도 그 분께서 말씀 해 주셨던 날이 저희가 생각했던 날짜랑 딱 겹쳤고요. 그렇게 우연이 겹쳐 그 MV가 완성 된 것입니다.” (콘노)
수 많은 기적들이 겹치고 겹쳐 만들어 진 MV. 그 MV에 대해 콘노씨는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인도 해 주신 덕분에 완성 할 수 있었다’고 표현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한자 케야키자카’가 갖고 있는 강한 ‘운’이라는 것이 이 때도 드러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강렬한 데뷔,
각광을 받는 센터.
4월 6일. 케야키자카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데뷔 싱글이 발매되었다.
타이틀곡의 제목은 ‘사일런트 마조리티’.
‘침묵하는 다수’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제목이 달린 이 곡은 메세지성이 강한 가사와 어쿠스틱 기타와 핸드 클랩이 인상적인 빠른 비트의 댄스 사운드, 군대를 연상시키는 절제된 댄스 등 소위 말하는 ‘아이돌 그룹의 데뷔곡’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강한’ 부분들이 돋보이는 곡이었다.
이 곡은 아이돌 팬들 뿐 아니라 아이돌에 흥미가 없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3월 중순, YOUTUBE에 공개 된 MV 조회수는 순식간에 300만을 넘겼다. 신인 그룹의 MV재생 수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케야키자카는 이례적으로 ‘강렬하게’ 데뷔했던 것이다.
이례적인 것은 또 있었다. 싱글이 발매된 지 겨우 2주만에 ‘뮤직 스테이션’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지금껏 TV로 보아오기만 했던 꿈의 무대에 자신들이 서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멤버들의 기분은 들뜨기 시작했다.
“다들 기합이 팍 들었지요. 동기부여도 대단했고요. 대기실에서도 쉬지 않고 연습을 했을 정도로 다들 하나가 되어 있었어요.” (오다)
“어릴 때 부터 TV를 통해 보아왔던 프로그램이기에, 그 스테이지가 제 눈에 나타났을 땐 ‘아, ㅇ이런 느낌이구나’라며 감동과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어요. 방송이 끝난 뒤, ‘뮤직스테이션’ 증후군이랄까요. 뭔가 허전했어요. 그런 허전함이 무려 2주일이나 계속되었답니다. (웃음)” (사이토)
‘뮤직 스테이션’출연을 계기로 ‘사일런트 마조리티’와 ‘케야키자카46’의 이름은 더더욱 빠른 스피드로 일반 대중에게 퍼지기 시작했다.
“데뷔 작품으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충격적인 가사라던가 멋진 곡, MV 같은 게 일반적인 아이돌의 그것과는 달랐기에 흥미를 가져 주신 것 같기도 하네요.” (모리야)
“만약 데뷔곡이 ‘사일런트 마조리티’가 아니었다면 지금만큼 주목을 받지는 못 했을 것 같아요. 그 곡, 그리고 가사의 세계관, 멤버들 중 누구 하나라도 빠지면 완성되지 않는 안무, 그리고 무엇보다 센터에 선 히라테의 표현력… 그 모든 것이 더해 져 엄청난 것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 MV를 볼 때 마다 뭔가가 끓어 오르는 것만 같아요.” (스가이)
‘사일런트 마조리티’는 발매 첫 주에만 25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크게 히트했다. 오리콘 주간 CD 랭킹에서도 1위를 마크하였다.
“오리콘에서 1위를 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버스로 이동을 하던 도중이었어요. 휴대전화로 뉴스를 검색 해 보며 ‘몇 위래? 몇 위래’라는 식으로 떠들썩했어요. 그리고 1위라는 것을 안 순간, 버스 안에서 신나서 소리를 쳤죠. 그 순간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스즈모토)
케야키자카가 기록한 판매량은 여성아티스트의 데뷔 싱글이 첫 주에 판매한 판매량면에서도 역대 최고 기록을 갱신한 것이었다. ‘쾌거’를 이뤄 낸 것이다.
