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거리감, 생각을 공유 할 수 있는 관계성
- 히라테는 불과 14살에 불과한 나이에 싱글 ‘사일런트 마조리티’를 통해 아이돌로 데뷔하였으며 키타가와는 17살의 나이로 잡지, 드라마 등을 통해 연예계에 데뷔하였다. 아직 어린 10대에 연예계라는 가혹한 환경에 뛰어들게 된 두 사람. 그런 공통점이 있기에 키타가와는 히라테의 현재 모습을 보며 느끼는 점이, 히라테는 키타가와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며 느끼는 점이 각각 있다고 한다.
키 : 생각 해 보니까 사적으로 이렇게 매일 연락을 주고받는 건 히쨩밖에 없는 것 같아.
히 : 정말? 생각 해 보니 나도 그래.
키 : 뭐 딱히 말을 안 나누고 서로 스티커만 주고 받는 경우도 있잖아? 딱히 대화를 안 해도 그렇게 서로서로가 잘 지내는 지 확인하는 경우. 뭐, 말하자면 생존보고 같은 느낌? (웃음)
히 : 응. 그거! 그거! ‘후미도 열심히 일 하고 있구나!’라고 안심하면서 매일매일 일 하러 가곤 해.
키 : 나도 그래. ‘아, 히쨩은 이런 늦은 시간에도 깨어 있구나’라던지 말이야. 어쩌면 다른 누구보다도 서로의 일상 생활을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히 : 응.
키 : 우리들은 정말로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지.
히 : 응. (웃음) 후미랑 이야기 나누는 건 즐겁기도 하고 마음이 편해. 심지어 재미있기까지 하고. 정말이지 이런 관계성 너무 좋아.
키 : 히쨩은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지만 한마디씩 하는 말이 때때로 굉장히 핵심을 꿰뚫곤 하거든. 조언을 해 줄 때도 적확한 조언을 해 주고. 그런 히쨩을 보고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면이 ‘특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 어쩌면 나도 특이한 사람이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히 : 결론이 그렇게 나? (웃음) 하지만 난 내가 되게 평범하다 생각하는걸.
키 : 나도 나 자신이 평범하다 생각해. 하지만 우리 둘,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꽤나 특이한 사람들일거야. (웃음)
히 : 그럴까?
키 : 히쨩은 예의도 바르고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상식도 갖고 있지만 어디라고 콕 찝어서 이야기 하긴 힘들어도 분명 특이한 부분이 있어. 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런 면도 이해 해 줄 사람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기 마련이고, 그런 ‘이해자’들이 응원 해 주시는 것 아닐까?
히 : 그럴지도 모르겠네.
키 : 자신의 감성을 믿어야 하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잖니. 뭐, 그렇게 생각하면 특이한 부분이 있다 해도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히 : 그건 그렇지.
키 : 얘기하다보면 이런 식으로 점점 깊은 이야기로 발전하곤 하잖아.
히 : 후미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10대였을 때 있었던 이야기들을 종종 해 주잖아? 그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정말로 안심이 돼.
키 : 내가 처음 데뷔 한 건 잡지 ‘세븐틴’이었지. 그리고 거의 같은 타이밍에 ‘세일러 문’의 TV드라마를 통해 드라마도 데뷔 했었고. 하지만 두 가지 일 모두 어린 여자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어. 함께 같은 잡지를, 작품을 만들어 가는 동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모두가 라이벌이었지. 그런 사람들이 잔뜩 있는 복잡한 환경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래저래 어려운 일들이 많았어.
단체 행동을 할 땐 서로서로 협조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법인데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고 남들보다 더 빛을 내서 스포트라이트를 내 쪽으로 끌고 오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니까. 그런 환경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랑 허물 없이 친해지는 것도 힘들었고, 내 생각보다도 더 치열한 전장 같은 곳이었어. 주변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항상 고독했다는 것이 내 10대 시절에 대한 솔직한 감상이야. 정말 언제나 외톨이었거든. 주변에 사람이 많건 적건.
한 곳에 수 많은 개성들이 모여 있는데 그 개성들이 하나가 되어 움직여야 한다는 것도 힘들었어. 물론 그렇게 개성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도움이 된 점도 있었지만 말이야. 물론 머리로는 이해를 하고 있었지만 이해를 하고 있다 해도 그런 환경에 놓여있다는 것 자체가 상상보다 훨씬 더 힘들었어.
20대가 된 뒤로는 나 개인에게 여러 일들이 주어졌는데,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혼자 모든 것을 해 나가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고.
각자 몸담고 있는 분야가 다르긴 하지만 결국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일이라는 거, 사실상 자기 자신을 축내면서 해야 하는 일이잖아? 자신이 힘들다고 설렁설렁 하면 작품이 어중간해지고, 그게 싫어서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고 전력투구하면 결국 남는 건 너덜너덜해 진 자신의 모습이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매번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어도 상관없어’라는 각오로 전력을 다 해야만하는 일이다 보니, 어떻게 보면 이 업계의 가장 큰 난관은 수십년간 변함이 없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대가로 팬분들께서 ‘이번 작품 정말 좋았어요’, ‘이번 작품을 통해 용기를 얻었어요’라고 말씀 해 주시는 것을 들으면 역시 ‘다음 작품에도 최선을 다 하자’는 생각이 들지.
히 : 그건 그래.
키 : 얼핏 보기에는 화려해 보이기만 하는 일일지 모르지만, 사실 심신 모두 곤죽이 될 정도로 쥐어 짜 내면서 일 하고 있잖아.
히 : 응. 정말 너덜너덜해지곤 해.
키 : 그러니까 꼭 같이 온천 가자는 얘기야.
히 : 그러자. (웃음) 뭐라 해야하지, 방금 전 얘기 같은 것들 듣다 보면 후미랑 나는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나와 공감이 될 사람, 공감 해 주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키 : 히쨩의 모든 것이 공감할 곳 투성이인걸. 나는.
히 : 정말?
키 : 팬 여러분께 좋은 작품을 보여드리려면 결국 나 자신을 만신창이로 만들어야 하잖아. 나도 촬영하면서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자세를 취하거나 무모한 액션 연기에 도전하거나 하거든 (웃음) 하지만 결과적으로 해 내고 나면 아드레날린이 막 뿜어져 나오지.
히 : 응. 그래서 결국 어떻게든 해 내고 마는거고. 이렇게 이 일을 하면 결국 나 자신이 만신창이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키 : 사실 아이돌 그룹같은 경우, 아무리 다들 서로 사이가 좋다고 해도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프로’인 집단이다 보면 의견 충돌은 있을 수 밖에 없잖아. 그냥 ‘우리 사이 좋아요’라는 미사여구로 포장 할 수만은 없는 세계니까. 하지만 그렇게 치열하게 부딪히는 것도 결국 언젠가는 ‘그렇게 살길 잘 했다’고 되돌아 보는 날이 오기 마련이야.
히 : 응. 나야 아직 데뷔한지 4년차 밖에 안 되었지만 매일매일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키 : 그렇지. 어찌저찌 오늘을 버텨내면 내일이 오고, 내일을 버텨내면 모레가 온다는 느낌. 우리들 정말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고 있지.
히 : 응.
키 : 때때로 ‘내일 잘 일어날 수 있으려나’라는 걱정이 될 정도로 녹초가 되기도 하지만.
히 : 그렇지.
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해 나간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 해 보면 내가 데뷔 한 건 17살 때였던 데 비해 히쨩은 겨우 14살에 데뷔 했잖아. 그거,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중학생에 불과한 소녀가 이 힘든 환경에서 싸워 왔다는 게. 그렇기에 좀 더 많은 분들께서 ‘히라테 유리나라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어.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아니 그것보다도 더 노력하고 있는 아이라는 것을 말이야.
히 : 고마워. 후미랑 이야기 하고 있으면 이렇게까지 서로를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에 깜짝 놀라고, 나를 너무 잘 알아줘서 안심하곤 해.
키 : 아이돌의 센터처럼 남들 앞에 서서 주도적으로 일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거, 한 시즌내내 방영되는 드라마의 주연을 할 때의 기분과 비슷 할 것 같아. 자신이 메인이 되어서 일을 해야 하지만 동시에 다른 출연자들과도 보조를 잘 맞추어 가며 일을 해야 하지. 의견을 내야 할 땐 확실히 의견을 내야 하지만 그 의견이 자신만 생각하는 고집이 되어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작품 전체가 잘 되기 위하여 내는 의견이어야 하고. 그렇게 의견을 내다 보면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어. 그럴 때 느끼는 내 마음을 히쨩은 잘 알아 주고, 반대로 나 역시 ‘히쨩은 이럴 때 이런 마음이겠지’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북돋고 용기를 얻기도 해.
히 : 나도 마찬가지야. ‘후미도 이런 식으로 노력해 왔겠구나’라고 생각하곤 하는걸.
키 : 히쨩은 이미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걸.
히 : 에이, 아직 멀었어.
키 : 자신이 놓인 환경에서 최선을 다 해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 둘 다 조금 서툰 부분이 있을 지도 몰라. 하지만 확실한 건 ‘전력을 다 하고 있다’는 점.
히 : 응. 그런 노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힘이 나.
키 : 세세하게 모든 것을 보고하진 않아도 ‘아, 히쨩은 알아 주는구나’라고 느껴지는 경우는 꽤 있지.
히 : 진짜?
키 : 응. 특히 ‘나를 배려 해 주는구나’라는 점은 정말 잘 느껴져.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 관계, 정말 좋은 관계네!
히 : 응. 좋은 관계야.
다음에 함께 일을 한다면 어떤 일을?
- 비록 서로 활약하는 분야가 다르지만 ‘표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더욱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남들 앞에 서서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두 사람이기에 서로의 마음이 잘 통하고, 각자가 끌어안고 있는 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만약 다음에 함께 일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해 보고 싶은 지’라는 주제를 중심 축으로 하여 두 사람이 그리는 상상과 희망에 대하여 들어 보기로 했다.
키 : 다시 한 번 함께 일 해 보고 싶어. 만약 히쨩이 다시 영화에 출연한다면 나도 꼭 같은 작품에 나가고 싶어.
