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화
10명이서 맞이한 투어 파이널
2017년 봄에 시작된 히라가나 케야키의 첫 전국투어도 어느 사이엔가 치바현 마쿠하리 멧세의 이틀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투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쿠하리 멧세는 12월 12일, 13일 양일에 걸쳐 14,000명을 동원하는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지금껏 그녀들이 경험 해 본 적도 없는 규모였다.
하지만 지금껏 전국적으로 라이브 뷰잉을 한 덕분인지 히라가나 케야키의 팬층은 투어 개시시와 비교해서 괄목할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기에, 투어 파이널 공연 티켓은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즉시 매진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번 투어 파이널 공연을 통해 처음으로 무대에 서게 된 2기생들도 1기생들과 함께 1, 2기 합동곡인 ‘NO WAR in the future’의 안무 레슨에 임했다.
이렇게 차근차근 과거 최대규모의 투어 파이널을 향해 준비가 되어 가고 있었다.
공연 이틀 전에 일어난 사고
이틀에 걸친 치바 공연 세트리스트에는 총 20곡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날 처음으로 선보이는 ‘NO WAR in the future’를 비롯한 히라가나 케야키의 오리지널 곡들을 필두로 지금까지 투어에서 불러 온 한자 케야키의 곡들을 전부 더한 숫자였다.
거기에 더하여 탭댄스나 드럼 마치 등 지금까지 전국을 돌며 선보여 온 퍼포먼스도 전부 선보이게 되어 있었기에, 말 그대로 히라가나 케야키의 1기생들이 9달에 걸쳐 선보인 전국투어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그리고 이 치바공연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게 되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바로 ‘롤러스케이트 퍼포먼스’ 였다. 비록 어릴 때 롤러스케이트를 탄 경험이 있는 멤버가 많았다고는 하나, 그것을 신고 퍼포먼스를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헬멧은 물론이고 팔목, 무릎, 팔꿈치에도 프로텍터를 착용하여 최대한 안전 대책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연습을 하며 수 차례 넘어지는 과정에서 롤러스케이트 자체에 대하 공포심을 느끼게 된 멤버도 있었다. 특히나 롤러스케이트에 대하여 공포를 안고 있었던 다카모토 아야카와 사사키 미레이 등은 겨우겨우 지지대에서 손을 떼고 연습을 한 뒤, 곧바로 손잡이로 돌아 가 꼭 붙들고는 놓지 않았다. 롤러스케이트 퍼포먼스가 정해진 직후부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걸 해 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어떻게 하지?’라고 불안해 했던 사이토 쿄코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속도를 내기는커녕 걷는 것 조차 고전 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실전 연습을 겸해 이른 아침부터 도쿄도내의 대형 롤러스케이트장을 빌려 리허설을 하게 되었다. 처음 경험 해 보는 넓은 롤러 스케이트장의 미끄러운 바닥에 고전한 멤버들은 수 없이 넘어져가며 리허설을 진행했다. 그리고 롤러스케이트 강사가 그녀들을 한 데 모아 구두로 요령을 설명해 주던 도중, 이변이 발생했다.
‘죄송한데 기분이 안 좋아요…’
이렇게 이야기 하며 카키자키가 갑자기 쭈그려 앉았던 것이다. 얼굴에도 핏기가 없이 창백했다. 이상을 감지한 스태프들은 곧바로 그녀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저녁이 되어 멤버들이 리허설 스튜디오에 모여 노래 연습을 하고 있을 무렵, 스태프들과 함께 카키자키가 돌아왔다. 그녀의 왼 팔은 삼각건으로 고정되어, 목에 걸려있는 채였다.
이런 카키자키의 모습을 본 순간, 사이토 쿄코는 ‘설마!’라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아침에 카키자키가 쭈그려 앉을 때만 해도 그 누구도 그녀가 이토록 크게 부상을 당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카키자키와 함께 서 있던 스태프가 입을 열었다.
‘다들 보면 알겠지만, 카키자키의 왼 팔이 골절되었습니다. 마쿠하리 라이브에도 참가 할 수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충격 발표에 멤버들 대다수가 울기 시작했다.
