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화
새로운 자신
히라가나 케야키 멤버들에게 있어 첫 ‘본격 드라마 출연작’이 된 ‘Re:Mind’. 밀실을 무대로 한, 거의 완전한 ‘회화극’인 이 작품은 그만큼 각자의 대사 전달력, 연기력이 요구되는 어려운 작품이었다.
사전에 열린 워크숍에서 불안을 토로하는 멤버들도 많았지만, 정작 촬영이 시작되자 점차 연기를 하는 재미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두 달 반에 걸친 드라마 촬영 기간 동안 연기력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크게 변화를 보인 멤버들이 두 명 있었다.
인생을 사는 데 딱히 웃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드라마 촬영이 시작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감독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리허설이 한창이던 녹화 스튜디오를 가득 메웠다.
‘다카세라고!!’
갑작스러운 감독의 고함소리에 깜짝 놀란 다카세 마나는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다른 멤버들의 말을 받아 자신의 대사를 이어가야 하는 타이밍이었으나,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런 에피소드가 재미 있었던 멤버들 사이에서는 그 후 한동안 ‘다카세라고!’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유행했다고 한다.
사실 다카세는 전체 멤버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다가가기 힘든’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드라마 설정상 다카세와 서로 마주보고 연기를 해야 했던 다카모토 아야카는 드라마 촬영을 통해 다카세와 친해져 어느 정도 가벼운 얘기를 주고 받을 수 있게 된 뒤, 이렇게 털어 놓은 바 있다.
‘지금까지 마나피라 하면 솔직히 말 걸기 힘들었어요. 잘 웃지도 않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알고 보니 정말 특이하고 재미있는 아이였지요.’
다카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 까지의 기간을 부모님 일 관계로 영국에서 보냈다. 현지 학교에 다니던 당시, 같은 학교에 일본인은 다카세 한 명 뿐이었지만 금세 현지 아이들과 친해져서는 라크로스, 테니스, 수학 클럽 등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선생님의 수업 내용을 필기하는 것 뿐 아니라 교재를 갖고 스스로 공부 하는 영국식 수업이 정말 즐거웠다고도 한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녀는 친구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
‘나, 일본에 돌아가면 유명해져서 TV에 나올 테니, 꼭 봐 줘’
물론 당시만 해도 ‘꿈’이나 ‘목표’라고 하기에는 너무 막연했고, 그리 강하게 의식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다카세 본인이 드라마와 뮤지컬을 좋아한다는 점도 있어 당시부터 막연하게나마 연예계를 동경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즐거웠던 영국 생활에 비해 일본 학교 생활은 너무나도 따분했다. 그렇기 때문일까,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는 동안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당시 그녀가 항상 생각했던 것은 ‘인생을 사는 데 있어 딱히 웃을 필요는 없지 않나’라는 것이었다고.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무리해서 웃기보다는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이 편했던 것이다.
고 3때 히라가나 케야키의 멤버가 된 뒤로도 좀처럼 다른 멤버들 사이에 섞여들지 못 하고 겉돌았다. 다른 멤버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뭔가 쑥스러웠기에 상대방이 말을 걸어 줄 때 까지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기다리기만 했다. 그 뿐 아니라 사진을 찍을 때도 미소를 짓는 것이 어색해서 입 꼬리가 올라가는 교정용 굿즈를 사용하거나 남들 몰래 웃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룹에 들어 와 어느 정도 지나 ‘W 케야키자카의 노래’의 MV 촬영이 있었다. 이 곡은 한자 케야키 멤버들과 히라가나 케야키 멤버들 전원이 참여하는 첫 합동곡이었는데, 그런 의미깊은 곡의 MV 촬영임에도 다카세는 학업 관계상 참가하지 못 했다. 그리고 이 촬영에 불참한 것 역시 다카세 단 한 명 뿐이었다.