히 : 나도 내가 영화에 나갈 일이 있다면 후미가 함께 나와줬으면 해. 어떤 역이든 좋으니까.
키 : 한 장면만 나오는 단역이라도 좋으니 부디 나가고 싶어. ‘히비키’처럼 우리 둘이 중심이 되는 건 힘들지도 모르지만 함께 연기를 하게 된다면 다시 한 번 ‘후미’가 되고 싶어.
히 : 응. 꼭 나와줬으면 해.
키 : 그리고 자주 ‘함께 버라이어티에 나가고 싶다’는 말도 하잖아.
히 : 응.
키 : 지난번처럼 영화 선전하러 나가는 게 아니라 ‘저희 잠깐 나왔어요~’ 같은 느낌으로 가볍게 나가 보고 싶어. 아무래도 영화 선전으로 나가면 무엇보다도 ‘영화를 PR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앞서니까.
히 : 응. 나도 그런 의무감 없이 함께 나가보고 싶어. 후미와 함께라면 어떤 일이건 괜찮아.
키 : 여행 방송 같은 것도 좋겠다. 그러면 일부러 쉬는 날 일정을 맞추지 않아도 함께 온천여행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여자 단 둘이 가는 여행’ 느낌으로.
히 : 그거 좋다!
키 : 온천 들어 가 있는 부분은 촬영 안 하고. (웃음) 아침 먹을 때 정도는 괜찮지만.
히 : 정말 좋은 생각이야!
키 : 일이라 해도 그런 일이면 즐거울 것 같고.
히 : 일이 그런 식이면 괜찮을 지 모르겠는데. (웃음) 하지만 정말로 둘이 함께 뭔가 하고싶어. 이렇게까지 사이가 좋아진 상황에서 다시 한 번 함께 일을 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알고싶기도 하고.
키 : 아, 내가 케야키자카46 MV에 출연하는 것도 괜찮겠다!
히 : 에에에?!? 정말이야? 대박…
키 : 뭐 이렇게 케야키자카 특집 잡지에 내 인터뷰가 실린다는 것만 봐도 내가 케야키자카라는 그룹에 다가가고 있다는 얘기 아니겠어?
히 : 그렇네. 천천히 다가오고 있어. (웃음)
키 : 정말로 다음 MV에 배경으로라도 잠깐 나올 지 몰라!
히 : 아니 아예 후미가 센터에 선다던지.
키 : 에? 둘이서 센터에 딱 서?
히 : 딱 서 버려? (웃음)
키 : 사실은 이렇게 사이 좋으면서도 일부러 외부적으로는 ‘우리 엄청 사이 나빠요’라고 어필 해 본다던지?
히 : 거꾸로 말이지.
키 : 서로 흘긋흘긋 째려본다던지 말이야.
히 : 촬영장 분위기 엄청 살벌하게.
키 : 메이킹 비디오에서도 엄청 살벌하게 연기 해 보는거야. ‘야, 왜 오늘 메이크업 받는 자리가 얘 옆인데.’ 라고 짜증 낸다던지 (웃음)
히 : 그거 엄청 무서운데! (웃음)
키 : 아, 인터뷰에서 이런 바보같은 이야기 해도 되는건가 모르겠네. (웃음) 뭐, 인터뷰라고 일부러 격식 차리면서 이야기 하는 것도 좀 웃기고 하니 그냥 평소처럼 대화를 나눴네.
히 : 응. 정말로 평소같아.
키 : 수다가 끊기질 않지.
히 : 응. 끊기질 않아.
키 : 하지만 오늘은 이쯤 해 둘까? 쌓인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 계속 하자.
히 : 응.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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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촬영 현장을 떠나 개인적으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짐에 따라 히라테와 키타가와의 관계는 유일무이한 관계로 승화되었다. 그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사람. 서로를 처음 만났을 때의 첫인상은 어떠하였는 지가 궁금해졌다.
키 : 처음 만났을 땐 ‘뭔가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어. 물론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 없고. 처음 만난 게 캐스팅 된 배우들 대면식이었잖아?
히 : 응. 그랬지.
키 : 그 때 히쨩 머리 금발이었지. 일 관계로 염색했다고 했어.
히 : 응. 그 때 마침 금발이었어.
키 : 그래서 ‘쟤 성격 좀 세 보이네’라고 생각했어. (웃음) 하지만 이야기 해 보니 그냥 평범한 10대 소녀더라고. 금전감각도 그냥 평범했고. 하지만 일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프로로 돌변하더라고. 자기 의견을 적확하게 표출하며 의견 교환을 한다던지. 그 두 모습 사이의 갭이 정말 너무 귀엽더라고. (웃음) 어른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함께 사진 찍자’며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 그냥 그 나이대의 소녀이기도 하고 말이지.
히 : 갭모에라니… 그럼 이번엔 내가 후미의 첫인상을 이야기 해 볼게. 음… 어떤 이미지였더라… 사실 아마도 너무 긴장해서 후미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 했던 것 같아. 나 낯가림이 엄청 심하거든.
키 : 응. 실제로 눈이 마주친 게 2~3번 뿐이었으니까. 계속 자기 무릎만 보고 있었어.
히 : 응. (웃음) 시선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몰라서 헤맸어. 일단 인사 하고 자기 소개를 한 뒤에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하는 것 만으로도 벅찼거든. 뭔가 미안한데…
키 : (웃음) 결국 내가 엄청 질문을 해 댔었지? 원작은 읽었니? 만화 좋아하니? 라는 식으로 되게 귀찮게 굴었을거야.
히 : 귀찮게 굴다니. (웃음)
키 : 그 때 성심성의껏 대답 해 줬잖아. 사실 나도 10대 때 이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엔 히쨩이랑 비슷했거든. 회의실 같은 데에 들어가서 선배님들께 인사를 하는 것만 해도 엄청 긴장이 됐고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 지도 몰랐고 말이야. 그래서 히쨩을 보며 ‘지금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고 있구나’라는 건 금방 알겠더라고. 나도 낯가림이 심하다보니 히쨩이 이 분위기를 얼마나 어색하게 생각하고 있을 지도 이해가 됐고. 그래서 역시 내가 언니니까 분위기를 바꾸어 보자 싶었어.
히 : 응. 나도 후미가 낯가림이 심하다는 얘기는 들었어.
키 : 그렇지. 그러니까 나도 꽤 용기 내서 말 건 거라고. (웃음) 내가 언니인데 여기서 낯가림이 심하네 뭐네 핑계 대면 안되겠다 싶었지. 하지만 지금 생각 해 보면 둘 다 낯가림이 심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는 점도 친해진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 둘 다 들이대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까 자연스레 마음이 맞았던 것 같아. 사실 누구라도 금방 친해지는 타입도 아닌데다가, 심지어 알게 된 계기가 일 관계면 그 뒤로도 일 관계로만 엮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히쨩이랑은 정말이지 기적적인 타이밍에 만나 좋은 관계를 맺은 것 같아.
함께 시간을 보내는 법, 그리고 함께 해 보고 싶은 것
- 키타가와와 히라테는 상대방에 대해 나이 차이, 몸 담고있는 장르의 차이 등을 넘어 서로를 존경하고 있고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존재라 이야기 해 주었다. 각자 눈코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에도 서로를 만나기 위해 없는 시간을 쥐어짜 낼 정도라는 두 사람. 함께 해 보고 싶은 일도 잔뜩 있다고 한다.
키 : 영화 촬영이 끝난 뒤에도 자주 만나긴 하지만, 사실 대부분이 잠깐 만나서 식사를 함께 하는 정도라는 게 좀 아쉬워.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훌쩍 지나 있고 말이야.
히 : 그렇지.
키 : 헤어질 때가 되면 ‘지금까지 무슨 얘기를 나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야. 하지만 그렇게 만나서 금방 시간이 간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잘 맞는다는 얘기겠지.
히 : 응. 무조건 그렇지.
키 : 생각 해 보면 15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니까, 일반적으로는 세대차이도 느껴질 법 한데.
히 : 세대차이라… 있으려나? 사실 나 같은 경우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대부분 30대인걸.
키 : 정신적으로 성숙해서 그런 게 아닐까? 이렇게 보면 일반적인 여고생들이 좋아할만한 것들엔 흥미 없어 보이는걸.
히 : 그건 그래. 하지만 ‘가급적 지금 이 순간을 살자’라는 생각은 갖고 있어. 예를 들어 요즘 유행하는 타피오카 밀크티 (※버블티)에 대해 큰 흥미는 없어도 일단 한 번은 마셔 본다던가. 그렇게 하는 건 좋아해.
키 : 나 같은 경우에는 버블티 하나 마시겠다고 몇십분씩 줄 설 엄두조차 못 내는데 말이야. 그러다 보니 편의점에서 파는 것 말고는 마셔 본 적도 없어.
히 : 에! 정말? 그럼 안돼! 얼마나 맛있는데. 꼭 마셔봐. 아, 그래. 다음에 만날 때 사 갈게.
키 : 그렇다면 차라리 함께 줄 서서 사 마시자.
히 : 응! 함께 줄 서서 마시자!
키 : 그러고 보니 요 전에 만났을 땐 나 때문에 미술관에 줄 섰었네.
히 : 그랬지. (웃음)
키 : 우에노에 있는 도쿄도립 미술관이었지? 클림트(※구스타프 클림트. 오스트리아의 상징주의 화가)전 보러 갔던거.
히 : 응. 클림트. 그 땐 입장하는 것 만으로도 엄청 줄 서서 기다렸지.
키 : 심지어 비까지 왔었잖아! 사실 그 때 둘이서 이틀 휴일을 받아서 온천여행 가자고 했었는데 둘이 동시에 이틀씩이나 휴가를 맞출 수 없었지. 하지만 하루 정도는 어떻게든 맞출 수 있어서 이전부터 가고 싶었던 클림트전에 끌고 갔었잖아.
히 : 끌고 갔다니.. 전혀 그렇지 않아! 나도 미술관 좋아하는 걸!
키 : 응. 같이 가자고 했을 때 흥미를 가져 줘서 고마웠어. 미술관에 함께 간 건 그 때가 처음이지?