사실 이 날, 대망의 라이브까지는 겨우 이틀 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위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나가노현에서 태어나고 자란 카키자키 메미는 어째서인지 어릴 때부터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유치원 때나 초등학생 때 학예회에서는 딱히 자신이 입후보 하지 않았음에도 친구들의 추천으로 공주 역할에 발탁 되기도 하였다. 그런 활발한 성격은 커서도 변하지 않아, 친구도 많이 생겼으며 중학생이 되어서는 미술부 부장이나 학생회 서기에 뽑히기도 하였다.
히라가나 케야키 오디션 합격 발표때에도 그녀의 위치는 단상 한 가운데였고, 히라가나 케야키의 첫 오리지널곡인 ‘히라가나 케야키’에서도 그녀는 나가하마와 더불어 더블 센터 자리에 서게 되었다.
가입 당시 14살로 그룹 최연소 멤버였던 카키자키의 별명은 ‘껌딱지(※원문은 ‘ひっつき虫’, 원래는 도깨비바늘처럼 종자 끝에 갈고리 등이 있어서 다른 동물이나 사람에게 붙어서 씨앗을 퍼뜨리는 식물을 뜻함)’. 그 정도로 항상 다른 멤버들에게 딱 붙어서 응석을 부리곤 했지만 그런 평소 모습과는 달리 때로는 매우 격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히라가나의 세 번째 오리지널 곡인 ‘우리들은 사귀고 있어’에서 센터인 나가하마의 뒤, 다시 말 해 1.5열 정도의 애매한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에는 분한 모습을 감추지 못 하기도 하였다. 물론 단순히 ‘센터에서 탈락했기 때문’에 분해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분해한 까닭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실력 부족’을 실감했기 때문이고, 동시에 ‘내 실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니까, 이렇게 어중간하게 뒤로 보내지 말고 아예 확 뒷줄로 보내주지…’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본디 카키자키가 센터에 서는 한자 케야키의 ‘후타리 세종’에서 이구치가 솔로 댄스파트를 소화하게 되었을 때, ‘센터는 메미가 서면 되는데 왜 하필이면 나야?’라고 투덜대는 이구치를 보았을 때는 진심으로 화를 내기도 했다.
카키자키는 그런 이구치를 보며 ‘아무리 울어봤자 변하는 건 없으니까 하기로 결정 된 건 최선을 다 할 수 밖에 없잖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카키자키 역시 센터에 서면서 수 없이 눈물을 흘려 왔지만, 단 한 번도 ‘못 한다’고 이야기 한 적은 없었다. 그렇듯 그녀의 끈기와 한 번 정한 일은 어떻게든 끝까지 해 내는 근성은 거의 기품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카키자키를 잃게 된 것이다. 그것도 마쿠하리에서 열리는 큰 무대를 앞두고.
사실 카키자키 본인도 넘어져서 손을 짚었을 때, ‘아, 이거 큰일이네’라고 실감을 했다고는 하지만, 병원에 가서 X선을 찍고, 의사의 입으로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은 순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펑펑 울었으면 의사가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자신이 히라가나의 멤버로서 노력 해 온 1년 반의 성과를 선보이는 라이브에 참가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 바로 그 때 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리허설 스튜디오에 돌아 온 카키자키는 다른 멤버들이 그녀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도 의연하게 하늘만 쳐다보며 눈물을 참고 있었다. 그녀는 그 때, 마음 속으로 이렇게 되뇌고 있었다. .
‘여기서 내가 울면 안돼. 지금 내가 울어서 다른 멤버들 마음이 흐트러진다면 마쿠하리 공연은 성공시키지 못 해’
카키자키가 라이브에 참가하지 못 하게 되어, 본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타이밍에 모든 곡의 포메이션을 변경해야만 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른 멤버들이 메미의 파트를 커버하며 최고의 공연을 선보이겠다’는 팀 전체의 의지에 따른 선택이었다.