“마나카랑 아카네, 미유랑 밥을 먹고 있었을 때였어요. 갑자기 멤버들의 그룹 라인에 스탭분께서 ‘역대 기록을 갱신했습니다’라고 메세지를 남기셨지요. 그 순간, 다들 ‘와! 대단해!’라고 기뻐했지요. 다들 라인 스탬프로 신나 했어요. (웃음)” (와타나베 리카)
데뷔 싱글에서 센터에 선 것은 그룹 최연소 멤버, 히라테 유리나였다. ‘내향적’이고 ‘눈에 띄는 것을 싫어했’던 소녀는 당당히 그룹의 중심에 서서 14살이라고는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였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 당당한 분위기는 ‘데뷔’곡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런 히라테의 센터에 대해 멤버들의 생각은 어떨까?
“그야 뭐, ‘당연하지’라고 납득했어요. ‘센터에 어울리는 건 히라테지’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춤 출 때 보면 동작 하나하나가 전부 멋있거든요.” (모리야)
“머릿속으로 ‘얘가 센터면 어떨까? 그럼 쟤는?’이라 생각 해 본 적이 있거든요. 하지만 역시 가장 납득이 되는 건 히라테였어요. 아니, 히라테밖에 없다 생각했습니다.” (오제키)
“처음에는 히라테를 ‘평범한 중학생’이라 생각했지만, 알면 알수록 그렇지 않더라고요. FNS 때 히라테를 보고 ‘얘 춤도 잘 추네!?!’라고 놀랐던 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한 편으로는 ‘이런 인재를 잘도 발견 해 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코바야시)
데뷔 싱글에서 2열 중앙, 히라테의 뒤에 서서 퍼포먼스를 한 스가이 유카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히라테를 보다 보면 ‘세상에 이런 아이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째서 처음 경험하는 아이가 저런 표정을 지을까? 라던가, 멤버들이 보기에도 ‘천재’라는 말 외에는 표현 할 수 없는 부분이 많거든요. 어떤 스테이지에서도, 아무리 긴장을 해도 멋지게 퍼포먼스를 해 내는 모습을 보면 ‘타고 난 주인공’이란 생각이 들어요. 뭐라 할까요… 등에서 뿜어져나오는 아우라가 있어요. 그렇기에 언제까지고 ‘이 등을 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지요.” (스가이)
멤버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인정하는 ‘센터’. 아니, 인정 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고 하는 편이 정확 하다고 해야 할 정도의 ‘차원이 다른’ 존재감을 뿜어내는 히라테.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일런트 마조리티’는 센터인 히라테를 크게 부각시키는 곡이었음에도, 질투를 하는 멤버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할 정도이다.
선택된 소녀가 품고 있던
고뇌
데뷔 싱글을 통해 일약 각광을 받은 히라테 유리나. 팬들 뿐 아니라 미디어들 역시 신인아이돌 그룹의 중심에 선 이 14살짜리 소녀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천재가 나타났다’, ‘전설의 아이돌, 야마구치 모모에의 재림!’, ’신시대의 뉴 히로인 탄생!’같은 자극적인 수식어가 어지러이 휘날렸다. 하지만 주변의 평가가 과열되면 과열 될 수록 히라테 본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뭐라고 할까요… 그룹에서 눈에 띄는 게 저 뿐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음악 방송에 나갔을 때에도 센터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카메라에 집중적으로 찍히는 것도 불편했고요. 저만 칭찬을 받아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고 할까요… ‘나보다 훨씬 더 표정이 좋은 멤버, 노래를 잘 하는 멤버, 춤을 잘 추는 멤버들이 많은데도 어째서 나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히라테)
“멤버 모두가 히라테를 인정 했어요. 하지만 정작 본인은 다른 멤버들을 많이 의식했던 것 같아요.” (모기)
내향적이고 눈에 띄는 것을 싫어했던 소녀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그룹의 ‘얼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절대적인 센터’라는 말을 들어도 순수하게 기뻐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바꾸기 위해 찾은 케야키자카. 하지만 그 변화가 너무나도 급격하고 극적이었기에 그녀의 마음에 유예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부담감이 심했을 거예요. 그렇기에 할 수 있는 한 힘껏 히라테를 받쳐주자, 할 수 있는 건 전부 하자고 생각했지요. 저보다 다섯살이나 어린 아이거든요. 저 자신이 5년 전에 어땠었는 지를 생각 해 보면, 저는 히라테처럼은 하지 못 했을 거예요. 상처를 받거나 마음에 저미는 부분이 많았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사토)
“아직 어린 아이이기에 얘기도, 발산도 못 하고 혼자 끌어안는 부분도 많으리라 생각해요. 그런데도 자신보다 그룹을 먼저 생각하고, 그룹을 위해 필사적으로 활동 하고 있지요. 팬 여러분께서는 무대에 선 히라테의 정면을 보고 계시겠지만, 저희는 히라테의 등을 보며 서 있거든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 작은 등에 많은 것들을 담아두고 있구나’라고 절감하게 돼요.” (모리야)
그룹을 위해 힘든 역할을 맡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 히라테. 하지만 고민하고 있는 것은 히라테만이 아니었다. 언더 그룹 ‘히라가나케야키’의 유일한 멤버, 나가하마 역시 자신의 특수한 위치에 고민하고 있었다.