히 : 같이 식사하는 것 외에 어딘가를 함께 간 것 자체가 그 때가 처음이잖아. 하지만 같이 가자고 해 줘서 정말 좋았어. 정말 멋진 그림도 많았고.
키 : 정말 대단했지. 특히 누다 베리타스(※벌거벗은 진실이라는 뜻으로 클림트의 대표작 중 하나)라는, 전라의 여성이 그려진 작품이 좋았어. 위아래로 긴 캔버스에 중성적인 여성이 그려져 있고, 여성의 발부분을 뱀이 휘감고 있는 작품 말이야. 우리 둘이 다 좋다고 했던건 ‘언덕이 보이는 정원’이라는 꽃밭 그림이었던가?
히 : 응. 그거 정말 좋았어. 그것 말고도 출입문 근처에 걸려 있었던 ‘헬레네 클림트의 초상’이 좋았어.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아이의 옆모습 그림. 정말 좋아서 엽서와 굿즈까지 샀을 정도.
키 : 나도 마음에 드는 것들을 여러 종류 샀는데 알고 보니 둘이 산 게 거의 겹쳤지.
히 : 응. (웃음)
키 : 정말 좋은 자극이었어. 일 면에서도 여러 모로 참고가 되었고. 둘이 서로 ‘이런 세계관으로 MV 찍어보고 싶다’던가 ‘이런 의상 입어보면 어떨까?’같은 얘기를 했잖아.
히 : 응. 했었지.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어.
키 : 그러니까 정말 언젠가 시간 넉넉하게 잡고 온천에서 하루 묵으면서 진득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어.
히 : 응. 가고 싶어.
키 :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되니까 자연 속에서 느긋하게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역시 ‘18살짜리가 이런 여행 계획에 찬성하다니, 역시 좀 애늙은이 같은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드네. (웃음)
히 : 애늙은이 같다? 그런 부분도 있을 지 모르겠네. 하지만 후미랑 둘이서 느긋하게 있고 싶은걸.
키 : 히쨩이랑 간다면 분명 즐거울거야.
히 : 응. 아무나 같이 가는 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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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적인 타이밍에 만난 두 사람, 서로에 대한 인상은?
- 히라테 유리나의 첫 출연작인 동시에 처음으로 주연에 발탁된 영화 ‘히비키’가 개봉한 지 10개월여가 지났다. 본작에서 주인공인 아쿠이 히비키를 연기한 히라테는 아이돌로서 뿐 아니라 배우로서도 일약 큰 주목을 받으며 ‘제 42회 일본 아카데미상’ 신인 배우상 및 ‘제 28회 일본 영화 비평가 대상’ 신인 여우상을 수상하는 등 큰 성과를 내는 동시에 스스로도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 뿐 아니라 히라테는 이 작품에서 만난 동료 배우와 ‘유일무이’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동료배우는 다름 아닌 극중에서 히비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여주는 편집자 하나이 후미 역할을 맡은 키타가와 케이코이다. 영화 촬영이 끝난 뒤에도 서로를 부를 땐 영화 캐릭터의 애칭을 딴 ‘히쨩’, ‘후미’라고 부른다고 하는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거의 매일같이 연락을 주고받고, 시간이 될 때면 만나서 시간을 보낼 정도라고.
본지는 그런 두 사람에게 ‘히비키’ 프로모션이 끝난 뒤 처음으로 대담 특집을 제의하였다. 공적인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은 10달만이라 하는 두 사람에게 ‘처음 만났을 때 느낀 서로의 첫인상’부터 ‘사적인 자리에선 어떤 사람인지’, ‘일을 대하는 자세’, ‘앞으로 함께 도전 해 보고 싶은 일’, 그리고 ‘서로에게서 받은 영향’ 등에 대하여 질문을 해 보았다.
키타가와와 히라테가 개인적으로 단둘이 만났을 때 처럼 편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이번 대담동안 ‘거리가 가까운 사람들이기에 이해 할 수 있는’ 일종의 ‘운명적인 관계성’을 느낄 수 있었다.
키타가와 케이코 (이하 ‘키’) :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함께 취재를 받는 건 10달만인가…
히라테 유리나 (이하 ‘히’) : 사실 개인적으로는 자주 만나니까 이렇게 새삼스럽게 대하는 게 좀 어색한데. 당장 전에 만난 게 지난주였고.
키 : 아까 전에 사진 촬영 할 때도 뭔가 좀 어색했지?
히 : 응. (웃음) 그래서 오늘 취재는 어떻게 응해야 할 지 갈피가 안 잡히더라고.
키 : 사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친해졌다는 거, 생각 해 보면 좀 신기하지 않아?
히 : 응. 신기해.
키 : 물론 영화에서 맡은 역할이 있으니 그 영향도 있겠지만 말이야. 히쨩이 천재 소설가 아쿠이 히비키 역할이었고, 나는 담당 편집자 하나이 후미 역할이었으니까. 후미는 히비키가 천재라는 점에 대해 확신을 갖고 오래 전부터 주목 해 왔고, 그만큼 히비키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잖아. 촬영이 시작 된 이후로는 히쨩 본인이 내게 있어 그런 존재로 느껴지게 되었고. 그래서인지 처음부터 역할에 몰입이 잘 되었지.
히 : 그렇게 생각하면 분명 역할이 끼친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네.
키 : 둘이 함께 나오는 장면이 많았기에 함께 시간 보내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있을거고. 지금 생각 해 보면 정말로 좋은 추억이야.
히 : 응. 후미가 없었더라면 나는 촬영 끝까지 버티지 못 했을거야.
키 : 그렇게 보면 처음에 친해지게 된 계기는 역할 때문이라 생각하거든. 그런데 이렇게 그 후로도 계속 친하게 지낸다는 게 좀 신기해. 사실 나만해도 여러 작품을 찍었지만 함께 나온 동료들과 이렇게까지 친해지는 게 흔한 일은 아니거든. 작품이 끝날 때면 서로 친해져서 ‘또 만나자’고 이야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서로 바쁘다 보니 다시 만날 기회를 만든다는 게 쉽지 않거든. 하지만 히쨩은 좀 달라. 실제로 시간을 내서 만나고 있잖아.
히 : 응.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만나네. 연락은 매일 주고받고.
키 : 이야기 하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다음 날이 되어 있고, 그 뒤로도 계속 이야기가 끊기지 않는 경우가 많지.
히 : 그렇지. 정말로 끝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아. 신기할 정도로.
- 처음엔 극중 히비키’와 ‘후미’의 관계에 영향을 받아 가까워 진 두 사람.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어느 사이엔가 특수한 것이 되어 있었고, 그 관계의 특수성은 본인들 스스로도 말로 다 옮기지 못 할 정도로 특별한 것이었다.
키 : 가끔 ‘키타가와상에게 있어 히라테상은 어떤 존재인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 지 모르겠어.
히 : 그렇지. 나도 같은 질문을 가끔 받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고.
키 : 절친이라 하기엔 역시 나이 차이가 꽤 나니까 조금 이상해 보일 것 같고, ‘가장 친한 사람’이냐 하면 그렇게 표현하기는 좀 안 맞는 것 같고 말이야. ‘가장 친하다’라고 하면 사실 거기서 끝이잖아. 뭔가 굉장히 가볍게 느껴지거든.
히 : 그러고 보니 아키모토(야스시)상은 ‘미녀 자매’라고 하시던데.
키 : 아, 그거 괜찮네!
히 : 그래? (웃음) 하지만 사실 난 ‘미녀’ 소리 들어 본 적 거의 없는데.
키 : 그럴리가. 히쨩같은 아이 좀처럼 없는걸.
히 : 음… 아무래도 ‘자매’는 좀 안 맞는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딱 맞는 단어가 안 떠오르는데.
키 : 어떤 얘기도 할 수 있는 존재인데다가 숨기는 것도 없고. 무슨 일이 생길 때면 ‘상담’이라 하기엔 좀 안 맞을 지는 모르지만 누구보다 먼저 이야기를 해 주는 그런 관계지.
히 : 평소에도 근황보고 같은 거 자주 하고.
키 : 그렇지. 그 뿐 아니라 서로 마음 속 이야기도 터놓고 얘기 하잖아. 히쨩같은 경우 나보다 어리긴 한데 솔직히 이야기 하고 있으면 나보다 어린 사람이랑 이야기 나눈다는 생각이 안 들어. 히쨩이나 나나 ‘표현 하는 일’에 연관된 사람들이잖아? 그런 점에서 보면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때때로 히쨩이 아직 18살이라는 사실을 잊곤 해.
히 : 우후후
키 : 사실 나 히쨩을 존경하거든. 사실 서로 본업은 다른 분야이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된다고 생각하고.
히 : 분명 그런 점은 있네. 우리 둘의 본업이 같은 분야였다면 지금 같은 관계는 쌓지 못 했을 지도 몰라.
키 : 나 같은 경우는 히쨩을 보며 엄청 자극을 받아. 한 번 만날 때 마다 최소 한두번은 깜짝 놀라게 되거든. ‘아, 이 아이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구나’ 라며 감탄하게 돼.
히 : 어? 정말?
키 : 그래. 히쨩 같은 경우 주관이 뚜렷하잖아. ‘이 부분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던가 ‘이 곡은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라던가. 이야기를 하다보면 히쨩 자신이 어떤 것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제대로 전하려 한다는 점이 잘 느껴져. 나같은 경우 연기가 본업이잔아? 그런데 ‘이 역할은 이렇게 연기해야지’라고 나 스스로 생각해 둔 게 있다 해도 감독님이 ‘이 역할은 이렇게 연기 해 달라’고 하면 감독님 지시에 맞추어 연기를 바꾸곤 하거든. 물론 이렇게 상황에 맞추어 연기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면 중요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생각한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마음을 잊지 않는 점 역시 중요하다 생각하거든. 최근 들어 자주 생각하는 게 있는데, 다름 아니라 ‘나도 내일부터는 히쨩같은 마음가짐으로 연기에 임하자’라는 거야.
히 : 그래?