그리고 카키자키 역시 리허설 내내 스튜디오를 떠나지 않고 다른 멤버들의 연습 상황을 지켜보았다. 라이브에 참가 할 수 없게 되어 가장 분한 것은 본인일텐데도 다른 멤버들을 생각하여 눈물을 참았던 그녀의 심경을 헤아리기라도 했는지 다른 멤버들도 그녀에게 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자세는 그 곳에서 연습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평소에는 마음이 약한 편인 카토 시호조차 ‘이제 와 울어봤자 변하는 것 없다’는 스태프의 말에 단호하게 ‘지금 우는 건 슬퍼서 우는 게 아니에요. 분해서 우는 거지’라고 받아 칠 정도였다. 카토 뿐만이 아니었다. 카키자키와 함께 무대에 설 수 없다는 ‘분함’이 멤버들의 투지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그렇게 투지에 불타는 선배들을 바로 곁에서 보고 있던 것이 바로 들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2기생들이었다. 그녀들은 1기생의 기세에 휩쓸려 덩달아 달아오른 스태프들과 선배들이 서로 팽팽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던 현장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지만, 그 때 자신들의 눈으로 목격한 리허설 광경은 바로 그 날 이후 그녀들이 일에 임하는 자세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결정적인 장면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마치 폭풍과도 같던 이틀이 지나, 결전의 날이 찾아왔다.
‘여기서 이대로 멈춰 설 수 없어’
라이브의 막을 연 것은 히라가나 케야키자카46의 첫 오리지널곡 ‘히라가나케야키’. 해당 곡의 더블 센터인 나가하마 네루, 카키자키 메미 두 명이 모두 빠지고 10명이서 퍼포먼스를 했던 것이다.
카키자키는 그 날도 스테이지 옆에 설치된 모니터 앞에 앉아 멤버들의 퍼포먼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라이브가 시작 된 직후에는 자신이 그 곳에 서 있지 않는다는 분함과 자신 탓에 모두가 힘들게 준비 해 온 롤러 스케이트 퍼포먼스가 중지되었다는 죄책감에 몇 번이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스테이지에 선 것은 10명만이 아니었다. 라이브를 앞두고 모두가 빙 둘러서 원진을 짰을 때, 카키자키도 그 원진에 포함 되어 있었으며, 누군가가 ‘네루쨩’이라고 이야기 하자, 사사키 쿠미가 목소리를 높여 ‘네루쨩 자리는 비워 줘! 자, 그럼 12명 전원이 온 힘을 다 해 라이브에 임하자!’ 라고 이야기 했던 것이다.
1기생들에게 있어서는 말 그대로 ‘지금까지의 노력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이브였기에, 남은 멤버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나가하마 네루, 카키자키 메미의 몫까지 더한 12명 전원의 해피 오라’를 관객들에게 전하겠다는 의식이 싹 터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슴 속에 품고 넓은 마쿠하리의 스테이지 위에서 노력하는 10명의 모습을, 겨우 10명이서 그 큰 무대를 꽉 채우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무대 옆에 서 있던 카키자키의 심경도 점점 변해갔다.
‘라이브라는 거, 보고 있기만 해도 이렇게 기운이 나는 거구나. 당장 나만해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정말이지 히라가나케야키 멤버들이 좋아.’
그리고 카키자키는 이 날, 멤버들이 옷을 갈아 입으러 들어 올 때나 유닛곡 교대를 위해 스테이지 옆을 지날 때 마다 웃으며 ‘힘 내!’라고 격려했다.
이 날 이렇게 새롭게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은 카키자키만이 아니었다. 그룹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2기생들 역시 역사적인 첫 걸음을 뗀 것이다.
라이브가 중반에 다다랐을 무렵, 2기생들이 한 명씩 무대 위로 올라 와 자기 PR을 하였다. 그리고 2기생들의 자기소개가 끝난 뒤, 1기생들이 합류하여 ‘NO WAR in the future’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4박자의 비트에 맞추어 주먹을 높게 든 채 점프를 하는 등 격렬한 안무가 군데군데 들어 간 파워풀한 곡이었다.