“사일런트 마조리티가 히트하면서, 고향 친구들이 ‘MV봤어’라고 이야기를 해 주거나, 학교 친구들이 ‘시부야 마루이에 케야키 포스터가 붙어 있다더라. 보러 갈게’라고 이야기 해 주는 경우가 늘었어요.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때 마다 ‘나는 거기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정말 외로웠어요. 혼자 제복 색도 달랐고, 멤버들이 공연을 앞두고 원진을 짤 때, 저 혼자 무대의상이 아니라 사복을 입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요. 멤버들이랑 사이는 좋아졌지만, 그런 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지요.” (나가하마)
고독을 서로 나눈 두 사람
그리고 이마이즈미와 오빠의 약속
그런 히라테와 나가하마가 가까워 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말하자면 그 둘은 ‘케야키자카’라는 언덕길에서 조금씩 벗어 나 있는 멤버들이었던 것이다. 큰 각오를 하고 찾아 온 ‘내가 있던 곳이 아닌 어딘가’였음에도.
“제가 느끼던 것은 물리적인 ‘고독’이었어요. 이벤트 때에도 저 혼자 출연을 못 하거나 하는 등 말 그대로 ‘홀로 될 때’’가 많았거든요. 반면 히라테는 ‘정신적으로 고독’했을 거라 생각해요. 모두와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고독함을 느꼈던 것이지요. 히라테는 그 누구보다 멤버들을 생각하는 아이이기에, 그만큼 더 힘들었을 거라 생각해요.” (나가하마)
“네루랑은 어딘지 닮은 부분이 있었어요. 일에 임하는 자세라던가… 네루는 홀로 뒤늦게 가입하였기에 아무래도 고독했을 거라 생각해요. 물론 제가 느낀 고독따위는 네루의 그것과 비교하면 별 것 아니겠지만, 저 역시 나름대로 고독함을 느꼈어요.” (히라테)
그런 두 사람은 서로 고독을 나누며 서서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다른 멤버들과 함께 레슨을 받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 나가하마를 위해 히라테는 1대 1로 춤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 당시엔 거의 매일 둘이서 조깅을 했어요. 때마침 제가 ‘사일런트 마조리티’ 안무를 익히는 데 고전하던 때였는데, 히라테는 저를 위해 직접 춤을 추며 알려 주었지요.” (나가하마)
다른 이들은 모르는 둘만의 세계. 그것은 고독한 가운데에서도 ‘혼자가 아님’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언젠간 이런 일도 있었어요.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평소 조깅을 하러 가는 곳에 혼자 가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히라테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어디 있어?’라고. ‘언제나 가는 곳에 있어’라고 이야기 하자, 히라테가 와 주었지요. 그리고 히라테는 제게 ‘괜찮아’라고 용기를 주었어요. 돌아 갈 때 함께 오자키 유타카상의 ‘Forget me not’을 들었어요.” (나가하마)
“네루의 빈자리는 멤버 전원이 메꿔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네루가 빠지면 ‘케야키자카46’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네루도 힘 내 주었으면 했어요. 그리고 언젠간 같은 무대에 서서 함께 퍼포먼스를 하고싶다고도 생각했고요.” (히라테)
히라테와 나가하마가 자신들에게 주어 진 역할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전진하기 시작했던 바로 그 무렵, 그룹 내에는 눈에보이는 ‘격차’가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멤버들 역시 이 ‘격차’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잡지 취재에 자주 불리는 멤버와 그렇지 않은 멤버가 나뉘었어요. 저는 그렇지 않은 멤버였고요. 점점 초조해지더군요. 한 때는 그렇게 활약하는 멤버들을 질투하고, 스스로에 대해 네거티브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사토)
“처음에는 프론트가 주목을 받기 쉽잖아요. 물론 제가 부족한 것도 알고 있었고, 프론트는 프론트이기에 별 수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역시 힘들긴 힘들었지요. 1, 2열에 선 아이들은 일이 비교적 많이 들어오는데, 그 안에 저 자신이 없다는 게 신경 쓰였어요.” (모리야)