키 : 요 전에 히쨩을 만나고 나서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 했던가? 어쩌면 그 직전에 만났을 때 였을지도 모르겠다. 왜, 함께 토마토 스키야키 먹었던 때.
히 : 아, 이래저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을 때구나.
키 : 히쨩이 하는 얘기들을 듣고 있자면 나 자신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나 역시도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열정이 넘쳤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정해진 규칙에 익숙해지고 하다보니 그런 열정을 잊고 있었거든. 히쨩은 그런 초심을 일깨워 줘.
히 : 나도 후미랑 이야기 하다보면 여러 모로 자극을 받아. 안심이 되기도 하고. 후미 같은 경우엔 일과 관계된 일 뿐 아니라 대부분의 면에서 말이 잘 통하거든. 특히 연기라는 부분에서는 후미의 프로페셔널한 면에 느끼는 점도 많고. 나 역시 후미가 존경스러워.
키 : 이렇게 보면 서로가 서로를 존경하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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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막 ‘미츠모토 저택 객실’
객실 가운데에 놓여 있는 테이블 주변에 쥰케이, 쥰이치, 마이, 타도코로, 소지로의 아들인 타카미, 모리타 교수가 서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마후유는 메이드 복장으로 음료를 나르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히라노야의 다이후쿠쵸와 미사가 기입한 복식부기 장부가 펼쳐져 있다.
쥰이치 : 이노우에 자작이 쭈뼛대며 돌아가는 모습이라니! 모리타 교수님도 그 장면을 보셨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리고 마이님의 늠름한 모습도 꽤 멋졌고요.
모리타 : 그거 볼 만 했겠군요.
마이 : 어머, 무슨 말씀을. 저는 그렇게 ‘늠름한’ 사람이 아닌걸요.
타카미 : 저도 보고 싶었습니…
타카미의 말을 끊기라도 하듯 소지로가 미사를 이끌고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미사는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다. 타카미의 누이의 드레스였다.
모리타 : 참으로 아름답군요.
쥰케이 : 복식 부기의 여신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군.
쥰이치 : 하카마 차림보다 이런 옷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마이 : 옷이 날개라고 하잖아요.
마후유 : 미사상만 예쁜 옷 입고… 치사해요. 왜 난 메이드 복장인데 미사상은 드레스인가요?
미사는 쑥쓰러운 듯 어색하게 웃으며 소지로의 손에 이끌려 객실 중앙까지 걸어갔다.
쥰케이 : 복식부기의 여신이여, 이 쪽은 테이코쿠대학 교수인 모리타 교수일세.
모리타 : 처음 뵙겠소. 잘 부탁하오.
모리타는 그렇게 인사를 하며 한 쪽 무릎을 꿇더니 비단 장갑을 낀 미사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마후유 : 미사상 치사해요.
마이 : 옷이 날개라니까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예요.
소지로 : 이 쪽은 내 아들인 타카미일세. 타카미, 이 쪽은 이번에 복식 부기라는 것을 발명한 미사양이다.
타카미는 미사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소지로 : 타카미, 지금 그 태도는 뭐냐. 숙녀에게 실례를 범하는 것 아니냐. 당장 제대로 인사 하지 못해?
쥰이치 : 부끄러워 하는 것 같은데요.
갑자기 모리타가 미사의 앞으로 다가왔다.
모리타 : 아까 전에 쥰이치군, 쥰케이님께서 자네가 발명했다는 복식부기라는 것에 대해 말씀 하시더군. 내가 가르치는 전공 과목이 상법이다 보니 전 세계의 장부 기입법에 대해 연구를 했네만, 자네의 그 ‘복식부기’ 비슷한 것도 본 적이 없어.
미사 : 역시 여기는 복식부기가 없는 세계구나…
‘아무래도 여기는 평행세계가 맞나봐. 언젠가 비슷한 얘기를 읽은 적이 있어.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무수한 평행세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던가? 그나저나 어쩌다 이런 세계로 들어 오게 된 거지?’
쥰케이 : 복식부기의 여신양 뭘 그리 인상을 쓰고 있나. 자, 자 다들 잔을 들게. 우선 건배부터 하세나.
쥰이치 : 복식부기의 ‘여신’이라… 아무리 봐도 복식부기 ‘소녀’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마후유 : 미사상 나이를 봐선 ‘소녀’라고 하긴 힘들죠. 뭐, 저도 그렇지만…
‘아직 소녀 소리 들어도 될 것 같긴 한데 말이지…’
쥰케이 : 그래? 내가 보기엔 미사양에게는 여신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말이야. 뭐, 그렇다면 젊은이들의 의견을 따를까? 자 그럼 우리의 ‘복식부기 소녀’를 위하여!
건배가 끝난 뒤, 미사는 잔에 담긴 샴페인을 원샷했다.
일동 : 야, 술 시원시원하게 잘 마시네!
그런 와중에 타카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다.
쥰케이 : 우리의 복식부기 소녀는 술도 잘 마시는구만.
미사 : 그렇지도 않아요.
마후유 : 미사상만 즐기고… 치사해.
미사 : 마후유상도 한 잔 할래?
소지로 : 메이드가 술을 마시면 쓰나. 일이나 하게.
마후유 : 네. 일 할게요.
마후유는 빈 술잔을 들고 부엌쪽으로 힘 없이 걸어갔다.
쥰이치 : 아, 미사양. 미사양이 기입한 복식 부기가 히라노야의 재판에서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을 지에 대해 모리타 교수님께 여쭤보는 건 어떨까요. 때마침 모리타 교수님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상법학자시고 말이죠. 교수님께서 인정하신다면 재판도 쉽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쥰케이 : 타도코로 점장에게 부탁해서 다이후쿠쵸와 자네가 적은 복식부기 장부를 빌려 왔네.
쥰케이는 그렇게 말 하면서 테이블 위에 펼쳐진 장부를 가리켰다.
마이 : 어떻게 해서든 그 야만스러운 재무장관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어요. 그런 작자가 귀족이라니… 왕족의 일원으로서 수치스러워요.
미사 : 저도 동감입니다. 그 자는 정말이지 악독한…
쥰이치 : 우리 복식부기 소녀는 할 말은 하는 성격이군요.
모리타 : 이 재판의 쟁점은 참으로 간단한 것입니다. 바로 ‘빌려 준’ 것인가 ‘빌린’ 것인가라는 점이지요. 하지만 차용증에 ‘히라노야 상점이 이노우에 자작에게 돈을 빌렸다’고 되어 있는 한, 어지간한 증거로는 이기기 힘들 겁니다. 뭐, 귀족을 상대로 돈을 빌려 줄 때는 ‘빌렸다’고 거짓말을 하는 풍습이 있다는 것 정도는 저도 잘 아니까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쥰케이 : 그렇다면 미사양에게 부탁해서 히라노야의 최근 거래를 전부 복식부기로 기록 해 보는 것은 어떨까?
모리타 : 사실 저도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던 차입니다. 이노우에 자작과 히라노야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게 반년쯤 전이니,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최근 1년간의 거래를 전부… 그 뭐라 했지요? 분개라고 했던가요? 그 방법을 이용해서 기록 해 보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이 ‘분개’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계정과목’간의 연동과, 같은 사안에 대하여 여러 번 확인하는 ‘복식’이라는 특성을 활용하면 알기 쉽겠지요. 다시 말 해 이노우에 자작과의 돈거래를 제외한 모든 거래의 내역, 음… 돈을 빌려주거나 되돌려 받거나 하는 거래 내역과 현금 잔고가 아귀가 맞는다면 문제는 이노우에 자작과의 거래 뿐이겠지요. 그러니 이노우에 자작과의 거래 금액과 현금 잔고를 비교 해 보면 돈을 빌린 것인지, 빌려 준 것인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쥰이치 : 아! 그렇네요! 복식으로 거래를 기록하면 모든 계정과목이 연동되니까 어떤 거래 내역이 사실과 다를 경우 반드시 현금 잔고와 맞지 않게 되니까요!
마이 : 대체 무슨 말씀들을 하고 계신 건지 모르겠네요. 쥰이치님은 전부 이해가 되시나요?
쥰이치 : 아, 저도 전부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 복식 부기라는 것은 지금까지의 장부 기입방식과는 전혀 다르네요. 모든 ‘거래’를 원인과 결과로 나누어 ‘분개’ 하나로 표현을 한다는 점이 재미 있군요.
소지로 : 개인적으로는 거래를 ‘차변’과 ‘대변’으로 나누어서 보기 쉽게 만든다는 점이 마음에 드네만.
쥰케이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 역시 이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다름 아닌 ‘보기 쉽다’는 점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실 지금까지의 방식은 솔직히 보기 힘들었지요. 주판을 이용해서 검산을 해야만 하는 방식이었기에 장부만 봐서는 어느 것이 현금 잔액인지도 알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복식 부기는 분개… 복식부기 소녀의 표현에 따르자면 ‘거래의 일기’를 이용해서 하나의 거래를 ‘차변’과 ‘대변’으로 나누어 깔끔하게 알 수 있게 되어 있지요. 그리고 이 ‘분개 내역’ 들을 하나로 정리한 ‘총 계정원장’은 매달 행해진 거래의 대차(빌리고 빌려줌)의 총 합계를 바로 알 수 있도록 월별로 기록하게 되어 있잖습니까. 이런 발상이야말로 앞으로의 장부 기입을 바꿀 한 수라 생각합니다.
모리타 :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앞으로는 장부 기입을 함에 있어 단순히 상인들이 자신의 매상을 관리하기 위해서 기입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상인들에게 투자한 자본가들에게 ‘당신이 투자 해 준 재화는 이렇게 쓰이고 있다’라고 보고 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할 테니까요. 저 역시도 오랜 기간동안 그런 새로운 장부 기입 방식에 대해 궁리 해 보았지만, 미사양이 개발한 이 방식이야말로 앞으로의 변화에 가장 걸맞는 방식이라 생각이 듭니다. 자, 여러분 위대한 복식부기 소녀를 위해 건배 합시다!
모리타의 말에 모두들 건배를 외쳤다. 건배가 끝난 뒤, 미사가 다시 한 번 샴페인을 원샷하자 그 모습을 본 모두가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냈다.