완성된 뮤직 비디오가 공개 된 뒤, 다카세의 스케줄이 빈 때를 찾아 다시 한 번 ‘전원 버전’ 촬영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전원’이 촬영에 참가하게 되어 기뻐하는 히라가나 멤버들을 보고 다카세가 입을 열었다.
‘마나 탓이야. 미안해’
그룹에 있어 의미 깊은 곡의 MV에 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뻤지만, 이렇게 자신 때문에 멤버들, 그리고 스태프들이 재촬영이라는 번거로운 일을 해야만 했다는 점이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멤버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다카세는 자신과 함께 촬영을 할 수 있다고 기뻐 해 주는 멤버들을 보며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들 어렵게 여기던 다카세. 하지만 그녀가 ‘사실 사랑스러운 성격이다’라는 점을 가장 먼저 알아 차린 것은 다름아닌 카키자키 메미였다. ‘Re:Mind’ 촬영 현장에서 다카세의 옆자리에 앉았던 카키자키는 ‘공부를 잘 하면서 대사는 잘 못 외우’고 ‘자주 깜빡하’며 ‘자주 멍 때리고 있’는 다카세의 의외의 일면을 알게 되었고, 그런 점들을 갖고 다카세를 놀리기 시작했다. 카키자키의 그런 모습을 본 다른 멤버들도 자연스레 다카세 주변으로 몰려 들게 된 결과, 촬영 후반의 다카세는 일약 모두의 아이돌적인 존재로까지 변해 있었다.
다카세 본인도 드라마 촬영을 통해 서서히 변해갔다. 처음에는 ‘아이돌’로서의 수치심을 버리지 못 해 연기에 몰입하여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하는 모습을 선보이지 못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몸이, 감정 표현이 따라오게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하는 시간이 길어 져, 어떤 모습이 진짜 자신의 모습이고 어떤 모습이 극중 역할인지 구분이 안 되는 신기한 경험마저도 했을 정도였다. 사실 그녀가 카키자키와 사이가 좋아 진 것에는 드라마에서 두 사람이 콤비로 묶였던 것이 큰 영향을 주기도 했던 것이다.
드라마 촬영이 끝난 뒤, 멤버들은 다카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마나피, 드라마 촬영 때부터 엄청 변했어. 요즘은 엄청 잘 웃는걸’
다카세 본인도 스스로가 예전과는 많이 변했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다름 아닌 ‘멤버들과 함께 활동하는 시간이 정말 즐겁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웃는 표정을 짓기 위해 샀던 ‘입꼬리를 올려주는 교정 굿즈’는 어느 사이엔가 그녀의 가방 구석에 들어 가 있을 뿐이었다.
오디션에 떨어져서 싹 튼 감정
‘Re:Mind’를 통해 새로운 즐거움에 눈 뜬 또 다른 멤버는 다름 아닌 다카모토 아야카였다.
다카모토는 사실 아이돌, 연예계에 관심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 2때 우연찮게 보게 된 ‘마지스카 학원’에 푹 빠져 버린 뒤로 AKB48 그룹의 팬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당시 SKE48 소속이었던 마츠이 레나에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녀가 마츠이 레나의 팬이 된 직후, 마츠이가 그룹 졸업을 발표했다. 다카모토는 어쩌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지 모르는 ‘마츠이의 노래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었기에 마츠이의 졸업 콘서트를 보러 갔다. 참고로 콘서트 회장까지는 그녀의 아버지가 직접 운전을 해서 오고 갔다고 하며, 이 콘서트가 그녀가 처음으로 본 아이돌의 라이브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케야키자카46이 결성되었다.