간주중에는 멤버 전원이 한 데 모여 거대한 ‘히(ひ)’자를 만들었다. 스테이지 위쪽에 설치한 카메라는 이 모습을 모니터에 비추어 냈다. 이는 다인원 그룹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다이내믹한 포메이션이었다.
2절 A멜로디에는 1기생과 2기생이 한 명씩 팀을 이루어 차례차례 무대 앞으로 나아가 포즈를 취하는 파트도 준비 되었다. 말하자면 이 곡의 안무는 1기생과 2기생 사이의 융합을 촉구하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안무에는 멤버들이 몰랐던 숨겨진 테마가 있었다. 바로 ‘멤버들이 카메라를 의식하게 만든다’는 테마였다.
그녀들의 선배인 한자 케야키자카46의 라이브에서는 멤버들의 얼굴조차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강한 역광을 준 상태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연출이 자주 사용되곤 한다. 이는 보는 이들을 도취시킬만큼 환상적인 광경인 동시에, 여타 다른 아이돌의 무대와는 확연히 다른 컬러를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된다. 이 당시 히라가나 케야키자카46의 라이브 역시 큰 틀에서는 한자의 그것을 답습하는 방향으로 연출의 방향성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선배들의 연출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히라가나만의 색을 내기 위해 준비 한 것이 바로 ‘모니터를 향한 어필’이었다. 멤버 각자가 자신이 언제 원샷을 받게 될 지를 의식하고, 자신의 타이밍에 맞추어 보는 이들에게 어필을 하는 스타일은 어찌 말하자면 아이돌 라이브의 기본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의 대선배인 노기자카46의 라이브에서도 너무나도 당연히 실시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자면 이런 식의 ‘아이돌스러운’ 면모와 ‘쿨한’ 면모를 동시에 선보이면서도 확실히 구분 하는 점에서 히라가나 케야키 특유의 ‘노기자카와 케야키자카의 복합체’적인 면모는 이미 이 라이브에서 어느 정도 정립 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이브 마지막 부분에서는 카키자키 메미를 포함하여 1기생 전원이 ‘W-KEYAKIZAKA의 노래’를 불렀다. 골절을 당한 왼 팔을 히라가나 케야키의 깃발로 감싼 카키자키가 무대 위로 올라 와, 마이크를 잡자 회장의 분위기는 폭발할 듯 끓어올랐다.
‘지금 이 무대에 11명 전원이 설 수 있어 정말로 행복합니다.’
카키자키를 비롯한 히라가나 케야키자카46 1기생 멤버들은 그룹 가입 직후부터 일부 팬들에게 ‘케야키자카46에 언더 그룹 따윈 필요없어’라 야유를 받았던 일을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 하고 있었다. 그랬던 자신들이 지금은 이리도 넓은 마쿠하리 멧세가 자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타올을 든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광경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기분과 동시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그렇게 이틀간 이어진 라이브의 마지막 MC에서 사사키 쿠미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다.
‘저희들은 네루쨩 한 명으로 시작되어, 12명이 힘을 모아 지금껏 활동 해 왔습니다만, 어느 사이엔가 11명이 되고, 이제는 2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네루쨩의 의지는 저희가 이어 갈 생각이며, 지금은 저희들을 그 자체로 좋아 해 주시고 응원 해 주시는 분이 이렇게나 늘었습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여기서 이 상태로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한참 미숙한 저희입니다만, 9명의 후배들과 함께 더욱 더 믿음직스럽고, 더 멋지고, 해피 아우라를 뿜어내는 그룹이 될 수 있도록 20명 전원이 노력 해 나가고자합니다.’
그녀가 문장 하나 하나에 진심을 담아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동안, 객석을 가득 메운 팬들은 마치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숨죽여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세워진 모니터에는 지난 1년 1반 동안의 일들을 떠올리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멤버들의 얼굴이 크게 클로우즈 업 되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카키자키 메미의 골절이라는 불의의 사고를 극복 해 내며 치러진 히라가나 케야키자카46 최대의 라이브는 무사히 그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직후에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시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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