모리타 : 제가 요즘 생각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바로 ‘주식회사법’이라는 것인데요, 다름 아니라 자본가들로부터 막대한 투자를 받아 공업을 중심으로 한 각종 산업을 육성하는 방식입니다. 사실 잉글랜드가 이런 식으로 ‘리미티드 파트너십’ 계약을 발전시켜 막대한 자본을 투자받고, 그 투자를 원동력으로 산업혁명을 일으켜 세계 최강대국이 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주식회사법’은 말하자면 ‘회사법’을 뜻함. ‘리미티드 파트너십 계약’이란 투자자와 기업가를 이어주는 계약을 뜻하며, 이 ‘리미티드 파트너십 계약’이 산업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은 실제 역사와는 다른 이 소설의 설정) 우리나라 역시 그런 잉글랜드를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식회사법을 하루바삐 가결시켜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서 ‘한 눈에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장부’라고 하는 것을, 다시 말 해 ‘주식회사를 만드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요소’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기념비적인 날을 위해 한 잔 더 하시죠!
모리타의 말에 모두들 다시 한 번 건배를 했지만, 미사는 ‘이 이상은 못 마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복식부기에 대해 이렇게 기뻐 해 주니 나도 기쁘긴 한데… 어째서 저렇게까지 복식부기에 감동 하는 거지?’
미사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마후유가 새로운 음료가 실린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마이 : 어려운 얘기들이라 사실 어떤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복식부기라는 것이 있으면 얄미운 재무장관을 혼쭐 내 줄 수 있다는 얘기지요?
모리타 : 그렇게 되도록 저 역시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히라노야의 지난 1년간의 거래를 전부 복식부기로 기입해야 하겠지요.
소지로 : 그렇군. 미사양, 어떤가, 해 줄 수 있겠나?
타도코로 : 오너인 히라노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부디 장부 정리를 해 줬으면 좋겠어. 히라노야를 구한다고 생각하고 해 줘.
미사 :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지만… 재판의 증거가 될만한 장부를 제가 만들 수 있을지…
‘사실 자신이 없는데… 옛날에 있었던 환전상이라 하면 은행 같은 거잖아. 그 거래를 전부 분개 할 수 있으려나…’
마이 : 만약에 가게가 망하면 당신, 일자리를 잃게 되는 걸요.
미사 : 일자리를 잃는 건 곤란한데요. 이번 달에 학교도 졸업하니 제대로 일자리를 잡아야만 하니까요.
쥰이치 : 그러고 보니 미사양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온가쿠여학원에 다니시나봐요?
미사 : 저기 있는 마후유상과 함께 온가쿠여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쥰이치 : 그럼 거기서 배우는 건 뭔가요? 노래? 악기?
미사 : 노래를 배웠어요.
쥰이치 : 노래군요. 그거 멋지네요. 어려운 장부 얘기는 이쯤 해 두고 노래 한 곡 들려 줄 수 있나요? 타카미군, 피아노 좀 쳐 줄래? 자네 잘 치잖나. 피아노.
타카미 : 음.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자, 그럼 미안하지만 난 이쯤에서 실례 하겠네.
그런 말을 남기고 타카미는 방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남은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타카미의 행동에 말을 잃은 채 타카미의 등만을 바라보았다.
쥰이치 : 저 친구 왜 저러지? 아까 전부터 상태가 별로더니.
소지로 : 내가 미사양에게 저 드레스를 입힌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마이 : 그러고 보니 그 드레스, 타카코 언니의 드레스지요?
소지로 : 키가 같길래 잘 됐다고 생각했었네만…
마이 : 타카미씨는 아직도 타카코 언니가 폐하의 제 2 왕비로 들어 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겠죠.
미사 : 드레스, 안 입는다고 말씀 드리는 건데 그랬어요…
소지로 : 자네 탓이 아닐세.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말이야 쉽지… 신경이 쓰이는 걸. 집안 사정이 굉장히 복잡해 보이네… 아니, 그런 가정 사정 다 빼고 봐도 이 드레스 너무 꽉 조여서 힘들단 말이지. 빨리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싶은데…’
모리타 : 여러분.
축 처진 분위기를 바꾸기라도 하려는 듯, 모리타가 입을 열었다.
모리타 :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모의 재판을 한 번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재정장관이 이 복식 부기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론을 할 지 연습도 되지 않겠습니까. 일단 제가 재정장관측 변호인을 할 테니 미사양이 원고측 증인이 되어서 말이죠.
쥰이치 : 교수님 그거 재미있을 것 같네요. 그럼 제가 원고측 변호인을 하겠습니다.
모리타 : 그거 좋군요. 그럼 소지로님, 판사를 해 주시겠습니까?
‘갑자기 재판을 한다고 해도…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미사와 쥰이치, 모리타는 각각 좌우로 갈라섰다. 그 중심에 소지로가 들어 와 섰고, 다른 이들은 조금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소지로 : 그럼 지금부터 원고 히라노야, 피고 이노우에 자작의 대부금 사건에 대한 심리를 시작하겠소. 원고측 증인 앞으로 나오시오.
미사는 망설이며 소지로 앞에 가 섰다.
소지로 : 자 그럼 피고측 변호인, 심문을 시작하시오.
모리타 : 증인이 작성한 이 장부를 보아하니 왼쪽 항목에 ‘차변’이라고 적혀 있군요. ‘차변’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증거물 – 총 계정원장>
이노우에 자작
차변 1/1 현금 200,000,000 15 현금 180,000,000
|
대변
1/25 현금 20,000,000 31 잔액 360,000,000
|
합계 : 380,000,000 |
합계 : 380,000,000 |
미사 : 복식 부기에서는 돈을 빌리거나 해서 자산이 증가했을 경우에는 그 내역을 차변에 적게 되어 있습니다.
모리타 : 그렇다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데요. 돈을 빌렸(借, 빌릴 차)는데 어째서 ‘자산이 증가’ 한 것이 되나요?
미사 : 그냥 그러기로 되어 있는 건데 왜 그렇게 되냐고 물어 보시면…
모리타 : 원고인 히라노야는 현재 이노우에 자작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지요. 게다가 돈 거래가 있었을 때 양 측이 함께 작성한 차용증에는 ‘이노우에 자작이 히라노야에게 돈을 빌려 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증거라고 이 장부를 제출 하셨는데, 일단 이 장부의 1월 1일의 거래 내역을 보도록 하지요. 현금 2억엔이 적혀 있는 것은 ‘차변’ 입니다. 이노우에 자작의 이름이 적혀 있고 ‘차변’ 다시 말 해 빌린 내역에 2억엔이 적혀 있다는 것은 히라노야의 주장과는 반대로 히라노야가 이노우에 자작에게 2억엔을 ‘빌렸’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말 그대로 이노우에 자작에게 돈을 ‘빌렸’기 때문에 ‘차변’에 기입을 한 거죠. 제 말이 틀립니까? 증인?
미사 : 차변이라는 표현에 빌릴 ‘차’자가 사용되기는 합니다만, 그 차변이라는 표현이 문자 그대로 ‘빌린 돈’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생각 해 보니 나도 왜 저렇게 헛갈리는 표현을 쓰는 지에 대해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네. 학교에서 배울 때도 일단 무작정 외우면 된다고 했었고… 생각 해 보니 이상하긴 하네… 자산이 증가했는데 왜 차변에 기입하는 걸까? 음… 이 분개는 사람 한 명 한 명에 대한 분개니까… 아, 어쩌면 이런 이유일지도!’
미사 : 정확한 설명이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경우에는 분개를 할 때 계정항목으로 해당 인물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빌린/빌려 준’ 주체는 히라노야가 아니라 해당 인물이라는 것이지요.
쥰이치 : 재판장님! 저 말이 맞습니다. 바로 영어에서 말하는 SV 문형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맞아! 그거야! …아마도…’
미사 : 맞습니다. 영어의 주술관계인 SV문형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이노우에 자작이라는 특정인의 이름이 ‘주어(S)’가 되는 것이기에 이 장에 적혀있는 행동(V)들은 전부 이노우에 자작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경우, 돈을 빌린 것이 이노우에 자작이고, 돈을 빌려서 자산이 증가 한 것도 이노우에 자작이므로 차변’, 다시 말 해 ‘빌린’ 측에 2억엔을 기입하는 것이지요.
모리타 :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은 궤변 같군요. 말장난을 하는 것 뿐, 히라노야의 주장을 속시원하게 증명 해 주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진실을 가리기 위한 얄팍한 술수에 불과합니다!
‘아닌데…’
모리타 :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히라노야가 이노우에 자작에게 돈을 빌렸기에 ‘차변’에 기입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차용증과도 앞뒤가 맞고 말입니다. 자, 증인 이 말에 반론이 가능합니까?
‘아… 말꼬리나 잡고 말이지. 제대로 상대 해 줘야겠어.’
미사 : 하지만 그 말씀대로라면 다른 계정항목과 비교 해 보았을 때 모순이 생깁니다. 분개 장부를 보시면 아실 수 있는데요, 분개를 할 때 대(빌려줄 대 貸)변에 쓴 ‘현금 2억엔’이라는 것은 다시 말 해 히라노야에게 있어 현금이라는 자산이 2억엔 어치 ‘줄어들었다’는 얘기죠. 다시 말 해 총 계정원부에서 ‘현금’ 항목을 찾아 보시면 2억엔이 줄어들어 있는 상태일 것이고, 현금 잔액 역시 2억엔 부족한 상태일 거예요. 돈을 빌렸는데 현금이 줄어들었다면 그것이 모순 아닐까요?
※참고 : 분개 장부의 내역 - 1/1 이노우에 자작 200,000,000 / 현금 200,000,000
모리타 : 백보 양보해서 실제로 현금이 줄어 있는지 아닌 지 알 방법이 있나요? 장부야 그냥 고치면 되는 것이고.
미사 : 현금이라는 것은 실제로 히라노야에 보관중인 실체가 있는 재산이므로 장부만 조작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죠. 상식적으로 그냥 히라노야 금고에 들어 있는 돈을 세어 보면 될 일 아닌가요?