사실 다카모토는 케야키자카46 오디션에도 참가 한 적 있다. 아이돌에 관심이 없었던 그녀가 오디션에 참가 한 이유는 너무나도 단순했다. ‘아이돌이 된다면 마츠이 레나와 만날 수 있을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케야키자카46의 오디션에서는 도중에 탈락하였지만, 태어 나 처음으로 심사위원들 앞에서 춤 추고, 노래하고, 자기소개를 하며 그녀의 마음 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만약 내가 그 때 오디션에 붙었다면 지금쯤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까? 저 옷을 입고 나도 함께 TV에 나간다면 자기 소개는 어떻게 했을까?’
그런 상상은 특히 ‘케야카케’를 볼 때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자신이 아이돌이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수 없이 상상하던 어느 날, 나가하마 네루라는 존재가 나타났고, 히라가나 케야키라는 그룹이 새롭게 만들어 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카모토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오디션에 응모하였다.
그로부터 수 달 뒤, 히라가나 케야키의 멤버가 되어 처음으로 나가하마와 만난 날, 다카모토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바랐지만 결국 도중에 탈락했던 오디션에서 자진 사퇴했음에도 결과적으로 합격한, 하지만 그 덕분에 히라가나 케야키라는 그룹을 만들고 그 첫 멤버가 되어 자신을 아이돌 세계로 이끌어 준 존재가 자신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다카모토에게 있어 나가하마라는 사람은 이미 ‘특별함’을 넘어 선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다카모토가 아이돌로서 경험한 다양한 분야의 일들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경험으로 꼽는 것이 바로 ‘Re:Mind’였다.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는 ‘연기 참 무섭다’고 지레 겁을 먹고 연기, 표현한다는 것 차제에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촬영이 시작 된 직후, 첫 신을 찍을 때에도 자기 마음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초조함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 눈 딱 감고 크게 소리를 낸 뒤로부터 서서히 연기라는 것이 즐겁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촬영 현장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이 작품에 관여 된 스태프들은 전원 사이가 좋은데다가, 멤버들에 대해서도 화를 내기보다는 차분하게 성장을 지켜 봐 주고 기다려 주는 스태프들이었다. 드라마의 설정상 스토리에 맞추어 한 명씩 등장인물들이 사라져 가는데, 그 때마다 멤버들의 이름에서 특징을 따 점토로 오브제를 만들어 세트장에 숨겨 놓으며 멤버들을 즐겁게 해 줄 정도로 재치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촬영을 하며 다카모토는 현장 운영쪽에도 흥미를 보였다.
‘카메라 옆에 붙어 있는 이거, 뭔가요? 어떻게 쓰나요?’
매일같이 자신이 잘 모르는 것들을 새롭게 발견해서는 스태프들에게 질문을 했다. 결국 자신도 같은 일을 해 보고 싶어 져, 본방등(※외부에서 보았을 때, 촬영중임을 알 수 있는 등. 온에어 표식판 같은 역할)을 사 와서는 ‘그럼 본방등 켜겠습니다!’라고 스태프 흉내를 낸다던가, 무대 제작이나 세트 장식을 돕기도 했다. 자신의 캐릭터가 마지막 출연을 끝낸 뒤, ‘내일도 현장에 와서 스태프 일을 돕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냈다가 매니저에게 제지 당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토록 두려워 했던 ‘드라마’가 이토록 좋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 뒤, 제작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180도 변한 것이다.
그런 경험을 한 지금, 다카모토의 목표는 더욱 더 표현력을 길러 언젠가 다시 이 드라마 팀과 함께 드라마를 찍는 것이다.
‘히라가나는 연기를 잘 하는 팀이 되었으면 해’
이 ‘Re:Mind’의 주제가로는 히라가나 케야키의 5번째 오리지널 곡인 ‘그럼에도 걸어간다’가 발탁되었다.
‘인생이란 넘어지는 거야. 무릎은 까지라고 있는 거지.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면 돼. 나는 그럼에도 걸어 갈 거야.
인생이란 무엇일까? 승패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그래 그럼에도 걸어 가는 거지.
그렇기에 나는 그럼에도 걸어 가.’