“사일런트 마조리티에선 3열에 있었기에 전혀 눈에 띄지 않았어요. MV에도 거의 비춰지지 않고…” (우에무라 리나)
전원이 평등한 아이돌그룹이란건 사실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바닥에서는 그게 당연한 것이라는 것도 머리로는 이해를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마음 속에서는 갈등이 생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케야키자카46 운영위원회 위원장 콘노 요시오씨는 멤버들의 이런 갈등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앞’만을 보고 달려가고 있었다.
“멤버들은 아마도 ‘케야키자카46이라는 그룹은 하나의 팀’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더군요. 그렇기에 자신들이 센터인 히라테를 받쳐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한 편으로는 ‘히라테에게만 맡기지 말고, 나도 힘을 길러 이 그룹을 이끌어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멤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두 가지 생각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현재 그룹이 운영 되고 있기에, 히라테 이외의 멤버를 축으로 한 이야기도 얼마든지 펼쳐 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재 다른 멤버들에게 포커스가 맞춰지지 않고 있기에 ‘지금껏 보지 못 한 케야키자카의 새로운 모습’을 펼쳐 나갈 방법론도 풍부한 것이라 생각하고요. 저희가 할 일은 이대로 ‘히라테 원톱’으로 끝나는 것을 겁내는 것 보다, 다른 멤버들의 장점을 어떻게 살릴 수 있느냐를 고민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콘노)
콘노씨는 ‘히라테는 대단하다’는 명제가 멤버들을 낙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히라테를 받쳐주는것’이 그룹을, 나아가선 미래의 자신의 활약의 발판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멤버들 중에서 ‘히라테를 따라잡고, 언젠간 뛰어넘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멤버가 나타났다. 히라테에 대한 리스펙트, 그리고 라이벌심을 가슴에 품기 시작한 그 멤버의 이름은 이마이즈미 유이였다.
“솔직히 스스로와 히라테의 퍼포먼스를 비교 해 보면서 큰 격차를 느꼈어요. 히라테는 표현력도, 존재감도 있기에 동영상만 봐도 ‘역시 타고난 센터’라고 납득하게 되지요. 하지만 데뷔 싱글 때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하는 히라테의 모습을 가까운 곳에서 보면서 ‘곁에서 받쳐주겠다’고 이야기 해선 언제까지고 히라테를 뛰어넘을 수는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기에 언젠간 저도 당당하게 센터에 설 수 있으면 좋겠습… 아니, 센터에 서겠습니다!” (이마이즈미)
자신이 목표로 하는 곳에 서 있는 존재는 ‘천재’. 하지만 그런 ‘천재’를 앞에 두고도 이마이즈미가 이토록 전의를 불태우게 된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사실 케야키자카46 오디션을 보기 전엔 가수라는 꿈을 접으려 했어요. 하지만 셋째 오빠가 ‘마지막으로 이 오디션은 꼭 봤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해 주었지요. 사실 오빠도 한 때는 가수가 되려 했지만 결국 포기 해 버렸거든요. 그런 오빠가 ‘내 몫까지 열심히 해 달라’고 하는 것을 보고,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이마이즈미)
자신이 한 번 포기했던 꿈을 자신에게 맡긴 오빠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소녀. 그 강한 신념이야 말로 그녀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마이즈미의 의지야말로 진정 ‘센터의 중압감과 홀로 싸우고 있는’ 히라테를 고독에서 구원 해 줄 방법이며, 케야키자카라는 그룹을 더욱 더 높은 경지로 이끄는 원동력이 될 지도 모른다.