쥰이치 : 판사님. 히라노야에 실제로 현금이 얼마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증인이 책임을 질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지로 : 변호인의 말에 일리가 있군. 실제로 현금이 얼마나 있는 지까지 증인이 책임을 질 필요는 없지. 피고측 변호인, 이 점을 고려 하여 심문을 이어 가시오.
모리타 : 알겠습니다. 자 그럼 다시 장부로 이야기를 돌려 보지요. 아까 특정 인물을 계정항목으로 사용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증인의 논리에 따르면 이번 대부금에 있어서는 특정 인물, 다시 말 해 이노우에 자작을 계정항목 삼아 분개를 하였기에 주어가 이노우에 자작이 되는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이노우에 자작의 이름을 ‘차변’에 쓴 것은 ‘이노우에 자작이(주어) 빌렸다(술어)’라는 의미가 된다는 얘기인데요. 제가 이해 한 바가 맞나요?
미사 : 네. 이번에는 대부금이지만, 다른 거래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이노우에 자작님이 히라노야 개화당에서 외상으로 커피를 1만엔 어치 사 가셨다고 치죠. 이 거래를 분개한다면 차변에는 ‘이노우에 자작’이라는 계정항목으로 1만엔을, 대변에는 ‘매상’이라는 계정항목으로 1만엔을 적어서 분개 할 수 있어요.
※참고 : 이 경우 분개 장부의 내역 - ?/? 이노우에 자작 10,000 / 매상 10,000
모리타 : 돈거래 뿐 아니라 외상 거래 역시 ‘차변’에 이노우에 자작의 이름을 적는다는 얘기군요.
미사 : 그렇죠. 상품을 거래했을 때 생긴 외상 역시 차변에 적습니다. 대변을 보면 이번 거래로 발생한 이익이 ‘매상’이라는 계정항목으로 기입이 되어 있으니, 이번 거래를 통해 히라노야가 1만엔 어치 매상, 다시 말 해 자산의 증가가 있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지요. 그러므로 이 경우, 비록 ‘차변’에 이름이 적혀있긴 해도 이 1만엔이 이노우에 자작의 것이 아닌 히라노야의 것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머리를 쓰는 건 오랜만인걸…’
모리타 : 그건 그것대로 또 이상하군요. 원래 ‘대변’에는 자산이 감소한 내역을 쓰는 것이라 하지 않았나요? 어째서 ‘매상’을 대변에 쓰는 것이지요? 앞뒤가 안 맞지 않나요?
미사 : 네. 기본적으로는 ‘자산이 감소한 내역’을 대변에 씁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수익이 증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매상’이라는 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4장을 참조)
모리타 : 그건 궤변 아닌가요. 재판장님, 증인은 지금 이 복식부기라는 것에 대해서 ‘이 경우에는 이렇고 저 경우에는 저렇다’라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증언은 증거로서 효력이 없습니다!
‘그런 게 아닌데… 이 사람 너무하는걸…’
소지로 :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자, 증인. 그러면 지금 이야기가 복잡해 지는 것이 특정 인물의 이름을 계정항목으로 사용해서 주어가 어떻다 하는 말이 나오는 것 같은데, 아까 전의 외상 거래를 인명 계정항목을 사용하지 않고 분개 할 수는 없는거요?
미사 :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대신 ‘외상 미수금’이라 적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 : 이 경우 분개 장부의 내역 - ?/? 외상 미수금 10,000 / 매상 10,000
모리타 : 자 그럼 ‘외상 미수금’을 갖고 분개를 한다고 생각 해 보죠. 이 경우는 당연히 ‘외상 미수금’이 주어겠지요? 아까 논리대로라면 ‘외상 미수금’이 1만엔을 빌렸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요?
미사 : 외상 미수금은 사람이 아니니까 돈을 빌리거나 하지 않지요.
모리타 : 그렇다면 더 이상하지 않나요? 외상 미수금은 ‘사람’이 아니니 아까 말한 영어의 SV구조가 적용되지 않음에도 미수금의 증가를 왜 ‘차변’에 쓰는 거죠? 아까는 ‘히라노야가 아니라 이노우에 자작이 주어이기에, 차변에 이노우에 자작을 써도 된다’고 하더니?
미사 : 아.. 그건… 확실하진 않지만, 원래 복식 부기는 특정 인물의 이름을 계정항목으로 사용 하는 데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해요. 그 때 왼쪽은 차변, 오른쪽은 대변이라는 원칙이 정해져서 이후에 여러모로 계정항목의 종류가 늘어난 뒤로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모리타 : ‘아닐까 싶다’고요? 재판장님 이건 말도 안 됩니다. 항상 엄정하게 관리되어야 할 장부가 ‘이럴 땐 이렇’고 ‘이 계정항목은 이렇’고 ‘아마도 예전에는 이랬을 것이다’ 라는 식으로 변명에 불과 해 지면 증거로서의 효력이 없는 것 아닐까요?
쥰이치 :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것에 예전에 쓰이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닙니다!
미사 : 복식부기라 함은 기본적으로 차변과 대변이라는 두 항목만으로 모든 거래를 도식화 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기에 엄정한 규칙이 있으며, 제 편의에 맞추어서 이렇게 해석했다 저렇게 해석했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리타 : ‘엄정한 규칙이 있다’고 했나요? 지금?
‘아… 지금 여기서 자세히 설명 하라 하면 곤란한데…’
쥰케이 : 재판장님.
쥰케이가 갑자기 소지로를 불렀다.
쥰케이 : 분위기가 과열 된 듯 싶으니 잠시 휴식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요? 복식부기 소녀도 지쳐버린 듯 하고 말이죠. 지쳐버린 미녀를 보는 건 마음이 아프군요.
‘다행이다… 쥰케이님은 역시 신사야.’
소지로 : 그렇군요. 그럼 잠시 휴식 시간을 갖도록 하지요. 저도 좀 피곤하군요. 모리타 교수, 괜찮겠지?
모리타 : 물론이죠. 너무 몰아붙인 것 같기도 한데, 너무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미사양.
미사 :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긴장한 탓인가 너무 피곤한데…’
휴식시간이 시작되자 다들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마후유 : 차변, 대변 같은 두 가지 화제만으로도 이렇게까지 달아오를 수 있군요.
쥰이치 : 이것저것 설명하는 것도 귀찮은데 그냥 ‘왼쪽이 대변(빌려 준 것)입니다’라고 얘기 해 버리면 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정말로 내가 만들어 낸 개념이라면 그래도 되겠지만, 이건 전 세계 공통의 기준이라서요… 엄밀히 말하자면 차변은 Debit의 번역어, 대변은 Credit의 번역어란 말이지요…’
미사 : 왼쪽이 차변, 오른쪽이 대변이라는 건 정해진 거라서요…
제 3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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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카에데는 기숙사 정문을 뛰어 들어갔다.
맨발인 채였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교무실에 있을 터인 미야가와 선생님을 부르러 간 것이다.
“선생님! 선생님!”
카에데는 교무실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왜 그러니?”
교무실 문이 열리고 미야가와 선생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다.
카에데는 그런 선생님의 표정을 보며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카에데는 주저하면서도 천천히 일어난 일에 대하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이 끝난 뒤, 카에데와 미야가와 선생님, 그리고 학교 수위는 현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현장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스미가… 방 창문으로… 뛰어내렸어요. 정말이에요! 거짓말이 아니라고요!”
카에데의 말을 들은 선생님과 수위는 서로 얼굴을 한 번 마주보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사이죠상 방이라…”
선생님은 수상쩍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카에데는 문득 고개를 들어 아스미의 방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열려 있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펄럭이던 커튼 역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방안을 가리고 있었다.
“어…?”
대체 누가 창문을 닫은 걸까…
닫은 게 아니라면 혹시…
“야마무로상, 일단 사이죠상 방으로 함께 가 볼까요?”
미야가와 선생이 말을 이었다. 카에데 역시 그 말에 동의하고 아스미의 방 앞으로 갔다.
아스미의 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별달리 이상이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미야가와 선생은 방 문을 노크하며 아스미를 불렀다.
“사이죠상, 방 안에 계신가요?”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미야가와 선생이 몸을 돌려 카에데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읽어 낼 수 없는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문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방 문이 열리고, 아스미가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 있나요?”
살짝 짜증이 난 것 같은 표정이다.
“아, 아니에요. 방 안에 있었다면 다행이네요.”
“네?”
미야가와 선생과 대화를 끝낸 뒤 돌아서는 아스미의 시선과 카에데의 시선이 한 순간 마주쳤다. 카에데를 향한 아스미의 시선은 마치 수상한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 차갑기만했다.
“그럼 쉬세요.”
아스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일단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 천천히 이야기 해 봅시다.”
미야가와 선생은 카에데에게 이 한 마디를 남기고 교무실로 돌아갔다.
카에데는 지금의 상황에 할 말을 잃고 어쩔줄 모른 채 멍하니 서 있었다.
-----
다음 날, 평소와 다름 없이 아침이 밝았다.
카에데는 무거운 마음으로 교실로 향했다. 통학이라 해 봤자 기숙사에서 교실까지 가는 것 뿐이지만,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함께 위치한 프리지아 여학원의 부지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매우 넓었다.
누군가가 갑자기 카에데의 축 쳐진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좋은 아침! 좀 더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한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스미가 서 있었다. 평소와 다름 없는 그녀의 모습에 카에데는 뭐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멍하니 아스미의 뒷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아스미가 갑자기 뒤돌아 보며
“나 먼저 간다?”
라고 말을 걸어왔다.
카에데는 미소 지으며 다시 등을 돌려 교실로 달려가는 아스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돌렸다.
교실에서도 아스미의 모습은 변함 없었다. 평소처럼 유즈키나 호노카와 명랑하게 수다를 떠는 아스미의 모습에서는 어제 본 참혹한 모습, 창문 아래 널부러져 있던 모습은 눈꼽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카에데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아스미가 문득 카에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에데는 다시 한 번 아스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그런 부자연스러운 두 사람의 모습을 히지리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 하고 있었다.
수업과 부 활동이 다 끝난 뒤, 기숙사에 저녁식사 시간이 찾아왔다.