지금까지 그녀들이 불러 온 밝고 상큼한, 말 그대로 ‘아이돌’다운 곡들과는 달리 포크송 곡조에 맞추어 ‘인생’에 대해 논하는 진지한 곡이었다.
센터는 그런 곡조에 맞는 어른스러운 분위기와 강렬한 목소리를 갖춘 사이토 쿄코가 발탁되었다. 지금까지 나가하마 네루가 혼자 센터에 서거나 나가하마와 카키자키가 더블 센터를 서 왔던 히라가나 케야키의 센터 자리가 바뀐 순간이었다.
이 곡의 포지션 발표는 드라마 촬영과 병행되었던 이 곡의 안무 레슨 때 있었다. 스태프가 아무렇지 않게 ‘센터 자리에는 쿄코’라고 이야기를 했고, 이 말을 들은 사이토는 ‘네?!’라고 얼빠진 듯한 대답을 했다. 그리고 이런 사이토의 모습을 보며 다른 멤버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센터 교체’라는 중차대한 사건에서도 히라가나 케야키다운 모습을 잃지 않은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싱글 발매 직전에 가입한 2기생 9명 중, 와타나베 미호가 드라마 촬영에 참가하게 되었다. 드라마에 출연할 한 명을 가리기 위해 급히 2기생들만을 대상으로 간단한 오디션을 열고, 그 결과 와타나베가 선택 받은 것이다.
와타나베는 오디션에서 합격 한 그 날 바로 촬영 스튜디오로 가서 처음으로 1기생들과 대면하였다. 히라가나 케야키 2기생들의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시작 된 순간이었다.
약 2달간에 걸친 드라마 ‘Re:Mind’ 촬영.
촬영이 종료되는 날, 마지막 장면을 보기 위해 모든 멤버들이 스튜디오에 모였다. 촬영이 전부 끝난 뒤, 축하의 의미로 받은 꽃다발을 든 멤버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소감을 이야기하였다.
어릴 때부터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카게야마 유우카는 ‘더욱 더 유명한 배우가 되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선언하였다. 멤버들의 리더 역이자 누구보다도 오래 스튜디오에 있었던 사사키 쿠미는 ‘연기를 하는 것이 처음인 저희들이기에 부족한 부분도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여러분께서 정말 상냥하게 대해 주셔서 즐겁게 촬영 할 수 있었습니다. 평생 잊지 못 할 추억입니다’라고 그룹을 대표하여 감사 인사를 남겼다.
그리고 이 때, 멤버들은 스태프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드라마 촬영기간 약 2달간의 추억이 담긴 노트였다. 사이토는 자신에게 주어 진 페이지만으로는 모자랐는지, 별도로 편지를 써서 감독인 우치카타에게 전달했다. 무려 편지지 세 장이 빼곡하게 들어 찰 정도로 수 많은 추억이 담겨 있던 그 편지에는 워크숍에서 눈물을 흘린 뒤, 감정이 복받쳐 올라 ‘감사합니다’라는 말도 제대로 못 했던 자신의 모습을 두고두고 후회하는 그녀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우치카타는 워크숍 당시부터 멤버들에게 ‘히라가나 케야키를 연기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듣는 팀으로 만들자’고 이야기 하며 멤버들을 다독여 왔다. 그리고 그녀들이 그 말을 따라 우직하게 노력 한 결과, 우치카타의 말은 예언이 되었다.
그리고 우치카타는 연기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게하기 위하여 멤버들에게 ‘라이브를 할 때, 객석에 앉아 있는 손님들을 똑바로 응시 하라’고 주문하였다. 그리고 이런 주문은 결과적으로 연기 뿐 아니라 그녀들의 라이브 퍼포먼스의 수준 향상으로도 이어졌다.
히라가나 케야키 멤버들에게 다양한 성과를 안겨 준 ‘Re:Mind’의 촬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멤버들의 마음 속에 빛나는 보물과도 같은 추억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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