피를 나눈 ‘가족’이외에도 소녀들에게 용기와 힘을 준 존재는 있었다. 바로 그녀들에게 성원을 보내주는 ‘팬’들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고민만 하던 제가 바뀌게 된 계기가 있어요. 저를 예뻐 해 주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가족, 스태프 여러분, 그리고 팬 여러분의 힘을 느꼈던 것이지요. 그 때 ‘아, 왜 지금까지 그렇게 부정적인 마음으로 활동을 했던 걸까’라고 후회 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항상 곁에서 저를 지탱 해 주시는 여러분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활동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팬 여러분의 미소를 보는 순간이 정말 행복하답니다!” (사토)
“버라이어티에서 눈에 띄는 게 오히려 고민거리였던 때도 있어요. ‘아, 나 어느 사이엔가 아이돌이기를 포기한건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랬더니 괜시리 너무 슬프더라고요. 그 뒤로 한동안은 녹화때 일부러 말을 아끼곤 했었는데, 그 모습을 보신 팬분들께서 ‘요 전에 나온 방송에선 조용하더라? 컨디션 안 좋았어?’라고 걱정 해 주시더라고요. 그 순간, 걱정하게 한 데 대한 죄송함과 ‘역시 이건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세계에 들어오기 전부터 버라이어티에 나가 보고 싶기도 했고, 코미디도 좋아했기에 녹화장 분위기를 띄우는 존재가 되기로 마음 먹었지요.” (오다)
메이저 데뷔를 한 뒤로부터는 팬들과 교류를 할 기회도 크게 늘어났다. ‘악수회’가 시작 된 것이다.
데뷔 전에 ‘팬’입장으로 노기자카의 악수회에 참가 한 적이 있는 우에무라 리나는 자신이 ‘아이돌’이 되어 처음으로 악수회를 했던 날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많은 팬분들이 넓은 회장을 가득 메워 주셨어요. 그 많은 팬분들이 사이리움을 흔들어 주시는 게 정말 기뻤지요. 실제로 악수회를 해 보니, 제가 이전까지 생각했던 것이랑 전혀 다르더라고요. 팬 입장으로 악수회에 갔을 땐, 저 자신이 너무 작고 하찮게 느껴져서 ‘내 이름이랑 얼굴을 기억 해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하지만 실제로 제가 해 보고나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름이나 나이 같은 것도 엄청 기억에 남더라고요!! 어떤 말을 해 주셨는지도 기억 할 정도인걸요! 응원 해 주시는 팬분들이 얼마나 든든하고 친근한 존재인 지 알게 되었어요. 그렇기에 악수회나 라이브 등으로 팬분들을 만나면 엄청 기운이 나요!!” (우에무라)
우에무라의 말은 이어졌다.
“팬 여러분을 만나지 않을 땐 ‘나한테 팬이 있긴 한가?’싶어서 불안 해 지기도 해요” (우에무라)
다시 말하자면 ‘팬’들의 존재야말로 그녀들이 아이돌이라는 증명이며, 그녀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미디어의 일은 비록 균등하게 받지 못 하지만 팬들은 모든 멤버들에게 생기는 것이기에.
그리고 서서히 ‘고뇌’와 ‘갈등’을 극복 해 가는 케야키자카 멤버들에게 다시금 거대한 도전이 주어졌다. 모든 멤버가 출연하는 학원 드라마, ‘누가 도쿠야마 다이고로를 죽였는가?’의 제작이 발표 된 것이다.
드라마 출연에 쾌재를 부르는 멤버들. 솟아오르는 기쁨을 주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촬영이 시작 된 뒤, 그녀들은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는 괴로운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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