카에데는 교복을 입은 채 식당에 자리 잡았다. 그녀의 앞에는 밥을 담는 트레이가 놓여 있었고, 트레이 위에는 정갈하게 차려진 저녁식사가 놓여 있었다.
소위 ‘이상적인 식단’으로 평가 받는 1국 3반찬으로 이루어진 메뉴를 앞에 하고도 카에데는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양 손은 무릎 위에 올린 채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젓가락을 들 기력조차 없는 것 처럼 보였다.
“카에데, 무슨 일 있어?”
사복 차림으로 카에데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미노리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카에데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카에데의 모습을 보며 미노리는 자세를 고쳐 앉고는 묵묵히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에데가 옆자리를 곁눈질하며 ‘그래도 미노리라면 내 얘기를 믿어주지 않을까?’라 생각 한 순간, 옷을 갈아 입고 온 아스미가 카에데의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 배고파!”
아스미는 그렇게 말하며 밥공기에 담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왕성한 식욕이었다.
분주하게 밥을 입 속으로 옮겨넣던 아스미가 문득 카에데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수학여행 가서 찍은 사진말이야, 앨범에 넣었어?”
아스미의 말에 순간적으로 어제 본 참상이 카에데의 눈 앞을 스쳤다.
“…내 말 듣고 있어?”
“아… 응… 아직 안 넣어뒀어.”
허둥대며 카에데가 대답했다. 그런 카에데의 모습을 보며 아스미는
“흐음.. 그렇구나. 아, 그거 안 먹을거야? 내가 먹는다?”
라고 이야기 하며 카에데의 접시에 놓여 있던 고깃덩어리를 집었다.
아스미는 집어 든 고기를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아스미가 고기를 씹는 소리 사이사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카에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에데, 왜 그래?”
카에데는 걱정스러운 듯 묻는 미노리의 말을 뒤로하고 출구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카에데의 뒷모습에 아스미와 히지리의 시선이 꽂혔다.
다른 학생들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왁자지껄 떠들며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
방으로 돌아온 카에데는 책상 위에 엎드렸다.
어찌저찌 옷은 갈아 입었지만 답답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혼잣말을 해 보지만 당연히 답은 알 수 없었다.
카에데는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사진 어플을 열어 수학여행때 찍었던 사진을 보기 시작했다.
사진들 중에는 잠비마을에서 찍은 사진도 여러 장 있었다.
바람개비 뒤로 유이가 사진을 찍는 장면이 찍힌 사진도 있었다.
‘잠비마을이라…’
마을의 이름은 분명 모리구치인가 하는 남자가 가르쳐 주었었다.
뒤이어 마을 어디에선가 보았던, 짚인형을 손에 들고 있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외에도 작은 사당, 거울, 부적, 바람개비 등 자신들이 우연히 마을에 들어 가 맞닥뜨린 것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쳤다.
“잠비마을이라…”
카에데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인터넷 즐겨찾기에 등록되어 있던 ‘잠비마을의 민속과 전승’을 터치했다.
곧바로 예의 그 ‘영상’이 시작되었다.
‘…어?!’
춤을 추는 사람이 쓰고 있는 가면, 그 가면에 붙어 있는 부적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카에데는 동영상을 잠시 멈추고 화면을 확대시켜 보았다. 자세히 보니 부적에는 어떤 글자가 적혀있었다. 분명 이전에도 같은 영상을 보았을 터인데 갑자기 위화감이 느껴졌다.
조금 더 자세히 화면을 보니, 그 글자는 ‘終, 끝날 종’자를 좌우 반전해서 적은 것이었다.
“끝이라고?”
그 순간 카에데는 깜짝 놀라 침을 삼켰다. 그 글자는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글자였던 것이다. 다름 아니라 신사에 있던 작은 사당, 그 안에 붙어있던 글자와 똑같았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아버렸다는 생각이 든 카에데는 황급히 인터넷 브라우저를 닫고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끝이라는 글자, 그것도 좌우반전… 대체 무슨 의미지?’
아무리 생각 해 보아도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카에데의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 찝찝한 뒷만을 남기고 있었다.
-----
성당 종소리가 들린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여러분, 숙제는 잊지 말고 꼭 해 오세요.”
교과서를 덮으며 미야가와 선생님이 말을 맺었다. 미노리의 구령에 맞추어 학생들이 일어섰다.
카에데는 아스미의 모습을 곁눈질 하다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늦어버렸다.
전원이 기립 한 뒤,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카에데의 시선은 아스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카에데의 곁에 미야가와 선생님이 다가왔다.
“야마무로상, 오늘 방과후에 시간 있나요?”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 잠시 시선을 거둔 그 찰나의 사이에 아스미는 교실을 나서고 말았다.
‘빨리 쫓아가야 되는데’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카에데의 팔을 잡는 손이 있었다. 미야가와 선생님의 손이다.
“야마무로상, 정말로 당신이 걱정되어서 그래요.”
미야가와 선생은 다시 한 번 카에데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선생님의 눈빛은 너무나도 자상해보였다.
“혹시 고민 같은 것이 있거든 꼭 선생님에게 상담 해 주세요.”
미야가와 선생님의 다정한 말에도 카에데의 신경은 온통 아스미에게 집중 되어 있었다. 카에데는 선생님의 손을 떨쳐 내고는 아스미의 뒤를 따라 복도로 뛰쳐나갔다.
저 멀리 어딘가로 걸어가는 아스미의 모습이 보였다. 카에데는 아스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 가는 것을 보면 화장실을 가려는 걸까?
카에데의 예상대로 아스미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잠시 후 아스미가 화장실에서 나와 교실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 한 뒤, 카에데 역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가장 문과 가까운 화장실 문을 열어 보았다. 내부는 전통식 변기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두 번째 화장실은 좌변기가 놓여있다는 것 외에는 마찬가지로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화장실은 어떨까.
다른 두 개의 화장실과는 달리 마지막 화장실은 문을 당겨서 여는 방식이었다. 비단 이 층 뿐 아니라 모든 층이 동일하게 문과 가장 먼 화장실 문은 당기고 나머지 두 개는 미는 문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카에데는 손잡이를 잡고 문을 당겨 열었다.
‘…!!’
좌변기 뚜껑은 내려 간 채였고, 그 뚜껑 위에는 길고 검은 물체…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널부러져 있었다.
머리카락 뿌리 부근에는 모근, 심지어 피부까지도 붙어 있어 끔찍한 모습이었다.
카에데는 자신도 모르게 그 머리카락을 손에 들어 확인했다. 가발 같은 게 아닌 틀림 없는 사람 머리였다.
“…지금 뭐 하는거야?”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에데는 깜짝 놀라 튀어 오르듯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스미가 서 있었다.
아스미의 표정은 수상한 것을 보는 듯 의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왜 내 뒤를 쫓아 다니는거야?”
아스미는 그렇게 말 하고 혀로 입술을 핥았다. 순식간에 일어 난 일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히 이야기를 하던지.”
아스미는 카에데를 추궁하며 몰아붙였다. 뒷걸음질 치던 카에데는 조금씩 화장실 칸막이 속에 고립되기 시작했다.
카에데는 긴박한 상황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오지 마.”
카에데의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오지 마! 이쪽으로 오지 마! 저리 가 버려!!”
카에데의 절규에도 아스미는 동요하지 않았다.
“카에데, 너 좀 이상해.”
아스미는 그렇게 말하며 카에데의 팔을 붙잡았다.
“카에데.”
“건드리지 마!!!!!”
카에데는 절규하며 아스미를 밀쳐냈다. 그 뒤 생긴 틈을 타 화장실에서 뛰쳐나갔다.
하지만 겨우 화장실을 벗어났다고 생각 한 순간, 카에데의 눈 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카에데는 정신을 잃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카에데의 의식이 돌아왔다.
눈을 뜨긴 했지만 초점이 맞지 않아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다.
잠시간 시간이 지난 뒤,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하얀 천장과 거기 설치 된 형광등이었다.
‘여긴 어디지?’
생각 해 보니 침대 위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실에서도 하루 종일 멍하니 있었고, 어제 저녁도 제대로 먹지 않더라고요. 수학여행에서 돌아 온 이후로 계속 상태가 이상했어요.”
아스미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흰 커튼 사이로 아스미와 미야가와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게… 확실히 평소와는 좀 달랐지.”
미야가와 선생님도 아스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카에데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일까, 아스미가 카에데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스미…”
“아무리 불러도 정신을 못 차리길래 죽은건가 했어.”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말이다. 분명 수학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아스미가 했던 말이다. 아스미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 뭔가 오랫동안 악몽을 꾼 것 같아.”
카에데의 말에 아스미는 카에데의 머리맡에 다가오며 나직이 속삭였다.
“금방 괜찮아 질 거야.”
걱정스러운 듯 카에데를 바라보는 아스미의 표정은 예전과 다름 없었다.
아스미는 가슴 위에 포개져 있는 카에데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카에데도 자연스럽게 포갰던 손을 풀고 아스미의 손을 꼭 쥐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요 며칠간 계속되었던 신경전은 어느 사이엔가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미야가와 선생님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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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짙게 드리워진 교내에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고요한 학교 성당 안에 미야가와 선생이 홀로 앉아있다.
쭉 늘어 선 촛대에 설치 된 양초의 빛이 성당 내부를 따뜻하게 채우고 있었다.
미야가와 선생은 성호를 긋고는 가슴께에서 손을 모으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기도가 어떤 내용인지, 그리고 그녀가 기도하는 대상은 누구인지… 그것은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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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았다.
학교 체육관에서는 체육 수업이 한창이었다.
그 날 수업 종목은 농구였다.
한 반을 여러 팀으로 나누어 시합을 하는 형식이었다.
“카에데! 패스!”
아스미의 말을 들은 카에데가 재빠르게 아스미를 향해 공을 던졌다.
카에데의 패스를 받은 아스미는 한 차례 페인트를 섞어 수비를 제끼고는 그대로 점프 슛을 날렸다. 아스미의 손을 떠난 공은 네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결국 시합에서 이긴 것은 카에데의 팀이었다.
“예이!”
아스미와 카에데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승리를 자축했다.
“아, 잠깐 얼굴 좀 씻고 올게.”
아스미가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카에데는 딱 기분 좋을 정도의 나른함을 느꼈다.
아스미와의 관계가 예전처럼 되돌아 간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하지만 히지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아스미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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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미는 수돗가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먼저 물을 마시러 갔던 반 친구들 네 명이 계단을 내려 오는 것이 보였다.
유이, 키우치 카나, 세키 아즈사, 혼다 쿄코였다.
“걔 졸라 짜증나지 않냐?”
유이가 웃으며 다른 아이들에게 이야기 했다.
“짜증나.”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아 그나저나 아까 그거 봤어?”
“봤어.”
“개 웃기지 않았냐?”
유이의 말을 들은 나머지 셋이 말을 주고 받았다.
얘기만 들어도 유이 그룹이 누군가를 이지메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스미는 그런 이야기들을 못들은 척 하며 유이 그룹을 지나쳤다.
그리고 수돗가에 다다랐을 때,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가 울고 있었다.
등을 돌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던 것은 사쿠라 스즈네였다.
양갈래로 묶은 머리 사이로 땀이 송글송글 맺힌 흰 목선이 보였다.
아스미는 그런 모습을 보며 어찌 할 줄 모르고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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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아스미는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샤워부스 문 건너편에서 카에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스미, 나 먼저 간다.”
“응!”
아스미의 대답을 들은 카에데는 샤워실을 나섰다.
아스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머리를 감았다. 샴푸 거품과 함께 뽑힌 머리카락이 물처럼 흘러내렸지만 아무런 상관 없다는 듯 머리를 감고 있는 것이다.
샤워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 온 아스미의 등 뒤로 꽃병에 꽂힌 바람개비가 보였다. 바람개비의 날개는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개비 뒤편에는 사진 액자가 놓여 있었다. 액자 안에는 친구들과의 추억이 담긴 사진이 장식 되어 있었다.
아스미는 자리에 앉아 발톱에 패디큐어를 바르기 시작했다. 패디큐어 솔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엄지 발가락 발톱이 크게 움직였다.
아스미는 덜렁덜렁거리는 발톱을 손에 쥐고 좌우로 흔들더니 천천히 떼어냈다.
발톱이 뽑혀 버린 발가락이 아프지도 않은 걸까, 아스미는 뽑아 낸 발톱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천천히 눈을 감더니 가슴팍을 마구 긁어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하반신 쪽에서 예의 그 검은 혈관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얼굴을 향해 몸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괴로운 것인지, 아니면 적당한 통증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모를 표정을 짓던 아스미가 갑자기 눈을 떴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탁한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아스미는 그대로 복도로 나가, 정처없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양 팔은 축 늘어뜨리고, 고개는 힘 없이 휘청거리며, 맨발로 휘적휘적 배회하기 시작 한 것이다.
발톱이 빠진 자리가 아플 법도 한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아스미의 움직임에 맞추어 그녀가 지나가는 곳의 조명들이 빠르게 깜빡였다.
어디갔느냐 헤메고있느냐 어디갔느냐 숨어버렸느냐 어디갔느냐 돌아가버렸느냐
아님죽어버렸느냐 도망가라도망가라 땅이움직인다 손이뻗어온다 내일이온다
되살아나리라 되살아나리라 잠비가온다 바로네뒤에 바로네뒤에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잠비마을에서 들었던 동요가 어디선지도 모르게 울려퍼졌다.
때때로 복도 양쪽으로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요동치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검은 그림자는 서서히 모습을 갖추어 갔다. 작은 지장보살과 손의 모습이었다. 잠비마을 부근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무수한 손과 지장보살의 그림자가 아스미를 감싼 채, 복도를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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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실에서 돌아 온 카에데는 침대에 걸터앉아 수학여행때 찍은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비마을에서 찍은 사진을 보던 중에 눈에 들어오는 사진이 있었다.
아스미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아스미는 잠비마을의 풍차 앞에서 양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에데의 입가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사진을 스와이프 하여 다음 사진을 보았다. 다음 사진은 유이가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사진 아랫쪽에는 예의 그 바람개비가 찍혀 있었다.
‘…?!’
기분 탓인지 사진에 찍혀 있는 바람개비가 움직인 것 처럼 보였다.
찝찝한 마음에 카에데는 다시 한 번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바람개비 사진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조금씩이긴 하지만 확실히 바람개비가 움직이고 있었다.
카에데의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눈을 떼지 못 하고 바라보고 있으려니 바람개비의 움직임이 조금씩 부드러워 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느리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확인 했지만 확실히 동영상 파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착시를 이용하는 사진도 아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겨우겨우 스마트폰에서 눈을 뗀 순간, 노크소리가 났다.
문에 설치된 불투명 유리 너머로 복도 조명이 깜빡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조명이 들어 올 때마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췄다.
‘누구지?’
카에데는 튀어 오르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어 보니 히지리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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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에데는 히지리를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것 좀 봐 줄래?”
그렇게 말 하며 히지리가 카에데에게 내민 것은 스마트폰이었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이거… 뭐야?”
히지리가 내민 사진은 교실에서 담소를 나누는 아스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아스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스미의 오른쪽 얼굴이 마치 누군가가 잡아 당기기라도 하는 듯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 처럼도 보였다.
“사실…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 했거든… 아스미 말이야… 그래서… 사진… 찍어 봤더니…”
히지리는 아스미의 친구인 카에데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듯 단어를 신중히 골라가며 말을 이었다.
카에데는 추하게 일그러진 아스미의 사진에서 눈을 돌리고 화면을 껐다. 오한이 느껴졌다.
“이 사진… 계속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져.”
히지리가 말을 이었다. 두 눈은 내리 깔고 카에데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 사진,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카에데는 히지리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주며 질문했다.
“사실… 오늘 한 장 더 찍은 게 있거든..”
“뭐?”
“아스미 뿐 아니라 한 명 더 있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해서 찍어 봤는데..”
카에데는 히지리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이 학교 내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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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에데는 히지리와 함께 어두컴컴한 도서실로 향했다.
이 학교 학생이라면 소등시간 이전까지는 언제는 이용해도 되는 시설이다. 그 뿐 아니라 카에데 본인이 도서위원이기에 이용하기 편한 곳이기도 했다.
책상 위에는 ‘주술 완전 매뉴얼’, ‘주술연구’ 같은 책들이 놓여 있었다.
히지리가 책을 한 권 더 가져왔다. 표지에는 ‘일본 고주술사’라고 적혀 있었다.
히지리는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다가 멈추어서는 소리내어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음양도(※陰陽道, 일본 전통 신앙 중 하나. 음양오행에 기초한 주술법)의 가르침에 따르면 오른쪽 얼굴은 ‘삶’을 상징하고 왼쪽 얼굴은 ‘죽음’을 상징한다.”
히지리의 말에 카에데는 문득 아까 본 사진을 떠올렸다. 카에데가 보고 있는 방향이 아니라 아스미 본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왼쪽 얼굴이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던 사진을. 아스미 기준으로 오른쪽 얼굴은 평범해 보였지만 왼쪽 얼굴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는 듯 추악하게 일그러져 있지 않았던가.
“음양도라고?”
카에데의 질문에 히지리가 대답했다.
“음양도는 원래 주술이나 점성술의 체계를 말해. 물론 전통 신앙과도 관계가 있고. 예를 들자면 신사도 음양도와 관계 있지.”
“신사라…”
히지리는 카에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책 내용을 소리내어 읽었다.
“한 사람의 얼굴에 삶과 죽음, 그 두 가지가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 그런 사람은 잔미라고 부른다… 잔미가 뭐지?”
카에데는 수학여행때 들렀던 마을의 이름을 떠올렸다. 히지리는 계속 책을 읽어 나갔다.
“잔미는 살아 있으면서 죽은 존재이며, 죽어 있으면서 산 존재로서…”
카에데의 머릿속에 아스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친구의 얼굴과 그 때 창밖으로 보았던 무참한 모습, 그리고 얼마 전 양호실에서 보았던 다정한 표정까지…
갑자기 카에데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래! 잠비마을 신사에 모셔진 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 위치한 자들이었던 거야!”
이전에 보았던 동영상에 나왔던 이미지들, 다시 말 해 위아래가 뒤바뀐 도리이와 기묘한 사당, 그리고 그 주변에 꽂혀 있던 바람개비들이 어지러이 카에데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신들이 한 일이 무엇이었는 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잠비… 마을? 그게 뭐야?”
“그 때 우리들이… 잠비의 봉인을 풀었던 거야…”
카에데가 단언했다.
“우리가… 봉인을… 풀었어.”
갑작스러운 카에데의 말에 히지리는 할 말을 잃고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카에데를 바라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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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에데와 히지리가 도서실에서 잠비에 대한 책을 읽고 있을 무렵.
아스미는 교실에 홀로 남아있던 학생을 덮쳤다.
뒷편에서 달려들어 몸을 움직이지 못 하게 한 뒤, 뾰족한 혀를 목덜미에 꽂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당했던 것 처럼 그 학생의 흰 목덜미를 콱 물어 버렸다.
아스미의 눈은 탁한 흰색이었고 얼굴에는 검은 혈관이 솟아있었다.
아스미에게 목덜미를 물린 소녀 역시 점차 온 몸에 검은 혈관이 솟아 오르더니, 이윽고 눈이 희게 변했다.
소녀의 이름은 시이나 미코토.
잠시 뒤, 아스미는 만족한 듯 미코토의 목에서 얼굴을 떼었다. 미코토는 마치 무너지듯 바닥 위로 쓰러졌다.
아스미의 입 옆으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그녀의 입가는 처참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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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에데는 조용히 되뇌었다.
“그렇다면 아스미는 역시…”
상상하기도 싫었던 시나리오가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히지리는 깜짝 놀란 눈빛으로 카에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갔느냐 헤메고있느냐 어디갔느냐 숨어버렸느냐 어디갔느냐 돌아가버렸느냐
아님죽어버렸느냐 도망가라도망가라 땅이움직인다 손이뻗어온다 내일이온다
카에데와 히지리는 당황한 나머지 어찌 할 줄 모른 채 도서실에 서 있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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